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ighteous Demon of Kunlun RAW novel - Chapter 443
2부 175화
합리적인 의심
멸혼생사투를 구경하러 온 군중은 이녕임가(伊寧任家) 대장원의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나오자 탄성을 터뜨렸다.
북슬북슬한 털과 날카롭게 솟은 송곳니, 기이할 정도로 긴 꼬리. 사흉(四凶) 중 도올(檮杌)이 수놓인 무복을 입은 사내들 때문이었다.
“뭐야? 도올대(檮杌隊)잖아!”
“진짜네. 저들이 왜 왔지?”
“가만. 광명좌사자(光明左使者)도 있어.”
“음? 어디? 어디?”
“고리눈에 풍채가 좋은 노인을 보게나.”
“허어. 눈 호강 한번 제대로 하는군. 생사투 참가자들을 격려하러 오기엔 너무 과한 인사들인데…….”
사람들이 수군거리든 말든 도올대는 비무대 위로 올라가 일렬로 도열했다.
그리고 당장이라도 칼춤을 출 것처럼 살기를 발산하자 소란스럽던 장내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고리눈의 노인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도올대 앞에 섰다.
그는 거만한 표정으로 사람들을 둘러보다가 천천히 포권했다.
“광명좌사자 은호정이 교우(敎友)들에게 인사드리네!”
군중 한 명, 한 명의 귀에 똑똑히 꽂히는 웅혼한 음성!
실로 놀라운 내공 아닌가?
그 신위에 위축된 마인들이 두 손을 모아 답례했다.
“광명좌사자를 뵙습니다!”
은호정은 고개를 한 번 크게 끄덕이고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이렇게 반겨줘서 고맙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교주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일세! 지금부터 읽을 테니 경청해 주게나!”
그는 품속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활짝 펼치고 말을 이었다.
“멸혼생사투 최종 예선에 진출한 동량들이여! 너희들이 지금껏 흘린 피땀이 첫 번째로 결실을 볼 순간이 왔도다! 가문과 본인의 영달을 위해 최선을…….”
교주의 축사는 꽤 길었다.
도올대의 살기와 은호정의 신위 때문에 집중해서 듣던 마인들은 얼마 안 가 지루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축사가 끝나고 다른 얘기가 나오자 두 눈을 빛냈다.
“성전(聖戰)을 치르기 위해 곤륜산으로 떠난 교우들이 전해온 소식이다! 순차적으로 곤륜산에 집결해서 정파 위선자들을 파죽지세로 몰아치고 있다! 적들의 목을 베어 그 수급으로 술잔을 만들고 심장을 잡아 뽑아 안주로 즐기며 이기고 또 이길 것이다!”
거대한 함성이 장내를 울렸다.
“와아아아아!”
“위선자들의 피를 마시고 살점을 씹자!”
“아예 씨를 말려야 해! 깡그리 죽이자고!”
시간이 갈수록 함성이 잦아들긴커녕 더 커졌다.
열기가 전염되고 막대한 살기가 넘실거렸다.
잔뜩 흥분한 마인들과 달리 차가운 눈으로 은호정을 보고 있던 정광은 피식 웃었다.
‘허세 부리기는.’
교주인 연가 놈이나 마뇌 녀석이나 그럴듯한 전공을 거뒀으면 상세하게 자랑하지, 이렇게 뭉뚱그려서 때우는 성품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선전한다?
일이 뜻대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는 얘기였다.
‘천마신교가 강한 건 사실이나 곤륜산에 모인 정파 전력도 약하지 않아.’
더구나 공격보단 방어가 훨씬 쉽기 마련.
뿐이랴.
청해성주가 지휘하는 관병 때문에 이래저래 불편할 게 뻔했다.
보나 마나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으리라.
‘지원군을 계속 보내고 있으니 점점 유리해지겠지만 한동안은 아니지.’
