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ighteous Demon of Kunlun RAW novel - Chapter 561
암흑대공전기(暗黑大公傳奇) 17화
믿음
콰콰콰콰콰쾅!
화창한 날씨가 이어지던 어느 날, 정광 일행이 사슴을 잡아 진흙 구이를 해 먹었던 숲에 반듯한 큰 길이 뚫렸다.
[보았느냐?]문트바르의 물음에 정광이 뚱한 얼굴로 대꾸했다.
“물론이죠.”
[결과가 아니라 그 과정을 말한 것이다.]“그건 들었고요. ‘뚫려라’, 딱 한 마디 하셨죠.”
문트바르가 고개를 끄덕이고 정광을 내려다봤다.
[그렇게 하는 것이다.]“오늘도 친절하게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알면 됐다. 이제 봐줄 테니 혼자 해봐라.]정광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비꼰 거였거든요. 이번 것은 전보다 오래 걸릴 것 같으니 댁에 돌아가서 기다리시죠.”
[굳이 그럴 필요 없다.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너의 ‘오래’는 내겐 ‘찰나’다.]이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장구한 세월 동안 존재해 온 그에게 며칠 정도 기다리는 게 대수로울 리 있나.
그것도 괘씸한 미물이 쩔쩔매는 모습을 구경하는 즐거움이 있는 상황인데.
하지만…….
문트바르는 여태껏 경험해 보지 못했던, 신기할 만큼 빠르게 흘러 버린 지난 한 달을 돌이켜 봤다.
‘이 녀석은 대체 뭘까?’
시범을 보일 때마다 투덜대면서도 얼추 흉내는 내는 꼴이라니.
용언(龍言)으로 명령하는 것도 아니고 여느 인간처럼 잡다한 절차를 거쳐 이뤄내는 것도 아니었다.
몸을 써서 싸울 때 그랬듯이 본인을 매개체로 삼아 세상에 가득한 마나를 마법으로 발현했다.
어떤 용언마법을 펼쳐도 신족의 눈으로 마나가 어떻게 변하는지 보고, 인간의 것이라 믿기 힘든 뛰어난 두뇌로 외운 뒤 알맞은 수식을 만들어내고 계산하는 능력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번에도 그러겠지.’
예상대로였다.
며칠 지나지 않아 정광이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우. 대충 됐으니까 보세요. 음…… 뚫려라.”
콰콰콰콰콰쾅!
나무들이 박살 나고 풀들이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문트바르가 냈던 길 바로 옆에 엇비슷한 길이 생겼다.
“어때요? 그럴듯하죠?”
문트바르도 인정했다.
[용언은 아니지만 결과는 비슷하다. 네가 장담했던 대로 그럴싸하게 흉내 냈다.]“그럼 제가 또 이긴 건데 표정이 괜찮으시네요.”
[말 그대로 흉내일 뿐이니까. 이겼다는 너는 얼굴이 왜 그 모양이냐?]그럴 수밖에.
정광이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대답했다.
“말씀하신 대로 제대로 된 게 아니니까요. 용언으로 명하고 이뤄지면 멋진데 입으로만 ‘뚫려라’라니. 초식명을 외치며 검을 휘두르는 자들을 보면 멍청하다고 비웃었었는데 제가 딱 그러고 있네요.”
[그게 인간인 너의 한계다. 저놈보다는 낫지만 같은 종족인 건 어쩔 수 없다.]조금 떨어진 곳에서 비지땀을 흘리며 ‘뚫려라’라는 말을 모깃소리만 한 목소리로 되뇌고 있던 블랑샤르가 화들짝했다.
“위, 위대한 드래곤이시여. 조,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시면…….”
[나는 공평하다.] [[구겨라.]]우드드득-
명필가가 글이 마음에 안 들어 구겨버린 종이처럼 변해 버린 블랑샤르가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끄아아아아악! 저, 정광! 제발 한 번만 더 살려주게나!”
