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115
115화 쉬라고 해도 (1)
“아저씨.”
묵직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가슴이 약하게 떨렸다. 신화급의 힘이 향해 오자 공포 저항도 별 소용 없었다. 얼른 선생님 스킬을 끄자 조금 나아졌다.
“제가 스킬 쓰지 말라고 했잖아요.”
눈앞에 서 있는 건 분명 예림이인데 평소와는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인어여왕을 떠올리게끔 하는 위압감을 베일처럼 휘감고 있어, 여느 때처럼 가볍게 대하기가 힘들었다.
근데 물의 지배자 스킬 아이템 지속 시간이 꽤 기네.
“지금은 안 쓰고 있어. 저기, 예림아.”
“네.”
“아직 스킬 사용 가능한 거 같은데 이럴 게 아니라 좀 더 몸에 익혀 보는 게—”
거대한 파도가 덮쳐들었다. 그런 착각이 들었다. 조금 전에는 진짜 화난 게 아니었구나. 예림이의 눈꼬리가 약간 실룩거렸을 뿐인데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 아니…….”
무심코 유현이의 팔을 붙잡으며 더듬거렸다. 진정해라. 다 잘 끝났는데 왜 이래.
“선생님 스킬 쓰기 전에 아저씨한테 부담이 클 거라는 거, 알고 있었죠?”
“알고는, 있었지만. 하지만 원래 다 부담 같은 건 감수하는 거잖아. 던전에 발 들이면서 털끝 하나 다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딨냐. 저번에 두꺼비 잡을 때는 아예 며칠 잠들기까지 했고.”
그에 비하면 이번은 아직 두 눈 멀쩡히 뜨고 있다.
“그런 거랑은 달라요.”
예림이가 단호하게 말했다. 찔러 오는 시선이 여전히 무겁고도 무섭다. 간담이 서늘해지는 이 기분, 오랜만이구나.
“두꺼비 때처럼 반드시 써야 하는 상황이 아니었잖아요. 굳이 쓸 필요 없었잖아요. 그냥 내버려 뒀어도 이겼을 테니까.”
“하지만 네가 조금이라도 더 물의 지배자에 대해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면…….”
“아저씨.”
…아저씨란 소리가 이렇게까지 살벌하게 들릴 줄은 몰랐는데. 이럴 시간에 지배자 스킬을 더 살피라고 하고 싶지만 그랬다간 더 화내겠지. 하지만 아깝다.
“야, 좀 말려 봐.”
안절부절못하다가 동생에게 중재를 부탁했다. 하나 돌아오는 건 예림이의 것 못지않게 싸늘한 눈빛이었다.
“이번만큼은 박예림 헌터 편이야.”
어, 음. 너도 화났나 보구나. 그런데 유현이는 예림이의 위압감이 느껴지지 않는 건가. 아니면 예림이가 조절을 잘하는 걸까. 유현이 등급상 후자가 맞겠지. 우리 예림이 벌써 능력 조절하는 게 많이 능숙해졌구나.
그 조절력을 날 다그치는 데 사용하는 건 뼈아프지만.
“절 생각해서 그랬다는 건 잘 알아요. 하지만 이런 식은 안 되죠. 다행히 별일 없긴 했지만 물의 지배자가 얼마나 어마어마한 스킬인지 지금도 느끼고 있어요. 그런데 이런 감각을 아이템 사용자도 아니면서 덥석 받아들여요? 심지어 힘들다 싶으면 스킬 꺼야지, 그러긴커녕 세성 길드장까지 받아들이다니. 미쳤어요, 진짜?”
“진정 좀, 하고…….”
너, 지금 엄청 무서워. 절벽 끝에 서서 폭풍우 치는 바다를 바라보는 기분이다. 파도가 눈앞까지 치솟아 오르고 저만치 커다란 배 하나 가라앉고 있고, 뭐 그런.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 썩은 동아줄이나마 잡는다는 심정으로 성현제를 돌아보았다.
“저기—”
“나도 꼬마 아가씨 편이라네.”
아니 댁은 왜 또. 괜히 억울해져 이유가 뭐냐고 노려보자 뻔뻔한 대답이 돌아왔다.
“쓸데없이 무리해 망가지기라도 하면 내 손해잖나. 빚진 거 이자도 못 받았을 뿐더러 세 번 도와주기로 한 것도 그대로 남아 있지. 받을 게 많아.”
