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ighteous Demon of Kunlun RAW novel - Chapter 97
97화
발목 잡지 마세요
황태손은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지닌바 재주를 어여삐 여겨 함께하려 했거늘 돌아온 대답이…….
‘……단 이틀이라고?’
처음엔 잘못 들었나 싶었다.
하지만 정광의 또렷한 눈빛을 보자 제대로 들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도저히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대답한 것이오?”
“네.”
“……정녕 부귀영화를 원하지 않는단 말이오?”
“도사가 무슨 부귀영화예요.”
“……무늬만 도사라 들었소만. 최근 행보는 전보다 더하다던데…….”
황태손이 어이가 없다는 듯 말꼬리를 흐렸다.
정광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 진짜. 소문이 어떻게 난 거야.’
어떻게 나긴.
아주 제대로 났다.
황실에 처박혀 사는 황태손마저 알고 있을 정도면 사부를 비롯한 곤륜 사람들도 당연히 들었을 터.
그래도 큰 걱정은 들지 않았다.
‘다 이해해 주겠지.’
곤륜 도사들은 진짜 도사 아니던가.
‘아니지. 내가 뭘 잘못했다고.’
하남에서 이곳까지 오며 죄 없는 이를 죽인 것도 아니고, 남의 재산을 턴 것도 아니…… 산적이나 수적놈들 것들이었으니 정당방위였다.
어쨌든 아직까지는 크게 책잡힐 만한 일은 하지 않은 정광이었다.
그렇기에 당당히 가슴을 펴고 말할 수 있었다.
“본디 강호의 소문이란 와전되기 일쑤지요. 황태손께서 오해를 하시는 것 같습니다.”
“……연경(燕京)은 황상께서 거하시는 곳이라 토지 가격이 무척 비싸오. 전망도 좋지. 좀 떼주리까?”
“얼마나요? 목이 좋은 덴가요?”
“…….”
“무량수불. 이틀 치만 주시죠.”
황태손은 정광을 물끄러미 보다가 크게 웃었다.
덥석 물어놓고도 계속 이틀을 고집하다니.
참 재밌는 자 아닌가.
‘진옥룡이라…….’
잠시 겪어봤을 뿐인데도 알 수 있었다.
정광은 강제로 취할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시간을 두고 공을 들여야 하리라.
‘어차피 갈 길은 멀다.’
황태손은 기다릴 줄 아는 자였다.
황위에 오를 때까지, 얼마가 걸리더라도.
그는 속내를 시원하게 비췄다.
“좋소. 일. 단. 이틀로 합시다.”
“일단이라뇨. 무조건 이틀…….”
“길게 보는 게 좋지 않겠소?”
“네?”
“아까 그대가 말했던 대로 나는 대단한 부자요. 게다가 권력도 있지.”
“음. 그건 그렇죠.”
“앞으로는 더 대단한 존재가 될 것이오. 아니 그렇소?”
정광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긴 하지.’
황태손은 황태자가, 그 후엔 황제가 될 몸이었다.
중간에 삐끗하지만 않는다면.
‘흐음.’
정광은 황태손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황태손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담담하게 받아들일 뿐이었다.
‘제법 똘똘하고. 배포도 있고.’
이런 이는 흔치 않았다.
연을 만들어두면 최소한 손해는 보지 않으리라.
정광은 결정을 내렸다.
“좋아요. 일단 이틀로 하죠.”
“하하하. 고맙소.”
“뭘요. 주고받는 건데. 이틀 치는 무엇으로 주실 거예요?”
황태손은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정하는 것보다 그대가 원하는 걸 말하시오. 그게 깔끔할 것 같소이다.”
“너무 커서 못 들어준다고 하실 것 같은데.”
“최대한 맞춰 드리리다.”
“그럼 조금 더 묵혀두죠.”
“……?”
의아해하던 황태손은 정광의 이어지는 말에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더 힘이 생기셨을 때 말씀드릴게요. 이자까지 붙여서.”
* * *
이렇게 정광은 황태손과 이틀을 함께하게 되었다.
“머무실 곳부터 정해야 하는데.”
정광이 중얼거리자 황태손이 대답했다.
“대공자가 큰 전각을 내주었소이다.”
“거기보단 차라리 여기가 낫죠.”
“그건 왜 그렇소?”
정광이 아직 팽가의 대공자인 팽강웅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고 있어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말할 수야 있나.
“며칠 지내보니 편하더라고요.”
“음? 하하하. 재밌는 이유군.”
황태손은 정광의 뜻에 맞춰주고 싶었지만 지금껏 그를 보필해 온 부지휘사의 면을 세워줘야 했다.