“그럼 뭐 해주실 건데요?”
“이, 이젠 없네! 자네에게 다 줘서 빈털터리야! 끄으윽. 외, 외상으로 부탁하네!”
“그건 곤란한데요. 에이, 기분이다. 생판 모르는 사이도 아니니 문서로 남기죠.”
정광은 블랑샤르의 옷을 찢어 그의 몸에서 흐르는 피로 글을 쓴 뒤 손도장까지 찍고 나서야 자연지기로 치료해 줬다.
문트바르는 그 광경을 묵묵히 보다가 레어로 향했다.
가다가 잠깐 뒤돌아보니 정광이 머리를 얼싸쥐고 흐느끼는 블랑샤르를 위로하며 또 이런 일이 생길 경우를 대비해 미리 문서를 더 만들어두자고 권유하고 있었다.
‘당장 마계에 떨어져도 적응 기간이 필요 없겠군.’
레어에 도착하자 다른 미물이 신경을 건드렸다.
[넌 또 뭐 하는 짓이냐?]“헉! 버, 벌써 오셨습니까? 낡디낡은 종이 뭉치가 굴러다니길래 치우려고…….”
에스텔은 금은보화 속에 깊숙이 묻혀 있던 서책을 품에 안고 변명하다가 문트바르의 눈에 검은 기운이 어리는 걸 보고 정정했다.
“……사실은 살짝 묻혀 있었는데 걷던 제 발에 차여 튀어나왔고 내친김에 읽어보던 중이었습니다.”
문트바르는 그 서책이 무엇인지 기억 속에서 찾아냈다.
아주 오래전 이곳에 침입했던 도적 떼 중 어설픈 저주와 마법을 남발하던 놈이 죽고 남긴 것이었다.
[그 모자란 꼬마의 쓰레기군.]그의 입장에선 적절한 표현이었으나 인간에겐 아니었다.
“네? 전설적인 대마녀 까뜨린느를 어떻게 모자란 꼬마라고…… 아! 죄송합니다. 드래곤께선 그렇게 보시는 게 당연합니다.”
에스텔은 죽을죄를 지었다는 듯 공손히 사과한 후 은근슬쩍 허락을 구했다.
“이 엄숙한 레어에 이런 쓰레기가 있으면 안 됩니다. 제가 당장 치우겠습니다.”
[내겐 하등의 쓸모가 없으나 네겐 아니지.]문트바르는 마법서를 얼렁뚱땅 꿀꺽하려는 미물을 벌하려다가 아까의 일을 떠올렸다.
[너는 내게 무엇을 줄 수 있느냐?]“…….”
에스텔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드래곤의 흥미를 끌 만한 보물을 지녔으면 세상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되어 떵떵거리고 살고 있지, 여기까지 흘러와서 드래곤의 눈치나 보고 있겠는가?
하지만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있나, 머리를 짜내고 또 짜내다가 간신히 한 가지를 떠올렸다.
“지금은 없으니 시간을 주십시오. 일전에 언젠간 반드시 홀로 걸을 거라 말씀드렸었습니다. 이 마법서를 제게 내려주시면 예상하신 것보다 더 빨리, 더욱더 당당하게 걷는 모습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현재가 아니라 미래인 데다, 네가 그 포부를 밝혔을 때 내가 시시하다고 말한 걸 잊었나 보군.]“드래곤이시여! 제발…….”
[나는 관대하다. 허락하마.]“꺄아아악!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렇게 기뻐할 필요 없다. 조건이 있다.]“무엇이든 명하십시오! 어떤 일이 있어도 따르겠습니다!”
에스텔은 드래곤의 대답을 듣고 자신의 입을 저주했다.
[마법과 저주를 쓰는 모든 미물들의 위에 서라. 내 은혜를 받으면 그 정도는 되어야 한다.]“……그, 그건.”
