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ighteous Demon of Kunlun RAW novel - Chapter 563
암흑대공전기(暗黑大公傳奇) 19화
이유
휜펠 제국 황제 슈폰하임 11세는 지축을 흔드는 포성에 이어 수많은 포탄이 터지자 충혈된 눈을 희번덕거렸다.
‘이놈! 짐의 환대가 마음에 드느냐? 짐을, 인간을 우습게 본 대가를 치러라!’
상대가 정말 암흑대공이라 해도 육신을 지닌 존재 아닌가? 바로 이날을 위해 제국 전역에서 끌어모은 화포들이었다. 그것들이 토해내는 포탄의 비를 모조리 피하는 건 불가능했다.
‘어서 쏴라! 뼈와 살이 갈가리 찢기고 까만 잿더미로 변해 버릴 때까지 계속!’
그 순간, 포성이 뚝 그쳤다.
분노한 황제가 전령을 보내 쉼 없이 쏘라고 다그치려는데, 너무 커서 시원하게까지 느껴지는 폭발음이 들려왔다.
그것도 포탄이 터진 곳보다 훨씬 가까운 위치에서.
콰아앙!
사람들의 처절한 비명과 고함이 그 뒤를 이었다.
“으아악! 진짜 암흑대공이다! 그 많은 포탄을 정지시키고 떨어뜨리더니 성문까지 박살 냈어!”
“도, 동요하지 말아라! 빨리 적을 막아!”
“미친! 무시무시한 화염을 뿜어내는 저 마왕을 무슨 수로…… 끄윽.”
“불복하는 자는 이놈처럼 즉결처분한다! 우리는 위대한 휜펠 제국군이다! 준비한 대로만 하면 충분히 승산이, 커어억!”
“실례합니다, 잠시 지나갈게요.”
맑은 목소리와 함께 소란이 더 커지고 병사들이 중구난방 소리치기 시작했다.
“아, 암흑대공이 성문 수비대장을 하늘로 날려 버렸다!”
“으흐흑. 모두 도망쳐! 이러다간 다 죽어!”
회의실에서 이를 악문 채 귀를 기울이고 있던 황제가 폭발했다.
도망이라니, 미천한 것들을 거둬서 지금껏 입히고 먹인 게 얼마인데 누구 맘대로?
창가로 달려가 밖을 내다보며 호통치려고 하는데 아까의 맑은 음성이 또렷하게 울렸다.
“다들 도주하시는 건 좋은데 조심히 하셔야죠. 자오, 뭐 하세요?”
황제는 두 눈을 부릅떴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지옥의 불길처럼 시커멓게 이글거리는 마신이었다.
그런 마신의 말에 너무 과하게 평범해서 이질감이 느껴지는 이민족 사내가 공손히 답했다.
그 사내는 황제의 눈에 익은, 바텐베르크의 마검 블루우트 프라센다 데이몬을 등에 메고 있었다.
“지금 하려던 참입니다, 단주. 다들 들으시오! 내 공용어 실력이 부족해도 양해해 주시길 바라며 말하겠소! 가는 사람은 잡지 않을 테니 줄을 서서 질서 있게 움직이시오! 서로 먼저 가려고 다투다가 크게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오? 안심시켜 놓고 뒤를 칠 생각은 없소! 이분은 절대로 허언을 안 하시는 분! 믿고 따르시오!”
“……!”
공포에 질려 달리고 구르고 밟히는 병사들로 아수라장이 됐던 장내가 진정됐다.
병사들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걸었다.
너무나 평범한 이민족이 말했듯이 암흑대공은 허언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파다했고, 단지 소문뿐이면 모르지만 드래곤 정벌군에게 경고했던 그대로 이렇게 오지 않았는가?
“이놈들이 진짜!”
그 꼴을 본 지휘관들이 화를 내며 처벌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기 전에 하나둘 목이 잘려 쓰러졌다.
휜펠군 사이를 유령처럼 헤집고 다니며 지휘관들을 죽인 평범한 이민족이 재차 안내했다.
“자! 그렇게 천천히 가시면 되오! 여러분의 주적은 내가 계속 처리할 테니 안심하시고! 잠깐! 동문 방향은 사람이 너무 많소! 남문과 서문이 여유가 있어 보이니 그쪽을 추천하오!”
병사들은 군말 없이 따랐다.
심지어 지휘관들을 죽인 이민족에게 어색하게 감사를 표하는 자도 있었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황제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버럭 소리를 지르려다 억지로 참았다.
마신의 이목을 끌기 싫었을뿐더러 그나마 밥값을 하려는 이들이 있어서였다.
