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126
126화 이린 (2)
천장의 전등이 환한 빛을 발한다. 내 손으로 몇 번이나 갈아 끼운 기억이 있다. 거실은 그리 넓지 않았다. 소파와 티브이. 벽시계는 멈춰 있었다.
“…왜 하필 여기냐. 그보다 너, 정신계 스킬을 쓸 수 있는 거였어?”
아니면 정령의 계약 스킬 효과 중 하나일지도.
[유현이가 좋아하는 곳!]“유현이가?”
[응, 형이랑 같이 살던 집이에요. 그러니까 린이도 여기 좋아해.]도마뱀이 꼬리잡기라도 하듯 빙글빙글 돌며 말했다. 유현이에 대해 말하는 목소리에 애정이 듬뿍 담겨 있는 것이 느껴졌다. 이 녀석은 좋은 도마뱀이구나.
[이 스킬은 형 거예요.]빙글빙글 돌던 이린이 멈추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까만색 눈이 보석처럼 반질거린다.
“내 거라고?”
[아직 제대로 못 쓰는 거 같아서, 린이가 도와주긴 했지만.]“난 이런 스킬 없는데.”
[있어요. 그런 힘.]아니, 이건 내 거라기보단 도마뱀 주인 놈의… 문득 좀비가 디아르마의 후계자라고 나를 칭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땐 저주독룡종을 조합한 것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디아르마의 다른 스킬도 쓸 수 있게 된 건가?’
스킬 창에는 없지만. 어떻게 사용하는지도 모르겠고. 패륜아들에게 상담해 볼까.
고개를 들어 새삼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좋아하는 곳이라니, 기분이 묘해졌다. 나는 견디지 못하고 도망쳤었는데. 여기 있으면 눈이 닿는 곳마다 지난 일들이 너무도 선명히 떠올라서. 집안 구석구석은 물론이요 별 특징 없는 하얀 컵도, 텅 빈 책상도, 화장실 슬리퍼조차 보기 싫어서 거의 몸만 빠져나오다시피 이사했었다.
그랬었는데 이제 와서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린아.”
[응?]“지금 유현이가 조금 이상한 거 같은데, 혹시 너와 관련 있어?”
[린이는 조금, 형은 많이요.]“뭐?”
[형, 린이 안아 줘요.]원하는 대로 도마뱀을 안아 들었다. 딱 좋을 정도로 따뜻하고 부드러우면서도 말랑거렸다. 겨울에 안고 있으면 정말 기분 좋을 거 같다.
[정령은 순수한 힘이니까요. 린이를 받아들이면서 더 솔직해진 거예요. 속성 탓에 조오금 난폭해지기도 했고? 거슬리는 걸 치워 버리고 싶고 그럴 힘도 생겼으니 참지 않은 거예요.]“…성현제가 그렇게나 싫었나.”
[성현제도 유현이를 죽이려고 했을걸요! 형이 무척이나 유용하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유현이는 그걸 눈치챈 거예요.]이린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말했다.
[유현이는 많이 누르고 있지만 둘의 본성은 비슷하니까. 공격 스킬 효과 두 배를 받아 보고 성현제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 알아차렸어요. 다른 사람을 다 죽이고 형을 빼앗으려 했을 거라는 걸요.]그랬더라면 성현제도 살아남진 못했겠지. 정확히는 내 손에 죽었을 것이다. 성현제가 진짜 그렇게까지 하려 했을까, 라는 물음에 이린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이나 공유해 줬지만 별문제 없었는데.
“유현이가 불안해한다니. 아깝긴 하지만 어떻게든 멀리 떨어뜨려 놔야 하나, 그 인간.”
[아냐, 괜찮아요! 유현이도 진정하면 있는 게 낫다고 생각할걸요. 형이 쓸모 있으면 계속 보호해 줄 테니까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요. 형을 지켜 줄 사람이 많아야 유현이도 부담이 덜할 거예요.]“부담은 덜해진대도 나 뺏기는 기분 들어서 쓸쓸하다던데.”
