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ighteous Demon of Kunlun RAW novel - Chapter 84
84화
운룡(雲龍)
정광은 검을 보지 않았는데도 알 수 있었다.
그의 특별한 감각이 그렇게 말해서였다.
‘좋은 놈이구나.’
그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감정 표현을 안 하는 철혈장주가 의아해할 정도로.
“주시죠.”
“…….”
“감사 인사는 검 좀 만져보고 드릴게요. 그놈이 절 부르고 있거든요.”
“……!”
철혈장주는 정광의 눈을 유심히 바라봤다.
눈이 별빛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
“오오. 묵직하네.”
정광이 건네받은 목함을 주저 없이 열자, 그 안에 들어있던 검이 자태를 드러냈다.
“……어?”
“사, 사형. 왜 그러십니까? 뭔가 잘못됐습니까?”
정광은 말없이 검 손잡이를 잡고 들어 올렸다.
검자루와 검집에서 찬란한 황금빛이 번쩍였다. 게다가 정교하게 새겨진 구름 문양이라니!
백승무가 입을 떡 벌렸다.
“……뭐, 뭐가 이렇게 화려합니까?”
정광이 그 이유를 알 리가 있나.
제일 기가 막힌 건 정광이었다.
‘감각하고는…….’
누가 봐도 돈을 덕지덕지 바른 모습 아닌가!
아니, 바르다 못해 들이부었다는 게 정확하리라!
정광이 황당한 얼굴로 철혈장주를 바라봤다.
대답은 그의 아들이 대신했다.
“진옥룡 자네의 검을 참조해서 만들었네.”
“……네?”
“나도 그렇게 화려한 건 싫어해. 자네의 취향을 고려했단 말일세.”
정광은 천천히 고개를 숙여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것을 바라봤다.
청해성주가 강제로 선물해 준 화려한 황금색 검을.
‘……내가 이걸 차고 다녀서 화려한 걸 좋아한다고 생각한 거야?’
좀 물어볼 것이지 쓸데없는 짓을!
이것과 비교해도 너무 심할 정도 아닌가!
그런데.
새로운 검을 계속 보다 보니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뭐 나와 그럭저럭 어울리긴 하겠군.’
천하에서 오직 정광에게만 어울리는 검이다.
어찌 보면 잘된 것일지도.
‘이놈아. 그만 보채라. 꺼내주마.’
실제로 검이 그에게 말을 거는 건 아니었다.
언젠가는 그렇게 될 테지만.
마혼이 그랬듯이 말이다.
정광은 검을 검집에서 뽑았다.
소리도 없이 검붉은 검신이 드러났다.
‘아!’
검신은 물론 검올(劍兀), 고동(古銅), 검반(劍盤), 검파(劍把) 등 모든 것이 흠잡을 데가 없었다.
정광의 미소가 짙어졌다.
검의 검집보다 더 화려하게.
‘좋아. 인사 겸 놀아볼까.’
삼청합일신공을 끌어올렸다.
그 막대한 진기를 검에 쏟아 넣자 눈이 부신 황금빛이 폭발했다.
지켜보던 이들은 경악했다.
“사, 사형! 그건 뭡니까!”
“이럴 수가! 비수의 빛과는 비교도 안 되지 않는가!”
“……!”
정광은 대답 없이 검을 움직였다.
검붉은 검이 허공을 누비며 황금빛을 수놓았다.
그 모습은 마치 흑룡(黑龍)과 적룡(赤龍)이 한데 섞여 어우러지며 황금색 운무(雲霧)를 뿜어내는 것 같았다.
백승무는 그 모습을 넋 놓고 바라봤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으나 철진기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철혈장주는…….
더 깊은 것을 보고 있었다.
‘대체 저 아이는 어떤 존재인가.’
천하제일명검이라 불려도 아깝지 않을 검이긴 했다.
그런데 정광의 손에 들리자 더한 것이 느껴지는 것 아닌가.
그냥 검붉은색이 아니었다.
검은색은 빛을 전부 빨아들일 것 같았고 붉은색은 세상의 피를 다 머금을 듯했다.
