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221
221화 탑에 갇힌 왕 (2)
반사적으로 무기를 꺼내들었다. 그래 봐야 등급이 높지도 않은 짧은 칼이었다. 설사 S급 무기를 손에 쥐었다고 해도 내 스탯으로는 제대로 쓸 수 없다.
그나마 이어링에 방어막 스킬이 있었지만 등급은 고작 B. 범위도 넓지 않아 기껏해야 한두 명 끌어안으면 끝일 것이다. 은혜는, 내 몸뚱이로 막아서 봐야 얼마나 가려질까.
우리를 이렇게 끌고 온 상대라면 방법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일단 유현이와 예림이 사이에 섰다.
“허니!”
재차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니라면 패륜아 쪽일 가능성이 높긴 한데. 그럼 다행이지만.
“괜찮아요! 일단은 막았어요!”
허공에서 스르륵, 작은 인간의 형체가 나타났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베이지색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이었다. 머리 양옆으로는 귀가 늘어져 있었다. 길고 하늘거리듯 팔락대는… 마치 강아지 같았다. 그, 코카스파니엘. 딱 그 강아지다.
눈은 흰자위 없이 동그랗고 빨개서 늘어진 귀를 가진 토끼처럼도 보였다. 동그란 얼굴에 작은 키는 열너덧 살쯤 되었을까. 몸은 겹겹의 백합을 뒤집어 놓은 듯했다. 옷으로 보이는 둥근 꽃잎 같은 지느러미가 여럿 길게 흐느적대며 공중에 살짝 뜬 채 움직이고 있었다. 다리는 보이지 않았지만 팔은 평범하게 두 개인 듯했다. 역시나 길게 지느러미 같은 소매가 늘어져 손을 감추었다.
아무튼, 평범한 인간은 아니다.
긴장을 늦추지 않으며 상대를 향해 떡잎 스킬을 사용했다. 여기서도 창이 뜨는 대신 머릿속에 직접적으로 전해져 왔다.
탑에 갇힌 왕.
읽어낼 수 있는 것은 그뿐이었다. 왕이라. 인어여왕과 무해의 왕이 떠올랐다. 패륜아와 효도중독자, 역시 그쪽 무리인 듯했다. 탑에 갇혔다는 수식어가 특이하긴 했지만.
“허니!”
“용건부터 말해.”
“네?”
강아지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아, 하고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쓸데없이 귀여워서 긴장이 풀려 버릴 것만 같다.
“저 신입이에요! 윌슨! 배구공!”
“…뭐? 신입이라고?”
“네! 저예요!”
밝게 대답하며 한쪽 팔을 들어 흔든다. 지느러미가 팔랑팔랑 춤추듯 움직였다. 신입이라니, 진짠가. 내가 의심을 버리지 못하자 강아지가 시무룩해하며 말했다.
“허니를 위한 던전, 제가 만들었잖아요. 장난감 병정의 주인이고요, 제일 처음 허니를 찾아내서 오류 일으킨 것도 저고요.”
장난감 병정. 계약자 이름이, 분명 다섯 칸이었지. 탑에 갇힌 왕. 처음 찾아내서 오류 낸 것도 맞고. 그 밖에도 여태까지의 일을 열심히 떠들어 대었다. 틀린 부분은 없었다.
“…내 동생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된 거지? 무사한 건가?”
“무사해요! 제가 빠르게 대처했거든요!”
“제대로 설명해.”
연이은 냉정한 대꾸에 신입이 잔뜩 풀이 죽었다. 그 모습을 보자 아주 약간 미안해졌다. 신입이 우물거리다가 한결 차분해진 어조로 입을 열었다.
“효도 애들이 간섭해 왔어요. 허니가 들어간 던전에요.”
“괜찮을 거라더니.”
“저, 정말로 해파리에게는 이럴 능력이 없어요! 아마도 다른 효도자가 합류한 것 같은데, 보통은 이런 일 잘 없거든요.”
“생겼잖아.”
그렇죠, 하고 신입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래도 막았다고는 했으니.
“그래서 이제 어떻게 되는 건데?”
굳어졌던 표정을 풀며 묻자 신입이 반색하며 대답했다.
