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ighteous Demon of Kunlun RAW novel - Chapter 464
2부 196화
짧고 굵게
천마신교가 아무리 강자존(强者尊)의 법칙을 기본으로 삼는 마인들의 집합체라 해도 그 본질은 종교 집단이었다.
천신께서 창설하신 멸혼생사투 본선에 출전하기 위해 왔으니, 신전으로 가서 예배를 드리는 게 맞지 않냐고 따지는데 할 말이 있나.
아니, 그래도 그렇지!
마뇌의 명을 받고 진혼을 데리러 온 곽숭은 두 눈을 부릅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저 망종이 신실한 교도라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놈의 일행조차 경악하고 있지 않은가?
곽숭은 눈을 가늘게 뜨고 타박했다.
“어이가 없구나. 핑계를 대려면 좀 그럴듯한 것으로 대라.”
정광이 정색했다.
“누가 감히 천신님을 핑계로 삼아요. 그분이 여기 계셨으면 성화(聖火)로 정화하실 만큼 불경한 말씀을 하시네요. 천신님, 저 불충한 교우(敎友)를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천신이 정말 이곳에 있었으면 정광부터 불태워서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겠지만 안타깝게도 바쁜 일이 너무 많아 없었다.
정광은 덕분에 곽숭을 준엄하게 훈계할 수 있었다.
“교도면 교도답게 항상 천신님을 마음속에 품고 공경하세요. 설마 불신자는 아니시죠?”
“…….”
곽숭은 속으로 탄식했다.
불신자이긴 하나 그렇다고 말할 수야 있나.
비록 세월이 흐르고 흘러 천신에 대한 믿음이 희미해지다 못해 없어지다시피 한 세상이었으나 최소한의 선은 있었다.
천마신교의 수많은 마인들을 하나로 묶는 구심점인 그를 어찌 부정할까.
‘마뇌께서 쉽지 않을 거라고 하시더니 과연. 방심했어.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녀석이야.’
자책도 잠시.
곽숭은 옆으로 비켜서며 두 손을 모았다.
“깨우쳐 줘서 고맙다. 다시 만날 땐 지금과 많이 다를 거다.”
네가 얼마나 간교한 녀석인지 제대로 알게 해줘서 고맙고, 곧 돌아와 네놈을 반드시 끌고 갈 것이라는 의미였다.
정광은 그 뜻을 알아듣고도 다른 소리를 했다.
“이제라도 아셨으니 다행이네요. 다시 뵐 땐 신실한 교도로 거듭나셔 있기를 빌게요.”
“……먼저 가마.”
곽숭이 사라졌다.
정광도 일행을 이끌고 밖으로 향했다.
장내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다가 가문별로 흩어져 전음을 나눴다.
정광은 전각 밖으로 나가자마자 피식 웃었다.
섬랑이 헤벌쭉 웃으며 한 소년과 대치 중이었다.
‘등이 흠뻑 젖은 주제에 허세 부리기는.’
섬랑에게 다가가 등을 찰싹 때렸다.
땀에 절어 있던 옷이 순식간에 뽀송뽀송해졌다.
섬랑이 비명을 지르려다가 겨우 참고 투덜거렸다.
“왜 때려요?”
“그만 가자고.”
“참 빨리 오시네.”
“그런 감이 있긴 하지. 새로 사귄 친구와 더 놀고 싶어?”
섬랑은 물론이오, 손강 역시 눈살을 찌푸렸다.
정광은 두 아이를 번갈아 보며 웃었다.
“하하. 수줍어하기는. 어디 보자. 토로번손가가 쓰는 만도(彎刀)를 허리에 차고 있네. 네가 소가주님의 적자구나.”
손강은 언제 눈살을 찌푸렸냐는 듯 구김살 없는 얼굴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손강이에요.”
“그래, 반갑다. 아버님과 다르게 순하게 생겼네.”
정광은 손을 뻗어 손강의 머리를 대충 쓰다듬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눈엔 독기가 어려 있구나. 네 아버님과 작은 다툼이 있었지만 말끔히 풀고 화해했으니 그렇게 경계 안 해도 돼.”
“……!”
손강의 뺨이 파르르 떨렸다.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씌우고 팔을 자른 것으로도 모자라 차용증을 만들어 염왕채 같은 빚을 지워놓은 놈이 뭐가 어째?
마음 같아선 당장 도를 뽑아 난자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대체 어떻게 내 머리에 손을 댄 거지?’
원수는 손을 빠르게 뻗지 않았다.
빤히 보일 정도로 느린 움직임이었는데 어느새 머리를 쓰다듬으며 개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
“섬랑과 사이좋게 지낼 거라고 믿을게. 멸혼생사투에서 만나면 기권해 줄 만큼.”
