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143
143화 스며든 파편 (5)
미니 포털 너머의 닫혀 있던 문은 별다른 확인도 없이 순순히 열렸다. 한유현은 안경을 벗어 인벤토리에 넣었다. 어차피 성현제라면 금방 눈치챌 것이다.
집은 넓었지만, 한유진의 위치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자신의 정령이 있는 곳으로 향하면 되었다. 그는 걸음을 옮기며 이린을 깨웠다. 감각의 일부를 정령과 동화시키자 이내 주변 풍경이 보였다.
한유진은 잠들어 있었다. 그 얼굴이 눈에 띄게 창백하다. 정신을 잃은 것은 그대로로, 장소는 아까와 달라져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혹시나 싶었는데, 역시 도련님이었군.”
무심코 이를 악물던 한유현이 흠칫 걸음을 멈추었다. 이린을 통해 형을 살피느라 이쪽의 감각이 무뎌졌다. 감각을 되돌리자 작은 실내정원과 새파란 물이 일렁이는 수조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너머로 성현제의 모습이 보였다.
한유현은 주저 없이 노기를 드러냈다. 서늘하게 타오르는 눈빛에 성현제가 입꼬리를 올렸다.
“아무 일 없었다, 라고 말해 주고 싶지만, 너무 뻔한 거짓말이라. 도련님도 이미 눈치챈 듯하고.”
“무슨 짓을 한 거지.”
금방이라도 상대를 물어뜯을 듯한 음성이 나직하게 으르렁거렸다. 그에 가벼운 목소리가 대답했다.
“기억이 잘 안 나는군.”
콰득, 한유현의 발아래로 희미한 금이 갔다. 그럼에도 덤벼들지 않는 것은 한유진을 무방비하게 혼자 들여보낸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개소리 적당히 해. 형은 내가 데려가겠어.”
“이대로 돌아가 버리면 곤란해지는 건 한유진 군이 아닌가. 분명 목적이 있어서 여기까지 찾아온 것일 텐데.”
그렇지 않느냐며 옅은 색조의 눈이 가늘게 미소를 띠었다.
“도련님으로서는 역부족일 부탁을 하려고 말이야.”
한유현은 짧게 숨을 내뱉었다.
“지금 시비 거시는 겁니까.”
“단순한 사실이지.”
성현제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정원을 가로지르는 길 위로 실내화를 신은 발이 내디뎌졌다.
“그리 오래 신세 지진 않을 겁니다.”
“도련님은 아직 어리니까, 앞으로 더 성장하기는 하겠지. 하지만 말이야.”
성현제는 새파랗게 젊다 못해 어린 헌터를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덤벼들고 싶은 것을 참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때에도 여전히 동생이겠지. 지키고 보호해야 하는 피양육자.”
한유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도련님이 나를 내버려 두는 것도 그 때문이지 않나. 사랑하는 형님이 짐을 나누고 의지할 만한 상대가 필요하니까. 한유진 군은 제 품에 들어온 사람들은 거의 맹목적으로 보호하려고만 드는 나쁜 버릇이 있어서.”
“…한동안일 뿐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해 주지. 도련님은 끝까지 동생일 뿐일 거라네. 한유진 군의 고집이 어지간해야 말이지. 그러니 괜한 짓 말고 어리광이나 부려 주는 편이 형에게는─”
텅─
주먹과 손바닥이 맞닿았을 뿐임에도 묵직한 충격음이 퍼져 나갔다. 가볍게 막아 낼 줄 알고 덤빈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한유현은 못마땅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마음 같아서는 눈앞의 남자의 목덜미를 찢어발기고 싶었다. 손을 뻗으면 바로 닿을 지근거리다. 하나 불가능한 일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머잖아 형에게 당신이 필요 없어지면 순순히 떠나 주는 게 좋을 겁니다.”
“토사구팽이라니, 너무하는군. 아직도 이렇게 귀엽게 굴어서야 도련님이 나를 대신할 일은 요원하겠지만.”
이가는 소리가 으득 들려왔다. 분했지만 한유진의 태도가 쉽게 바뀌지 않으리란 사실은 한유현 또한 잘 알고 있었다. 한유진은 어떤 면에서는 제 동생이 어렸을 적보다 웬만해선 생채기도 입지 않는 지금을 더 걱정하며 싸고돌려 들었다.
이상하리만치. 그것이 달가우면서도 불안하고, 초조하게 느껴졌다.
“역할 분담도 나쁘지 않잖나. 일부러 수고를 들여 주겠다는데.”
왜 자꾸 가시를 세울까. 여유로운 목소리에 한유현의 주위로 끝내 참지 못한 화기가 피어올랐다. 이린을 불러 다시 한 번 진득한 화상을 새겨 주고 싶었다. 이왕이면 눈에 잘 띄는 얼굴에.
“이러니 아직 어리다는 거지. 달아오른 걸 받아주고는 싶다만 정원에서는 화기 엄금이라네.”