탑극랍마간에서 구르고 있는 불회당 얘기가 없는 걸 보면 녀석들도 나름 잘하고 있을 터.
그렇다고 여유가 있는 건 아니니 빨리 일을 마무리 지어야 했다.
‘그나저나 무슨 놈의 혀가 저렇게 길어?’
은호정의 혀가 긴 게 아니라 교주 놈의 글이 길어서겠지만 내용이 갈수록 지루해졌다.
성전 얘기는 진작에 끝난 상황. 근래에 이룬 치적들을 늘어놨는데 그리 대단한 것도 없었고 설령 그런 게 있다 해도 듣고 싶지 않았다.
한껏 달아올랐던 마인들도 마찬가지였다.
피가 끓어오르는 사안이 아니라 머리를 써야 알아들을 수 있는 얘기가 계속되니 하나둘 하품을 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몇몇은 투덜거렸는데…….
몇 마디 내뱉기도 전에 시체가 되어 쓰러졌다.
은호정이 암기를 던져 이마에 구멍을 낸 것이다.
그는 불쾌한 얼굴로 사자후를 터뜨렸다.
“갈! 분명히 경청하라고 했거늘, 이게 뭐 하는 짓이냐?”
무공이 약한 마인들은 귀를 두 손으로 막으며 괴로워했다.
나름 싸울 줄 아는 자들은 이를 악물고 들끓는 기혈을 가라앉혔다.
그리고 제대로 된 고수들은 억지로 분노를 삭였다.
죄를 지은 자가 있으면 그자만 벌할 것이지 이게 무슨 행패란 말인가?
좌중을 살피던 은호정의 고리눈에 혈광이 어렸다.
“오호라. 이게 누구신가. 교주께서 중히 쓰시겠다고 불러도 병을 핑계로 오지 않던 놈들이 때마침 쥐새끼들처럼 모여 있었구나.”
모두 의아한 얼굴로 두리번거리는데 은호정이 손을 들어 한 노인을 지목했다.
“양정! 네놈 무리를 말하는 것이다! 입이 있으면 반박해 봐라!”
노인이 참지 못하고 대꾸했다.
“오랫동안 요양하다가 이제야 조금 나아져서 구경 나왔을 뿐이오! 왜 우리에게 누명을 씌우는 것이오?”
은호정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천하에 핑계 없는 무덤은 없지.”
“억울하오!”
“마침 잘됐군. 교주님의 위대한 힘을 제대로 선보일 수 있게 됐어.”
노인 무리는 저도 모르게 도올대를 주시했다.
허나 은호정이 말한 교주의 힘은 그들이 아니었다.
“칠살(七殺), 이십삼살(二十三殺). 저놈들을 쳐라!”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의 좌우에 시립해 있던 방립인들이 신형을 날렸다.
노인과 고수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죽여!”
즉시 병기를 빼 들고 방립인들을 공격했다.
다양한 병기가 날아가 육신을 난자하려는 그때!
방립인들이 두 손을 휘둘렀다.
그 간단한 손짓에 병기들이 부러져 튕겨 나갔다.
고수들의 머리가 박살 나고 심장이 뽑혔다.
일체의 망설임도 없는 잔혹한 손속과 가공할 무위!
“괴, 괴물…… 끄아악!”
순식간에 싸움이 끝났다.
방립인들은 손에 묻은 뇌수를 혀로 핥았다. 쥐고 있던 심장을 씹어 피를 삼켰다.
주변에 있던 마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아악! 비켜! 비키라고!”
“당장 피해야 해! 어서!”
멀리 있던 자들도 경악한 얼굴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뭐, 뭐야 저건? 어떻게 저렇게 강하지?”
“사람이 아니라 괴물이다! 어디서 저런 놈들이!”
