The Righteous Demon of Kunlun RAW novel - Chapter 377
2부 106화
곤륜산(崑崙山)
다음 날 아침.
밤늦게까지 달렸던 사람들은 잠에서 깨자마자 운기조식으로 취기를 날려 버린 후 떠날 준비를 했다.
각자 맡은 일을 하느라 분주한 가운데, 홀로 침상에서 뒹굴고 있던 정광에게 서녕에 남는 강대환이 작별 인사를 하러 왔다.
“진옥룡. 바로 출발할 셈이오?”
“네.”
“그대는 항상 바쁘구려. 쉴 틈도 없이 또 싸우러 가야 한다니.”
강대환은 고개를 좌우로 젓다가 피식 웃었다.
“하긴, 그래서 많은 백성들이 진옥룡이라는 별호를 연호하는 것이겠지. 참 대단하더이다. 솔직히 부러웠소.”
“천하의 무장들은 강 천호님을 부러워할 건데 무슨.”
“하하. 얼굴에 금칠을 해줘서 고맙소. 조심히 가시오. 무운을 비오.”
“강 천호님도요. 쉬시러 온 분께 이런 말씀 드리기 좀 그런데. 별다른 일은 없겠지만 혹시 모르니 조심하세요.”
천마신교가 황족들이 거주하게 된 서녕을 칠 가능성은 무척 적었다.
그래도 세상에 확실한 일은 없으니 주의하란 얘기.
강대환도 그 의미를 알아들었기에 굳은 얼굴로 두 손을 모았다.
“명심하겠소이다.”
그다음엔 소혜가 와서 고마움을 표하고 떠났는데…….
의외의 인물이 나타났다.
“단주. 저도 남아야 할 것 같습니다.”
“어? 혜진 소저도요?”
혜진은 차분한 음성으로 사정을 설명했다.
“황궁에서 이곳까지 오며 아버님과 적지 않은 시간을 보냈는데, 떨어져 있던 시간이 길다 보니 아직도 부족한 것 같습니다. 만에 하나를 대비해야 하기도 하고요.”
“아. 그런 이유라면 남으시는 게 맞죠.”
“이해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뭘요.”
혜진은 잠시 침묵하다가 정광의 눈을 지그시 들여다봤다.
정광이 멀뚱멀뚱 있자 그녀는 희미하게 웃었다.
“끝까지 단주다우시군요.”
“네?”
“아닙니다. 앞으로 어떡하실 계획입니까?”
“열심히 싸워야죠.”
혜진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걱정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단주가 이길 테니까요. 그 후의 행보를 묻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공포로 군림해 온 천마신교를 당연히 이길 것이라니.
다른 이가 들었다면 혀를 찼을 만큼 맹목적인 믿음이었으나 정광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글쎄요. 아직 확실히 정한 건 없는데.”
“왠지 멀리 떠나실 것 같습니다. 다시는 볼 수 없을 정도로 먼 곳으로 말입니다.”
정광이 웃었다.
“하하. 그렇다 해도 언제까지 거기 있겠어요? 아무리 좋은 곳이어도 지겨워지면 돌아오겠죠.”
“……그렇군요.”
혜진의 얼굴에 꽃이 폈다.
조간왕을 빼닮은 눈매 때문에 역용을 한 사나운 인상이 본래의 아름다운 얼굴보다 더 환하게 빛났다.
“그거면 됐습니다.”
“네?”
“이번 일이 끝나면 단주께 배운 역용술로 만든 이 얼굴을 풀고 아미산으로 돌아가 수련에 임하려고 합니다. 다시 만났을 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텐데 그때도 잘 부탁드립니다.”
정광도 활짝 웃었다.
“기대되네요.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제대로 한번 싸워보죠.”
“……후우우. 무운과 건승을 빕니다.”
혜진이 나가자 정광도 떠날 채비를 했다.
병기들을 챙기고 봇짐을 짊어졌다.
언제나 그렇듯 단출한 차림.
‘슬슬 가볼까.’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니 이미 준비를 끝낸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정광은 먼저 불회당에게 다가갔다.
“푹 주무셨어요?”
황웅이 힘차게 답했다.
“네, 은공.”
“다른 분들도 그러시죠?”
불회당원들이 입을 모아 외쳤다.
“그렇습니다!”
정광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좋네요. 그럼 다음에 봬요.”
“……네?”
정광은 어리둥절해 하는 불회당원들에게 친절히 설명했다.
