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ighteous Demon of Kunlun RAW novel - Chapter 426
2부 156화
제정신이 아닌 건 알고 있었지만
공자의 제자인 증자가 말하길, 십목소시(十目所視) 십수소지(十手所指) 기엄호(其嚴乎)라. 무수한 이들이 지켜보며 잘못을 손가락질할 수도 있으니 홀로 있어도 언행을 조심하라 했다.
홀로 있어도 그래야 하거늘, 하물며 군중이 모인 자리에서는 어떠랴.
눈을 찡긋한 건 찰나였지만 그로 인한 대가는 영겁으로 돌아왔다.
그 광경을 목도한 몇몇 사람들은 나문욱을 그쪽 사람으로 단정 지었다.
‘표정이 항상 얼음 같은 건 그걸 감추기 위해서였나?’
‘혼인도 하고 자식도 꽤 있는 것으로 아는데. 양쪽에 능한 자였군.’
‘미친! 진혼이야 잘났으니 그렇다 치고. 나는 왜 보는 거야? 취향의 폭이 넓은 건가?’
‘생사투 따위를 구경할 때가 아니야! 당장 여길 떠야 해!’
나문욱에게는 천만다행스럽게도 그의 추파 아닌 추파는 널리 퍼지지 않았다.
먹잇감이 되거나 살인멸구 당할 걸 두려워한 목격자들이 슬금슬금 물러나더니 줄행랑을 친 것이다!
나문욱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금이야 이렇게 조용히 끝났지만 얼마 안 가 신강 전체에 소문이 퍼질 터.
크나큰 분노가 일어나 모든 일의 원흉인 정광에게 오롯이 향했다.
-진혼! 이걸 노리고 수작을 부린 것이냐?
-설마요. 다른 사람들이 볼 줄은 몰랐어요. 조심 좀 하시지.
물론 거짓말이었다.
몇몇 사람의 귀에 ‘어? 나문욱 왜 저래?’라고 다전음으로 슬쩍 흘려 쳐다보게 만든 것이다.
이 사실을 모르는 나문욱은 자신을 원망하며 정광도 비난했다.
-조심해서 했는데도 이렇게 됐다! 네가 빨리하라고 압박을 가하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어!
-그래도 꼭 나쁘기만 한 건 아니에요.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정광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소문이 퍼지면 누가 소가주님을 두려워하지 않겠어요. 거의 무적이 되신 거죠.
-…….
-소수지만 열렬한 추종자들도 생길 테니 아껴주세요.
-…….
나문욱은 폭발하려는 분노를 간신히 억눌렀다.
이미 지난 일을 어쩌겠는가?
헛소문을 퍼뜨리는 놈은 징치하면 된다.
지금은 더 중요한 일에 집중해야 했다.
나문욱의 눈이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그 눈으로 정광을 노려보며 단단히 경고했다.
-일을 똑바로 처리해야 할 것이다.
-물론이죠.
-잘못되면 내 모든 것을 걸고 너를 죽일 것이야.
-그런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하세요.
정광을 한 번 더 쏘아보고 시선을 돌리는데.
옆에 앉아 있던 나익승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진혼을 노려본 것이냐?”
대답을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럴 거라 단정하고 물었으니 아니어도 그렇다고 해야 했다.
“네, 아버님.”
“내가 놈을 사위로 삼아 너와 경쟁시키려고 하는 걸 눈치챘나 보구나.”
“그렇습니다.”
나익승이 못마땅한 어조로 나무랐다.
“못난 놈. 자신을 갈고닦을 생각은 안 하고 상대를 원망해?”
“죄송합니다.”
“말로만 그러지 말고 똑바로 해라. 네가 내 자식이라고 편애하지는 않을 것이야.”
“명심하겠습니다.”
대답은 했으나 실제로 명심할 필요는 없었다.
그 사실은 이미 마음속 깊이 새겨져 있었다.
‘웃기지도 않는구나. 언제 자식 취급을 해줬다고 편애를 들먹여?’
아비는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위인이었다.
나문욱은 물론이오, 그 어떤 자식에게도. 심지어 장중보옥(掌中寶玉)처럼 여겨야 할 막내딸 나민에게조차 애정을 주지 않았다.