“부지휘사의 생각은 어떻소이까?”
잠시 생각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사실 팽가에서 내어준 전각도, 이곳도 저하를 보필하기엔 모자란 점이 많습니다. 그래도 굳이 고르라면 이곳이 낫겠지요.”
“그건 왜 그렇소?”
“아까 그곳은 주변에 전각도 너무 많고 지나다니는 이도 많습니다.”
“확실히 그렇더구려.”
“하지만 이곳은 조금 외진 곳에 있기에 사방을 경계하기가 용이합니다. 금의위가 주변을 둘러싸면 웬만한 이들은 접근할 생각조차 못 할 것이옵니다.”
황태손이 빙그레 웃으며 덧붙였다.
“웬만함을 넘는 이들은 부지휘사가 모조리 막아낼 것이고 말이오.”
“저하. 소인을 이리 높여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하하. 높이다니. 나는 지금 황궁십대고수에게 걸맞는 평을 하고 있는 것이외다.”
“저하…….”
부지휘사는 감격했고 황태손은 기꺼워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정광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야. 황태손 저 인간. 거지로 태어났어도 밥벌이는 문제없었겠네. 아니, 떵떵거리고 살았겠는데.’
사람의 기분을 맞출 줄 알고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이였다.
정광의 마음속에서 경계심이 커졌다.
‘방심했다간 보수를 깎일지도 몰라. 정신 바짝 차려야지.’
한편, 황태손은 다른 고민을 하고 있었다.
팽가에게 있어서 그는 연락도 없이 찾아온 불청객이었다.
그런 그에게 팽가의 대공자가 전각을 내어줬는데 그걸 거절하고 여기에 머문다?
이는 결례를 넘어 큰 모욕을 주는 행위였다.
‘쓸데없는 원한을 살 필요는 없지.’
게다가 그의 평판에도 영향을 미칠만한 일이었다.
“……거참. 어쩐다.”
그가 중얼거리자 정광이 물었다.
“뭘요?”
“대공자에게 뭐라 말해야 좋을지 고민 중이오.”
정광은 황태손의 마음을 알아챘다.
“돌려서 말씀하시죠.”
“무슨 의미요?”
“팽 어르신과의 일화요. 과거 도움을 받았는데 황실의 법도상 세상에 알리지 못했다. 지금도 알릴 순 없지만 팽가에게만큼은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팽가의 중심부에서 좀 떨어진 이곳에서 팽 어르신과 시간을 보내고 싶다. 이렇게요.”
“아!”
황태손은 그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렸다.
‘다른 이도 아니고 팽가다. 그 정도야 흘릴 수 있지.’
과거 그때만 해도 아니었으나 지금의 그는 황태손이었다.
이 정도는 책잡히지 않을 만큼의 힘이 있는 것이다.
‘게다가 사부의 공을 사부의 가문에 알릴 기회야.’
팽만소가 왜 다리를 절게 되었는지는 팽가 사람들조차 모른다.
황궁의 일이었기에 철저히 함구했기 때문이다.
비록 돌려 말하는 것이지만 그 정도만 해도 알아들으리라.
“좋소. 그렇게 합시다. 그런데 말이오.”
“네?”
황태손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나와 사부님 간에 있었던 일을 어찌 아시오?”
황태손이 의심하는 건 당연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정광은 다른 방에 있지 않았는가.
정광은 당연한 걸 왜 묻냐는 듯 대답했다.
“들리던데요.”
“…….”
황태손은 시선을 돌려 부지휘사를 바라봤다.
그의 얼굴은 벌써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분명 내공으로 소리를 차단했었거늘. 대체 어떻게?’
자책하는 부지휘사를 황태손이 위로했다.
“그대의 잘못이 아니오.”
“……저하. 소인을 죽여주십시오.”
“어허. 아니래도.”
황태손의 시선이 정광에게로 옮겨졌다.
진짜 죽여야 할 건 정광이었다.
‘적이라면 말이지.’
상상만 해도 피부가 저릿저릿해졌다.
이 정도의 능력을 아무렇지도 않게 드러내는 것을 보면, 드러내지 않은 것들은 더욱 대단하단 소리였다.
왜, 강호의 격언 중에 실력의 삼 할은 숨기라 하지 않던가.
정광도 당연히 그러고 있을 터.
‘그렇다면…….’
황태손의 마음속에 있던 욕심이 더 커졌다.
지금 그는 황위 다음으로 정광을 가지고 싶었다.
* * *
팽강웅은 무척 기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천하의 누가 황태손에게 감사의 말을 듣겠는가.