“효도 애들이 던전에 간섭해서 시스템을 장악하려고 했어요. 시스템을 다룰 줄 아는 효도자인 모양인데, 그게 가능한 사람은 몇 없거든요. 그중에서도 해파리와 가까운 효도자는 딱 한 명뿐이니까 이런 일이 두 번 벌어지지는 않을 거예요. 힘이 많이 필요해서 허니 세계 시간으로 사오 년쯤은 휴식을 취해야 할 테니까요.”
사오 년 후면 망했든 멸망에서 벗어났든 둘 중 하나일 거니 말이다. 신입 말대로 두 번 벌어질 일은 없겠지.
“아무튼 검은 소의 숲 던전 시스템을 가로채서 허니 일행에게 해를 끼칠 생각이었던 모양인데, 제가 재빠르게 준비해 뒀던 시스템을 밀어 넣었죠! 검은 소의 숲 던전을 아예 다른 던전 시스템으로 바꿔 버린 거예요.”
대충 바이러스 걸린 파일을 통째로 버리고 새 파일로 바꿨다는 건가.
“대응 빠르네.”
“이런 걸 막는 게 저희 일인걸요. 게다가 마침 허니를 위해 준비해 둔 던전이 있어서 쉬웠어요. 아이템과 스킬을 얻을 수 있는 던전 시스템이요.”
“그게 여기야? 그런데 왜 다들 깨어나지 않는 거지?”
주위를 살펴보며 물었다. 텅 빈 방으로밖엔 안 보이는데.
“준비한 그 시스템이요, 가상현실 시스템이었거든요.”
“가상현실?”
“네! 말하자면 가상현실 게임이요. 허니 세계보다 좀 더 미래에서 흔한 시스템인데, 육체는 두고 정신만 게임, 던전에 들어가는 거예요. 허니 세계의 던전과는 다르게 사람들, npc도 있고 상호작용도 가능하죠. 컴퓨터 게임은 아시죠? 게임에 직접 들어가는 거예요! 거기서 퀘스트를 통해 포인트를 얻어서 원하는 아이템과 스킬을 교환하는 시스템을 만들었죠. 정신만 들어가니 안전하기도 안전하고요!”
들어 보니 상당히 좋아 보였다. 무엇보다 안전하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우리도 던전 말고 가상현실 시스템으로 해주면 안 되었냐.”
“어, 허니 세계는 문명 발전도가 떨어져서요. 그리고 인간들이 만든 가상현실 게임을 바탕으로 시스템을 적용하는 거라 제가 만든 것보다는 안전도가 훨씬 낮아요. 던전 시스템보다 더 위험한 부분도 있고요. 아무튼 허니의 일행은 지금 가상현실 던전에 들어가 있어요. 그 세계의 사람이 되어서요. 몸은 여기 있으니까, 일종의 빙의죠.”
그런데, 하고 신입이 곤란한 얼굴을 했다.
“허니는 정신만 시스템에 넣을 수가 없었어요.”
“왜? …혹시 스탯이 너무 낮아서인가.”
“아뇨, 반대예요. 허니의 그 마석이요.”
신입의 지느러미 소매가 내 가슴을 가리켰다.
“강해요. 예상 이상으로요. 도마뱀의 마석이 들어갔다고 해도 불완전한 거니까 SS급일 가능성이 높고 최대로 해도 SSS급일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최소 L급으로 느껴져요, 지금은.”
“L급?”
“…최소로요. 잘 모르겠어요. 태어나면 확실히 확인 가능할 거 같은데, 완전히 예상 밖이에요, 허니. 그래서 제가 허니에게 제대로 손댈 수가 없었어요. 허니의 정신만 분리하려는 것을 그 마석의 마수가 막아 버렸어요.”
최소 L급이라니. 무심코 손을 가슴의 상처에 대었다. 그렇게 강하면, 괜찮은 건가. 내가 제어 가능할까. 양육자 칭호 등급을 넘어서 버린다면 제어 불가능해지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지금으로선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요, 허니는 직접 그 세계에 들어가야 해요.”
“직접? 그냥 바로 던전을 빠져나갈 수는 없는 건가?”
“아직 완전히 만들지 않은 시스템을 급히 바꾸느라 저도 시스템 제어권을 잃어버리고 말았거든요! 그래서, 어, 공략을 해야 해요!”