완전무장을 한 황제 직속 기사단들이 마갑을 입힌 군마를 타고 나타나 전의를 불태웠다.
그 선두에 선 아벨라르 기사단장 레히나르 후작이 은색 투구에 달린 화려한 얼굴 가리개를 내리며 위엄 있게 외쳤다.
“황제 폐하의 명예를 위해! 휜펠 제국의 영광을 위해 인세를 침공한 마왕을 물리친다! 전원 귀를 막고 돌격하라!”
기사들은 즉시 마나를 일으켜서 귀를 보호하고 발뒤꿈치로 말의 배를 찼다.
이미 솜뭉치로 귀를 단단히 막아놓은 군마들은 별도 달도 없는 밤보다 더 어둡게 일렁이는 마신이 두려웠으나 훈련으로 길들여진 의식을 거스르지 못하고 질주하기 시작했다.
두두두두-
기마 돌격에 흥분한 땅이 힘차게 고동쳤다.
마신은 거센 파도처럼 밀려오는 기사단은 둘러보며 흡족해했다.
“준비를 좀 하셨네요. 저번에는 바빠서 빠른 길을 택했는데 이번에는 그럴 이유가 없죠.”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마신이 움직였다.
물러나지도 피하지도 않고 일마(一魔) 돌격으로 맞섰다.
낭만에는 낭만으로 보답하려는 것이다.
흑염(黑焰)이 햇빛을 집어삼키며 날아가 선두에서 말달려오는 아벨라르 기사단장을 덮치려 했다.
순식간에 시야가 어둠으로 물들어버린 아벨라르 기사단장은 이를 악물며 비껴들고 있던 랜스를 내렸다.
‘바텐베르크를 죽였다고 기고만장하구나!’
바텐베르크가 대륙제일검으로 불릴 만큼 강하다는 건 인정했으나 자신과 현격히 차이가 난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더구나 천하제일기사라는 칭호까지 그가 가져간 건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기마술과 마창술(馬槍術)은 내가 위다!’
가문의 비전 마나 운용법인 게르하르트로 쌓아온 마나를 한 톨도 남기지 않고 끌어올려 랜스에 담았다. 그리고 그 랜스에 본인의 체중과 근력, 말이 돌격하는 속도와 힘까지 오롯이 실어 내질렀다.
시퍼런 빛을 발하는 랜스가 짙은 어둠을 가르고 마신의 가슴을 꿰뚫으려 했다.
‘내가 이겼, 흡!’
마신이 뻗은 주먹이 아다만티움으로 만든 날카로운 창날을 비롯해 단단한 창대와 그것을 움켜쥔 기사단장의 억센 손과 팔, 어깨를 불사르는 것으로도 모자라 풀 플레이트 아머를 착용한 전신까지 소멸시켰다.
화르르르르-
그의 소멸을 시작으로 오와 열을 맞춰 돌격하던 기사단 한복판에 길이 생겼다.
육편과 핏물은 물론이오, 뼛조각과 병장기마저 남김없이 태워 버리는 죽음의 길이었다.
마신은 그 길의 끝에 멈춰 서서 위를 올려다봤다.
높은 층에 있는 한 창가에 주름살이 너무 많아 무서울 정도인 노인이 축 늘어진 얼굴 가죽을 푸들대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신이 그와 눈을 맞추며 싱긋 웃었다.
“차림새만 봐도 알겠네요. 만세만세만만세. 위대한 휜펠 제국의 통치자이신 황제 폐하를 뵈어요.”
슈폰하임 11세는 속이 뒤집히는 인사를 무시하고 마신을 지나쳐 간 기사단에게 쩌렁쩌렁한 음성으로 명령했다.
“무엇들 하느냐? 어서 선회해서 적을 쳐라!”
그에겐 안타깝게도 불가능한 지시였다.
극도의 공포에 빠진 군마들이 기사들의 통제에서 벗어나 마구 날뛰었고 기사들의 사기도 바닥에 떨어지다 못해 지옥까지 뚫고 들어갈 기세였다.
“이놈들이 감히! 짐의 명을 지금 무시…….”
“폐하, 고정하시죠.”
검디검은 불길을 넘실거리던 마신이 사라지고 본모습이 드러난 엄청난 미청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충고했다.
“울화가 치미는 걸 견디지 못하고 돌아가시면 어떡해요. 제가 찾아온 보람이 없잖아요.”
“짐에게 그런 망발을!”
“조심하셔야 하는데 자꾸 그러시네. 자오, 올라가서 주의를 좀 드리고 올 테니 아직 남은 분들을 황궁 밖으로 안내해 드리세요.”
“맡겨만 주십시오.”
