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ighteous Demon of Kunlun RAW novel - Chapter 554
암흑대공전기(暗黑大公傳奇) 10화
시도
“공작님. 왜 혼자 음흉하게 웃으세요? 뭔지 알려주시고 같이 웃죠.”
“……!”
바텐베르크는 미소를 지으려다가 얼어붙은 채로 정광을 노려본 뒤 떠났다.
정광은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씩 웃었다.
‘손에 피를 꽤 묻혀본 놈이야. 속도 음흉하고.’
바텐베르크가 등에 메고 있는 화려한 장검도 재밌었다.
마검(魔劍) 블루우트 프라센다 데이몬이라 했던가.
이름은 영 아니지만 검집 속에 얌전히 앉아 비릿한 피 냄새를 풍기는 귀여운 검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녀석과 은근히 닮았네. 잘 어울리겠어.’
정광이 누군가를 떠올리는데 에스텔이 투덜거렸다.
“거봐. 내 말이 맞잖아. 황제가 엉망이니 공작씩이나 되는 늙은이도 저 모양이지.”
“공작님이 마음에 안 들죠?”
에스텔이 인상을 썼다.
“그걸 말이라고. 처음에 오면서 나를 잽싸게 훑어본 거 몰라? 얼마나 소름이 돋던지. 그러고는 또 안 보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역겨워 죽는 줄 알았네.”
“고생하셨어요. 자오는 괜찮아요?”
에스텔을 안쓰럽게 보고 있던 자오가 의아해했다.
“네? 뭐가 말입니까?”
“공작님이 대놓고 좋게 보시던데요. 못 느끼셨나 봐요.”
자오의 얼굴이 시꺼멓게 죽었다.
“저, 정말입니까? 저, 저는 그런 쪽은 별로, 아니, 전혀…….”
“그건 차차 고민해 보시고 그만 가죠. 지금쯤이면 식사 준비가 끝났을 거예요.”
그들은 밥을 먹고 천막에서 빈둥거렸다. 딱히 할 일이 없어서였다.
신분이 높은 자들은 합동 전략 회의에 참석해 머리를 맞대고, 낮은 이들은 저마다의 임무를 수행하며 구슬땀을 흘렸지만 정광 일행에게는 아무런 일도 주어지지 않았다.
물론 정광은 이 상황이 마음에 들었다.
자고로 사람이란 남이 시키는 일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걸 해야 즐겁지 않은가.
“우리도 열심히 먹고 자죠.”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정광은 아침을 먹고 침상에 늘어져 있다가 갑자기 일어났다.
“깜짝이야. 왜 그래?”
자오를 혼내며 공용어를 가르치고 있던 에스텔이 화들짝 놀라 묻는 말에 정광이 밖을 가리켰다.
“저쪽에서 마나가 뒤틀리고 있어요.”
“헉! 치, 침묵의 산 방향이잖아. 설마 드래곤이 깨어나는 건가?”
“그렇다면 실망이죠. 대단한 양의 마나도 아닌데. 직접 가서 보죠.”
그들은 천막 밖으로 나가 산 쪽으로 향했다.
얼마 가지 않아 누가 마나를 움직이고 있는지 알게 됐다.
침묵의 산 바로 아래에서 눈처럼 하얀 로브를 입은 사람들이 휜펠 제국의 기사들과 병사들의 도움을 받아 지형지물을 바꾸고 뭔가를 설치하는 한편 땅바닥에 복잡한 도형들을 그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 모습을 본 에스텔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우우. 다행이다. 마법진을 그리는 거였어.”
“저걸로 결계 마법에 틈을 내려나 봐요.”
“그렇겠지. 완성하려면 며칠 걸릴걸. 못 본 척하고 돌아가자. 마법사들은 속이 좁아서 마법을 쓰는 모습을 남이 보는 걸 싫어해.”
“다행이네요. 우린 남이 아니라 어엿한 동료니까.”
정광은 아예 훌쩍 뛰어올라 높다란 나무의 가지에 앉았다.
마법진이 한눈에 들어오는 좋은 자리였다.
에스텔은 입을 살짝 벌리고 정광을 올려다보다가 목소리를 낮춰 채근했다.
