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105
105화 저주독룡들의 주인 (2)
“건네주십시오.”
이를 악물고서 노아가 말했다. 저보다 훨씬 강한 자들이 전투 직후 식지 않은 기세를 흘려대고 있음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억지로 버티고 선 그 모습에서 성현제는 바바르를 처치한 직후를 떠올렸다. 상대는 전혀 달랐지만, 엇비슷한 상황이기는 했다.
다만 그때와 다르게 살의 같은 건 들지 않았다. 물론 품에 안아 든 청년을 내어줄 생각은 여전히 없었지만.
“세성 길드장님.”
안달하며 부르는 목소리를 깨끗이 무시하며 성현제는 정신을 잃은 한유진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문득 그 얼굴이 어리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나이가 든 편이 어울리지 않을까. 대략… 서른 살 정도.
“야, 남의 동생 무시하지 마.”
죽은 용인종을 살펴보던 리에트가 한쪽 눈가를 찌푸리며 말했다.
“동생 교육부터 시키지 그러나.”
“뭐?”
“남의 것을 탐내면 안 된다고.”
“원하는 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손에 넣어라, 라고는 가르쳐 줬지.”
리에트가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금색 눈이 생글생글, 하지만 사납게 웃는다.
“그리고 나도 가지고 싶거든. 우리 자기가, 뭔가 능력이 많은 거 같던데.”
“사탕상자에 개미가 꼬이는 건 어쩔 수 없다지만.”
“왜 개미야, 지나가던 드래곤이라고 해 줘.”
“일단 어디 눕혀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제 누나가 다가오자 움찔 물러났던 노아가 다시금 용기를 내어 끼어들었다.
“그보다 공략을 끝내고 나가는 편이 낫겠지. 저번에도 깨어나는 데 며칠 걸렸고 밖에는 힐러도 있으니까.”
“여기 2층까지 있었던가? 연약한 허니를 위해 힘 좀 써야겠는걸.”
다시 용의 모습으로 변한 리에트가 자신만만하게 꼬리를 휙— 길게 흔들었다. 속도도 파괴력도 남다르니 그녀가 나선다면 빠른 시간 안에 공략이 끝날 것이었다.
– 태워 줄까?
“챙겨 가야 할 게 몇 있으니 그걸 부탁하지.”
– 응? 아, 혹시 걔들 아직 살아 있어? 뭐 하러 살려 뒀대.
고개를 갸웃하던 리에트가 MKC와 수담의 헌터들을 떠올리곤 물었다.
“이 정도로 거하게 일을 쳤으니 앞으로 쓸모 있게 사용할 수 있지 않겠나. 나름 S급 헌터도 둘이나 되고.”
– 알뜰도 하셔라.
“쓸 수 있는 건 써야지. 앞으로는…….”
성현제는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어렴풋하게 떠오른 무언가가 이내 하얗게 사라진다. 불쾌한 괴리감을 느끼며 그는 다시 한유진을 내려다보았다.
* * *
눈 닿는 곳마다 용의 사체가, 사체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크기도 형태도 제각각이었지만 그 모두가 저주독룡종이다.
– 크르륵.
뱀처럼 긴 몸뚱이를 가진 드래곤이 검은 불꽃으로 이루어진 창에 꿰뚫려 펄떡거린다. 이어 내 앞을 막아서는 것은 제법 반가운 얼굴이었다.
라우치타스.
회귀 전에 마주친 놈보다 더 크고 강해 보이는 저주독룡왕이 괴성을 내지른다. 왕이 대체 몇 마리야. 하긴 우리 동네도 한둘은 아니었지만.
“펫 내세우는 거 말곤 재주가 없나. 정말 한심한 주인이네.”
공격 스킬이 독과 저주가 주라면 어쩔 수 없긴 하겠지만. 지독한 독기 속에서 숨을 가볍게 들이마셨다. 나한테야 상쾌한 공기다.