직후,
촤아아─
두 사람의 위로 수조의 물이 순식간에 쏟아져 내렸다.
* * *
‘하나로도 충분히 많은데 왜 둘이냐.’
실제 몸이야 하나지만. 그보다 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거냐, 이 인간은. 합쳐진다더니 따로 놀고 있는데요, 여기.
“음… 일단은 성현제 씨?”
“온전한 건 아니지만.”
아마도 회귀 전의 성현제가 말했다.
“어떻게 된 건지 물어봐도 됩니까?”
날 물에 빠뜨린 놈은 그저 현재의 성현제의 의식이 가라앉은 사이 잠깐 드러난 회귀 전 기억의 일부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이건, 아예 나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제가 듣기로는 합쳐진다고 했거든요. 예민한 사람은 이질감을 느낀다고는 했지만.”
“이질감을 느끼다 못해 거부당했다고 할 수 있겠군.”
“…예?”
“현재의 나는 물론이고 회귀 전의 나 또한 두 개의 세계가 합쳐지는 것에 강한 이질감을 느꼈지. 그래서 이렇게 섞이지 못하고 분리되어 버렸어. 물론 완벽하게 나누어진 것은 아니고, 나는 일종의 파편 모음이지만.”
성현제가 답지 않게 자존심 상해 하는 표정을 지었다. 예민하다 못해 아예 이상함을 느끼고 자기 자신을 거부해 버린 건가. 정말 별짓 다 한다 싶지만 그럴 만한 인간이긴 하지.
“그러면, 계속 이대로 유지되는 겁니까?”
“아니.”
불만스러워하는 얼굴이 확실히 지금의 그보다 어린 티가 났다. 외모야 별 차이 없지만 십 년 전이나 십 년 후나 똑같은 얼굴일 거 같아서.
“결국은 전부 먹히겠지. 지금도 합쳐지기 전 5년간의 기억은 별로 없어. 현재 시점까지의 기억이야 ‘나’ 또한 온전히 가지고 있는 덕에 대부분 남았지만.”
“그래서 더 어리게 느껴지는 모양이군요.”
“어리게?”
“그 나이답게 느껴진다고요. 서른 후반이면 요샌 별로 많은 것도 아니고.”
아직 한창때 아니냐. 아무튼, 합쳐진다면 뭐 별일 없을 테고.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남은 시간 즐겁게 보내세요.”
내 손목 놔줘. 보내 줘. 하지만 젊은 파편 씨는 나를 놓아주기는커녕 되레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회귀 전 기억이 별로 없다면 내가 이길 수 있을 텐데, 그러기엔 몸뚱이가 황천에 발 담글 거 같아서 못 하겠네.
“매정하기는.”
“첫 대면에 사슬로 묶어서 물에 퐁당 담근 주제에 할 말입니까. 있던 정도 사라질 판인데.”
“곱게 건져다가 물기도 닦고 옷도 갈아입혀 주었건만. 그리고 내 안에 받아들여 주기까지 하였지.”
“그건 댁 구하려고─”
“내가 아니야, 한유진.”
…하긴 그렇군. 나를 향해 굽어진 시선이 음산하게 느껴졌다. 기분이 영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머잖아 먹혀 사라질 위기에 처하면 성현제라 해도 여유만만할 순 없겠지. 정신적으로 더 어리기도 하고.
“사과라도 할까요.”
“대신 다른 걸 줘.”
“뭘요?”
“내 몸.”
“죄송하지만 무립니다. 저는 빼고 둘이서 가위바위보라도 하든가요. 심사 정도는 봐드릴 수 있습니다만.”
구경하면 재밌겠다. 십중팔구 현재의 성현제가 이기겠지만. 내 말에 파편이 웃었다.
“현재의 내 몸을 빼앗는 건 무리야. 하지만.”
그의 손가락 끝이 내 가슴을 가볍게 짚었다. 옷 아래 상처를 덧그리듯 매만졌다.
“대신할 수 있는 좋은 걸 가지고 있잖아?”
“…뭐? 야, 잠깐만.”
이 새끼가 대체 뭘 노리는 거야.
“SS급 마석에 금가긴 했지만 L급 이상 마석 조합한 거거든?”
“그거 괜찮군.”
“괜찮고 자시고 세성 길드 통째로 넘겨도 못 줘!”
SS급 마석은 그렇다 쳐도 디아르마 건 두 번은 못 구한다. 지불 능력도 없는 파편 주제에 언감생심 뭘 넘보냐.
“어차피 지금 상태로는 마석이 제대로 깨어날 수도 없을 텐데.”
놈이 확신을 담아 말했다.
“그걸 어떻게… 기억도 없다면서.”
“아주 없지는 않지. 멍청한 도마뱀에 대해선 약간 남아 있더군.”
진짤까 아닐까. 의심스럽지만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조합한 마석이 시간이 지나도 영 반응이 없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려고요. 마석을 내주면 거기서 성현제 복제품이라도 튀어나오… 으아악! 역시 싫어! 시발!”