미청년이 가볍게 뛰어올라 창가에 착지했다.
황제는 급히 뒤로 물러나며 청년을 손가락질했다.
“놈이 올라왔다! 빨리 쳐서 떨어뜨려라!”
미청년이 고개를 갸웃했다.
“누구한테 하시는 말씀이에요? 설마 저?”
“시끄럽다! 다들 왜 가만히 있느냐? 어서 저놈을…….”
황제는 뒤를 돌아보며 버럭 고함을 지르다가 말끝을 흐렸다.
회의실에 가득했던 귀족들과 대신들이 단 한 명도 안 보였다.
어느새 모두 도주한 것이다.
“……하. 하하. 으와하하하. 역시 밥벌레들뿐이구나.”
“밥을 제대로 안 먹이신 거겠죠.”
“더 이상 어떻게 말이냐?”
“말씀하시는 것만 들어봐도 통이 작으신 걸 알겠네요. 그런데 저한테는 왜 그러셨죠? 아주 용감하게 말이에요.”
황제의 충혈된 두 눈이 한층 붉어졌다.
“네가 암흑대공인 걸 알았으면 그런 명은 안 내렸을 거다.”
“강한 상대에게는 약하고 약한 상대에게는 강한 분이셨구나.”
“다르다.”
황제의 목소리에 뚜렷한 신념이 실렸다.
“강자로서 강자를 인정하는 것이다. 강자는 그만한 대우를 받아야 해. 헌데 너는 왜 그러느냐? 짐이 실수를 했으면 그만한 보상을 받고 끝내면 되는 것을, 왜 그걸 핑계 삼아 발부에 같은 애송이를 돕냐는 말이다.”
“돕는 건 진작에 끝났죠. 어떤 분들과는 다르게 밥값을 제대로 치른 거였고요.”
정광의 눈이 둥글게 휘었다.
“여기 온 건 개의 잘못을 주인에게 묻기 위해서예요. 사실 폐하께서 공작님께 지시한 거였으니 폐하의 책임이 더 크죠.”
“너도 짐을 존중해야…….”
“물론이죠. 극진히 모실게요.”
정광은 황제를 존중해 솜씨를 부렸다. 황제가 참고 참다가 내지른 피맺힌 절규가 황궁을 뒤흔들었다.
“주, 죽여! 그냥 죽여라! 끄흐흑.”
“안 돼요. 만세까지는 아니어도 장수하셔야죠. 지금까지 일구신 게 아깝지도 않으세요?”
“아아악! 그냥 죽이라고!”
황제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말을 이었다.
“헉. 헉. 이것만 물으마. 드래곤은? 죽였느냐?”
“아뇨. 나름 좋은 사이라서.”
“결국 짐보다 오래 살게 됐군. 그게 아쉬울 뿐, 후회는 없다.”
“거짓말.”
정광이 피식하고 웃음을 흘렸다.
“그런 분이 표정이 왜 그래요.”
“짐의 얼굴이 어떻길래 그러느냐?”
“입에 담기도, 더 보기도 싫네요. 조금이라도 나아 보이게 만들어 드릴게요.”
정광은 온갖 욕망이 얼기설기 뒤엉켜 일그러져 있는 황제의 얼굴에 주먹을 꽂았다.
퍼엉!
황제의 얼굴이 완전히 사라졌다.
‘조금이 아니라 훨씬 나아졌네.’
할 일도 다 끝냈겠다, 정광은 기지개를 켜고 하품하다가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아무런 후회가 없는 표정을 지었던 한 사람을 떠올렸다.
현생의 사조 운후였다.
‘그러고 보니 또 갈 때가 됐네.’
정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미소 지었다.
‘나도 정말 갈 때가 됐고.’
* * *
“허허허. 날씨가 너무 좋아서 그런지 이상하게 들뜨는군. 그때의 일도 희미해졌고. 이제야 좀 살 만해진 것 같네.”
“자네도 그런가? 나도 그렇다네. 오래전에 다 지나간 일이니 그만 잊고 편히 사세나.”
“껄껄껄. 아암, 그래야지. 얼마 남지 않은 인생, 계속 과거에 붙들려 있을 순 없지 않은가?”
흐뭇하게 웃는 두 노인에게 한 중년 사내가 다급히 뛰어왔다.
“크,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로 그러느냐?”
“그, 그것이…….”
더없이 화창한 어느 날, 신강(新疆) 사람들의 머리와 가슴에 폭풍우가 휘몰아쳤다.
천신(天神)이 이십 년 만에 수다스러운 종복과 함께 귀환했다는 거대한 재난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인생을 달관한 현인처럼 떠들던 노인들이 얼마 남지 않은 머리털을 쥐어뜯으며 절규했다.