“여러분은 잠시 다른 곳에서 수련을 하시게 됐거든요.”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무장 몇 명과 노련해 보이는 상인들이 다가왔다.
“이분들이 여러분을 도와주실 거예요. 오래지 않아 다시 만나게 될 테니 한눈팔지 마시고 수련에 힘써주세요. 불회진(不悔陣)은 특히 신경 쓰시고요.”
“……?”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몰랐으나 얼마 안 가 또 만날 거란 말에 황웅과 불회당원들은 의욕을 불태웠다.
“알겠습니다. 다시 뵐 때까지 치열하게 노력할 테니 안심하십시오.”
“하하. 든든하네요.”
정광은 멀찍이 떨어져 있는 동방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뭐 하세요? 불회당 옆에 서시지 않고.”
동방장이 몇 걸음 물러났다.
“주, 주군. 나도 곤륜산(崑崙山)에 가면 안 될까? 이래 봬도 은근히 산 체질이거든.”
“어제 말씀드렸잖아요. 낭인으로 살아오시며 쌓은 경험을 불회당에게 전수해 주셔야 한다고요.”
동방장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낭인 경험 전수는 개뿔! 그건 겸사겸사하는 거고. 전마(戰馬)도 아직 안 되는데 낙타까지 부려보라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그게 끝이면 말도 안 하지.
불회당이 격이목(格爾木)에 도착해 낙타를 타다가 자신들의 처지를 깨닫고 도주하려 들면 막으란다.
크게 다치거나 죽는 놈 없이 무탈하게!
‘안 해! 아니, 못…… 끄응.’
정광이 이를 드러내며 웃는 모습을 보자 폭발하려던 반발심이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암. 경험은 소중한 것이지. 기꺼이 나눠줄게. 아주 전력으로.”
동방장은 잽싸게 불회당에게 다가가 밝게 웃었다.
허나 그건 그의 생각이고.
불회당이 보기엔 목에 칼날을 바짝 들이대고 을러대는 듯한 무서운 웃음이었다.
“낭왕의 사방장(四方將) 중 수장인 동방장이다. 앞으로 잘해보자.”
불회당원들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동방장인 거야 아는데, 낭왕의 사방장 중 수장?’
‘황구(黃狗)라고 놀림 받는 최약체라 들었는데 무슨.’
되지도 않는 허세에 기가 찼지만 천하에 널리 알려진 고수가 스스로 그렇다는데 할 말이 있나.
황웅이 떨떠름한 얼굴로 예를 표했다.
“영광이외다. 잘 부탁하오.”
이번엔 동방장이 어이없어했다.
‘이놈 눈빛 보게. 말은 또 왜 이리 짧아?’
황웅뿐만 아니라 다른 놈들도 마찬가지였다.
산적질에 수적질에 시장통에서 푼돈이나 뜯어 먹던 놈들이 감히 이따위로 건방지게 나올 줄이야.
‘고얀 놈들. 버릇을 고쳐주마.’
불회당원들도 다짐했다.
‘우리보다 위라고 생각하는 건가? 웃기는군. 본때를 보여주마.’
정광은 양측을 번갈아 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서로 자극되고 좋네. 실력이 쑥쑥 늘겠어.’
이제 마지막 인사만 남은 상황.
‘친왕들이나 공주는 됐고.’
그들이 원하지 않을 게 뻔한데 정광이 갈 이유는 없었다.
“성주님. 안녕히 계세요. 그만 갈게요.”
영약을 복용하고 안색이 한결 좋아진 청해성주가 웃었다.
“으하하. 조카, 조심히 가거라. 이숙(姨叔)은 너만 믿고 있으마.”
“성주님도 조심하시고요.”
“걱정 안 해도 돼. 태상황께서 괜히 나를 이곳으로 보내셨겠느냐?”
병세가 악화됐던 부인이 자리를 털고 일어난 상황.
청해성주는 근심을 벗어던지고 과거의 그로 돌아와 천마신교를 상대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음은 연 부인 차례였다.
“이모. 찬바람 그만 쐬고 들어가세요. 많이 좋아지셨지만 앞으로도 무리하시면 안 돼요.”
연 부인이 곱게 웃으며 다가와 정광을 부드럽게 안았다.
그녀의 입에서 오래전에 들었던 말이 흘러나왔다.
“네 뜻대로 하되 항상 몸조심해야 한다.”