[쓸쓸하지 않게 해 주면 되죠. 유현이가 제일 좋다고 해 주세요.]“당연히 내 동생이 최고지. 성현제 같은 거랑 비교가 되겠냐.”
[많이 말해 줘요. 형이랑 한 번 틀어졌었잖아요. 또 그럴 수도 있으니까 불안해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거예요. 유현이는 아직 어리거든요!]“넌 더 어려.”
[린이는 태어날 때부터 많이 알고 있어요!]“그래도 어린 건 어린 거야.”
이린이 투정 부리듯 앞발로 내 팔을 툭툭 쳤다. 하는 짓이 제법 귀엽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간지럽다는 듯 웃는다.
“나름 표현 많이 해 줬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몇 번이나 말해 줬어요?]“음… 아니, 그걸 대놓고는 잘 말 안 하지.”
[왜요? 많이 해도 돼요! 가짜 아니잖아요. 진짜니까! 유현이가 좋아할 텐데도 하기 싫어요?]“싫은 게 아니라, 그냥 좀 어색해서? 어릴 때도 아니고. 크면 잘 안 하거든.”
이린이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탓하듯 노려봐 왔다. 아니 진짜 보통은 잘 안 하잖아. 특히 형제간에는. 부모자식 간이고 무척이나 화목한 가정이면 자주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유현이를 키우긴 했어도 일단은 형제다.
[형.]“…노력해 볼게. 그걸로 괜찮아지는 건가?”
[아마도요!]아마도라니. 무책임한 말일세. 도마뱀의 말랑한 볼을 콕 잡아당겼다. 꼬리를 파닥대며 아프다고 엄살을 부린다.
[유현이는 형이랑 계속 함께 있었잖아요! 근데 갑자기 갈라졌고! 진짜 완전히 괜찮아지려면 예전처럼 돌아가야 할걸요!]그 말에 내가 도망친 장소를 바라보았다. 나는 떠나갔는데. 동생은 나보다도 먼저 떠났었는데. 그런데도 사실은 여전히 이곳에 남아 있었던 것일까.
무심코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나와는 달리 잘난 놈이니까 그냥 잘 먹고 잘 살지. 나도 정말 미련하게 굴긴 했는데 유현이 놈도 만만찮은 거 같다. 등급은 달라도 피는 못 속인다는 건가. 이런 걸 닮을 필요는 없는데.
“나야 동생 하나 보고 살았다지만 걔는 가진 것도 많으면서 왜 그러냐.”
[사랑받는 걸 싫어하는 사람은 없어요, 형. 인간이 아니라 그 무엇이든요. 그런 기분 아예 처음부터 몰랐다면 괜찮았겠죠. 근데 알고 나면 포기 못 해요. 유현이를 사랑해 주는 사람은 형밖에 없고요!]“걔 이제 스물이야. 앞으로 어떻게 될진 알 수 없어.”
[안 돼요! 없어요!]“저주하냐.”
없긴 왜 없어. 없으면 안 되지. 회귀까지 했는데 내가 키운 동생 놈 결혼해서 애 낳고 잘 사는 건 봐야 한다. 이젠 당당하게 혼주석에 앉을 수 있다고. 그러고 보니 예림이도 내가 앉아야 하나. 헉, 잠깐만. 예림이는 신부 입장도 있잖아. 한 십 년쯤 후일 테니 마흔 넘으면 꽤 그럴듯… 아, 아니다. 그때도 삼십 대구나. 어떤 새끼가 데려갈진 모르겠지만 우리 애한테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죽일 테다.
“애들 애기들 보고 싶다. 앞으로 이십 년은 더 살아야지.”
[형?]“그래서 진정되고 내가 잘 다독여 주면 앞으론 괜찮은 거냐? 네 힘 쓸 때마다 저러진 않겠지?”
[오늘 정도는 아닐걸요!]약간은 맛이 간다는 거구만.
[아직 린이한테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요. 심하면 물이라도 끼얹으세요! 그럼 좀 진정될걸요!]예림아, 부탁한다.
“너한테 정령의 계약이라는 스킬이 있던데, 정확히 어떤 스킬인지 알 수 있을까?”