[나는 누구처럼 문서로 남기지 않는다. 이유를 아느냐?]모르면 당장 죽일 기세였기에 에스텔은 재빨리 대답했다.
“인간이 아니라 위대한 드래곤이시기 때문입니다.”
[명심하는 게 좋을 거다.]문트바르는 작은 유희를 하나 만들고 레어 안쪽으로 들어가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단정한 자세로 기다리고 있던 자오가 정중히 인사했다.
“오셨습니까. 남은 이야깃거리들이 많아서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네 소개에만 한 달을 쓰더니 이번엔 무엇이냐?]“제 인생사보다 훨씬 더 흥미진진한 얘기입니다. 단주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문트바르는 지금껏 들었던 얘기들이 아주 지루하진 않았고 단주라는 인간이 정광이라는 걸 알았기에 쫓아내지는 않았다.
바닥에 드러누우니 자오가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귓가에 앉은 뒤 떠들기 시작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한 달 전에 이미 학을 뗐겠지만 기나긴 시간을 거의 홀로 지내 온 문트바르에게 한 달이라는 기간은 촌각이나 마찬가지였고 참을성도 그만큼 강했기에 그리 나쁜 소일거리는 아니었다.
“제가 단주와 어떻게 만났는지는 벌써 말씀드렸고 곤륜파의 허청 진인이 산에 버려져 있던 단주를 발견해 제자로 거둔 일화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지금은 상상도 안 가지만 그 당시의 단주는 배가 고파도 용변이 급해도 귀엽게 칭얼거리는 갓난아기였는데…….”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시원한 비가 계속 내려 무더위를 식히고, 침묵의 산에 낙엽들이 수북이 쌓인 후 그것들이 채 썩기 전에 눈송이가 떨어져 산 전체를 하얗게 물들였다.
그동안 드래곤이라는 종자기(鍾子期)를 만난 백아(伯牙) 자오는 가슴속에 맺혔던 응어리를 남김없이 풀어놓았고 전설적인 대마녀의 마법서를 얻은 에스텔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탐독하며 수련했다.
용언마법을 조금이라도 배우고 퍼뜨려서 언젠가 끊길지도 모르는 마법을 보존하려던 블랑샤르는 드래곤의 무지막지한 폭행을 견디다 못해 사람들이 마법을 더 쉽게 이해하고 익힐 수 있는 마법서를 집필하기 시작했고 미진하지만 자그마한 결실을 거두고 있었다.
그리고 정광은.
‘안 해. 때려죽여도 안 해.’
문트바르의 시범을 관찰하고 궁리하여 많은 마법을 익혔으나 진짜 용언마법은 펼칠 수 없었다.
누가 봐도 기적을 이뤘다고 칭송할 성과였지만 그러면 뭐 하나, 당사자가 성에 차지 않는 것을.
‘입으로 용언을 내뱉을 때마다 자괴감에 시달려 못해 먹겠네. 제대로 해야 해. 아주 제대로.’
그러려면 모험을 해야 했다.
‘용언은 말에 힘을 싣는 것, 사람으로 치면 언령(言霊)이겠지. 그걸 하려면…….’
드래곤처럼 타고나면 모를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인당(印堂). 즉, 상단전(上丹田)을 활짝 열어서 하늘과 영(靈)을 통해 하나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우화등선(羽化登仙) 해버리면 곤란한데.’
자연지기를 삼단전에서 순환할 수 있게 됐을 때 허공에서 자신의 모습을 관조했던 기억을 떠올리자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아니야, 그때도 시기적절하게 잘 끊었는데 이번이라고 다를까.’
무엇보다 자존심이 상했다.
상대가 용이든 뭐든 간에 남이 분명히 하는 걸 자신이 못 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그래도 혹시 모르니…….’
정광은 자오를 불러 함께 산을 오르다가 적당한 곳을 찾았다.