‘그러니 근본 없는 녀석을 묶어두는 용도로 써먹으려는 것이지.’
곁눈질로 나민을 살폈다.
언제나처럼 알 수 없는 눈으로 텅 빈 비무대를 응시하고 있었다.
‘여전하군.’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녀석이라 항상 꺼림칙했다.
이번 거사가 성공하고 진혼이 데려가면 마음이 한결 편해지리라.
‘그나저나 아무것도 없는데 뭘 보고 있는 거야?’
나민은 무언가를 보는 게 아니라 누군가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녀를 데려가겠다고 약조한 사람이었다.
그에게서 수많은 의문을 느꼈으나 지금 당장 궁금한 건 단 하나였다.
‘대체 어떻게 아버님께 허락을 구하려는 걸까?’
그가 말하길, 특기가 남을 설득하는 것이라 했다.
허나 별로 믿음이 가지 않았다.
이제껏 들어온 소문을 통해 그 설득법이 무엇일지 짐작을 해서였다.
‘그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아버님을 강제하진 못해.’
순순히 응할 사람이 아니었다.
나익승 본인도 강하지만 가문의 힘까지 고려해야 했다.
그가 거기까지 생각 못 했을 리는 없으나 그녀의 상식으론 불가능한 일이었다.
‘일단 던져놓고 계획을 짜려고 했던 건가?’
아무리 궁리해 봐도 그럴듯한 답이 안 나와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힘이 쭉 빠졌다.
하루가 지났다고 뾰족한 수가 나왔을 리 있나.
지금쯤이면 머리가 터질 지경일 터.
실제로 그런 상황인지 너무 궁금해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두 눈으로 확인을 해야 기대를 접든 희망을 품든 할 것 아닌가?
정광을 찾은 나민의 눈이 커졌다.
‘……저건!’
현실적인 방도가 있고 모든 준비가 끝난 걸까!
저렇게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짓고 있을 줄이야!
정광은 그 얼굴로 군중을 둘러보며 힘 있게 외쳤다.
“오늘도 화끈하게 거실 거죠? 감사히 먹겠습니다!”
악의 없는 야유가 쏟아졌다.
“웃기는 소리! 자네 운은 어제로 끝났어!”
“하하! 오늘은 우리가 개평을 나눠주지!”
“내가 거는 쪽으로 따라와! 그럼 그렇게 될 수 있을걸?”
정광은 두 팔을 벌리며 받아쳤다.
“자신감 있으셔서 좋네요. 이따 잃고 우실 때도 당당하게 우세요!”
정말 울고 싶은 건 나민이었으나 정광이 알 바 아니었다.
그녀를 데려가는 건 데려가는 거고 지금 당장은 판돈을 따고 섬랑이 승리하는 게 중요했다.
그리고 그렇게 됐다.
도박이야 당연히 연전연승.
섬랑도 나쁘지 않았다.
쌍부(雙斧)를 사용하는 적을 쌍단봉으로 상대했다.
단병기와 단병기의 싸움인지라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위험한 접전이 펼쳐지는 게 순리였으나 섬랑이 누군가?
유일하게 자신 있는 무공인 묵영보를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펼쳤다. 요리조리 피하며 틈을 노리다가 눈을 빛내며 일격을 찔러 넣었다.
허나 안타깝게도 그 틈은 적이 일부러 드러낸 함정이었으니.
‘헉!’
바로 살벌한 반격이 쏟아졌다.
섬랑은 동물적인 감각으로 간신히 피했으나 마치 그러길 기다렸다는 듯이 이어지는 상대의 치밀한 연환기에 손발이 어지러워져 어쩔 줄을 몰랐다.
‘빌어먹을! 이러다 죽겠네!’
이렇게 속으로 비명을 지르는 와중에도 상황은 더 안 좋아지고 있었다.
‘어떡하지? 팔 하나라도 박살 내고 죽어?’
그때, 도끼가 옆구리를 스쳐 지나가며 핏줄기가 튀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죽긴 왜 죽어!