철혈장주가 만든 평생의 역작이 마검(魔劍)처럼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저 찬란한 황금빛이라니.’
천하에 저렇게 아름다운 빛은 없으리라. 그 빛은 지극한 현기를 뿌리며 전각 안을 종횡무진 누비고 있었다.
‘마검에 순후한 내공을 담아 현기 어린 검초를 화려하게 펼친다?’
철혈장주는 그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마(魔)인가 정(正)인가. 도저히 알 수가 없구나…….”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따가운 시선에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그의 아들이 경악한 얼굴로 입을 벌리고 있었다.
“……아, 아버님께서 마, 말씀을 또 하시다니! 요즘 대체 왜 이러십니까! 혹 불편하신 데가 있으신 겁니까?”
“…….”
백승무는 철혈장주의 과묵함을 몰랐기에 멀뚱멀뚱 구경만 했지만, 정광은 어느새 검무를 멈추고 장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 담긴 감정은 대견함이었다.
“전에 말씀하셨던 것보다 자연스러운데요. 훨씬 낫네요.”
“…….”
구경거리가 되어 잠시 침묵하던 장주는 정광에게 전음을 보냈다.
-자넨 대체 누구인가?
-정광요.
-진짜 자네를 묻는 걸세.
정광도 철혈장주의 중얼거림을 들었기에 무엇을 묻는지 알고 있었다.
‘극의에 가깝게 오른 자라 대충이나마 보는구나.’
무인이든 야장이든 높은 경지에 오른 이는 보는 것도 다른 법.
정광은 높은 곳에 선 거장에 대한 예우로 있는 그대로 답했다.
그렇다고 전직 진천마에 현직 진옥룡이라 한 건 아니었다.
-마(魔)인지 정(正)인지 그걸 왜 굳이 나누려 하세요. 둘 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게 사람인데.
-…….
정광은 싱긋 웃으며 덧붙였다.
-저는 그냥 접니다.
-…….
한동안 가만히 있던 철혈장주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정광의 말이 그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둘 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게 사람이라…… 그렇긴 하지.’
세상에는 완전한 흑(黑)도, 완전한 백(白)도 없었다.
사람은 물론 사물까지 조금씩이나마 섞여 있는 게 세상 이치였다.
양쪽 중 어느 쪽에 더 가까운지는 판단할 수 있을지 몰라도 항상 그러리라고 확신할 수는 없는 법.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게 사람이다.
그건 철혈장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누군가 내게 마인지 정인지 묻는다면…….’
그도 뚜렷한 답을 내놓을 자신이 없었다.
그는 그냥 그였으니까.
정광이 말했던 것처럼.
‘재밌는 녀석이군.’
철혈장주는 눈을 떴다.
그의 입가에는 가느다란 호선이 그어져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지어본 미소였다.
‘진옥룡이라…… 용이 맞긴 하구나. 어떤 용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들어온 소문은 물론 직접 경험한 바로도 대협이 될 성품은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이 뱉은 말은 반드시 지켰고, 의로운 일도 많이 했으며, 도리에 어긋나는 짓이나 악행은 절대로 하지 않았…….
‘……나?’
생각해 보니 기준에 따라 악행이라 할만한 것도 꽤 많지 않은가!
정광이 하남성에서 하북성으로 넘어오며 벌인 일들만 해도 그랬다.
사제인 백승무는 금권검협(金權劍俠)이라는, 좀 이상하지만 어쨌든 ‘협(俠)’이 들어가는 별호를 조금씩 얻어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정광이 얻은 별호는 금충검마(金蟲劍魔)였다!
그에게 당한 산적, 수적, 파락호 같은 놈들이 퍼뜨린 것이라 신빙성이 부족하긴 했지만…….
‘대체 얼마나 돈을 밝혔기에 그런 악명을…….’
철혈장주는 곧 알게 되었다.
정광이 철진기에게 따지는 소리를 듣고.
“소장주님. 근데 비수는 왜 안 주세요? 공짜로 주신다고 했잖아요.”
* * *
정광은 양심이 있는 남자였다.
철혈장주와 철진기에게 감사를 표한 것은 당연한 일.