상상만으로도 욕이 쏟아지는 끔찍한 광경이었다. 진짜 싫다. 차라리 상처 째고 마석을 도로 끄집어내는 편이 낫지. 내 인생에 성현제는 한 명으로도 너무 많다. 물론 성능은 좋겠지만, 그래도 성현제잖아.
“너무 질색하는 거 아닌가. 그렇게 온전히 옮겨질 수 있다면 좋겠지만 불가능해.”
하긴 그렇겠지. 만약 그런 게 된다면… 젠장,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머리를 흔들어 허튼 생각을 애써 떨쳐냈다.
“실질적으로는 전혀 다른 사람, 마수나 다름없어지겠지.”
“그럼 그냥 여기서 흡수당해도 되지 않습니까.”
“순순히 포기하는 건 성미에 안 맞아서.”
그러면서 웃는 얼굴이 현재의 성현제와 제법 비슷했다. 같은 사람이긴 하지. 나는 잠깐 미간을 좁혔다가 입을 열었다.
“마수 합성을 확실히 성공할 수 있게 해 주는 겁니까?”
“그건 장담하지. 지금의 문제점은 두 개의 마석 중 상위 등급의 마석이 온전치 않다는 거야. 마력이 희미하게 새어 나오고 있는 중이거든.”
그걸 자신이 보충해 주면 길어도 한 달 이내로 마수가 완성될 것이라 말했다. 찝찝하긴 했지만 이대로 마석들을 날려먹기엔 너무 아깝다. 게다가 회귀 전 5년 치는 거의 없는 파편이라 해도 성현제는 성현제니까 마수의 능력치가 오를 가능성이 높겠지.
…그 성현제라는 게 거슬리지만.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내 패는 하나라도 더 많은 게 좋으니까.
“받아들이죠. 어떻게 하면 됩니까.”
“이대로 나를 데리고 돌아가면 돼. 마석에는 알아서 옮겨갈 수 있으니.”
“제 몸을 대신 차지하려 들진 않겠죠?”
“그게 가능했다면 좀 더 튼튼한 육신을 찾아달라 부탁했겠지.”
허약한 몸뚱이라 죄송하네요. 그래도 평균 이상은 된다고 생각하는데.
성현제의 파편을 데리고서 스킬을 거두었다. 의식이 잠깐 흐릿해지고 이내 다시 눈이 떠졌다.
“으…….”
시야가 희뿌옇다. 얼른 마나 포션을 꺼내어 마셨지만, 여전히 눈앞이 흐렸다. 아무래도 시력이 떨어진 듯했다. 일시적인 거면 좋겠는데.
물론 몸 상태도 말이 아니라 전신의 뼈마디가 다 쑤셨다. 생명력 포션도 몇 개 따먹고 나서야 겨우 일어설 만해졌다. 가슴의 마석은… 아직은 별 변화 없는 거 같은데.
‘…죽겠다.’
말도 잘 안 나오네. 일어난 곳이 소파가 아니라 침대인 것으로 보아 성현제는 제대로 돌아온 모양이었다. 그런데 왜 안 보이지, 생각한 순간.
촤아아─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바로 거대한 수조가 떠올랐다. 방 밖으로 비틀거리며 걸어 나가자 어느새 튀어나온 이린이 나를 한 번 쳐다보고는 앞장섰다.
유현이구나. 하긴 그 녀석밖에 더 있겠냐마는.
이린을 따라 계단을 내려가다 두어 번 굴러떨어질 뻔했다. 엘리베이터도 있을 법한데. 정원이 있는 곳으로 들어서자 사라진 수조와 물에 흠뻑 젖은 두 사람이 보였다.
“유현아!”
“형, 괜찮아?”
유현이가 성현제의 멱살을 놓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으, 흙이 물에 젖어서 진흙탕이 되어 버렸어. 청소하기 힘들겠다. 이런 거 왜 집안에 만들어 놓냐. 바로 코앞에 잘 꾸며 놓은 공중정원도 있으면서.
“조금만 더 기다리지 뭐 하러 들어오고 그래. 완전히 젖어 버렸네. 집안 시설물 관리 똑바로 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똑바로 화재 진압 잘했네만.”
음, 내 동생이 좀 흥분했던 모양이로구나. 근데 그럴 만하지. 성현제가 나한테 한 짓을 생각하면 정원 살짝 태워먹는 것쯤이야 별거 아니지 않나. 유현이가 그거까지 아는지는 모르겠다만.
“그런데, 한유진 군.”
성현제가 갑자기 나를 향해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이게 몇 개지?”
“…세 개요.”
좀 흐릿해도 그 정도는 분간 가능하다.
“틀렸어.”
“네? 분명 세 개 맞는데?”
성현제의 손을 잡아 가까이 끌어당겼다. 뭐야 세 개 맞잖아.
“왜 거짓말을─”
“굳이 끌어당겨 확인하는 거 보니 역시 잘 안 보이는 모양이로군.”
눈치 빠른 능구렁이가 말했고 유현이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거참 귀찮게 만드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