[그냥 정령의 계약이요! 계약한 등급이 정령의 최대 등급이에요. 형, 형. 린이 등급 뭐예요?]까만 두 눈이 빛을 머금으며 반짝거렸다. 자기 스킬인데 확인 못 하는 건가.
“L급.”
[와, 린이 대단해! 린이 대단해!]이린이 신이 나서 외쳤다. 덩달아 맞장구쳐 주며 진짜 대단하다고 칭찬해 주었다. L급까지 성장 가능하다니.
“우리 린이 앞으로 엄청 강해지겠네.”
[응! 린이가 제일 강해요!]“유현이랑도 사이좋게 잘 지내고. 계약 해지되거나 하진 않겠지?”
[한쪽이 소멸하기 전까진 해지 안 돼요!]린아, 쑥쑥 자라다오. 얘만 다 커도 앞날에 대한 걱정이 싹 사라지겠는데.
“다 성장하는 데 얼마나 걸릴까?”
[린이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천 년쯤이요!]…정말 많이 느리구나. 좋다 말았다.
린이를 쓰다듬어 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겨갔다. 주방에는 식기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식탁의 의자는 두 개다. 벽에 걸린 달력은 3년 전의 것이다. 몇 장 넘겨 보았다. 내 생일에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돌아서서 방으로 향했다. 회귀 전까지 더해져, 오랜 시간이 흐른 후다. 그런데도 눈을 감고도 찾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문손잡이를 잡고 천천히 돌렸다. 방 안의 풍경도 예전 그대로였다. 다만 마지막으로 봤을 때완 다르게, 생활감이 있었다. 책상 위도 텅 비지 않았다. 교과서와 필기구가 보인다.
“금방이라도 유현이가 뒤에서 부를 거 같네.”
형, 거기 서서 뭐 하냐고.
[유현이 밖에 있어요, 형.]“응. 가 봐야겠다.”
좀 더 둘러보고 싶었지만 밖에서 무슨 난리가 벌어지고 있을지 모르니까. 예림이에게 부탁해서 동생 놈 물벼락 맞게 해야지.
“다음에 또 보자, 린아.”
[린이 더 크면 밖에서도 말할 수 있어요!]“그래, 그럼.”
…어떻게 나가지. 분명 둘 다 나가고자 하면 해제되는 걸로 기억하는데, 안 된다.
[형?]“잠깐만, 될 거 같기도 하고…….”
디아르마의 기억을 되살려 보자. 일단 상호 동의는 되었고, 아, 이거 그 자식 거랑은 좀 달라!
“이린아, 네가 개입해서 변질된 거 같다…….”
[진짜요?]“응.”
별수 있나. 머리 맞대고 풀어 봐야지. 시스템으로 규격화되지 않은 스킬이라는 거 은근 위험하구나.
정신계 공간 스킬은 한참 만에야 해제할 수 있었다. 그래도 덕분에 스킬에 대한 공부는 제대로 했다. 연습 좀 하면 린이의 도움 없이도 사용 가능할 듯했다.
눈을 뜨자 천장이 보였다. 밖이 아닌 실내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지. 커튼 너머로 빛이 어슴푸레한 게 밤은 아니다. 침대 위인 듯하고, 양팔이 각각 붙잡혀 있었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유현이가 보였다. 내 쪽으로 몸을 튼 채 깊이 잠든 듯 미동도 없이 숨소리만 약하게 들려왔다.
일단 멀쩡한 거 같네.
반대편에는 예림이가 자고 있었다. 한 손으론 내 손목을 붙든 채 이불을 반쯤 걷어차고 대자로 뻗어 있다.
‘예림이도 멀쩡해 보이고.’
다행히 별일 없었나 보다.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유현이가 잡고 있는 팔을 뺐다. 그 서슬에 감겨 있던 눈이 살짝 떠진다.
“…형?”
“그래, 더 자라.”
일어나지 말고. 가벼운 토닥임에 다시 잠에 빠져드는 게… 별일 있었던 모양이다. S급 헌터가 피곤해질 만한 일이 말이다. 홍콩은 무사한 거겠지.
“예림아, 손 놓고 자자.”