날개를 펼쳐 라우치타스를 뛰어넘으며 세 개의 머리를 단숨에 잘라냈다. 지금 던전 밖에 나타난다면 그 대륙 자체를 포기하고 바다가 있다는 사실에, 날지 못하는 용종이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할 재앙덩어리가 힘없이 무너져 내린다.
쿠우웅.
그에 별다른 감상 없이, 용을 쏟아내는 주인을 향해 차가운 탄식을 흘려보냈다. 이어 그림자 없는 낮, 마력과 화속성 강화.
하얀 안개를 몰아내려는 놈을 향해.
쏴아아!
차갑게 얼어붙은 빗줄기가 쏟아져 내린다. 후끈하던 공기가 순간 서늘해졌지만, 여기저기서 튀어 오르는 검은 불꽃의 기세를 이기지 못한 채 다시 뜨거워진다.
발이 묶인 놈을 향해 빠르게 날아 다가갔다. 헤르메스의 신발 순간이동은 쓰기가 까다로웠다. 비행 속도야 날개가 더 빨랐고.
“F급한테 발목 잡히고.”
수화한 손으로 후려쳐 주자 놈이 데굴데굴 굴러간다. 정말 보기 좋은 광경이다.
“크윽, 젠장!”
“애완동물도 줄줄이 잃고.”
날개를 접으며 뿔 달린 머리통 위에 내려섰다. 뭔지 모를 스킬로 공격해 오는 것을 가볍게 맞받아쳐 줬다. 스킬 대 스킬이라면 내가 훨씬 우위다.
“이젠 기억까지 너덜너덜해지게 생겼네. 이쯤 되면 알아서 마이너스 F급, 뭐 이런 거 달아야 하는 거 아닌가.”
파짓, 빛이 튀며 놈의 팔이 타들어갔다. 좀 더 쉽게 기억을 파헤치기 위해 선생님 스킬을 썼다. 여기 끌려오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니까 효과가 있지 않을까. 상대의 등급은 높았지만 스킬 효과가 오른 덕인지 무리 없이 파고들었다.
놈의 의식 안쪽, 기억들은 수없이 오래 묵은 먼지처럼 켜켜이 쌓여 있었다. 그 조각들을 억지로 끄집어냈다.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역시 다른 세계들이 존재했다.
‘이놈도 태생 S급 비슷한 거였구나.’
어느 세계에서 배척받아 멸종되다시피 했던 독과 저주의 고대용인종. 용종을 길들이고 융합해 새로운 종을 만들어 내는, 일종의 주술사였다.
나름 흥미로운 내용이었지만 내가 찾는 것은 아니다.
“별을 헤아리는 새에 대해 생각해 봐.”
그녀가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찾아가야 하는지.
다시 기억을 뒤졌다. 이번에는 놈의 스킬에 대한 것이다. 지금 이 정신계 스킬은 양쪽 모두 나가고자 해야만 풀리는 모양이었다. 놈이 도망치지 못한다니, 좋은 정보다.
그리고 다시, 쓸데없는 기억들을 버리고 다시.
“던전을 막지 못하고 잠식당하면 세계가 망하는 거야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인데.”
그렇게 사라진 세계의 기억도 있었다. 던전이 계속해서 터지고 몬스터가 쏟아져 나오고 대부분의 인간이, 그 세계의 지성체가 사라졌을 때. 터져 나간 던전이 있던 부분들 또한 먹히듯 사라지고 무언가에게 완전히 흡수되어 버리는 세계의 모습이.
“꼭 던전이 있는 것도 아니구나. 던전 없이 몬스터가 그냥 돌아다니는 세계도 있네?”
시스템도 각성도 없는 세계도 있었다. 중세 시대? 판타지풍이라고 해야 할까. 마법이며 검기 같은 걸 처음부터 쓸 수 있었던 세계. 어느 순간부터 몬스터가 점점 강해지고 감당치 못하게 되면 역시나 무언가에게 먹히고 말았다.
그런 세계에서 시스템을 만든 자들, 패륜아들은 시스템 대신 다양한 신으로 위장해 신탁과 업적에 따른 선물을 내려 지성체들을 도와주었다. 결국은 망했지만.
