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ighteous Demon of Kunlun RAW novel - Chapter 421
2부 151화
정해진 운명
향리객잔의 특이성과 정광의 악명, 외부를 지킨 전주(錢主)들의 수하들 덕분에 밤손님은 없었다.
수하들은 동이 트자 퀭한 눈을 끔벅이며 떠났고, 푹 자고 일어난 정광은 아침을 먹으며 오늘 할 일을 얘기했다.
“이길 거예요.”
섬랑은 생사투에서, 정광은 도박에서 승리할 거라는 의미.
모두 묵묵히 받아들였지만 섬랑은 아니었다.
‘이차 예선이라 그런지 수준이 달라. 어제는 이길 수 있었는데 오늘도 가능할까?’
부정적인 생각을 떨쳐내려 해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애써 자신감 있는 표정을 지었으나 산전수전 다 겪은 다른 이들이 속을 리 있나.
한마디씩 덕담을 해서 섬랑의 사기를 끌어 올렸다.
“긴장되지? 당연한 거다. 목숨을 걸고 싸우는데 긴장을 안 하면 그게 사람이겠느냐?”
“혈조, 역시 그렇죠?”
“그렇고말고. 그런데도 의연한 모습을 보이려 하니 오히려 안심이 되는구나. 너는 지금 자신의 상태를 알고 그것을 극복하려 하고 있어. 무인으로서 무척 좋은 자세라 할 수 있지.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
자오의 수다가 길어지자 차례를 기다리던 관엽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정신 차려. 지금껏 해온 것만큼만 하면 이길 거다.”
“고마워요, 관 숙수. 짧고 굵어서 좋네요.”
다음은 민현유였다.
“대인께 출전자들에 대한 정보를 모두 말씀드렸다. 대전 상대가 정해지면 대인께서 전술을 짜주실 테니 걱정하지 말거라.”
“네, 아저씨. 아저씨의 도움, 잊지 않을게요.”
마지막은 정광.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대신했다.
따악!
“아야! 왜 때려요?”
섬랑이 머리를 두 손으로 부여잡고 항의했다.
정광은 씩 웃어 보이며 섬랑의 정수리와 조금 전에 때린 부위를 가리켰다.
정수리에서 살짝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어제였으면 정수리를 맞아 눈물을 찔끔 흘렸을걸.”
“……아. 조금이나마 피했네.”
“오늘도 너는 나아졌다는 얘기지.”
“……그렇네요.”
“내일도 나아질 거고. 그런데 뭐가 문제야?”
“그러게요.”
섬랑이 눈을 빛냈다.
“하나 더 있어.”
정광은 섬랑의 작은 머리통을 대충 쓰다듬고 말을 이으려다가 민현유에게 명했다.
“탁자에 쌓여 있는 재물들, 마차에 실어.”
민현유가 공손히 대꾸했다.
“너무 갑작스럽군요.”
“삶이란 그런 거지.”
“비밀스러운 얘기를 하시려고 저를 보내시는 것 같은데 더 들으면 안 됩니까?”
“나를 평생 따라다니려면 듣든가.”
민현유는 점소이들을 지휘하러 자리를 비웠다.
정광은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섬랑을 응시했다.
“지금까지 멸혼생사투에서 싸우면서 움직인 적 없지?”
“뭘 말씀하시는 거예요?”
“네 옥당(玉堂)에 있는 그거.”
중단전에 심어준 마혼(魔魂)의 씨앗을 얘기하는 것이었다.
“아, 그거요? 미동도 안 하던데요.”
“마음속에서 살의가 들끓은 적 없어?”
“네.”
“화도 안 났고?”
“으음. 몇 군데 부러뜨리고 싶을 정도만요. 근데 그건 왜 물으세요?”
정광이 정리해줬다.
“네 마(魔)가 움직이지 않은 건 그것을 이용하거나 그것에 휘둘릴 만한 상대가 없었다는 거야.”
“오오. 제게 아직 여유가 있다는 말씀이죠?”
“이제야 이해하네. 어쨌든 알았으니 됐다.”
“헤헤. 죄송해요.”