“우으… 길드장 새끼, 덤벼…….”
예림이가 잠꼬대를 했다. 응, 그래. 둘이 붙었나 보구나. 무사해서 다행이다. 성현제는 살아 있나 몰라.
둘이 깨지 않도록 조심해서 침대에서 내려왔다. 셋이 아니라 넷이 자도 될 만큼 커다란 침대를 돌아보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둘 다 잘 자네.’
아, 귀여워. 얌전히 잠들어 있으니 천사가 따로 없다. 그리고 침대 옆 바닥엔 천사의 모델로 딱 걸맞은 청년이 웅크리고 있었다.
노아 씨, 왜 바닥에서 자고 있어요. 자리 넉넉한데. 여기 다른 침실 없나?
“노아 씨, 올라가서 주무세요.”
내 부름에 노아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피곤한 얼굴로 눈을 비비더니 내가 가리킨 빈자리를 보고 질겁한다.
“아, 아뇨. 저 잠 깼어요.”
“예림이는 모르겠지만 유현이는 잠버릇 얌전해요.”
“괜찮습니다. 세수하러 갈게요.”
노아는 두 사람에게 약간 질린 시선을 던지곤 자리를 떠나갔다. 애들이 어제 좀 많이 난리 쳤나 보다.
바구니 속에 잠들어 있는 삐약이를 살펴본 뒤 조용히 침실 밖으로 나가자 너른 거실이 나타났다. 전면창 너머로 바다가 보이는 것이 아직 홍콩인 모양이었다. 다른 호텔인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도 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티브이를 켰다. 긴장감 어린 리포터의 목소리와 함께 뉴스 화면이 나타났다.
“…와.”
저기 분명 육지였는데. 호텔이 있던 자리가 둥그렇게 사라지고 바닷물이 들어차 있었다. 군데군데 돌이 녹았다 굳은 흔적도 보였다. 지반이 십 미터 이상의 깊이로 무너지고 녹아내렸다는 리포터의 설명이 따끔따끔 귀를 찔렀다.
[2급 거대 바다괴수종 크라켄이 휩쓸고 간 흔적에 홍콩 전역은 경악에 빠져 있습니다. □□□호텔은 완전히 사라지고 현재 실종자—]크라켄이 저 지랄 해 놓은 것으로 알려졌구나. 그놈 덩치가 크고 파도를 부르는 스킬도 가지고 있지만 저 꼴은 못 만들어 놓지. 근데 진짜 뭔 짓을 했기에 땅이 사라졌냐. 호텔 부지를 포함해 해변까지 상당한 넓이인데도 죄다 부숴 놓다니.
“일어났군.”
2층에서 성현제가 내려왔다. 그가 여기 있는 건 별로 놀랍지 않았지만.
“…힐러는 어쩌고 그 꼴입니까.”
드러난 목덜미에 상처의 흔적이 있다는 건 꽤 놀라웠다. 옷에 가려진 부위는 더 넓을 듯했다.
“정령이라고 했던가. 도련님의 불길이 제법 사나웠던 덕분이지. 회복 속도를 더디게 하는 힘이 깃들어 완전히 치유되는 데 며칠 걸릴 거라더군.”
혈염과 비슷한 효과를 지닌 모양이었다. 그전에 다친 것도 신기하다.
“실레키아의 날개는 그새 어디 팔아먹기라도 했습니까?”
S급 화염 저항이면 화상이 저렇게 크게 날 일은 없었을 텐데.
“꼬마 아가씨에게 잠시 빌려줬지.”
“…예?”
“꼬마 아가씨가 도련님 손에 잘못되기라도 하면 내 아이템도 무사하지 못할 테니까 말이야. 아직은 망가지지 않았으면 하거든.”
내 귀가 맛이 갔나, 지금 이게 무슨 헛소리야. 그러니까 눈앞의 이 인간이 예림이를 보호해 줬다 이 말인가? 자기가 다쳐 가면서? 미쳤다 미쳤다 했더니 진짜로 드디어 미쳤나 보다.
미소 띠고 있는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몸을 돌렸다. 나도 세수라도 하고 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