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26
26화 OFF (2)
“어, 어떻게 오셨습니까……?”
입구 근처에 서 있던 스물 초반의 젊은 직원이 김성한을 보고 뻣뻣하게 굳었다. 어둑어둑한 데서 마주치기엔 무서운 얼굴이긴 하지.
“김민의를 알고 있나.”
김성한이 낮은 목소리로 취조하듯 물었다. 저러다 애 울겠다. 완전히 쫄았잖아.
“기, 김민의… 아, 민의 형이요? 네! 연락 받았어요!”
뜬금없이 왜 묻는가 했더니 김민의가 단골집이라 잘 말해 두겠다고 한 모양이었다. 직원이 안도하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민의 형 선배분이셨군요. 어서 들어오세요! 조용한 자리로 비워 놓았습니다!”
뭐랄까, 룸으로 안내받을 듯한 분위기가 되고 말았다. 물론 룸 같은 건 없고 구석 쪽에 따로 떨어진 좌석이었다. 위치도 위치지만 칸막이가 쳐져 있는 것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여러모로 숨고 싶은 기분이라.
“제일 잘나가는 걸로 빠르게—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음료는 수입 맥주? 양주도 있습니다만 발렌타인 17년산이 제일 좋은 거예요. 잘 안 나가서 몇 병 안 들여놨거든요.”
그새 활기를 완전히 되찾은 직원이 까불까불 말했다. 요즘 애들은 겁이 없다니까.
맞은편에 앉은 김성한이 주문하라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테이블 위의 메뉴판을 들었다가 도로 고이 내려놓았다. 안주도 술도 뭐가 많네. 내 주식은 그냥 이슬인데.
“맥주 소주 섞어서 적당히 가져다주세요.”
알아서, 적당히, 잘.
“옙, 형님!”
각 잡고 인사한 직원이 빠르게 멀어져 갔다.
경쾌한 리듬의 음악에 떠드는 소리, 웃는 소리도 요란하다. 들어오면서 보니 길쭉한 바에 작은 무대 공간도 있었다. 반쯤은 클럽 같은 건가. 요즘 애들은 이런 데서 노는구나.
잠깐 주위를 살피는 사이 술과 안주가 나왔다. 빠르네. 모듬 튀김에 과일, 부대찌개, 과자류 따위가 테이블 위에 늘어졌다. 이건 치킨… 샐러드? 웬 샐러드.
“필요한 거 있으시면 언제든지 불러 주세요~”
안주만 먹어도 배부르겠다. 일단 가볍게 맥주로 목을 축이며 안주를 집어먹었다. 이 감자튀김 맛있네. 잘 배어든 양념에 달달함을 베이스로 한 치즈 소스가 듬뿍 얹어져 기름진 단짠이 아주 그만이었다.
“제 오해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사과드리겠습니다.”
김성한이 진지한 얼굴과 진지한 목소리와 진지한 태도로 말했다. 내가 제일 예쁘다는 발랄상큼한 유행가를 배경음으로 깔고서.
역시 이 분위기는 아니야. 빨리 취해 버리고 싶었다.
“제가 오해할 만하게 행동하기는 했죠. 각성 브로커 건도 그렇고요.”
오해가 아니지만 자꾸 오해라 하니 그런 걸로 쳐주자.
적당히 대답하며 치킨 샐러드를 포크로 찍어 들었다. 와, 이 치킨 샐러드 맛있다. 소스가 뭐지. 매콤 화끈한 게 딱 맥주 끌리는 맛이네. 살도 촉촉하고 쫄깃한 게 다리 부위를 쓴 모양이다. 역시 순살 치킨은 다리 살이지. 김민의 학생 맛집 잘알이구만.
“그것도 뭔가 다른 생각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까? 사기꾼 따위에게 속으실 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김성한이 확신을 담아 말했다. 지금은 속을 리 없긴 하지. 이러다 설정 충돌 일어나겠네, 어떻게 넘기지.
“그게, 사실 각성 브로커에 대한 개인적인 호기심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각성자와 던전에 대해 관심이 좀 많거든요. 따로 조사나 공부도 꽤 했죠.”