“성공한 사례는 없나.”
조금 불안해졌다. 망하면 안 되는데. 적어도 앞으로 백 년, 아니 S급은 수명이 길지도 모르니까 넉넉잡아 이백 년은 버텨야 하는데.
놈이 발악하는 것을 무시하고 다시 기억을 뒤졌다. 쓸데없는 기억, 이것도 별 쓸모없는 기억, 그리고 한유현.
지금보다 나이 먹은 동생이 서늘한 표정을 짓고 있다. 순간 내 가슴도 서늘하게 식었다. …나 때문에 계약할 때는 아닌 듯했다.
성현제가 사라진 후의 일인 듯했다. 근래의 기억이라서인지 이미지도 목소리도 선명하다. 길게 이야기할 필요도 없다는 듯 차디찬 눈빛만 보내다가 이내 유현이의 모습이 사라진다.
다시 한 번 더 그 기억을 꺼내 보려 했지만 무수히 많은 조각들 사이로 스며들어 버리고 말았다. 잠시 멍하니 선 사이에 몸을 피하려는 용인종 놈을 붙잡아 다시 찢었다.
내게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기억들을 뒤지길 수차례, 드디어 특이한 무언가가 손에 붙잡혔다.
“세 번째, 가장 깊은 샘?”
샘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떠오르는 이미지는 전혀 달랐다. 마치 블랙홀의 상상도처럼 끝없이 깊은 구멍 속에 물 대신 빛이 흐르고 있었다.
이어.
“다섯 번째, 눈이 내리는 나무.”
그 크기를 짐작할 수조차 없는 거대한 나무와, 흩날리는 눈과 같은 입자. 무한히 뻗어 있는 가지 사이로 날아가는 새 한 마리가 보였다.
나무의 크기에 비해 너무나 작아 형체를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분명 어지간한 드래곤 이상의 몸집을 지녔을 하얀 새.
별을 헤아리는 새. 틀림없이 그녀일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눈이 내리는 나무가 뭐지? 어디에 있는 거냐?”
“내 입으로 들을 생각, 없다더니.”
으르렁거리듯이 말한 놈이 돌연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이렇게까지 꼬여 버릴 줄이야. 그래도 확실한 건 한유진, 네가 바로 열쇠라는 거겠지.”
“뭐?”
“네놈만 죽이면 이 세계도 끝이라는 소리다.”
뭔 헛소리야. 그보다 어떻게 죽이려고. 이미 떡이 되게 처맞은 주제에, 라고 생각하는 순간 공간의 일부가 부서져 내리기 시작했다.
내게 멱살이 잡혀 있던 놈의 형체가 사라진다. 허공의 금이 더더욱 커지고 조각조각 파편이 흩어졌다.
공간의 딱 절반.
부서진 그 너머로, 공허한 또 다른 공간에서 거대한 드래곤이 몸을 일으켰다. 펼쳐지는 날개 너머로 흩뿌려진 빛이 보인다. 아니, 별이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눈앞이 아득해졌다.
“독과 저주의 고대용인종, 디아르마.”
내 공간의 더욱 안쪽으로 뒷걸음질 치며 중얼거렸다. 수많은 저주독룡들을 만들어 낸, 주인, 그자의 전룡화. 약화되지 않은 본체. 떡잎 스킬이 간신히 놈을 읽어 낸다.
“…나보다 강한 건 확실하군.”
그리고 지금 저 드래곤은 실존했다. 정신체가 아닌 진짜가, 공간을 부수고 난입한 것이었다. 전신이 약하게 떨렸다.
“이래도 되나.”
– 대가로 오랜 시간 잠들어야겠지. 하지만 너를 죽이는 것으로 만족하겠다.
“배포가 너무 작으시네.”
비꼬듯 말은 내뱉었지만 목소리 끝이 흐려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드래곤이 움직인다. 그 발톱 끝이 내가 있는 공간을 부수려는 그때.
통!
공이 튀었다. 배구공이다. 그려진 얼굴이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통— 통!