섬랑은 머리를 긁으며 웃다가 정광의 이어지는 말에 얼굴을 굳혔다.
“그렇다고 그것에 의지하지는 마. 기대면 기댈수록 네 의지가 약해져 잡아먹힐 거야.”
섬랑은 몸을 한차례 부르르 떨고 다짐했다.
“그건 안 되죠. 명심할게요.”
“좋아. 슬슬 가볼까.”
정광은 민현유에게 무명천을 조금 잘라서 가져오게 했다.
“대인, 여깄습니다.”
“응.”
정광은 경장 윗도리를 벗고 무명천을 왼쪽 어깨에 감았다.
다시 옷을 걸치자 어깨가 굵어진 것이 미세하게 티가 났다.
지켜보던 민현유가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뭐 같은데?”
“상처를 입은 척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잘 아네.”
“어젯밤 주루에서 오시는 길에 습격을 받으셨습니까?”
“응. 세 놈이 덮치더라. 자객질을 업으로 삼는 놈들이었어.”
모두 놀랐으나 금세 평정을 되찾았다.
누가 정광을 해칠 수 있을 것이며 실제로도 이렇게 무사히 돌아오지 않았는가?
민현유가 침착하게 물었다.
“전주들이 함정을 판 건 아닐 테고. 누가 사주한 겁니까?”
“둘 중 하나잖아. 편한 쪽으로 골라.”
“그럴 순 없지요. 직접 보고 고르겠습니다.
정광 일행은 황금마차를 끌고 오로나가로 향했다.
민현유는 대장원 앞에 늘어서 있는 천막들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가가 아니라 손가였군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보이지 않잖습니까. 떠나기 전에 대인을 시험해 봤나 봅니다.”
“손웅이 죽고 망신까지 당했으니 창피해서 갔을 수도 있잖아.”
“그렇다고 급하게 사라지면 체면이 더 깎이는 것 아닙니까? 암습이 실패해서 서둘러 떠난 게 사리에 맞습니다. 손가를 어떡하실 생각이신지요?”
“다시 보게 되면 이자까지 쳐서 패줘야지.”
정광은 피식 웃다가 섬랑을 내려다봤다.
“들었지?”
“네.”
“이해했어?”
“대충은요. 듣고 보니 손가의 소행 같네요.”
“그걸 말하는 게 아니야.”
“네? 그럼 뭔데요?”
정광은 의아해하는 섬랑에게 진지하게 충고했다.
“현유는 항상 모든 것들을 눈여겨보고 끝없이 생각해. 그리고 인과 관계를 추론해 내지. 왜 그럴까?”
섬랑은 이맛살을 모으고 궁리하다가 입을 열었다.
“부잣집 도련님이라 너무 한가해서?”
민현유가 한숨을 쉬었다.
“내가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매일 보면서도 그런 말을 잘도 하는구나.”
“농이에요, 농. 그럼 왜 그러시는 건데요?”
“점소이의 본분이니까.”
“아 진짜. 아저씨, 삐졌어요? 꽁하지 말고 좀 알려줘요.”
정광이 민현유를 변호했다.
“현유가 꽁한 건 맞지만 점소이라 그런 건 사실이야.”
“대인. 제가 언제…….”
정광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점소이는 손님의 행색과 표정, 말투, 몸짓 등을 통해 많은 걸 알아내야 한다. 그리고 그 정보를 이용해 적절히 접대해야 돈을 벌 수 있어. 심지어는 목숨까지 건질 수 있고.”
“아! 그럴듯하네요.”
“점소이뿐만 아니라 상행위를 하는 모든 이들이 그렇지. 무인도 예외는 아니야. 너도 쿠차에서 구를 땐 표식이 없는 뜨내기들만 암습해서 털었잖아.”
섬랑이 헛기침을 했다.
“흠. 흠. 적을 관찰하고 그에 맞게 대응하라는 말씀이죠?”
“사람뿐만 아니라 지형을 포함한 모든 사물을 주의 깊게 봐. 그게 네 힘이 될 거고 네 목숨을 살릴 거다.”
“알겠어요. 반드시 그렇게 할게요.”