“…….”
정광은 잠시 가만히 있다가 웃었다.
“네, 이모.”
* * *
정광은 곧장 곤륜산으로 향하지는 않았다.
기껏 서녕까지 왔는데 백가상단(白家商團)에 들러 유모 얼굴은 보고 가야 하지 않겠는가?
얼마 안 가 도착한 정광은 눈앞의 대장원을 보며 감탄했다.
‘더 커졌잖아. 그동안 돈을 꽤 번 건가?’
백승무의 사업 수완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그때, 장원 대문이 열리고 두 쌍의 인마가 나왔다.
정광을 본 기수들은 눈을 크게 뜨며 외쳤다.
“으, 은공!”
“오, 오실 거란 말씀은 들었는데 벌써 오신 겁니까?”
두 기수는 백가상단주 백진환과 그의 부인 허여민이었다.
정광 역시 놀라긴 마찬가지.
활짝 열린 대문 사이로 보이는 장원 내부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마치 빚쟁이가 들이닥쳐 몽땅 털어간 것처럼 휑하지 않은가?
“혹시 망하셨어요?”
“아!”
재빨리 평정을 되찾은 백진환이 텅 빈 장원을 돌아보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아닙니다. 무척 번창하는 중입니다.”
“근데 왜 저렇죠?”
“전부 곤륜으로 보냈습니다. 마지막으로 저희 부부도 갈 것이고요.”
“네? 왜요?”
백진환과 허여민이 허리를 꼿꼿이 폈다.
“곤륜과 환란을 함께 하기 위해서지요. 과거 진천마 그 악적의 명으로 마교가 일차 침공을 했을 때, 곤륜의 속가제자들이 사문을 돕기 위해 달려갔던 예를 따르려 합니다.”
“…….”
정광은 진천마 그 악적 운운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의아함이 더 커서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때 그분들. 곤륜산에 오르시기도 전에 전부 귀천하신 거 아시죠?”
허여민이 빙그레 웃었다.
“저희는 운 좋게 은공과 함께 가게 됐으니 그럴 일은 없어진 것 같습니다만.”
“그건 그렇긴 한데. 사제는 속가제자가 아니라 진산제자잖아요. 이러실 필요까진 없는데 너무 무리하시네요.”
백진환의 눈이 결연한 의지로 빛났다.
“저희 부부의 목숨이 아직도 붙어 있고 백가가 성세를 누리고 있는 것은 모두 은공 덕분입니다. 승무 역시 곤륜의 은혜를 입었고 말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 어찌 은공과 곤륜의 위급함을 모르는 척 눈감을 수 있겠습니까?”
가만히 지켜보던 사람들은 모두 감탄했다.
말이 쉽지, 이런 결정을 내리고 행할 때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까?
정광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가시죠. 곤륜도 백가의 도움을 잊지 않을 거예요. 허직 사숙께서 좋아하시겠네요.”
오라비의 도호를 들은 허여민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 융통성 없이 꽉 막힌 인간이 좋아할 리가 있나.’
백진환도 비슷했다.
‘처남의 꼬장꼬장한 언행을 떠올리니 속이 거북해지는군.’
어쨌든 간에 두 사람은 정광 일행에 합류하게 됐다.
그들은 곤륜산을 향해 말달렸다.
그새 소문이 퍼졌는지 수많은 사람들이 길가에 몰려나와 정광을 환영했다.
그런 사람들 중 단연 눈에 띄는 무리가 있었으니.
펄럭-
[진옥룡수호단(眞玉龍守護團)]똑같은 글귀가 수놓인 깃발들이 바람에 나부꼈다.
깃발처럼 ‘진옥룡수호단’이라 쓰인 천을 팔에 감은 여인들이 엄청난 환호성을 질렀다.
“진옥룡님이 돌아오셨어!”
“드디어 오셨다고! 진옥룡님! 여기 좀 봐주세요!”
이런 괴사(怪事)가 있나.
일행들은 기함했으나 정광은 태연했다.
“누님, 여전히 기운이 넘치시네요. 이모, 아저씨와 아이들은 잘 있어요? 첫째 아드님은 장가가실 때가 됐죠?”
정광의 놀라운 기억력은 단 한 사람도 놓치지 않았다.
수호단원들은 감동한 눈으로 기쁘게 답했다.
“얘는. 나야 기운 빼면 시체지.”