“안 돼에에에에!”
“천하가 또 도탄에 빠지게 됐다아아아아!”
천신의 행보는 빨랐다.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는 소문이 들불처럼 타올라 신강 전체로 번지기도 전에 총단에 올라가 교주 앞에 섰다.
“지존, 오셨습니까?”
“응, 잘 있었어?”
폭양마검(曝陽魔劍)이라 불리던 검호(劍豪)에서 머리가 허옇게 센 노인이 되어버린 단가휘가 정중히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명하셨던 대로 나 군사와 협력할 땐 협력하고 견제할 땐 견제하며 뜻을 펼쳐왔습니다. 또한 섬랑의 다음 대를 진지하게 노리는 중입니다.”
“좋아, 잘하고 있어. 귀곡자는 편히 갔고?”
“지존을 기다리지는 않을 테니 최대한 천천히 오시라고 전해 드리라 했습니다.”
“걔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그런다고 내가 빨리 갈 줄 아나. 설마 흑서도 비슷한 말을 지껄인 건 아니겠지?”
“아닙니다. 지존께서 교에 남겨주신 덕분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제자를 거두게 되어 감사하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눈을 감기 전에 그 제자를 섬랑의 비밀수신호위로 추천했고 섬랑도 받아들였습니다.”
“저런. 그 불쌍한 제자는 누구야?”
“화전오가(和田吳家)의 여식인 오희성입니다. 멸혼생사투에서 섬랑에게 패배해 죽은 오경의 손아래 누이입니다.”
“심술궂기는. 불쌍한 애한테 뭐 하는 짓인지 원.”
“오희성을 비롯한 화전오가 사람들은 이십 년 전에 이미 섬랑을 주군으로 모시겠다고 맹세했습니다. 섬랑은 그들에게 그 이상으로 베풀었기에 모두 고마워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리고…….”
단가휘가 말을 잠시 끊었다가 이었다.
“소인의 아버님도 지존의 가르침 덕분에 벽을 깨서 감사하다는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반짝이가?”
정광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녀석이 없는 일을 지어낼 리는 없지. 애썼네, 비석에 ‘반짝이’가 아니라 ‘섬광이’라고 새겨놔.”
“감사합니다. 하늘에서 정말 기뻐하실 겁니다.”
“그럼 나 대신에 귀곡자를 좀 패라고 전하든가. 잘 있어, 간다.”
정광이 아비의 별호를 섬광이로 바꾸는 은혜를 내렸을 때를 제외하면 담담하기 그지없던 단가휘가 놀랐다.
“벌써 말입니까?”
“나중에 또 보면 되지.”
“제일 중요한 일을 아직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왜? 섬랑이 가출이라도 했어?”
“반은 그렇고 반은 아닙니다.”
“자의와 타의가 섞였다는 얘기네. 너와 나민이 짠 계획이지?”
“네, 지존.”
“나민에게 가는 김에 물어볼게. 걔, 어디 있어?”
잠시 뒤, 정광은 귀곡자의 사후 좌우광명쌍뇌라는 무거운 직책을 홀로 맡게 된 나민을 그녀의 집무실에서 만났다.
“오랜만이에요, 나 소저. 여전히 예쁘시네요.”
나민은 단가휘가 그랬듯이 정광이 과례를 싫어하는 걸 알기에 공손히 인사했다.
“이렇게 천신을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런 거 아니라고 했는데 자꾸 그러시네. 잘 계셨어요?”
“천신께서 내려주신 말씀을 금과옥조로 삼아 조급해하지 않고 사람을 특히 길게 봐왔습니다. 모든 일 처리는 공평무사를 기본으로 삼되 아니다 싶을 땐 과감하게 정리하고 말입니다.”
“무슨 업무 보고하는 것도 아니고 딱딱하게 왜 그러세요. 다른 분들은요?”
나민의 입에서 정광과 함께했던 사람들의 안부가 흘러나왔다.
“성녀와 제사장은 어려운 교도들을 도우며 천신의 말씀을 전하고 있고 한등민가(汗騰閔家)가 그 일을 돕고 있습니다.”
“현유가 바쁘겠어요.”
“그렇습니다. 관 숙수는 천신께서 명하신 대로 소교주와 연이 닿은 아이들을 지도하다가 상노(商奴)가 귀천하자 고차(庫車:쿠차)로 돌아가 그곳 아이들 중 자질이 떨어지는 아이들을 보살피며 객잔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가신 분이 은근히 많으시네.”