은호정은 공황 상태에 빠진 군중을 둘러보며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교주님께서 마령강시(魔靈僵屍) 제조법을 복원하시고 죽은 이들에게 숨결을 불어넣으셨다! 여기 있는 칠살과 이십삼살은 그들 중 일부일 뿐이야! 교주님의 능력은 이렇게 하늘과도 같으니 교우들은 그 위대한 힘을 똑바로 깨닫고 무궁한 충성을 바쳐라!”
마인들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두려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마령강시들을 힐끔거렸다.
마령강시들은 아직도 심장을 씹어 피를 마시고 있었다.
겉으로 유일하게 드러난 그들의 푸르딩딩한 손은 피를 마시면 마실수록 혈색이 돌아 보통 사람의 것과 같아졌다.
이 무슨 끔찍한 일이며 놀라운 기사란 말인가.
자연히 사방이 쥐죽은 듯 조용해질 수밖에.
은호정이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리는데.
까앙! 깡-
대장원에서 흘러나온 망치질 소리가 침묵을 깼다.
은호정은 눈살을 찌푸리며 아까 대장원에서 함께 나왔던 한 노인에게 항의했다.
“가주. 지금 꼭 저래야 하겠는가?”
비무대 밑에 있던 이녕임가 가주가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아버님께선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이 시간엔 저래 오셨소이다. 광명좌사자께서도 익히 알고 계신 사실 아니오?”
“끄응. 그래도 그렇지. 융통성 없기는. 쯧쯧.”
은호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비무대에서 내려갔다.
“내 할 일은 다 끝났으니 가주의 일을 하시게.”
“알겠소.”
“칠살, 이십삼살. 가자!”
은호정은 마령강시들과 함께 대장원 안으로 들어갔다.
도올대는 한쪽에 마련된 천막으로 가 앉은 뒤 비무대를 주시했다.
이녕임가 가주는 홀로 비무대에 올라 사람들에게 외쳤다.
“지금부터 멸혼생사투 최종 예선을 시작하겠소! 모두 출전자들의 무운을 빌어주시오!”
은호정과 완전히 다른 짧고 굵은 축사!
마령강시 때문에 두려움에 젖어 있던 마인들이 정신을 차리고 환호성을 질렀다.
“와아아아!”
“그래! 이걸 구경하러 왔는데 즐겨야지!”
“싸워라! 죽이고 죽여!”
“이보게, 전주들! 빨리 판을 벌이지 않고 뭐 하는 겐가!”
장내가 시끌벅적해지며 활기가 돌았다.
정광은 이녕임가 대장원을 노려보다가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현로 상태의 귀곡자가 너무 두려워서 바지에 오줌을 지리고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었다.
“흐으으. 무서워. 너무 무서워서 바지가 축축해졌어.”
나민이 그를 달랬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가 있지 않습니까? 혹시 몰라 옷을 가져왔으니 갈아입으시지요.”
“고마워. 나민은 착해. 아주 착해.”
“아악! 제 앞에서 그러시면 어떡합니까! 당장 입으세요!”
“히끅! 나민은 무서워! 아까 강시들보다 무서워!”
정광은 한숨을 쉬고 다른 쪽을 봤다.
섬랑이 두 손을 매만지며 투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그 모습이 제법 귀여워 머리를 대충 쓰다듬었다.
“녀석.”
“네? 갑자기 왜 그러세요?”
“다른 꼬마들은 도올대를 구경하느라 정신없는데 너는 싸울 생각만 하고 있어서.”
아닌 게 아니라 멸혼생사투에 출전한 아이들은 몽롱한 눈으로 도올대룰 주시하고 있었다.
섬랑은 녀석들의 표정을 훑어보고 코웃음 쳤다.
“흥. 도올대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목표가 딱 저기까지인 놈들과 저를 비교하지 마세요.”
“네 목표는 누군데?”
“당연히 대인이죠.”
“불가능하다고 말하지 않았었나?”
“아 진짜. 될 때까지 해볼 거니까 기죽이지 마세요.”