거기에 약속했던 대로 사분지 일의 대금까지 지불한 것이다.
백승무의 검과 비수를 제외한, 현철검의 대금에서 사분지 일이었지만.
사람이라면 마음이 편치 않은 게 당연한 일.
정광과 달리 사람이었던 백승무가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걱정스럽게 말했다.
“사형. 철혈장이 이번에 손해를 많이 봤군요. 마음이 영 불편합니다.”
“돈 더 주자고?”
“……그건 아닙니다만.”
정광과 다니다 보니 무공은 물론 상인의 자질도 늘어난 백승무였다.
정광은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불편해할 것 없어. 그 정도 손해는 메꾸고도 남을 깨달음을 얻었으니까. 그것도 부자 둘 다.”
철혈장은 가세가 휘청일 정도로 큰 지출을 했지만 더 큰 것을 얻었다.
언젠가 그들은 더 큰 명성과 재력을 얻게 되리라.
‘그때쯤 한 번 더 놀러 와야지.’
정광은 철 씨 부자가 들었으면 기겁할 생각을 한 뒤에 말을 이었다.
“그런데 사제. 그런 말을 하려면 계속 껴안고 있는 그 공짜 검은 내려놓고 해야지.”
“하하하.”
정광의 핀잔에 백승무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손에 든 검을 계속 쓰다듬으면서.
그의 입에서 감개무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가 이런 명검을 가지게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야장들이 모여 있다는 철혈장.
그중에서도 소장주가 만든 검이다.
무인이라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얻길 원하는 보물인 것이다.
“뭘 그런 걸 가지고.”
“하하. 사형께는 그렇겠지만 저는 아니지요.”
백승무는 정광을 바라봤다.
모두 그의 덕분이었기에.
‘사형을 만나며 모든 게 바뀌었지.’
언감생심 꿈도 못 꾸던 정파 명문 곤륜에 입문하고 놀라운 절기들을 배우게 되었다.
영약도 얻어먹은 데다 협행도 꽤 하게 되었다.
그리고 평생의 벗이 될 명검까지 얻게 되니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
“근데 왜 이름을 그렇게 지었어?”
“네? 흑우(黑友)가 어때서 그러십니까?”
“어감이 영…… 그리고 ‘흑’이 왜 들어가. 검은빛은 조금밖에 없잖아.”
“그래도 현철을 두 냥이나 넣은 녀석입니다.”
“운룡(雲龍)은 스물한 근 열네 냥인데.”
“…….”
백승무는 이를 지그시 물었다.
무게에서는 형편없이 밀렸으니 이름에서라도 이겨야 했다.
“사형이야말로 운룡이 뭡니까. 너무 흔한 느낌입니다.”
“당연하지.”
“네?”
“본문에서 구름이랑 용을 빼면 뭐가 남아. 무공이고 뭐고 안 들어가는 데가 없잖아.”
“……그렇지요.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사문을 들먹이는데 할 말이 있나.
이름에서도 졌다.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애초에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지.’
그가 알기로 운룡은 천하에 하나밖에 없는 진짜 현철검이었다.
그런 검을 어찌 상대하겠는가.
그의 시선이 저절로 운룡을 향했다.
‘나도 저런 검을 가졌으면…….’
흑우도 지금의 그에게는 과분했지만, 사람인 이상 욕심이 날 수밖에 없었다.
백승무의 시선에서 그런 생각을 읽은 정광은 내심 실소했다.
‘욕심을 가지는 거야 좋은데, 조절은 해줘야지.’
정광은 백승무에게 운룡을 내밀었다.
“사제, 한번 써볼래?”
“네……. 네?”
백승무는 깜짝 놀랐다.
무인이 자신의 병기를 남한테 내주는 건 극히 드문 일이었기에.
‘도대체 무슨 생각이시지?’
고민은 짧았다.
욕심이 호기심을 이긴 것이다.
백승무는 냉큼 검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사형.”
그렇게 운룡을 건네받는데, 받자마자 손이 아래로 축 처졌다.
꼴사납게 놓쳐버리지는 않았지만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무슨 검이 이리 무거워? 이걸로 어떻게 검법을 펼치지?’