앞으로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중단전에 틀어박혀 있는 그 짜증 나는 것도 안 움직이잖아! 그걸 안 쓰고도 충분히 해치울 수 있는 놈이라고!
그런데 어떻게?
상처가 또 늘었다.
답답해서 성질이 났다.
거기에 죽음의 위협까지 짙게 느끼게 되자 옥당(玉堂)에 잠들어 있던 마혼의 씨앗이 눈을 떴다.
정광이 더 늦기 전에 답을 줬다.
-새것을 배웠다고 옛것을 버리면 쓰나. 네가 원래 잘하던 건 까먹었어? 아니면 쓰기 쪽팔린 거야?
‘아!’
깨달음은 깨달음이고.
섬랑은 억울했다.
하도 정신이 없는 데다 무공이 어느 정도 익어 그랬을 뿐인데 무슨!
당장 죽게 생긴 판에 모양새를 왜 따지겠냐고!
그리고 그게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야?
섬랑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우선 별 쓸모가 없는 쌍단봉을 허리춤에 꽂았다.
봉이 아무리 굵고 강해도 무거운 도끼를 계속 막아낼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신 끊임없이 묵영보를 밟으며 자유로워진 양손으로 오래전부터 갈고 닦은 비기를 펼쳤다.
바닥에 철질려가 깔리고 허공엔 독분이 흩날렸다. 비수를 던지는가 하면 꿍쳐뒀던 싸구려 춘화까지 활짝 펼쳐 적을 혼란시켰다.
‘보였어!’
적이 허점을 드러냈다.
주저하지 않고 뛰어들어 넘어뜨린 뒤 개싸움을 했다.
개싸움 하면 섬랑, 그것만으로 따지면 당장 소교주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경지 아닌가?
얼마 안 가 나가 무인이 승패를 판정했다.
“섬랑 승! 왕정총 패! 비무대를 정리하고 다음 대결을 위한 추첨을 하겠소! 이번엔 치울 것이 많으니 조금 걸릴 것이외다!”
말속에 뼈가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섬랑이 어질러 놓은 게 좀 많아야지.
허나 나가 무인은 탓하지 않았다.
생사투에서는 무슨 수를 써도 인정됐고, 탓하고 싶어도 그럴 기회가 없어서였다.
자오가 비무대에 뛰어올랐다. 비틀거리는 섬랑을 안고 바로 신법을 펼쳐 정광 앞에 내려섰다.
“단주. 상처가 꽤 많습니다.”
“수고했어요, 혈조. 지금부턴 제게 맡기세요.”
정광은 품속에서 금창약을 꺼내며 섬랑을 안심시켰다.
“이거 알지? 웬만한 상처는 금방 치료할 수 있으니 안심해.”
섬랑은 힘없는 얼굴로 고개만 끄덕였다.
정광이 상처를 살펴보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섬랑의 얼굴이 굳었다.
“왜요? 많이 깊어요? 제가 지금 흥분한 상태라 고통을 못 느끼는 거예요?”
정광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설명했다.
“생각보다 얕잖아. 비싼 거 괜히 꺼냈네.”
섬랑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가 급히 부탁했다.
“그, 그래도 그것으로 발라주세요.”
“왜?”
“그게 최고니까요. 내일도 싸워야 하잖아요.”
“또 다치겠네. 내일이 이차 예선 마지막 생사투인데 내일 한꺼번에 몰아서 다치지 그랬어?”
“그러게요. 세상일이란 게 참 뜻대로 안 되네요. 어쨌든 그걸로 해주실 거죠?”
“하아. 아까워라.”
말은 그랬지만 행동은 달랐다.
정광은 섬랑의 상처에 금창약을 아낌없이 발랐다.
섬랑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 대인. 갑자기 왜 이렇게 많이…….”
다른 이들이 보기엔 형편없이 적은 양이었으나 몇 번이나 이런 경험을 해봤던 섬랑은 정말 놀랐다.
그런 섬랑에게 정광이 따뜻하게 웃었다.
“네가 번 몫에서 빼려고. 불만 없지?”
왜 없을까.
섬랑이 입을 삐죽거리며 투덜거리자 정광이 웃었다.
“녀석. 알뜰하기는. 그래, 무상으로 해주마.”
