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ighteous Demon of Kunlun RAW novel - Chapter 447
2부 179화
철모(鐵母)
-콩이 들어가는 요리는 전부 빼고 고기 위주로 준비하라고 해. 이해했지?
-…….
정광의 전음에 단영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 내용이 문제여서였다.
지존이 명을 내렸으니 목숨을 걸고 완수해야 마땅하지만 그런 걸 요구하라니.
객(客)이 됐으면 주(主)가 주는 대로 먹어야지,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허나 단영은 정광이 인정할 만큼 유능한 인재였기에 반박하지 않았다.
그래 봐야 ‘말이 되는 소리니까 했지’ 하며 두들겨 팰 게 뻔한데 뭐 하러 고난을 자초할까.
-네, 지존. 맡겨주십시오.
-응. 수고.
단영은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보다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머릿속에서 수많은 것들이 떠올라 일목요연하게 정리됐다.
지금껏 이녕임가에서 먹은 요리들의 목록이었다.
‘콩은 거의 없었고 고기 위주였기는 한데…….’
오늘 저녁에도 그럴 것이란 보장이 있나.
어떻게든 손을 써봐야 했다.
단영의 반듯한 이마에 깊은 주름이 패었다.
‘칠대가문의 가주에게 청할 만한 사안이 아닌 데다 사업에 참여해 달라고 부탁하는 입장에서 요구할 수 있는 일도 아니야.’
그렇다면?
이녕임가의 요리를 책임지는 자를 구슬릴 수밖에.
‘주방에 가보면 누군지 알 수 있겠지.’
한가하게 생사투 따위를 관람할 때가 아니었다.
마음을 정하는 사이 첫 번째 생사투가 끝나고 도박꾼들의 함성과 절규가 귀를 때렸다.
“이야아아! 땄다! 땄다고!”
“빌어먹을! 야 이 멍청한 새끼야! 누가 그렇게 맥없이 죽으래! 이 어르신께서 얼마를 걸었는데!”
돈을 딴 이들은 낄낄대며 웃고 잃은 자들은 분노를 표출했다.
자연히 충돌이 일어났고 장내는 더 소란스러워졌다.
절로 눈살이 찌푸려질 상황이었는데 어제처럼 대장원에서 망치질 소리가 들려왔다.
태상가주가 내는 소리였다.
“이거야 원.”
내내 불쾌한 얼굴로 앉아 있던 광명좌사자 은호정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너무 시끄러워서 골이 울리는군. 그만 들어가겠네.”
이녕임가 가주 임종호는 담담히 받아들였다.
“알겠소이다.”
은호정은 지체 없이 마령강시들을 데리고 떠났다.
단영도 임종호에게 다가가 양해를 구했다.
“가주, 저도 그만 가보겠습니다.”
“자네도 머리가 아픈가?”
“아닙니다. 저녁에 논의할 사안을 한 번 더 점검해 보려고 그럽니다.”
임종호는 단영을 물끄러미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부친과 조부께선 아무 걱정이 없으시겠군.”
“과찬이십니다.”
“그럼 이따 보세나. 기대하고 있겠네.”
“네, 가주.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단영은 식솔들을 이끌고 장원 정문으로 향했다.
몇 걸음 떼지도 않았는데 근처에 있는 천막에서 건장한 중늙은이가 몸을 일으키는 모습이 보였다.
은호정과 함께 총단에서 내려온 도올대(檮杌隊)의 책임자였다.
‘저자가 왜?’
중늙은이는 뚜벅뚜벅 걸어가 정광 앞에 우뚝 섰다.
그리고 삭막한 눈으로 정광을 내려다봤다.
“부탁 하나만 들어주게.”
그의 목소리는 눈처럼 무척 건조했다.
반면 정광은 맑은 눈과 음성으로 대응했다.
“뭔데요?”
“자네가 이 아이의 보호자라고 들었네.”
“섬랑요? 그렇긴 하죠.”
“최종 예선을 통과하면 내게 맡겨주게.”
“그건 곤란한데요.”
중늙은이가 눈을 가늘게 뜨며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도올대에서 일조장직을 맡고 있네. 섬랑에게 나쁜 일은 아니니 다시 생각해 보게나.”
“그런 뜻이 아닌데.”
“무슨 의미인가?”
정광은 어깨를 으쓱하고 뒤로 빠졌다.
“당사자와 직접 얘기하시죠.”
“그게 편하겠군.”
일조장은 섬랑과 눈을 마주쳤다.