머리 위에 있던 원수의 손이 사라졌다.
대신 얼굴이 확대됐다.
그 얼굴에 박힌 두 개의 눈이 소름 끼치는 빛을 뿌렸다.
“그만 간다. 편식하지 말고 잘 있어.”
원수는 섬랑을 데리고 떠났다.
손강은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간신히 진정시켰다.
하지만 원수의 눈이 발했던 빛에 대한 기억은 아무리 애를 써도 떨쳐 낼 수 없었다.
그 빛은 공포, 그 자체였다.
* * *
정광은 아까 전각에 들어갈 때부터 오늘 보고 외운 것들을 계속 반추하고 있는 나민에게 주의를 줬다.
“소저. 그만 생각해요. 머리도 좀 쉬어야죠.”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안색이 하얘졌는데요?”
“다시 손을 잡아주시면…….”
“저도 쉬어야죠.”
나민이 아쉬운 얼굴로 수긍했다.
“진혼의 노고를 미처 생각지 못했군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다음은 섬랑 차례였다.
“인마. 허세를 부릴 거면 적당히 부려야지.”
“무슨 말씀이에요?”
“손강과 대치할 때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도 헤벌쭉거렸잖아. 뭐 하러 그렇게 웃어?”
“그래야 얕보이지 않죠. 그런 미친놈에겐 자신감을 심어주면 안 돼요.”
“걔는 네가 미친놈이라고 생각했을걸.”
섬랑이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으음. 그냥 담담하게 대할걸 그랬나.”
“차라리 그게 낫지. 억지로 웃으면 오히려 겁먹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어.”
“겁이 뭐죠?”
정광은 계속 발걸음을 옮기며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섬랑은 짧은 다리를 열심히 움직이며 사과했다.
“농이에요, 농. 앞으로 그렇게 할게요.”
“겁먹지 마.”
“아 진짜. 그게 뭔지는 알지만 안 먹었어요.”
“너처럼 농을 하는 게 아니야. 솔직히 말해. 그 녀석을 이길 자신이 없었지?”
섬랑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정광은 섬랑의 작은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했다.
“그런데도 그렇게 버텼으니 나쁘지 않아. 제일 중요한 건 마음이야.”
“……실력은 어떡하죠?”
“어떡하긴. 키워야지.”
정광의 손짓에 힘이 들어갔다.
“객잔으로 돌아가면 바로 수련시켜 줄게.”
“윽. 윽. 감사합니다.”
“뭐 그런 걸 가지고. 대신 제대로 해야 해.”
“큭. 크흑. 알겠으니까 그만 좀 때리시죠.”
섬랑은 어깨를 문지르며 울상 짓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신전.”
“네? 거긴 왜요?”
“왜냐니. 신실한 교도답게 신전으로 가서 예배를 드려야지.”
“아하. 신실한…… 네?”
“어쭈. 표정 봐라. 이상하게 기분 나쁘네.”
“…….”
섬랑은 입을 떡 벌린 채 아무 말도 못 하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물었다.
“지금 들으셨죠? 신실한…… 꿀꺽. 그거요.”
“…….”
나민, 자오, 단영, 관엽, 네 사람 모두 주변 풍경을 둘러보며 딴청을 피웠다.
섬랑은 자신이 제대로 들었다는 걸 확인하고 황당해하다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후우우. 나도 참 멀었네. 고작 이 정도에 놀라다니.”
대인 자체가 불가사의한 존재인데 뭐 이런 걸 가지고.
섬랑은 마음을 다잡고 힘차게 말했다.
“잘됐네요. 이번 기회에 신전 구경이나 해보죠.”
기대가 크면 실망도 커지는 법.
섬랑은 신전을 쳐다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하. 하. 고풍스러운 멋이 물씬 풍기네.”
최대한 긍정적으로 표현한 게 이거였다.
규모도 꽤 크고 비싼 대리석으로 지어져 있었지만, 색이 바래서 흐릿한 데다 곳곳에 금이 가 있는 모습이라니.
천신이 지금 나를 무시하는 거냐며 길길이 날뛰고도 남을 만큼 볼품없지 않은가?
섬랑은 결국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이게 뭐야. 관리라도 좀 잘하지.”
정광의 감상은 달랐다.
‘열심히 관리했네.’
이십여 년 만에 다시 본 신전은 예전 모습 그대로 서 있었다.
‘내부는 어떨까.’
정광이 대문으로 다가가자 길고 품이 넓은 신관(神官) 복장을 한 사내가 조심스레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교우님. 무슨 일로 방문하셨습니까?”
“천신께 예배를 드리려고요.”
“천신께서 많이 기뻐하실 겁니다. 처음 뵙는 것 같은데 어디서 오신 뉘신지요?”