“아저씨, 빚졌어요? 얼만데요?”
“세 번 도와준다는 소리는 또 뭐야?”
예림이와 유현이가 연달아 추궁해 왔다. 저 인간이 순수하게 내 걱정 안 할 것이야 알고 있었지만 저걸 하필 지금 말하냐. 날 엿 먹이려는 게 틀림없다.
“그, 돈은 아니고. 별거 아닌데.”
“별거 아니면 뭔데요.”
“별거 아닐 리가 없잖아.”
젠장, 내 편은 하나도 없구나. 아니, 내 편인데 내 편은 안 들어준다고 해야 하나. 이미 게이트도 열렸겠다, 그냥 튈까. 눈치 보며 슬슬 뒷걸음질 치는데 물이 다리를 감듯이 붙잡았다. 뒤로 넘어지는 걸 공기가, 공기 중의 수분이 푹신한 소파처럼 받쳐 준다.
와, 예림이 물 다루는 솜씨 좀 봐라. 감격스러울 정도지만 그걸 왜 나한테 쓰니. …이렇게라도 연습을 하니까 다행인 건가.
“아저씨는 머리 식힐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각성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위험한 일을 너무 많이 겪기도 했잖아요. 그래서 더 위기감이 없는 걸지도 몰라요.”
“너도 얼마 안 됐어.”
“전 스탯 S급이잖아요. 정신력 스탯도 높거든요? 하지만 아저씨는 준일반인이에요, 일반인!”
내 경력 거의 5년인데 억울하다. 예림이의 잔소리에 유현이도 거들고 나섰다.
“박예림 헌터의 말이 맞아. 한동안은 푹 쉬는 게 어때?”
“쉬라니.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몬스터도 몬스터지만 협회 쪽에서도 닦달이고 해외에서도 연락해 오고 명우랑 던전 돌기로 하기도 했고…….”
유현이 스킬이랑 정령 봐줘야 하고 좀비 놈 대비도 해야 하고 곧 나타날 스태미너 포션 재료 던전도 손에 넣어야 하고 신입이 맞춤형 보상 준다고 약속했으니 S급 던전도 좀 돌아 줘야 하고 문현아랑 김성한, 노아도 성장시켜야 하고 리에트 문제도 있고 다른 태생 S급도 찾아야 하고 송태원도 협회장 만들 수 있을지 찔러봐야 하고… 참, MKC 최석원도 처리해야 하지. 도하민도 데리고 와야 하고, 또 누가 있었던 거 같은데.
아무튼 할 일이 많다. …왜 이렇게 많지.
“협회는 내가 막아 줄게.”
“그러다 약속 어겼다고 각성센터 인원 제한 수 높여 버릴지도 모르잖아.”
“머리가 있다면 그렇게는 못 나올걸. 형이 쉬고 싶다고 하면 유명우 헌터도 협조해 줄 테고, 세성과 브레이커도 거절은 안 하겠지. 이것도 보호의 일종이니까.”
“한유진 군의 일이 아니더라도 협회에 압력을 가하는 건 즐거운 여가 활동이지.”
그게 여가 활동이면 평소엔 대체 뭘 하는 거야. 아무튼 막아 준다면 환영이었다. 각성센터 개장까진 아직 시간이 꽤 남았으니 협회의 징징거림만 없다면 느긋이 진행해도 되겠지. 일이 줄었다. 기쁘다.
“느긋하게 하세요, 아저씨. 누가 쫓아오기라도 해요?”
예림이의 목소리가 살짝 누그러졌다. 내 이마께를 시원한 손이 어루만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려고 노력은 해 보마.”
“노력이 아니라 아저씨부터 챙겨요, 아저씨부터. 아까 같은 일, 안 고마워요.”
“알았어. 미안해.”
또다시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면 다시 비슷한 짓을 해 버릴 거라 더욱 미안했다. 하지만 나는 예림이가 더 강해져서 조금이라도 더 안전해지길 바란다. 내 욕심이다.
아이템의 효과가 떨어져 가는지 내리는 빗줄기가 약해졌다. 이어 비가 완전히 그치고 예림이 몸을 감싸던 위압감도 사라졌다. 아직 화가 덜 풀린 건지 툴툴대는 모습이 무섭긴커녕 귀엽다.
“물을 다루는 건 어때? 많이 빼 온 거 같아?”