“빨리 내려와. 아, 어서. 미치겠네, 자오는 또 언제 올라간 거예요?”
“에스텔도 오세요. 여기가 더 잘 보여요.”
“그래서 더 문제라고. 마법사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아?”
“당연하죠.”
“왜 이럴 때만 긍정적이야? 네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저들은…….”
에스텔은 마법사들을 곁눈질하다가 말끝을 흐렸다.
마법사들은 정광을 보며 잠시 수군수군하더니 하던 일을 다시 하고 있었다.
“……뭐지? 이럴 리가 없는데.”
당황한 에스텔에게 정광이 설명했다.
“높은 분이 합동 전략 회의에서 우리가 뭘 하든 간에 신경을 쓰지도, 마찰을 일으키지도 말라고 강조하셨데요.”
“아! 네가 사고를 칠까 봐 국왕이 조처했구나.”
“아뇨. 다른 분이에요.”
“누구?”
정광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입을 열었다.
“대륙 제일의 기사이자 마검 블루우트 프라센다 데이몬의 주인이며 드래곤 정벌군의 총사령관인…….”
“그만. 충분히 알아들었어.”
에스텔은 익숙한 솜씨로 나무를 기어오른 뒤 정광 옆에 앉아 눈살을 찌푸렸다.
“그 징그러운 늙은이가 왜 그런 명령을 내렸을까?”
“문화가 판이한 곳 출신이라 여기 예절을 모르니 넓은 마음으로 양해해 줘야 한다고 말했데요.”
“네가 했던 말을 그대로 써먹은 거잖아.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감도 안 잡히네.”
“그야 당연히 에스텔과 자오에게 환심을 사려고…… 취소. 없던 말로 해요.”
정광은 자신을 쏘아보는 두 쌍의 눈을 슬며시 외면하고 마법진을 구경했다.
한동안 마법사들이 하는 짓을 보고 있자니 감이 왔다.
‘머릿속에 담기엔 너무 복잡하고 방대한 수식이고, 그에 따라 마나의 성질을 변형시키고 펼쳐내기도 힘들뿐더러 필요한 종류와 양도 많아 저러는 거구나.’
활로 예로 들면 매의 눈과 야수 같은 감각, 신궁의 기술과 무지막지한 힘이 있어야 다룰 수 있는 정광의 비룡(飛龍)을 열 살 먹은 아이들이 힘을 합쳐 활시위에 화살을 메기고 끝까지 잡아당긴 후 조준까지 마쳐놓고 쏠 순간을 기다리려는 것이었다.
‘발상도 좋고 신기하긴 한데…….’
딱 거기까지.
기대가 너무 컸었는지 시간이 지날수록 별로였다.
“점점 지루해지네요. 그만 가죠.”
정광의 시큰둥한 말에 마나를 탐구하는 길을 걷는 한 사람으로서 열심히 지켜보고 있던 에스텔이 황당해했다.
“저게 지루해? 왜? 이런 기회가 또 어디 있다고.”
“보면 다 아세요?”
“그게 되면 총사령관 늙은이가 명령했다고 마법사들이 들었겠냐. 군법에 따라 벌을 받더라도 우리를 쫓아냈지.”
에스텔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마법이라는 학문은 바다처럼 넓고 거기에서 갈라져 나온 학파는 수도 없이 많아. 그런데 그들 하나하나가 무척 폐쇄적이야. 그런데 지금 봐봐. 보이지? 바로 눈앞에 있잖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으면 뭐 어때. 내가 배를 타고 가던 하천과 다른 하천이 있고 그 길이 어떤 형식이며 무엇이 다른지 보는 것만 해도 큰 도움이 된다고.”
“아, 맞다. 외톨이셨지.”
“……그래, 지금은 그런 말을 들어도 좋아. 그러니까 조금만 더 참고 여기 있자, 알았지?”
마치 애를 달래는 것처럼 사근사근 말하던 에스텔은 정광의 대답을 듣고 폭발했다.
“제 눈엔 영 아닌데.”
“왜! 왜?”
“준비해야 할 게 한둘이 아니고 사람도 많이 필요한 데다가 시간까지 오래 걸리잖아요.”