“…약속한 시간은 지난 거 같은데, 다 못 만들었다고?”
“그, 그때 더 늦어질 거라고 말씀드렸잖아요! 허니가 원한 거잖아요!”
그건 그랬지만. 예림이가 들어간 던전을 살펴보는 대신이었지. 그때 일이 이렇게 돌아올 줄이야.
“원래라면 적당히 평화로운 중세시대로 배경을 넣을 예정이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어떤 세계인지 저도 알 수 없어요. 던전 속 세상이니까…….”
“이미 멸망한 세상 중 하나, 인가.”
“네. 사라진 세상과 그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옛 정보를 바탕으로 한 세계예요.”
가슴이 약간 두근거렸다. 흔적만 남은 던전이 아니다. 사람들과, 그때의 상황까지 고스란히 남은 세계다. 우리보다 앞서 멸망한 세상.
늘어진 소매를 걷으며 신입이 손을 꺼내었다. 평범한 손이었다. 그 손등과 손목에서 수십 가닥의 가느다란 촉수가, 윽.
“…웬 촉수냐.”
“이거 엄청 편해요. 허니네 대장장이에게도 추천해 주세요. 제작자라면 필수나 다름없다니까요. 섬세한 작업을 동시에 진행 가능하거든요.”
추천은 무슨 추천이냐. 한때 촉수 써 본 사람으로서 편하다는 데는 동의하지만 보기가 좀 그렇잖아.
촉수들이 허공을 빠르게 더듬었다.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무언가 조작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점점 더 움직임이 빨라지더니 눈으로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가 되었다. 그리고 잠시 후.
툭, 투둑
동그랗고 납작한 원반들이 허공에서 나타나 떨어졌다. 지름 5~6센티쯤 되어 보이는 작고 검은 금속성 원반이었다. 촉수가 그것들을 주워 내게 내밀었다.
“던전 내 특정 지역에 이걸 설치해 주세요. 그럼 제가 간섭할 수 있어져요. 설치 지역은 퀘스트창을 통해 알려 드릴게요. 중간 부분을 꾹 누르기만 하면 돼요.”
“던전 공략 방법은?”
“던전에 따라 달라서요. 설치를 끝내면 던전 정보를 확인 후 메시지를 보내 드릴게요. 그리고 허니, 허니에게 줄 수 있는 생명은 다섯 개예요.”
“생명?”
“네. 허니의 일행도 들어가 있겠지만 언제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잖아요. 상황에 따라 합류하기 힘들지도 모르고요. 사실 위험할 거 같아서 허니를 들여보내고 싶지 않은데, 그런데…….”
신입이 고개를 돌려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걸 전해줄 수가 없어요. 허니의 시스템창은 이미 몇 번이나 연결한 적 있어서 손대기 쉽거든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니니까요. 상황 메시지를 보내는 게 고작이었어요. 허니도 안전하게 정신만 들여보낼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신입이 머뭇거리며 다시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허니 한 명만이라면, 공략하지 않고도 밖으로 빼내는 게 가능해요. 하지만 혼자는 안 나가시겠죠.”
“당연한 소릴. 절대 안 가.”
고민할 필요도 없이 곧장 대답했다. 심지어 나 아니면 공략 정보를 전달도 못 한다는데 어떻게 혼자 빠져나가겠냐.
“다섯 번 죽기 전에 다른 사람들과 합류하면 되겠지. 죽고 나서 바로 살아나는 건 아니지?”
“네? 바로 살아나는데요?”
“야, 그럼 안 되잖아. 내 능력치로 또 죽기밖에 더하겠냐. 시간을 두고 부활해야 날 죽인 상대와 바로 마주치는 걸 피할 수 있다고.”
“아, 그러네요! 그럼…….”
촉수들이 또다시 바쁘게 움직였다. 빨간 눈동자도 데굴데굴 구른다.
“한 시간요. 최대 한 시간까지 대기할 수 있어요. 죽은 상태로 상황을 살필 수도 있고요.”
“좋아, 고마워. 그 정도면 해볼 만하겠지. 은혜도 있고.”
내 말에 신입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엔 또 뭐냐.
“아이템 말인데요, 저쪽 세계에 없는 건 사용할 수 없어요.”