“잘 모르겠어요. 감각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연습 좀 해 봐야 할 거 같은데. 물 많은 던전에 며칠 처박혀 있을까 봐요.”
“무리하지는 마.”
예림이가 밉지 않게 눈을 흘겨 왔다.
“아저씨가 할 말이에요?”
아니 나는 어른이니까. 성현제에게 진 빚이 뭐냐고, 도와주기로 한 건 또 뭐냐고 캐물어 오는 걸 적당히 얼버무리며 던전을 빠져나갔다. 호수는 사라지고 큰 구덩이만 남은 황량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송태원의 그림자 짙은 얼굴도.
특수격리소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으니 무척이나 난감하겠지. 정말이지 이게 웬 날벼락이냐. 그래도 덕분에 유현이가 날뛴 건 슬쩍 묻어가도 되겠다.
“던전은 무사히 공략하신 모양이로군요.”
“예. 저긴 특이한 던전이라, 공략 방법은 따로 설명드리겠습니다.”
마른 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며 대답했다. 방법만 알면 공략하기 어렵지 않을… 리가 없지. 다른 헌터들이 들어가면 막판에 유현이나 성현제가 튀어나오는 거 아니냐. 저걸 어떻게 깨. 난감해하며 게이트를 돌아보는데 게이트의 푸른빛이 희미하게 흔들리더니 이내 사라져 버렸다.
“…설명드릴 필요가 없어졌네요.”
다행이긴 하지만. 이상 현상에 송태원이 참지 못하고 긴 한숨을 흘려냈다.
“생성되자마자 터져 버린 것에 이어 던전이 돌연 사라지기까지 했으니 한동안 시달리게 생겼습니다.”
“그래도 저 던전 더럽게 까다로워서 없어진 편이 훨씬 나을걸요. 아니면 그냥 지각 이상으로 물이 솟구쳤다가 스며든 거라고 덮어 버리세요. 어차피 흔적도 없는데.”
“그럴 수는 없지요.”
송태원이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곤 각 길드에서 나온 사람들로부터 수건을 받아 물기를 닦아내고 있는 유현이와 성현제를 바라보았다.
“안에서 별다른 일은 없으셨습니까? 몬스터가 아닌 사람 간의 일 말입니다.”
“네. 별문제 없었습니다.”
그냥 내가 좀 야단맞았지. 송태원은 수고 많으셨다고 고개를 살짝 숙인 뒤 후처리를 위해 자리를 떠나갔다. 바쁘다니까. 한동안 더 바쁘겠지. 송태원에 비하면 난 한가한 편인 게 아닐까.
‘역시 저 사람은 밑에서 뛰는 것보다 위에 두는 편이 여러모로 나을 거 같은데.’
협회를 S급 헌터가 길드장으로 있는 준길드처럼 만들면 인력 부족 또한 해결하기 쉬울 테고. 지금이야 일반인이 수장으로 앉아 있으니 상급 헌터는 소속되길 꺼리고 있다.
송태원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유현이와 성현제를 불렀다.
“최석원을 처리해야 해요. 최소한 해주라도 해야 합니다.”
성현제에게 이번 던전이 생겨난 이유를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효도중독자와의 계약이 이어지고 있는 한 최석원을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던전 밖에서는 대놓고 건드리기 힘들다네. 도련님이 사고 친 직후기도 하고.”
“유현이가 사고를 쳤다니요. 증거 있습니까? 제 눈엔 물에 젖은 진흙밖에 안 보입니다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번 일로 최석원 측에서 경계를 강화할 것은 분명했다. 조용히 목 따는 건 힘들겠지.
“그럼 제가 방문 요청해서 해주라도—”
“형은 휴가 중이야.”
유현이가 딱 잘라 말했다.
“우리가 주시하고 있을 테니 한동안은 그런 일 신경 쓰지 마.”
신경 안 쓸 수가 있겠냐. 하지만 예림이까지 다가와서 또 무슨 일이냐며 모난 눈을 하는 탓에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간은 얌전히 쉬는 척이라도 해야지.
* * *
– 위잉.
둥글납작한 로봇청소기가 윙윙 소리를 내며 거실을 배회하고 있다. 그 위에 올라앉은 삐약이가 청소기를 재촉하듯 삐약거렸다. 블루가 있을 땐 파리 잡듯 후려쳐 대는 바람에 쓰지 못했었다.
‘귀여워라.’