“쿠차에서 온 진혼요.”
신관의 눈이 살짝 커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귀한 시간을 내서 와주신 교우께 결례를 범해 죄송합니다. 정해진 절차가 그러니 이해해 주십시오. 다른 분들은 일행이십니까?”
“네. 전부 들어가도 되죠?”
“신전의 문은 항상 모든 교우들에게 열려 있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정광 일행은 신관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갔다.
섬랑은 내부를 훑어보다가 더 실망한 표정을 지었으나 정광은 전생의 기억과 비교하며 내심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쁘지 않아. 거의 그대로야.’
사치를 부리지도 않고 게으름을 피우지도 않았다는 증거였다.
정광은 신관을 따라 걸으며 입을 열었다.
“저기요, 신관님.”
“네, 교우님. 말씀하십시오.”
“생각보다 조용하네요. 예배를 드리러 오시는 분들이 별로 없으신가 봐요.”
신관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편이긴 한데 날이 추워서 더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럼 신전 살림도 무척 빡빡하겠네요.”
“저희야 먹고 입고 잘 수만 있으면 되니 큰 문제는 아닙니다만. 형편이 어려운 이들을 많이 돕지 못해 걱정입니다.”
신관이 걸음을 멈추고 한쪽을 가리켰다.
“여기가 예배실(禮拜室)입니다. 들어가시지요.”
소박한 걸 넘어 아무것도 없는 거대한 방이었다.
정광은 일행을 재촉해 예배실에 몰아넣었다.
“뭐 하세요? 어서 예배드려야죠. 진실한 마음으로 오랫동안 하셔야 해요.”
사람들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들어가 바닥에 엎드렸다.
그리고 서로 다른 생각을 했다.
‘정말 오랜만이구나. 지존께 구타당하고 너무 억울해서 하소연하려고 들렀던 게 마지막이었나?’
‘천신이시여. 당신의 종 나민이 왔습니다. 부디 저를 가엽게 여기시고 무궁한 능력을 내려주십…….’
‘으음. 예배를 어떻게 드리는 건지 모르겠군.’
‘헉! 왜 이렇게 차가워? 망할. 내부 바닥까지 쓸데없이 대리석으로 깔아놨네.’
‘단주 덕분에 진귀한 경험을 하는구나. 천마신교 신전에서 천신에게 예배를 하는 날이 올 줄이야. 얘깃거리가 많아졌어.’
정광도 예배실로 들어가 딱 한 번 절한 뒤 신관에게 돌아왔다.
“저는 다 드렸으니 신전 구경 좀 시켜주세요.”
“……!”
바닥에 엎드려 있던 사람들이 머리를 번쩍 쳐들었다.
정광은 못 본 척하며 신관에게 설명했다.
“저분들은 믿음이 약해서 오래 하셔야 하지만 저는 워낙 신실한 교도라 짧고 굵게 끝냈네요. 어서 가시죠.”
신관은 당황한 눈으로 사람들과 정광을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겠습니다. 이쪽으로 가시지요.”
신전은 볼만한 곳이 전혀 없었다.
예배실도 저 모양인데 다른 곳은 오죽할까.
하지만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기에 상관없었다.
“신관님, 저 아시죠?”
“근래 들어 그 누구보다 악명…… 명성을 떨치시는 진혼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향리객잔을 통해 서찰을 받고 왔어요. 총단에 오면 바로 와달라고 하셨는데 일이 있어서 조금 늦었네요.”
“이렇게 와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무척 기뻐하실 겁니다.”
“글쎄요. 정말 그럴까요?”
“네? 무슨 말씀입니까?”
“별것 아니에요. 해가 짧으니 빨리 가죠.”
신관은 정광을 신전에서 제일 비밀스럽고 중요한 곳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문을 살짝 두드렸다.
“진혼 교우가 왔습니다.”
안에선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신관은 개의치 않고 정광에게 손짓했다.
“이제 들어가시면 됩니다.”
“고마워요. 수고하세요.”
정광은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집기라곤 탁자 하나와 의자 몇 개뿐인 큰 방.
홀로 무릎을 꿇은 채 기괴한 벽화를 올려다보고 있던 여인이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신형을 돌려 정광과 눈을 맞췄다.
“드디어 오셨군요. 신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제가 바로 서신을 보냈던 성녀(聖女)입니다.”
“…….”
“바쁘신 분께 무리한 부탁을 드려 죄송합니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서 그런 것이니 이해해 주십시오.”
“…….”
여인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아직도 노여움이 풀리지 않으신 겁니까?”
“…….”
정광은 묵묵히 여인을 바라봤다.
여인의 아름다운 얼굴에 다른 사람의 얼굴이 겹쳐졌다.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