미래에서 했습니다.
“석 팀장님께서도 유진 씨가 헌터에 대해 해박하다 말씀하시더군요. 그래도 위험한 행동이긴 했습니다.”
“그야 유현이가 가만 안 있을 거 뻔하니까요. 예상대로 바로 붙잡혀 끌려갔고요. 정확히는 예상보다 좀 빨랐죠.”
김성한이 맥주잔을 비우며 미소 지었다.
“유진 씨는 상당히 계산적으로 움직이는 듯합니다.”
아니요, 충동의 화신인데요. 회귀부터가 충동적이었다. 머리 식히고 계산적으로 굴렸으면 그냥 내가 최강 되어서 위급한 던전 싹 정리해 주면서 잘 먹고 잘살았겠지.
“박예림 양을 찾아냈을 때까지는 단순한 운이라고 생각했지만 예림 양의 신뢰를 얻고 화근거리를 미리 밟아 두며 석 팀장과의 계약까지 깔끔히 끝내는 것은, 운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요.”
“아뇨, 운도 꽤 따라줬습니다.”
운 좋게 회귀하면 성한 씨도 할 수 있답니다. 참, 스킬도 따라줘야 하는구나. 근데 스킬 얻은 것도 반쯤은 운이었지.
역시 운빨이 최고다.
“거기에 친구분을 구하러 갔을 때는, 솔직히 말해 감동받았습니다. 오래 알고 지낸 사이도 아니고 어쩌다 마주친 옛 친구를 위해서 위험까지 감수하다니. 뭐랄까, 믿고 뒤를 맡길 수 있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그, 그렇게까지야…….”
걔가 SS급 스킬 가질 수 있어서 구한 건데요. 속셈 가득한 행동으로 사리사욕 없이 순수하게 정의로운 일을 한 사람 취급받으니 쪽팔리고 닭살 돋았다. 유명우도 그렇고 석시명도 그렇고 오해가 쌓여 가는데 어찌 풀 방법이 없네.
멋쩍음을 감추려고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취기 좀 빨리 올랐으면 좋겠다. 저한테 괜히 기대해 봤자 돌려줄 건 없습니다.
“제 친구 일은 그냥 충동적인 겁니다. 길 가다 쓰러지는 사람보고 부축해 주는, 그런 반사적인 행동이었어요.”
“충동적인 일이라 해도 단순히 길에 쓰러진 사람을 돕는 것과 차량이 들어오는 선로에 떨어진 사람을 끌어내는 것은 완전히 다르지요.”
“…성한 씨가 있었으니 그리 위험한 것도 아니었습니다만.”
그만해라, 좀. 취하지도 않았는데 얼굴 빨개지겠다.
대화 주제를 돌리자. 무슨 이야기하지. 요즘 유행하는 거? …그러고 보니 요새 뭐가 잘나가고 인기 많은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X블 시리즈 새로 개봉한 거 있을 텐데. 몬스터 길들이기 4편이 올해 나왔던가? 각성자 연예인만 모아 대박 친 버라이어티가 언제 방영 시작했더라.
“혹시 오늘부터 헌터라고 아십니까?”
“…예?”
“아뇨, 아니에요.”
아직 시작 안 했나 보다. 오헌 재밌었는데. 게스트로 상급 헌터도 나오고 그랬지. 하급 헌터 특집편 출연자 모집 때 나도 신청했었다. 떨어졌지만.
“성한 씨도 초기 각성자였죠?”
세상 물정은 까맣게 모르니 그냥 내가 제일 잘 아는 헌터로 이야기를 돌렸다. 한동안 TV와 컴퓨터를 붙잡고 살든가 해야지 원.
“예. 저는 물론이고 현 각성자의 절반 이상이 첫 던전 쇼크 때 각성했죠.”
세상에 던전이라는 게 처음 나타나고 불을 발견한 원시인처럼 경계 반 호기심 반으로 기웃거리고만 있을 때, 과포화된 던전이 줄줄이 터져 나갔다.