청소기를 타고 노는 삐약이 영상을 SNS에 올렸다. 그간 늘어난 팔로워 수가 장난이 아니다. 댓글과 메시지도 가득 쌓여 있지만 확인하진 않았다. 그냥 업로드만 꾸준히 했다.
소파에 늘어지듯 앉자 피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무릎 위로 뛰어올라 왔다. 목덜미를 긁듯이 쓰다듬어 주자 만족스런 그릉거림과 함께 몸을 발랑 뒤집는다. 느릿이 흔들리는 꼬리가 기분 좋아 보였다.
켜진 티브이에서는 어제의 호수 던전에 대한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협회 측 사람이 심각한 얼굴로 어쩌고저쩌고 쓸데없이 긴 말을 늘어놓는다. 채널을 돌려 보았지만 흥미가 가는 프로그램은 없었다.
‘어차피 재밌는 건 다 봤고.’
회귀의 단점이다. 이즈음엔 문화생활과 거리가 멀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뒤져 보니 유명한 건 거의 다 본 것들뿐이었다. 헌터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되었을 땐 티브이와 친하게 지냈으니까. VOD로 구매해 봐 버렸다.
이젠 뭐 하지. 책이라도 읽을까. 예림이는 스킬 수련한다고 던전 들어갔고 유현이도 어제 일 때문에 바쁘고. 명우 쇼핑하는 거나 따라갈 걸 그랬나. 이틀 연속으로 뭘 그리 사는지 모르겠지만.
“안 되겠다, 산책이라도 하자.”
피스를 안아 들고 삐약이를 불렀다. 로봇청소기에서 내려오다가 삑 하고 넘어지는 걸 주워다가 피스 등 위에 얹었다.
집 밖으로 나가자 지키고 서 있던 헌터가 나를 바라봐 왔다. 전엔 여기까지 지키진 않았는데 감시가 더 늘어났다.
“옥상에 산책 가요.”
목적지를 통보하곤 옥상정원으로 올라갔다. 아직 오전이라 여름치곤 햇살이 여리다. 곧 뜨끈해지겠지만.
– 꺄아아!
몇 걸음 떼지 않아 블루가 날개를 활짝 펼치며 날아왔다. 그대로 달려들려는 블루를 향해 피스가 이를 살짝 드러냈다. 그러자 화들짝 얌전히 내 앞에 내려앉는다.
– 꺄우.
“그래, 잘 있었어? 지내는 데 불편하진 않고?”
고개를 들자 정원 한쪽에 제법 멋지게 세워진 블루의 집이 보였다. 혼자 밖에서 지내는 게 쓸쓸하진 않을까. 역시 블루에게도 맞는 헌터를 찾아 주고 싶었다. 내 안전이야 국내 헌터와 짝을 맞춘다면 피스와 번갈아 가며 자리를 비우면 되니까. 노아도 있고.
문현아에게 넌지시 말을 건네 볼까? 분명 반길 텐데. 나중에 예림이와 활동하게 된다면 비행형 기승수가 있는 편이 좋을 거고.
생각난 김에 문현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가기 무섭게 낯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한유진 님, 무슨 용건이십니까?]“네……? 그, 브레이커 길드장님 전화 아닙니까?”
[한동안은 보안실로 전화가 연결됩니다. 한유진 님께 오는 전화 또한 보안실을 거치도록 되어 있습니다. 휴가시니까요.]…미친? 대체 내 번호에 무슨 짓을 해 놓은 거냐. 전화상 업무도 금지라 이건가.
“어, 브레이커 길드장님께 연결 부탁드립니다. 그냥 심심해서 시간 나면 놀러 오시라는 용건입니다.”
알겠다는 대답과 함께 다시 신호음이 들려왔다. 이번에는 제대로 문현아가 받았다. 도청되는 게 아닐까 싶어 간략히 놀러 오지 않겠냐고만 물었다. 흔쾌히 오겠다는 대답을 듣고 전화를 끊자, 뒷골이 당겨 왔다.
‘유현이냐 예림이냐 아님 둘 다냐.’
어쩌면 그 외의 협력자가 더 있을지도. 애들이 나를 너무 못 믿네.
* * *
얼마 지나지 않아 문현아가 도착했다. 피스와 블루에게 탐욕과 귀여움이 섞인 눈길을 보내던 그녀가 불쑥 말을 꺼냈다.
“요즘 형님 동생 평판이 영 좋지 못하다는 거, 알아?”
…이건 또 뭔 소리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