“그래, 그런 치명적인 단점이 있지. 그럼 중간 과정이 귀찮으니 드래곤처럼 용언마법을 쓰면 되겠네.”
“안 그래도 만나면 어떻게 쓰는 건지 물어보려고요.”
“……드래곤이 참 좋아하겠다.”
“네. 저 같은 인재는 없죠.”
“……브레스에 녹아내리면서 남길 유언이 그거구나.”
에스텔이 정광의 양팔을 꽉 잡고 으르렁거렸다.
“똑똑히 들어. 바보짓 하다가 개죽음당하면 절대로, 영원히 용서하지 않을 거야.”
“괜한 걱정을 하시네요. 제가 에스텔보다 오래 살 거니까 안심하셔도 돼요.”
“……내가 졌다. 브레스에 녹든지 발에 밟혀 가루가 되든지 네 마음대로 해.”
에스텔이 정광의 팔을 놓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데 자오가 정광에게 전음을 보냈다.
-단주, 따로 말씀을 안 하셔서 그러려니 했는데 점점 대담해지고 있습니다. 어떡할까요?
에스텔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아까부터 기이한 수법으로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누군가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심심해졌는데 마침 잘됐죠. 제가 가서 처리할 테니 에스텔과 함께 있으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정광은 바로 신형을 날렸다.
뒤에서 에스텔이 ‘야! 그렇다고 너 혼자 가버리냐!’ 하며 화냈지만 정광은 이미 그녀의 시야에서 벗어나 침묵의 산 반대편에 있는 작은 숲으로 향하고 있었다.
‘저기네.’
둘러볼 것도 없었다.
정광은 숲에 들어가자마자 죽어서 썩어가는 가느다란 고목을 한 손으로 움켜쥐었다.
“실례지만 누구시죠?”
고목이 기침을 토하며 낡은 로브를 걸친 노인으로 변했다.
“쿨럭. 쿨럭. 궁정 마법사 브, 블랑샤르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끄으으. 나, 나 역시 그렇다. 어떻게 알았느냐?”
“바로 옆에서 그렇게 빤히 보시는데 어떻게 몰라요.”
노인의 눈이 살짝 풀렸다.
“끄르륵. 역시 내 마나의 눈을 느꼈구나. 악의는 없었다.”
“알아요. 있었으면 이렇게 안 끝났죠.”
정광은 손을 풀고 노인을 살펴봤다.
“로브 색깔이 다르네요. 마법진을 그리는 분들은 흰색이고 어르신은 회색.”
노인은 주름이 자글자글한 목을 쓰다듬으며 숨을 거칠게 몰아쉬다가 몇 개 남지 않은 이를 활짝 드러내며 웃었다.
“흘흘흘. 그자들은 휜펠, 나는 프로부뉴 사람이니 다른 것이다. 오해는 하지 말아라. 전하께서 보내신 게 아니라 순수한 호기심 때문에 그런 게다.”
“일부러 점점 더 티를 내시던데. 왜 부르신 거죠?”
“주책인 것 같아 참으려 했는데 도저히 그럴 수가 없더구나.”
지금 마법진을 그리고 있는 휜펠 제국 마법사들은 기초 작업 중이라 수뇌부가 빠진 상태였다.
그래도 아무 데서나 볼 수 없는 광경이거늘, 한동안 지켜보다가 지루하다는 둥 영 아니라는 둥 폄하하는 사람이 있다니, 직업 특성상 호기심이 많을 수밖에 없는 마법사가 그 이유를 궁금해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네가 본 마법진은 아주 훌륭한 것이다. 아국의 마법사들은 그것을 능가할 만한 것이 없기에 밀려나야 했어. 헌데 네 성에는 안 찼지.”
“무시한 게 아니라 취향 차이예요. 제가 좋아하는 건…….”
정광의 왼손바닥에는 불이, 오른손바닥에는 얼음이 생겼다.
“이런 실용적인 것들이에요. 재액업화장(災厄業火掌)이니 명부한빙장(冥府寒氷掌)이니 하는 잡기들보다 우아하게 펼쳐서 사시사철 쾌적한 생활을 즐길 수 있죠.”
“……!”
노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생전 처음 듣는 장법들 때문이 아니었다.
“주, 주문도 외우지 않고! 요, 용언마법?”