– 반칙입니다!
배구공, 신입이 소리쳤다.
– 너는.
– 반칙입니다! 연결하겠습니다, 물방울 선배님!
그리고 비가 내렸다.
쏴아아—
불이 꺼지고 독기가 흩어지며 공기가 무겁게 젖어든 그 속에서. 거대한 형체가 나타난다. 드래곤이 가시를 세우며 소리쳤다.
– 인어여왕!
그 말대로, 인어였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그 어떤 인어와도 다른 이미지였다. 푸른색 비늘과 투명한 지느러미를 지닌 무척이나 아름다운 여성체였지만, 동시에 흉포했다.
세상에서 가장 전투적인 형태의 인어라고 해야 할까.
까드득.
날개처럼 펼쳐진 등의 비늘이 서로 밀려 부딪치며 움직였다. 맑은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귀걸이가 어쩐지 눈에 익었다. 인어여왕의 손에 기다란 창이 들리고 드래곤이 크게 포효했다.
– 유폐된 패륜아가 밖으로 나서다니!
“엄밀히 말하자면 허니의 의식 속이에요. 우리는 나올 수 없죠. 절대로.”
드래곤 사냥에 나선 기사처럼 창이 겨누어졌다. 그녀가 나를 돌아보고, 흰자위 없는 짙푸른 눈이 웃음을 머금는다.
“허락해 주겠어요, 허니?”
“…예?”
“이곳의 주인은 허니니까요.”
그녀와, 그 너머의 용을 바라보았다. 허락이라니.
“저보다 더 간절히 저놈 머리를 원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요. 그러니 협조 부탁드리겠습니다.”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창끝이 휘둘러졌다. 마치 수중에 잠긴 것처럼 공기가 묵직하게 흔들리고.
– 크아아!
드래곤이 인어여왕을 향해 덤벼들었다. 놈이 내 공간을 부수지 못하고 들어서는 순간, 크기 또한 줄어들었다. 군데군데 피를 흩뿌리는 몸뚱이가 기껏해야 라우치타스의 배 정도다.
심지어 공포 저항과 팽팽히 맞서던 위압감까지 확 줄어들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인어여왕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녀 또한 인간보다 약간 큰 정도로 작아진 채였다.
“아무리 의식 속이라고 해도 그대로 맞붙었다간 허니가 위험해질 수도 있거든요. 저와 연결해서 위험하지 않을 수준으로 맞추어 놓았죠. 그리고, 협조라고 했잖아요?”
그래, 협조지.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디아르마 씨, 다시 한 번 갈까요?”
내리는 빗속에서 날개를 펼쳤다. 인어여왕을 경계하던 용이 송곳니를 드러낸다.
– 약화되었다 해도 조금 전과는 다를 거다!
“그편이 더 반가워. 옆구리 정도는 물어뜯겨야 진짜 싸웠다는 기분이 들지.”
즉사만 면하면 되는 공간이 아니던가. 그러니 있는 힘껏 나를 너덜너덜하게 만들어 봐라.
차디찬 비를 따라 번개가 쳤다.
세상을 녹여 버릴 듯 흘러넘치는 독기 속에 광포한 바람이 내 몸을 찢었다. 잘려 나간 날개를 접고 용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용의 눈가에 피가 흐른다. 물론 내 것이다. 눈꺼풀 사이로, 비늘 사이로 스며든 피가 불타올랐다.
괴성과 살이 타는 냄새.
타다 못해 녹아 내린 틈새에 독기 섞인 피의 창을 박아 넣고, 다시 번개를 내리쳤다. 한곳으로 집중된 전류가 눈부시게 터져 나간다.
그렇게 갉아먹고 갉아먹어 남은 끝에.
금이 간 마석 하나가 내 손에 쥐어졌다. 그리 크진 않았다. 손바닥보다 약간 작은, 탁한 흑색 마석이었다.
투둑 툭.
비는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씻겨 나가는 핏물 속에 서서 인어여왕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별을 헤아리는 새에 대해 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