이는 졸지에 전각을 빼앗기게 된 팽강휘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가슴은 조부에 대한, 가문에 대한 자부심으로 터질 것만 같았다.
‘게다가 내일 시작될 잔치에서 축사까지 하겠다고?’
‘그야말로 더 바랄 게 없구나.’
팽 씨 형제는 허리를 깊이 숙였다.
“편히 쉬십시오, 저하.”
“고맙소이다.”
이렇게 황태손은 팽강휘의 전각에서 편하게 머물 수 있게 되었다.
정광은 그에게 전각에 있던 사람들을 소개했다.
“제 사제 백승무예요. 강호에선 금권검협이라 불리지요.”
“……얼핏 들어본 적이 있소. 귀공자라 들었소만, 무척 불쌍하게 생기셨소이다. 혹 역용을 한 것이오?”
“네.”
“과연.”
황태손이 고개를 푹 숙인 백승무를 보며 감탄하자 정광이 말을 이었다.
“이쪽은 자오. 함께 다니는 사이죠. 악독한 부자 같죠? 원래는 평범하게 생겼어요.”
“허어. 대단하군.”
자오도 고개를 푹 숙이자 정광은 팽수빈을 소개했다.
“제 제자 팽수빈입니다. 이번에 거뒀죠.”
“허어. 벌써 말이오?”
“그러게요.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원. 그래도 똘똘하니까 다행이지.”
“하하. 그래 보이는구려.”
정광은 소개를 모두 끝내자 할 말이 없어졌다.
사람마다 맞는 일이 있는 법, 정광은 황태손처럼 사람을 쓸 줄 아는 이였다.
“자오. 황태손께 재밌는 얘기 좀 해주실래요?”
“부족하지만 한번 해보겠습니다.”
안 부족했다.
전혀.
자오는 쉴 새 없이 떠들었고 황태손은 넋을 잃고 들었다.
주로 강호의 야사나 자객에 관한 얘기들이었는데 지고한 신분을 가진 황태손이 언제 그런 걸 들어봤겠는가.
가끔 너무 천한 얘기도 나와서 부지휘사가 제지하려 했으나 황태손이 오히려 그를 제지했다.
“부지휘사. 이번만큼은 가만히 계시오. 무척 흥미롭단 말이오.”
“……네, 저하.”
자오는 신이 나서 계속 입을 놀렸다.
정광은 그사이에 조용히 문을 닫고 나왔다.
소란스러운 방과 달리 바깥은 평화스러울 정도로 조용했다.
‘돼지가 주변에 있으면 벌써 소문을 들었을 텐데.’
기다리는 건 성미에 안 맞았지만 이번만큼은 그래야 했다.
돼지가 무슨 짓을 벌일지 확신하지 못해서였다.
‘일단 몸 상태는 최대한 끌어 올렸고…….’
조력자도 쓸 만했다.
부지휘사는 물론이요, 주변을 경계하고 있는 금의위들까지도.
얼굴을 익히고 말도 대충 나눴으니 예상외의 일이 벌어지면 적절히 연계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무엇보다…….
‘진짜와도 안면을 터야지.’
정광의 시선이 자신의 그림자로 향했다.
그리고 그것을 향해 전음을 보냈다.
-이사 올 땐 양해를 구해야죠.
누가 봤다면 미쳤냐고 물었을 테지만 정광은 진지했다.
그는 그림자를 보며 전음을 이었다.
-황태손 저하 그림자 속에 있다가 순식간에 넘어오시네. 정체가 뭐예요?
가만히 기다려 봐도 그림자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정광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과묵하신 분이구나. 자오와 합쳤다가 반으로 나누면 좋겠네.
정말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정광은 불가능한 일을 아쉬워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당장 해야 할 일부터 해야 했다.
-어찌 됐든 간에 오늘 내일 잘해봅시다. 우선 저하께서 식사 중에 기습당하셨을 때를 상정해 보죠. 그쪽은 원래 어떻게 움직이게 되어 있어요?
-…….
-아 진짜. 쓸데없는 기 싸움 말고 빨리 말해요. 혹시 모르니까 연계해야죠.
-…….
-오호라. 이렇게 나오시겠다?
정광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그림자를 노려보던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전음을 보냈다.
-좋아요. 따로 움직이죠. 대신 발목 잡지 마세요.
착각이었을까?
그림자가 미미하게 흔들렸다.
-어라? 보기보다 자존심이 강한 분이네.
-…….
-그런데 뭐라고 불러야 해요?
-…….
-여협? 대협?
-……!
-둘 다 아니시니까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네.
그림자가 눈에 띄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