섬랑은 정광에게 쏘아붙인 뒤 인상을 찡그렸다.
“그나저나 시끄러워 죽겠네. 망치질 못해서 죽은 귀신이 붙었나, 곧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데 뭐 하는 짓이야?”
대장원에서 망치질 소리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소음이 거슬리는 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별수 있나.
광명좌사자 은호정도 포기한 판에 누가 가서 따지겠는가?
그 소리를 누르기 위해서 그런 것인지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특히 독두(禿頭)를 비롯한 전주들이 열심이었다.
“자! 자! 첫 번째 생사투가 곧 시작될 것이오! 늦기 전에 어서 돈을 거시오!”
“본선에선 조용히 구경만 해야 하는데 지금도 그러면 어떡하오? 무인이라면 당당하게 일확천금을 노리고 승부를 걸어야지!”
도박꾼들이 달아올랐다.
“전주들 말이 맞아! 평생 경험해 보지 못할 큰 판이야!”
“좋아!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달려보자고!”
판돈이 쌓이고 생사투가 시작됐다.
하나의 생명이 사그라들 때마다 웃고 우는 이가 나왔다.
물론 정광은 계속 웃었다.
따고 따고 또 따며 도박꾼들의 찬탄을 한몸에 받았다.
섬랑도 자기 몫을 했다.
다소 고전은 했으나 단 한 수로 역전해 도박꾼들을 열광시켰다.
한층 수준이 높아진 최종 예선에서 나민의 도움 없이 거둔 값진 승리였다.
“으하하! 역시 섬랑이라니까! 정말 멋진 비열한 수법이군!”
“어떻게든 이길 게 뻔해서 배당률은 엉망진창이지만 정이 붙어서 그런지 흐뭇하네그려!”
제자에게 쏟아지던 칭찬이 사부에게로 이어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다 진혼이 잘 가르쳐서지.”
“암. 그렇고말고.”
“아! 자네 혹시 그 소문 들었나?”
“무엇 말인가?”
“진혼의 도(刀) 말일세. 귀신이 잠들어 있는 명도라고 하더군. 임가가 만든 것들 중에서 저것보다 나은 게 없을 거란 소문이 파다해.”
“뭐? 그렇게 뛰어난 도라고?”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녕임가의 작품들보다 뛰어날 거라니!
그 정도면 명도가 아니라 신도(神刀) 아닌가!
마인들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정광의 허리춤에 꽂혀 있는 도를 노려봤다.
생사투를 주관하는 임가 무인들도 그랬다.
다른 점이 있다면 욕심에 가득 찬 얼굴이 아니라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
정광은 임가 사람들과 시선을 마주치다가 빙긋 웃으며 도를 쓰다듬었다.
“에이. 그 정도까지는 아닌데. 그냥 살짝 뛰어난 정도?”
“……!”
임가 무인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심지어 표정 변화가 거의 없던 가주도 눈살을 찌푸렸다.
정광은 소문을 잘 퍼뜨린 민현유를 전음으로 칭찬했다.
-임가에서 관심을 가지게 하라고 했는데 살의를 품었네. 소문도 정도껏 내야지. 너무 과하잖아.
-그래도 모자란 것보단 낫지 않습니까?
-그렇긴 한데. 어째 나를 물 먹이려고 이런 건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드네.
-기분 탓이시겠지요. 말씀드렸던 것처럼 오늘 중으로 태상가주 귀에도 들어갈 겁니다. 이제 어떡하실 생각입니까?
어떡하긴.
향리객잔으로 돌아가 네 녀석부터 손봐줘야지.
정광은 마음을 굳히고 딴소리를 했다.
-낚싯대를 드리웠으니 입질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지.
-안 오거나 너무 늦게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를 상정한 대책도 있으십니까?
있다마다.
정광은 고개를 좌우로 꺾으며 중얼거렸다.
“뺨에 직접 낚싯바늘을 꿰어주고 들어 올리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