백승무도 단련을 한 무인이었기에 드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검법을 펼치는 건 완전히 다른 얘기 아닌가!
‘나라고 못할 건 또 뭔가.’
조심조심, 그러면서도 온 힘을 다해 검을 움직여 보았다.
하지만.
검은 그의 의지대로 움직이긴커녕 자기 멋대로 달아나려 했다.
‘이걸로 그렇게 환상적인 검무를 추던 사형은 도대체…….’
백승무로선 정광이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올랐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허탈함도 잠시.
‘아!’
문득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정광이 그에게 선뜻 검을 넘겨주며 써보라 했던 이유!
‘자신에게 맞는 검이 제일 좋은 검이라 하셨었지.’
지금의 그에게 운룡이 쥐어져 봤자 검에 부끄러운 사람이 될 뿐이라는 걸, 아직 더 성장해야만 한다는 걸 느끼라고 준 것이 분명했다.
사실 정광으로서는 언감생심, 뱁새가 황새 따라오려다 가랑이 찢어진다는 뜻으로 준 것이었지만.
어쨌든 백승무는 껍질을 하나 더 벗게 되었다.
‘그래. 지금은 안 맞아.’
백승무는 솔직히 인정했다.
하지만 훗날에도 그러리란 법은 없지 않은가.
아니, 반드시 저런 검을 쓸 자격을 얻으리라!
백승무는 정광에게 운룡을 내밀었다.
“잘 봤습니다, 사형.”
“좀 느낀 게 있어?”
“물론입니다!”
정광은 백승무의 어깨를 두드려 준 뒤 운룡을 허리에 찼다.
이제는 가야 할 때였다.
“슬슬 떠나볼까.”
“네, 사형!”
정광은 고개를 돌려 자오에게 물었다.
“사마련 지부에는 제대로 말했죠?”
“네, 진옥룡. 지시하신 대로 한동안 보고를 못 올린다고 했습니다. 심상찮은 낌새가 있어서 오래 지켜봐야 할 것 같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자오가 난처한 웃음을 흘렸다.
“진옥룡께서 주신 것이 너무 많아서 걱정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큰 봇짐을 메고 있었다.
그 속에는 비수(匕首), 아미자(峨嵋刺), 유엽비도(柳葉飛刀) 등 암살에 특화된 병기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정광은 헐값에 그것들을 내어주며 떨떠름한 표정을 짓던 철진기가 생각났다.
“품질이 좋은 것들이니까 무조건 챙겨요. 어떻게든 다 쓰게 돼 있으니.”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철혈장주와 철진기에게는 이미 작별 인사를 한 상황.
떠나는 걸 비밀로 해달라 했으니 사마련의 눈으로부터 약간의 시간을 벌 수 있으리라.
정광은 사마련의 이 공자 상소운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그놈. 내가 가려는 곳에 용무가 있는 것 같단 말이야.’
정광은 습격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먼저 치는 게 그의 방식이었다.
우두둑-
천변만화역용축골마공(千變萬化易容縮骨魔功)을 펼치자 정광의 외모가 변했다.
전에 했을 때처럼 순진무구해 보이는 미공자가 아니라 성격 꽤나 있어 보이는 미청년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백승무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딱 어울리시는군요.”
“뭐?”
“아닙니다! 어서 가시지요!”
“사제도 역용해야지.”
“저, 저는 할 줄 모릅니다.”
“내가 해줄게.”
“네?”
정광은 손가락을 들어 백승무의 얼굴 몇 군데를 찔렀다.
그의 얼굴이 이리저리 일그러지더니 멍청해 보이는 청년이 되었다.
“좋아. 딱 어울리네. 자오도 내가 해줄까요?”
백승무의 얼굴을 보며 내심 웃던 자오가 찔끔했다.
“저는 역용술을 할 줄 아니 직접 하겠습니다!”
“좋아요. 어서 하고 가죠.”
잠시 뒤.
정광은 백승무와 자오를 들쳐 메고 철혈장을 벗어났다.
목적지는 북동쪽.
칠대세가의 일원이자 새로운 무림맹주를 배출한 하북팽가(河北彭家)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