불행 중 다행으로 초기 던전은 F~E급뿐이었다. 마력을 얼마 지니지 못해 일반적인 무기로도 그럭저럭 처치 가능한 괴물들만이 바깥세상으로 쏟아져 나왔다.
하나 무장한 군대가 아닌 맨손의 일반인은 F급 몬스터도 상대하기 힘들었다. 당연히 사상자가 엄청났어야 했지만, 실질적인 피해는 의외로 적었다.
몬스터의 공격을 받은 사람들의 다수가 각성한 덕분이었다.
각성 초기 스킬은 각성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초기 각성자들은 대부분이 공격 및 방어 스킬을 초기 스킬로 가졌다. 비록 F~E급이 대부분이었지만 하급 몬스터를 상대하는 데는 손에 익지도 않은 평범한 날붙이보다야 훨씬 유용했다.
거기에 적은 숫자나마 중상급 각성자들이 나타나자 사태는 빠르게 진정되었다. 그렇다 해도 한국에서만 백만 단위의 부상자와 만 단위의 사망자가 생겨 버리고 말았지만.
“당시 제가 있던 곳은 시골이라 더욱 위험했었습니다. 대부분이 노인이라 각성하기도 힘들고 각성해도 스탯이 낮았죠.”
김성한이 잔을 재차 비우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노령화가 심한 지역에서 던전이 터지면 피해가 커지다 못해 생존자가 전무한 경우도 있었다.
“다행히 제가 A급으로 각성해서 피해를 줄일 수 있었지만요.”
“그 동네에선 김성한 씨가 완전 영웅이겠어요.”
“마을 어른들께서 아직도 종종 연락하시곤 합니다. 이것저것 보내 주시기도 하고요.”
그가 조금 쑥스럽게 웃었다.
“마침 휴가를 낀 주말이라 조부님 댁에 내려가 있었던 것이 천운이었지요. 그렇지 않았더라면… 조부님을 두 번 다시 뵙지 못하였을 겁니다.”
“조부님과 사이가 좋으신 모양이로군요.”
“저를 키워 주셨으니까요.”
“아… 그럼 부모님께선…….”
“살아 계십니다. 다만 이혼 후 어머니께선 재혼하셨고 아버지께선 해외로 나가 양육비만 보내 주셨죠. 제가 성인이 된 이후로는 소식이 아예 끊긴 것이 아버지께서도 새로 가정을 꾸리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덕분에 두 분 다 얼굴도 가물가물합니다.”
그랬구나. 어째 가정사가 평탄한 사람이 별로 없네.
김성한이나 유현이의 경우와는 다르지만, 사실 초기 각성자 중에서는 가정이 파탄 난 사람이 꽤 많긴 했다. 당시에 각성했다는 것은 몬스터의 공격을 받았다는 뜻이고… 마침 주말이라 가족과 함께 있었던 경우가 많았으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부상자만 무려 백만 명 단위인 초유의 사태였다. 상처도 많았고 여전히 상처가 아물지 않은 사람들도 많았다.
“부모나 다름없던 조부께서도 병환으로 작년에 돌아가셨지요. 그때 길드장님과 석 팀장님이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해외에서 병구완 전문 힐러까지 초빙해 주었거든요.”
“그랬군요.”
힐러는 질병 치료까지는 못 하지만 기력 보충과 통증 감소에는 뛰어났다. 마약성 진통제와 달리 스킬은 부작용도 없고. 비싸다는 게 제일 큰 단점이지만.
이야기가 하나둘 쌓여 갈수록 빈 술병도 하나둘 늘어 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취기가 오르질 않았다. 아주 없는 건 아니고 살짝 알딸딸해질 듯 말 듯 감질나는 느낌에서 멈춰 있었다.
“보기보다 술이 강한 모양입니다.”
김성한이 말했다. 아닌데. 내 주량은 얼마 안 된다. 5년 뒤에야 레벨이 올라 스탯빨로 주량도 늘어났지만 지금은 1렙이니 소주 한 병에 얼굴이 달아올라야 정상이었다. 그런데 왜 멀쩡하냐.