“어휴. 장가를 가긴 했는데 영 못 미더워서 걱정이야. 곤륜산에 올라 치성을 드리면 좀 나아질까?”
정광은 일일이 대답해 주다가 손을 내저었다.
“잠시만요. 이러다간 끝이 없겠네. 자오, 조금 도와주시겠어요?”
서녕성에 남은 혜진과 달리 성에서 나오자마자 역용을 풀고 별호도 되찾은 자오는 기꺼이 나섰다.
“알겠습니다, 단주.”
바로 몰려든 인파를 정리했다.
“무량수불! 찾아와 주신 도우들께 감사드립니다! 되도록 질서를 지켜주십시오! 그래주시면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실 수 있을 겁니다!”
정광이 덧붙였다.
“급한 일로 가는 중이라 오래 있지는 못해요. 무림인들이 벌써 몇 무리나 곤륜산으로 가는 모습을 보셨죠?”
봤다마다.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나 보통 일은 아닌 듯싶었다.
정광이 그 사실을 확인시켜줬다.
“곤륜산에서 여러 문파와 가문이 친목을 다지게 됐거든요. 대화가 아니라 다른 것으로요. 당분간 입산 금지예요. 이해해 주실 거라 믿고 시작할게요.”
사람들은 금세 조용해졌다.
이제껏 정광이 민초들에게 허튼소리를 한 적이 있던가?
이렇게까지 주의를 주는 걸 보면 굉장히 흉험한 일일 터.
그런 와중에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신경을 써주는 게 고마울 뿐이었다.
“자! 자! 줄을 서십시오!”
자오는 멍하니 구경하던 팽가와 석가장 무인들에게 부탁해 군중을 통제했다.
사람들은 정숙을 유지하며 정광에게 인사하고 축원을 받았다.
정광은 마지막 한 사람까지 놓치지 않고 다독인 뒤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감사합니다, 진옥룡! 원시천존께서 함께하시길!”
서녕에서 곤륜산까지는 삼천리(三千里)가 훌쩍 넘는 거리.
가면 갈수록 황량한 풍경이 펼쳐졌으나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나와 정광을 반겼다.
그렇게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을까?
그들은 마침내 곤륜산에 이르렀다.
타고 온 말들은 근처 마을에 맡기고 산을 올랐다.
곤륜산은 높고 험했다.
정광은 기억 속의 길을 오르며 주변을 둘러봤다.
‘변한 게 없네.’
웅장한 산세와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칼바람.
추위에 얼굴이 하얗게 질린 팽수빈에게 내공을 불어넣어 주며 이곳저곳을 설명했다.
“저 봉우리는 추운봉(秋雲峰)이라 하는데 육질이 연한 사슴들이 꽤 많은 편이지.”
“아! 그렇군요.”
“이 위로 올라가면 원숭이들이 무리를 지어 사는 곳이 나오거든. 걔들, 후아주(㺅兒酒)를 빚는 솜씨가 일품이야.”
“원숭이가 술도 만듭니까? 정말 신기합니다, 사부님.”
다른 사람들은 정광 사제(師弟)가 신기했다.
그 사부에 그 제자라더니.
도사 주제에 사슴을 사냥하고 원숭이가 만든 술을 훔쳐 먹은 걸 자랑하는 사부나, 그걸 듣고 진심으로 감탄하는 어린 제자나 난형난제 아닌가?
그래도 재밌는 얘기가 많았기에 귀를 기울이며 걸었다.
그렇게 웃으며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저 멀리 거대한 일주문(一柱門)이 보였다.
짙은 운무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일주문 앞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물론 정광은 제대로 알아봤다.
바로 신법을 펼쳐 두 사람 앞에 내려섰다.
왼쪽에 서 있던 허청이 빙그레 웃었다.
“녀석. 이제야 돌아왔느냐?”
“네, 사부.”
오른쪽에 있던 운후가 담담하게 환영했다.
“어서 오거라. 그간 많이 변했구나.”
정광은 신선처럼 허허로운 느낌을 주는 운후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사조께선 여전하시네요. 몇십 년은 문제없으시겠는데요.”
“허어. 반선단을 또 만들어 늙어 죽지도 않는 괴물로 만들 셈이냐?”
“그것도 나쁘지 않죠. 말 나온 김에 그렇게 할까요?”
세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동시에 웃었다.
그 웃음은 곤륜파가 있는 운화봉(雲花峰)을 넘어 곤륜산 전체로 퍼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