“그래. 그게 오늘 전술이니까 잘하는 게 좋을걸.”
“……네?”
“오늘 역시 네 몫은 일할로 하고…….”
정광은 한곳에 모여 있는 독두와 전주들을 보며 미소 지었다.
“잔뜩 벌어볼까.”
전주들은 정광을 발견하자마자 바쁘게 움직였다.
“다들 길을 열어주시오!”
“도신께서 황금마차를 끌고 오셨소이다!”
사람들은 순순히 비켜주는 걸 넘어 열렬히 환영했다.
전과 달리 전주들이 모두 모여 큰 판을 준비하고 있어서 기대감이 가득 차오른 상태였는데 도박꾼들의 우상이자 몽땅 털어먹고 싶은 대적이 나타난 것이다!
“와! 마차 바퀴에 땅이 파이는 거 봐! 얼마나 많이 실린 거야?”
“진혼! 자네만 기다리고 있었네!”
“오늘은 긴장해라! 어르신께서 다 따 주마!”
멸혼생사투가 시작됐다.
정광은 전주들에게 얘기했던 대로 마지막에 걸었고 어김없이 땄다.
한 사내가 잔뜩 충혈된 눈으로 손에 든 목패를 노려보다가 울부짖었다.
“망했어! 망했다고! 아니, 아직 늦지 않았어! 그냥 빼앗으면 되지!”
와드득.
이번 판에 건 금액과 배당률 등이 적힌 목패가 손안에서 바스러졌다.
사내는 날카로운 못이 삐죽삐죽 박힌 낭아봉(狼牙棒)을 거칠게 휘두르며 판돈이 쌓여 있는 탁자를 향해 달렸다.
벌건 눈으로 눈치를 보던 몇몇 사내가 가세했고 장내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이런 미친!”
“도박을 끊으려면 조용한 곳으로 가 자결할 것이지, 이게 뭐 하는 짓이야!”
평소의 도박꾼들이라면 욱하는 마음에 칼춤을 췄겠지만, 괜한 소란에 엮여 처벌을 받기 싫었기에 분분히 물러났다.
덕분에 난동을 부린 자들은 판돈이 쌓여 있는 곳까지 쉽게 다다를 수 있었다.
하지만 독두(禿頭)라는 민둥산은 넘지 못했다.
“썅! 이 새끼들이 감히!”
독두도 엄연한 마인.
그것도 정신 나간 도박꾼들에게서 피를 빨아 먹고 사는 지독한 자 아닌가?
인생에 다시없을 큰 판을 벌이고 있는데 훼방을 놓다니!
화가 너무 나 머리꼭지가 돌자 본성이 드러났다.
“신성한 도박판에서 이 지랄을 해? 다 뒈져!”
호위하는 수하들을 밀치고 앞으로 나가 거무튀튀한 철퇴를 붕붕 휘둘렀다.
낭아봉을 든 사내의 것을 필두로 여러 개의 머리통이 연이어 박살 났다.
“점잖게 예, 예 하면서 다 받아주니까 우습게 보이냐?”
콰직! 콰앙!
“해준 만큼 보답을 해야 할 거 아니야! 예의 있게 굴어, 이것들아!”
독두는 판돈을 강탈하려던 자들을 모두 죽이고도 씨근덕거렸다.
그 기세가 어찌나 흉흉한지.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주춤주춤 물러날 정도였지만 정광의 한마디에 순한 양이 됐다.
“독두. 고객님들에게 겁을 주시면 어떡해요.”
“죄, 죄송합니다, 대인.”
“자. 나쁜 분들은 도박을 끊게 해드렸고. 하고 싶은 분들끼리 즐겁게 달려보죠. 따고 도망치면?”
도박꾼들이 눈을 빛내며 화답했다.
“후레자식이지!”
“좋아요! 교양이 있는 분들만 남으셨으니 그런 일은 없겠죠. 가죠!”
“와아아아아!”
정광이 다시 분위기를 끌어 올렸다.
벌은 이는 벌어서, 잃은 자는 잃어서 열기가 치솟았다.