“진짜요?”
“당연하지.”
“이상하다. 이럴 분이 아닌데.”
그렇긴 했지만 오늘은 달랐다.
정광은 기분이 꽤 좋은 상태였다.
‘지금까진 계획대로 전부 잘됐어.’
그러니 남은 것도 잘해내야 기분이 상하지 않을 터.
자오에게 말해 다음 생사투에 돈을 걸었다.
다른 천막 아래 앉아 있는 단영과 흑서에게 다전음을 보냈다.
-뒤돌아보지 말고 들어.
오늘 해야 할 일을 알려주고 확인했다.
-이해했지? 했으면 뒤통수 긁어.
단영이 자연스레 손을 들어 뒤통수를 긁었다.
흑서는 은신한 상태로 하는지라 제대로 보이진 않았으나 바보는 아니니 이해했을 게 분명했다.
‘이번 판이 끝나면 시작해야겠어.’
잠시 뒤.
또 다른 승패가 갈렸다.
이로써 오늘 예정되어 있던 생사투가 모두 끝났다.
정광은 관엽, 자오, 민현유, 섬랑에게 손짓했다.
“먼저 가서 쉬고 계세요.”
아침 식사를 하며 이미 끝낸 얘기였기에 그들은 아무 말 없이 마차를 끌고 향리객잔으로 향했다.
홀로 남은 정광은 구경꾼들이 흩어지기 전에 성큼성큼 걸었다.
목표는 나익승이었다.
그의 바로 앞까지 다가가 두 손을 모았다.
“가주님, 안녕하세요.”
“그래. 생각은 해봤느냐?”
“밤새도록 생각했죠.”
“답을 들을 차례군. 장원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하자.”
정광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가주님, 저를 좋게 봐주신 건 감사한데. 나 소저와 혼인하라고 하신 거요. 죄송하지만 거절할게요.”
“……!”
나익승은 눈을 부릅뜨고 나문욱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정광이 군중 앞에서 나민과 혼인하지 않을 거라고 천명하겠다는 약조를 지킨 것이다!
한편, 정광이 뭘 하려나 싶어 지켜보던 구경꾼들은 경악했다.
‘나 소저? 설마 나민?’
‘나 가주가 진혼과 그녀를 혼인시키려 한다고?’
‘나는 아직 말도 못 걸어봤는데?’
‘진혼을 사위로 들여 세를 불리려는 건가?’
정말 사실인가 싶어 지켜보는데.
그런 것 같았다.
나익승이 정광을 노려보기만 할 뿐, 부정하지 않는 것 아닌가!
사람들은 입을 떡 벌렸다.
‘진혼, 저 새끼! 제정신이 아닌 건 알고 있었지만 진짜 미쳤구나!’
‘나 소저는 신강에서 손꼽히는 미인인데 거절을 해?’
‘오로나가라는 엄청난 배경도 뿌리치고?’
모두 분노하며 황당해했으나 제일 심한 건 나익승이었다.
‘호의를 베풀었거늘, 감히 나를 물 먹여?’
그것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럴 줄이야.
당장 쳐죽이고 싶었으나 이유부터 알아야 했다.
-이놈! 무슨 수작을 부리는 것이냐!
-아무리 고민해 봐도 아닌 것 같아서요.
나익승이 다시 물으려고 하는데 한 마인이 하도 어이가 없어 외쳤다.
“이보시오, 진혼! 왜 나 소저를 거부하는 것이오? 미쳤소이까?”
정광은 주저 없이 답했다.
“너무 어려서요.”
“……아.”
모두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연상 취향인가?’
오해였다.
단지 나민이 너무 어린 것뿐이었다.
정광의 나이가 있지 않은가?
나민이 지금보다 최소 백 살은 더 먹어야 하는데…….
노기를 감추지 않고 있던 나익승이 정광에게 물었다.
“정말로 그 이유인 것이냐?”
“이유의 일부죠.”
“곱게 돌아가고 싶으면 남김없이 토설해라.”
어쭙잖은 대답으로 넘기려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살기가 느껴졌다.
정광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 살기를 받아내며 씩 웃다가…….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