“어제 네가 싸우는 모습을 봤다. 소문보다 훌륭하더구나. 끝까지 살아남으면 본대(本隊)에 들어와라. 장차 부끄럽지 않은 사내가 되도록 키워주마.”
섬랑은 황당한 얼굴로 일조장을 보다가 인상을 찡그렸다.
“지금은 부끄러운 사내라는 뜻인가요?”
“부끄러운 꼬마지.”
“제가 치졸한 수법으로 이겨서요?”
“그렇다.”
“근데 왜 거두려고 하세요?”
일조장은 손가락을 하나 세웠다.
“그 치졸함은 반드시 이기고야 말겠다는 의지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섬랑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요?”
일조장은 빳빳이 세웠던 손가락을 접었다.
“그게 끝이다.”
“네?”
“그거 하나면 충분해. 나머진 내가, 우리가 채워주마.”
사흉대(四凶隊) 중 하나인 도올대는 임전무퇴(臨戰無退)의 정신을 좌우명으로 삼는 조직.
피와 비명으로 얼룩진 전장에서 물러서지 않으려면 적을 반드시 이기려는 열망이 필요했다.
일조장은 섬랑에게서 그 자질을 보았고 이렇게 직접 나서서 권유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섬랑은 단칼에 거절했다.
“싫은데요.”
일조장은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
“이유는?”
“저는 최종 예선을 통과하는 게 목표가 아니거든요. 본선에 출전해서 반드시 우승할 거예요.”
“그건 무리다.”
일조장의 건조한 목소리가 더 갈라졌다.
“자신감은 좋지만 자만심은 독이야. 본대에 들어와서 한 걸음씩 차근차근 올라가라. 네 자질과 노력 여하에 따라 훗날 정점에 오르진 못하더라도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의 자리는 노릴 발판을 얻을 수 있을 게다.”
“저는 정점이 아니면 아무 의미 없거든요. 헛수고하지 마시고 다른 애들을 찔러보세요.”
일조장은 섬랑을 주시하다가 정광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 아이는 곧 죽을 거야.”
“그게 팔자면 어쩔 수 없죠.”
“자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군.”
“그렇기도 하지만 스스로 원하는 쪽으로 밀어줘야죠. 그래야 후회가 없으니까요.”
“…….”
일조장은 뭔가 가만히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말이 옳아. 죽으면 후회할 수도 없지.”
그는 미련 없이 신형을 돌렸다.
“마음이 바뀌면 언제라도 날 찾아오게.”
“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살펴 가세요.”
“함부로 장담하지 말게나. 세상은 그렇게 쉽지 않아.”
일조장은 왔을 때처럼 뚜벅뚜벅 걸어갔다.
섬랑은 정광을 바라보며 어깨를 폈다.
“저 양반, 재수 없는 말을 하는 건 싫은데 보는 눈은 있네요. 낭중지추(囊中之錐)라. 재능을 아무리 숨기려 해도 어쩔 수 없나 봐요.”
“겨우 한 사람의 눈에 들었을 뿐인데 너무 기고만장한 것 아냐?”
섬랑이 으스댔다.
“보통 무력대도 아닌 도올대에서 대주 바로 밑에 있는 조장이잖아요. 그것도 일조장이 데려가려고 하는데 자랑해도 되지 않아요?”
틀린 주장은 아니었다.
그만큼 사흉대의 위상은 대단했다.
정광은 일조장을 흘깃 보고 전생을 떠올렸다.
‘하긴. 저 녀석도 도올대에 차출됐을 때 그렇게 기뻐했지.’
아무리 불리한 상황에서도 후퇴 없이 싸우다가 죽는 조직에 들어가 놓고 그러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아 물었을 때, 녀석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였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 나눴던 대화도 비슷하네.’
그리고 나중에 녀석을 만났을 때.
마지막으로 했던 말을 섬랑에게 똑같이 얘기했다.
“혹시라도 죽기 직전에 후회해서 원한을 품은 귀신이 되어 나를 찾아오면 안 돼.”
섬랑이 발끈했다.
“흥! 아주 아주 오래 살아서 대인이 벽에 똥칠하는 걸 보며 놀려 드리죠. 아악!”
정광은 섬랑의 머리를 가볍게 때리고 등을 떠밀었다.
“네가 싸울 차례야. 일단 오늘만이라도 살아남아 봐.”
* * *
“이야아아아!”
섬랑은 치졸하기 그지없는 수법을 써서 당당히 살아남은 뒤 정광에게 시위했다.
“대인! 보셨죠?”