그 와중에도 정광은 계속 이겼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도박꾼들은 투쟁심이 솟았다.
생사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어느 쪽이 이길 확률이 극도로 높은지 알게 되어 싱거워지는 면이 있었으나 어제 드러났듯이 정광도 완벽한 존재가 아니지 않은가?
판이 거듭될수록 뜨거워진 분위기는 섬랑이 싸울 차례가 되자 급속히 식었다.
“섬랑에게 전부!”
“나도!”
“젠장. 또 모두 섬랑에게 거네.”
“내기가 성립되지 않잖아. 이번 판은 구경이나 하는 게 낫겠어.”
“그래, 저런 녀석도 하나쯤 있어야 우리도 숨을 돌리지.”
도박 열기는 사라졌지만 응원은 거세졌다.
섬랑을 향한 일방적인 응원이었다.
“약한 주제에 계속 이기는 게 재밌다니까! 또 한 번 이겨봐라!”
“어제 고신혁이 싸우는 거 봤지? 병기가 긴 이점을 잘 활용하는 녀석이니까 조심해!”
하지만 적을 아는 건 고신혁도 마찬가지.
집안 어른들이 어제의 생사투를 보고 지시를 내렸는지 초반부터 전력을 다했다.
쉬익- 후웅-
창날 좌우에 시퍼런 월아(月牙)가 달린 방천극(方天戟)을 세차게 찌르고 휘둘러 공격을 퍼부었다.
섬랑은 장기인 묵영보를 펼쳐 정신없이 피했으나 온몸을 움직이는 꼴이라 시간이 흐를수록 불리해질 수밖에 없었다.
‘망할. 뭐가 이렇게 길고 빨라? 접근을 못 하겠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정광의 조언을 되새기며 고신혁의 표정과 초식을 비롯한 모든 것을 머릿속에 욱여넣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어? 저건!’
참고 기다리던 기회가 왔다.
고신혁의 안면 오른쪽이 살짝 올라간 것이다.
‘오른발을 내디디며 허리를 틀어 방천극을 내지르는 초식이야!’
아까 봤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르며 눈앞에서도 펼쳐졌다.
‘가야 해!’
섬랑은 주저하지 않고 뛰어들었다.
비스듬히 나아가 창날은 피할 수 있었지만 월아는 어쩔 수 없었다.
단봉을 세워 억지로 막았으나 힘에 밀려 왼팔 상박을 베였다.
그래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전진했다.
뒤로는 피를 흩뿌리고 앞으로는 오른손에 쥔 단봉을 내질렀다.
단전에서 끌어 올린 내공을 담아!
콰직!
“끅!”
단봉이 고신혁의 목젖을 찌르고 들어가 목뼈를 부쉈다.
섬랑의 승리였다.
“이야아아아아!”
섬랑은 포효하고 사람들은 열광했다.
“와아아! 잘했어!”
“믿고 있었다고!”
“독종에 승부사로구나! 아주 제법인걸!”
사람들은 진심을 담아 섬랑을 축하했다.
하지만 오로나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천막의 분위기는 달랐다.
어제의 여인은 없었으나 소가주의 표정이 안 좋았다.
가주는 더했다.
섬랑을 물끄러미 보다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정광은 그 모습을 보며 내심 웃었다.
‘음흉한 생각을 할 땐 항상 저러더니. 나이를 먹고도 못 고쳤구나.’
그런데 옆에 있는 껑충한 중년인, 오로나가 소가주도 똑같이 그러는 것 아닌가?
‘그 아비에 그 자식이라더니. 습관도 비슷하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빤히 보였다.
나가의 병기는 창. 거리를 유지한 채 상대의 틈을 노려 내지르는 일격이 장기였다.
섬랑은 두려워하지 않고 전진하는 독종에 본능적으로 상대의 약점을 노릴 줄 아는 승부사였고.
섬랑은 나가 무공의 천적이라 할 수 있었다.
‘어제와 또 다르니 본선까지 진출하면 얼마나 바뀌어 있을까 걱정되겠지.’
가주든 소가주든 누가 흉계를 꾸미든 간에.
이로써 오로나가의 운명은 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