“뭐?”
“비슷한 능력의 아이템이라도 있다면 변경해 드릴 텐데 은혜 같은 건 확실하게 없을 거예요. 또 스킬도 저쪽 세계에 맞춰서 약간 변형되지 싶어요.”
“스킬은 그렇다 쳐도 은혜를 못 쓰면 곤란해!”
내 스탯은 F급이다. 지금 가지고 있는 장비를 덕지덕지 발라 봤자 C급 1레벨 즈음, 실질적으론 숙련된 E급 헌터 수준이다. 우리 세상처럼 던전이 있는 곳이라면 안 들어가면 그만이지만 던전이 없고 몬스터가 그냥 돌아다니는 세상이면 비명횡사하기 딱 좋다.
어떻게든 해보라는 내 눈빛에 신입이 촉수 끝으로 은혜를 툭툭 건드리다가 입을 열었다.
“어, 음, 같은 능력은 역시 불가능해요. 대신 스탯이나 다른 능력의 장비로 임시 변환해 드릴게요.”
“등급은?”
“스탯은 아마 C급까지 가능할 거예요. 대략 30레벨 수준으로요. 장비는 S급 무기나 방어구요.”
스탯과 장비라. S급 무기와 방어구라고 해봤자 스탯이 받쳐 줘야 쓸 만하지.
“스탯으로 줘. 그리고 장비는 대여해 주고.”
“네?”
“대여 말이야, 대여. 장비 가지고 있을 거 아니냐. 빌려주는 건 가능하지 않아? 얌전히 돌려줄게.”
“하지만.”
“솔직히 이럴 줄 몰라서 변변한 무기 안 가지고 들어온 거지, S급 장비 정도야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고. 내가 대장장이랑 친한 거 잘 알잖아. 많이도 말고 S급 무기, 딱 하나만 빌려주라. 이왕이면 방어구도. 은혜만 믿고 안 챙겼거든.”
머뭇거리던 신입이 허공에서 무기와 롱가디건 같은 걸 꺼내 주었다. 무기는 일단 검이긴 한데.
“망고슈네.”
방어용 가드가 붙은 짧은 단검이다. 단검은 쓰기 애매한데. 게다가 둘 다 옵션을 확인할 수 없었다.
“던전에 들어가면 그 세계에 맞춰서 변형될 거예요. 그때 옵션도 볼 수 있을 거고요. 둘 다 S급이에요.”
“고마워. 혹시 시간 제한 같은 거 있어?”
“시간은 넉넉해요! 가상현실 게임은 5배속 정도는 기본이거든요. 그건 밖에서도 조절할 수 있어요.”
그럼 다행이고. 이 정도 준비면 아무나 한 명 찾을 때까지 버틸 수 있겠지. 던전에 들여보내 달라고 말하기 직전, 한 가지를 더 물었다.
“양육자 키워드 적용자 50명을 모으라는 거, 정확한 이유를 듣고 싶어.”
신입이 입을 꾹 다물었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말해 드릴 수 없어요.”
“이유도 방법도 모른 채 무조건 따를 수는 없어. 솔직히 말해 나는 너희들을 완전히 믿지 않아.”
빨간색 두 눈이 크게 깜박였다. 조금 놀란 듯도 보였다. 믿지 않는다는 것 때문인가. 하지만 어떻게 믿을까. 속이고 숨기는데.
“허니의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예요. 정말이에요!”
“그러니까 어떻게? 그 50명을 가지고, 대체 어떻게. 만에 하나 키워드 적용자들에게 일말의 피해라도 간다면─”
“키워드 적용자들에게는 아무런 피해도 가지 않아요! 확실해요! 제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어요!”
신입이 펄쩍 뛰며 말했다. 키워드 적용자들에게는, 이라.
“확실하게?”
“확실하게요! 절대로요!”
“그럼 내게는.”
“허니는.”
신입의 늘어진 귀가 살짝 들렸다가 다시 하늘하게 처졌다.
“허니에게도 최대한 피해가 없도록 할 거예요. 그러려고 준비하고 있어요. 일 년에서 이 년, 그 정도면 준비가 다 될 거예요. 그때 알려 줄게요, 허니.”