정광이 볼을 긁으며 중얼거리자 나민이 좋은 소식도 전했다.
“호교당 삼향주였다가 천신께서 광명좌사자로 임명하신 곽상은 아직 괜찮습니다. 천신께서 떠나신 후 토로번손가(吐魯番孫家)를 깨끗이 밀어낸 뒤 빈 땅이 된 토로번을 놓고 여러 가문이 대립했는데 아예 기반이 없다시피 한 곽가(郭家)에게 맡기는 것으로 협의하게 됐습니다. 그는 얼마 전 은퇴한 후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잘됐네요. 그분도 쉬실 때가 되긴 했죠.”
“하지만 이녕임가(伊寧任家)의 철모(鐵母)는 위중한 상태입니다. 전대 태상가주가 귀천한 후 병세가 더 악화됐는데 언제 떠나도 놀랍지 않다는 말이 돕니다.”
“네? 아직 살아 계세요? 그게 더 의외네요.”
정광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화제를 돌렸다.
“섬랑의 기반은 어때요?”
“모두 인정하나 가끔 마성에 잡아먹혀 객기를 부리는 자들이 나왔습니다.”
“아주 튼튼한 편이네요.”
“게다가 소교주가 직접 멸해 버리니 근래에는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직접 다지기까지. 괜찮네.”
정광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자, 이제 섬랑의 가출에 대해 말해주세요.”
“소교주는…….”
정광은 나민의 설명을 들은 뒤 눈살을 찌푸렸다.
“세월이 꽤 흐르긴 했네요. 정족상단(鼎足商團)이라. 그곳과 거래를 트는 건 그렇다 치고. 자기 족적을 중원에 확실히 남겨서 차기 교주의 권위를 세우고 교도들의 사기를 끌어 올리겠다니.”
섬랑은 그보다 더 중요하게 여길 만한 게 많은 아이였다.
“중원으로 나가서 놀려는 마음이 더 큰 것 같은데.”
“천신께서 바로 보셨습니다. 소교주도 그렇게 실토했습니다.”
정광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하하. 그 녀석, 은근히 귀여운 구석이 있다니까요. 수빈이와 겨뤄서 자기가 저의 제일제자라고 으스대려는 마음도 있을 테고. 섬랑이 이길 것 같아요?”
나민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최소한 지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게 평하시는 걸 보면 섬랑이 꽤 잘 컸나 봐요.”
“너무 커서 천마비고(天魔秘庫)에 있던 곤륜파의 비급들을 전부 털어 갔습니다.”
“흐음. 자기 것도 아닌 걸로 곤륜에 생색을 내려는 거네요. 아주 잘 컸는데요?”
“……너무 제멋대로인지라 성품이 치밀한 아극소연가(阿克蘇燕家) 소가주를 동행시켰으니 아주 조금은 나을 겁니다.”
“빨리 가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네요.”
정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게 문제가 아니라 섬랑과 팽수빈은 우열을 크게 가리기 힘든 기재였고 두 사람 다 비무로 끝낼 성격이 아니었다.
“맞다. 고이륵단가(庫爾勒段家) 소가주님은요? 잘 계세요?”
정광이 단영에 관해 묻자 나민의 얼굴에 얼음이 한 겹 생겼다가 사라졌다.
“물론입니다. 전장 사업은 느리지만 꾸준히 커지고 있고 정족상단과 협의가 잘 되면 외부 유통도 조만간 시작할 계획입니다.”
“단가 말고 단가 소가주님요.”
“그는 지금 고이륵에 있습니다. 독두(禿頭)는 이녕의 도박장을 시작으로 신강 전역에 지점을 열었습니다. 지존께서 투자하셨던 황금 마차들도 크게 불어났을 겁니다.”
“흐음. 이거 영 수상한데.”
정광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왜 자꾸 말을 돌리세요? 단가 소가주님과 다투기라도 했어요?”
“……어떤 사안에 대한 의견이 달라 서먹서먹해진 감이 있습니다.”
“조금만 더 서먹서먹해지면 칼부림 나겠네요. 적당히 양보하시고 마무리 지으세요. 그만 갈게요.”
“네? 벌써…….”
“또 보면 되죠.”
정광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나민은 활짝 열린 문을 허탈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작게 탄식했다.
“천신께서 명하셨어도 그 사안만큼은…….”
따르기 힘들었다.
목숨을 잃는다 해도.
* * *
정광은 밖에서 기다리던 자오와 함께 곤륜을 향해 말달렸다.
겸사겸사 이녕에도 들르기로 하고.
시간이 흘러 이녕에 도착해 임가(任家)의 대장원에 가보니.
많은 사람들의 곡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