편평한 바위에 쌓인 눈을 손짓으로 날려 버리고 가부좌를 틀고 앉자 자오가 의아해했다.
“단주, 갑자기 무엇을 하시려는 겁니까?”
“상당히 위험한 거요.”
“헉! ‘상당히’씩이나! 하늘을 무너뜨리기라도 하시려는 겁니까?”
“거기까진 아니고요. 안 올라가려고요.”
정광은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당부했다.
“지켜보시다가 제 상태가 이상해지면 걷어차서라도 정신이 돌아오게 하세요.”
“차는 건 자신 있습니다만 단주께 큰 해가 되면 어떡합니까?”
“신선 따위가 되는 것보단 낫죠. 다시 시작하면 돼요.”
“단주의 상태가 안 좋아진 건 어떻게 알고요?”
“자오의 수준이면 뭔가 달라진 걸 느낄 거예요.”
자오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너무 불안합니다. 안 하시면 안 됩니까?”
“저는 저를 믿어요. 자오도 조금 믿고요. 그럼 시작할게요.”
정광은 바로 눈을 감고 상단전을 완전히 열었다.
그리고 자연지기를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받아들이며 삼단전에서 순환시켰다.
정광의 몸이 찬란한 금빛으로 물들었다.
항마주가 호응하여 진동하며 빛을 냈고 역천경은 몸을 요란하게 뒤틀며 비명을 질렀다.
화아아아아-
-우우우우웅!
-시끄러워. 마계를 열고 없애줄까?
-우웅! 우웅!
역천경이 강하게 사양하고 침묵하자 정광은 자연지기를 더 빠르게 순환시켰다.
그렇게 한 지 얼마나 됐을까?
잔뜩 긴장한 상태로 지켜보던 자오가 두 눈을 부릅떴다.
‘이, 이건가!’
금광에 뒤덮인 정광의 육신이 조금씩 희미해지고 있었다.
자오는 반사적으로 원앙각(鴛鴦脚)을 펼치다가 가까스로 멈췄다.
‘이건 아니야. 단주가 크게 다칠 게 분명해.’
운기조식 중인 무인을 건드려도 주화입마에 빠지는데 우화등선 중인 사람을 걷어차면 어떤 참사가 일어날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래, 내 장기를 발휘하자!’
자오는 그 어느 때보다도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떠들었다.
“단주! 이대로 떠나시면 안 됩니다! 아직 살아계신다면 오늘내일하고 있으실 운후 진인을 생각하십시오! 사부인 허청 진인을 비롯해 단주를 기다리고 있을 곤륜 사람들을 떠올리십시오! 게다가…….”
정광이 맺은 인연들에 그간 모은 막대한 재물들까지 전부 말해봤으나 소용없었다.
이런 판국에 맛있는 요리와 향기로운 명주 얘기가 통할 리 있나 하면서도 얘기해 봤지만 역시 효과가 없었고.
자오는 민망해서 꺼내지 않았던 최후의 수를 썼다.
“이러시면 섭섭합니다! 저를 홀로 남겨두고 가실 겁니까?”
정광이 더 희미해졌다.
‘이럴 수가! 나까지 안 통할 줄이야! 이제 어떡하지? 어떡해야 하는 걸까?’
궁하면 통한다더니 과연.
머리가 깨었다. 진짜 최후의 수는 따로 있었다.
자오는 이게 마지막 수라는 비장한 마음을 가득 실어 외쳤다.
“단주! 조선에도 들르시고 광활한 바다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하고 즐기겠다고 하셨잖습니까! 이번 생은 그 누구도 부럽지 않게 확실히 노시겠다고요!”
“……!”
기적이 일어났다.
화아아아아아아악-
황금빛이 폭발하듯 커져서 하늘과 땅을 뒤덮는가 싶더니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예전 모습 그대로, 또렷하게 보이는 정광이 씩 웃었다.
“당연히 그래야죠. 슬슬 마무리를 짓고 출발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