최대한 피해가 없도록 할 거다, 라. 확신이 없기에 오히려 더 안심되었다. 키워드 적용자는 정말로 괜찮은 모양이니까.
“뭐냐, 결국 준비도 다 안 해놓고 50명 모으라고 한 거잖아.”
“그래서 천천히 모아도 된다고 했잖아요. 자세히 말 못 하는 건 허니의 안전을 위해서기도 해요. 믿어 주세요. 진짜예요. 그리고 때가 되어도 허니의 결정에 따를 거예요. 우리가 억지로 시키지는 않아요. 그럴 수도 없고요.”
덥석 믿기에는 여전히 불안했지만, 신입의 표정과 목소리는 진솔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이 녀석은, 여러 가지로 많이 도와주긴 했었지. 간절한 눈빛을 바라보다가 무심코 손을 뻗어 신입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뭐랄까, 눈빛까지 저러니 진짜 강아지 같잖아. 신입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어, 불쾌했다면 미안.”
“아뇨, 허니는…….”
신입이 내 손을 만지작거렸다. 체온이 꽤 높다. 따스하다. 털도 부드러웠지.
“조심하세요, 허니.”
손이 놓였다. 이곳으로 올 때처럼 눈앞이 까맣게 물들고 잠시 후, 시야가 밝아졌다. 아니, 여전히 어둑어둑하기는 했다. 어두운 골목이었다. 높은 건물이 세워진 틈새.
‘…현대 같은데?’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페인트칠이 된 빌딩이었다. 신입에게 받아 입은 롱 가디건은 어느새 가죽 재질의 재킷으로 변해 있었다. 옵션을 살펴보려는 그때.
– 그르르.
위협적인 그르렁거림이 들려왔다. 소리가 들린 쪽으로 재빠르게 시선을 돌렸다. 골목 끝에서 모습을 드러낸 표범과 비슷하게 생긴 몬스터의 머리 위에.
‘…엥?’
[C급 가모에아생명력 1,370/1,370
마나 155/155]
상대의 등급과 이름, 그리고 생명력과 마나가 표시되었다. 뭐야 저게. 설마 가상현실 게임 시스템이라고 저런 게 뜨는 건가. 아니면 혹시.
‘떡잎 스킬.’
분명 스킬도 이곳 세상에 맞춰 변형될 거라고 했었다. 재빨리 떡잎 스킬을 썼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럼 역시 저렇게 상태창이 자동으로 뜨는 게 변형된 떡잎 스킬의 효과인가?
– 커헝!
길게 고민할 틈도 없이 몬스터가 덤벼들었다. 스탯 C급으로 준다고 했었지. 같은 C급이면 해볼 만하지. 심지어 이쪽은 S급 무기도 있다! 인벤토리에서 얼른 신입이 준 S급 망고슈를 꺼내들었…….
“총이잖아?!”
활도 아니고 총이냐! 잠깐만, 이거 권총인 거 같은데. 모양은 글록 비슷하지만, 안전장치 따로 있나? 그냥 당기면 되나? 총알은 장전되어 있고? 미친 뭐야, 이게?
당황하는 사이에 푸른빛 도는 표범이 순식간에 코앞까지 치달았다. 날카로운 송곳니가 지근거리에서 섬뜩하게 빛난다.
텅, 땅을 박차고 몬스터가 뛰어들었다. 내 머리를 정확히 노리는 위치였다. 바닥에 반쯤 드러눕듯 재빠르게 무릎을 굽히고 상체를 뒤로 젖혔다. 놈이 내 위를 스침과 동시에 총부리를 표범의 드러난 아래턱을 향해 겨누었다. 이어 힘껏 방아쇠를 당겼다. 마나가 훅, 빨려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퍽.
소음기라도 달린 듯 조용하게 탄환이 발사되었다. 하지만 그 고요함과 달리 표범의 머리통이 단숨에 터져 나가다 못해 몸뚱이까지 멀리 밀려 나뒹굴었다. 나 또한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땅에 처박혔다.
“…으윽, 허리야.”
이 동네 대체 뭐냐. 총이 튀어나오는 거 보니까 현대에 가까운 거 같긴 한데.
그때 메시지창이 눈앞에서 깜박거렸다. 퀘스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