“…오늘따라 잘 들어가네요.”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왜 안 취하지? 물론 완전히 취해 버릴 생각은 없었다. 자칫 헛소리라도 해서 스킬에 대한 걸 털어놓아 버렸다간 곤란해지니까.
하지만 약간의 취기 정도는 있어야 키워드 내뱉기가 쉬워질 텐데.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말 못 하겠다고.
“너무 취하지 않는 편이 낫긴 하죠. 저 술주정, 쪽팔린 종류거든요.”
그래도 일단 밑밥은 깔았다.
“울기라도 합니까?”
“에이, 그런 거야 쪽팔릴 것도 없죠. 제 술주정은… 아무한테나 고백하는 겁니다.”
연기할 필요 없이 멋쩍은 표정이 절로 지어졌다.
“취중고백 했다가 뺨 맞은 적도 있다니까요.”
물론 진짜 그런 적은 없고… 안 취하고 멀쩡한 정신으로 고백했다가 뺨 맞은 적은 있었다. 말로 거절하면 되지 왜 뺨까지 때린 건지 아직도 이유를 모르겠어. 내가 그렇게 싫었나?
“그것 참 곤란했겠군요. 제 대학 동기 중에는 취하면 아무나 붙잡고 입 들이대는 놈도 있었습니다. 예비대 때 피해자가 속출했었죠.”
…예비대가 뭐지. 예비 부대 말하는 건 아닐 테고.
묻기엔 쪽팔려 그냥 소주 홀짝이며 웃어넘겼다. 나도 대학이나 가볼까. 시간이야 남아돌 테니 공부해서 수능을…….
‘취기도 없는데 헛생각이 다 드네.’
대학은 무슨. 근데 진짜 왜 안 취하냐. 원래라면 이미 필름 끊어졌을 텐데. 그러고 보니 어젯밤 마신 맥주도 영 기별이 없긴 했다. 반캔밖에 안 마셔서 그런 줄 알았는데.
뭐가 문제지. 템도 마력 올려 주는 귀걸이 말곤 안 했고, 스킬도… 설마 스킬 때문인가?
‘독 저항이 범인인가.’
의심 가는 스킬이 그거밖에 없었다. 일정 이상의 알코올도 독으로 쳐서 막아 버리는 건가? 중독성도 있고 과하면 몸에도 안 좋은 거긴 한데, 그래도 독까진 아니잖아.
…독 저항 스킬 탓이 맞다면, 설마 이젠 술에 취하지도 못하는 건가. 적당히 올라오는 기분 좋은 취기랑 영원히 작별이라고? 미친?
“표정이 안 좋은 듯한데 역시 술이 과한 겁니까?”
“아, 아뇨. 그냥 약간 걱정스러운 일이… 생각나서요.”
내 술! 내 치맥! 곧 나올 각성자 리그 개재밌는데 맨정신으로 그 난장판을 봐야 한다니!
‘망할, 왜 하필 패시브 스킬이야. 스킬 못 끄나? 패시브 스킬 끌 수 있다는 소린 못 들어 봤지만.’
마나 소비도 안 하니 끌 생각을 하지도 않는 게 보통이었다. 애초에 꺼지지도 않을 듯하고. 패시브가 괜히 패시브겠냐.
‘그래도 온오프 가능하면 좋을 텐데. 지금 한 번만이라도 어떻게 안 되나. 취한 척하고 맨정신으로 키워드 말하긴 싫다고. 독 저항 스킬 꺼져라. 독 저항 스킬 오프.’
역시 안 되는…….
[독 저항(L) 스킬이 취소됩니다.]쨍그랑! 내 손에서 술잔이 미끄러져 떨어졌다. 그 광경이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느리게 인식되었다.
“한유진 씨? 괜찮습니까?”
아니, 안 괜찮… 미친… 바보짓 했다. 그게 진짜, 꺼질 줄이야.
가득 찼던 둑이 터져 버린 듯 술기운이 단숨에 밀려들었다. 시발, 불덩이라도 삼킨 것 같아… 스킬, 다시 써야…….
‘스킬 이름… 뭐였지…….’
뭐, 였더라…….
그리고 필름이 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