“응.”
정광은 섬랑의 머리를 대충 쓰다듬으며 축하했다.
“수고했다.”
“진심이세요?”
“물론.”
섬랑이 입술을 삐죽였다.
“저는 계속 이길 거예요.”
“당연히 그래야지. 나처럼 말이야.”
정광은 언제나 그랬듯이 모든 생사투에서 승자를 맞추고 거금을 손에 쥔 상황.
어둑어둑해지는 하늘을 힐끗 보고 일행을 둘러봤다.
“저는 이녕임가로부터 저녁 식사를 초대받았거든요.”
“……!”
“먹고 갈 테니 먼저 가세요.”
“…….”
놀람도 잠시.
일행은 정광의 명에 따라 객잔으로 향했다.
절대적인 믿음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정광도 자기 자신을 믿었다.
이녕임가 가주 임종호에게 다가가 장원 정문을 가리켰다.
“가주님, 가시죠. 제가 모실게요.”
“재밌군.”
두 사람은 나란히 발걸음을 옮겼다.
정문을 통과하자 장원 내부가 드러났다.
온통 금속으로 뒤덮인 기이한 풍경 속에서 수많은 야장들이 불을 태우고 망치를 휘두르고 있었다.
땅- 따앙-
시끄러운 망치 소리와 함께 화로에서 뜨거운 열기가 쉼 없이 피어올랐다.
후우욱-
그 열기들이 하늘로 올라가 붉은 노을을 이루었다.
귀가 따가운 소음과 매캐한 냄새와는 어울리지 않는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여전하네.’
정광이 속으로 혀를 차는데 이런 이상한 가문을 이끄는 임종호가 불쑥 입을 열었다.
“자네의 도, 정말 신도(神刀)인가?”
“나쁘지는 않은데 거기까진 모르겠네요.”
“역시 아닌가 보군.”
임종호는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소문을 듣고 호기심을 느끼고 있었는데 어젯밤에 아버님께서 자네에 대해 말씀하셨네.”
“칭찬하셨어요?”
“주의하라고 하셨으니 칭찬이라 할 수도 있겠지.”
임종호는 큰 전각을 가리켰다.
“저기에서 식사를 할 걸세. 가서 기다리시게.”
“네, 이따 봬요.”
정광은 임종호가 가리킨 전각에 들어갔다.
먼저 와 있던 단영이 굳은 얼굴로 맞이했다.
“지존, 오셨습니까?”
“응. 가주 녀석에게 말은 전했어?”
단영이 부복했다.
“그러지는 못했지만 임무는 완수했습니다.”
“주방 책임자를 구워삶았지?”
“역시 앉아서 천리를 내다보시는군요.”
“뭘 그런 걸 가지고.”
“무척 놀랐습니다. 숙수일 줄 알았는데 태상가주의 부인이었습니다.”
“밖에 안 알려져서 그렇지, 원래 그래.”
“아! 제가 그녀를 만나도록 안배하신 겁니까?”
“응.”
“왜 미리 알려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야 네가 자연스럽게 대할 테니까. 만나보니까 어때? 성깔 있어 보여?”
단영이 어깨를 움츠렸다.
“듣던 것보다 더했습니다.”
“나이를 먹어 유해졌을까 걱정했는데 딱 좋네.”
“그걸 확인하려고 그러신 겁니까?”
“겸사겸사.”
“그녀를 이용하려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정광은 피식 웃었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판인데 그래야지. 네 부탁을 쉽게 들어주진 않았을 텐데 어떻게 설득했어?”
단영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실은…….”
“잠깐.”
“……네?”
“누가 오고 있어.”
정광은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잠시 뒤, 문이 열리고 머리가 하얀 여인이 들어왔다.
날카로운 눈매와 강퍅해 보이는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그녀는 단영을 일별한 뒤 정광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네가 진혼이냐?”
정광은 기억 속의 얼굴과 여인의 얼굴을 대조하다가 미소 지었다.
“그런데요.”
“왜 웃느냐?”
“반가워서요.”
“무슨 말이지?”
“철모(鐵母)시죠? 뵙고 싶었거든요.”
여인의 눈꼬리가 하늘로 치솟았다.
“허튼소리. 입도 고급이라더니 혀도 요사하게 굴리는구나.”
“네?”
“네 입이 그렇게 고급이라 가리는 게 많다고 들었다. 사실이냐?”
사실이긴 한데.
정광은 단영을 노려봤다.
‘대체 얘한테 뭐라고 지껄인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