“아뇨. 주문을 외우며 수식을 되새겨야 할 만큼 복잡한 마법이 아니잖아요. 그냥 머릿속으로만 생각하며 마나를 다루면 되죠.”
“허. 허어어. 기초적인 마법이긴 해도 그렇게 간단히 하는 건 말도 안 되지. 그런 마법사는 내 평생 본 적이 없다. 스승이 누구시냐?”
“에스텔이 하는 걸 구경하며 익혔죠.”
“으음. 마녀라는 그 아이가 스승이었구나. 사이가 그리 안 좋은 것 같던데. 잠깐, 어깨너머로? 그건 불가능하다!”
“가능해요. 마나가 어떻게 변하고 어디로 움직이는지 보면 되잖아요.”
노인이 멍하니 있다가 소리쳤다.
“그래, 네가 증거지! 대단하구나! 정말 대단해! 이걸 안 믿을 수도 없고.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주 재밌어졌어.”
진물이 흐르는 노인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네가 아까 했던 얘기도 그렇다. 드래곤에게 용언마법을 쓰는 방법을 물어보겠다니, 세상의 누가 또 그런 생각을 할까. 그러다가 죽어도 그건 절대 개죽음이 아니야.”
“죽으면 개죽음 맞는데요.”
“어쨌든. 네가 드래곤에게 용언마법의 비결을 묻고 만에 하나라도 알아내면 이 세상은 마법을 보존할 수 있을지도 몰라.”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힘까지 강해지고 있었다. 언젠간 몬스터들을 멸종시키고 이 땅의 유일한 지배자로 군림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모든 것엔 끝이 있는 법, 인간이라고 영원할 리 있나.
노인이 평생을 바쳐온 마법도 마찬가지였다. 마법은 마나의 선택을 받은 극소수의 사람들 사이에서 폐쇄적으로 전승되는 것, 만약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활발히 교류하며 발전시킬 수 있는 수단이 생긴다면 마법이 사라지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실제로 인간의 기술들이 점점 발달하여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용언마법이라니!
“전하께서도 그렇고 에브뢰 후작도 그렇고, 너는 절대 빈말을 안 한다고 했다. 꼭 성공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배워서 널리 퍼뜨려다오.”
노인이 두 손을 꼭 잡고 간절하게 부탁하는데 정광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어르신이 직접 하시면 되지 왜 저한테 떠넘겨요.”
“……응?”
“죽을 날만 기다리고 계셨다면서요. 실패해도 개죽음이 아니라고 하셨으니 한번 시도해 보시죠.”
* * *
드래곤 정벌군이 계획한 모든 것이 순서대로 착착 진행됐다.
하지만 정광은 여전히 지루했고 답답함을 참지 못해 외부로 돌았다.
“자오, 오늘은 과일이나 따 먹죠.”
“네, 단주. 어느 쪽의 과일들이 잘 익었는지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자오, 오늘은 물고기를 잡아 구워 먹을까요?”
“좋습니다, 단주. 물고기들이 많은 지역을 알아보겠습니다.”
이렇게 정광과 자오가 매일 쏘다니니 에스텔은 심심해졌다.
마법진은 고위 마법사들이 눈치를 줘서 구경하기 힘들어졌고 마뉘엘은 마치 기사로 복귀라도 한 것처럼 친위기사들과 붙어 있으니 심심한 걸 넘어 외로워질 정도.
‘아. 이게 뭐람. 오늘은 멀리 가서 사슴을 사냥해 연한 부위만 진흙에 싸서 구워 먹는댔지. 그거나 먹으러 갈까.’
마음을 굳힌 에스텔은 천막에서 나와 숙영지 밖에 있는 숲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한 중늙은이가 작게 말했다.
“일차 표적들이 드디어 먼 곳으로 나갔고 이차 표적도 따라가는 중이다. 거기다 장소는 숲. 우리의 장기를 완전히 발휘할 수 있는 곳이지. 보는 눈은 없겠지만 주의하고 양쪽 다 생포하되, 이차 표적은 털끝만큼도 상하면 안 된다.”
비수처럼 예리한 느낌을 주는 사내들이 중늙은이에게 일제히 답했다.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