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278
276화 루가 폐야
분명 해파리의 스탯이 나보다 약간 낮을 텐데도 의외로 밀려나지 않았다. 무기가 더럽게 좋은 걸까. 당연히 SS급쯤 가볍게 넘어서는 걸 가지고 있겠지.
– 읏차!
그때 체인질링이 내가 미리 꺼내어 주었던 폭탄을 무해의 왕을 향해 던졌다. 힘겨루기를 하느라 도망칠 수 없었던 해파리가 인상을 잔뜩 찌푸린다. 퍼엉, 소리와 함께 무해의 왕이 뒤로 주욱 밀려나갔다.
“화염 저항 참 좋단 말이야. 폭탄 영향을 거의 안 받거든. 특히 열을 뿜어내는 종류는.”
다시 폭탄을 꺼내 던지며 순간이동을 사용했다. 이번에 던진 폭탄의 위력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하지만 펑펑 열과 빛을 뿜으며 터져 나가는 통에 무해의 왕은 내 접근 경로를 예측할 수 없었다.
순식간에 해파리의 옆으로 다가붙으며 검을 휘둘렀다. 새하얀 옷이 찢어지며 푸른빛 체액 같은 것이 튀었다. 하지만 급습한 것치고는 상처가 얕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오래 산 덕인지 피하기 힘든 공격을 경상만으로 잘도 흘려낸다.
물론 내가 그걸 칭찬해 줘야 할 이유는 없었다. 반대로.
“30년짜리 F급한테 밀리기나 하고. 나이 완전 헛먹었네!”
초월자 딱지가 아깝다. 몇 살인지 물어나 보자. 무해의 왕이 이를 악물며 미끄러지듯 옆으로 물러났다. 안개가 자욱하게 내 앞을 가로막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가볍게 휘두른 불길에 밀려나가고.
“왜 이렇게 늦나 했더니.”
성현제가 날 향해 웃었다. 뭐, 뭐야. 어떻게, 언제.
“여긴 왜 왔어요! 지금 댁은 방해만─”
서걱. 성현제에게 정신이 팔린 사이 다가온 비늘 검이 내 팔을 할퀴려 들었다. 전투예지의 경고에 따라 재빠르게 몸을 돌렸지만 옷이 약간 잘려 나갔다. 성현제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가짜였구나. 이 무척추젤리새끼가.
“아저씨!”
반가운 목소리가 또 들렸다. 가짜라는 걸 알면서도 반사적으로 흠칫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놈의 안개 깡그리 불태워 버리든가 해야지.
불길을 더욱 넓게 퍼뜨리며 번개를 내리쳤다. 콰르릉, 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안개가 밀리듯 흩어진다. 안개라면 미세한 물방울이 뭉친 것이니 전기분해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아직 내 능력으로는 불가능했다. 해파리 놈의 마력도 섞여 있어 손대기 더욱 까다롭기도 했다.
그래도 안개는 안개니까.
솨아아아─
예림이의 스킬, 차가운 탄식을 마나를 듬뿍 퍼 넣으며 썼다. 예림이의 안개가 무해의 왕의 안개와 뒤섞이고, 순식간에 온도를 낮추며 얼어붙었다. 후두두둑, 안개가 굳어진 미세한 얼음 조각들이 비처럼 바닥으로 떨어졌다.
마나 소모가 상당했지만 포션을 꺼내들 필요는 없었다. 줄어들었던 마나가 순식간에 다시 채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은혜의 마나의 샘 덕분일 터다.
“예쁘지 않아? 파티장에라도 온 것 같군.”
얼마 남지 않은 안개를 보호막처럼 제 주위에 두른 무해의 왕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사방에 흩뿌려진 얼음알갱이들이 곱게 반짝거린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바스작, 소리를 낸다.
색색의 은은한 빛을 흘리던 해파리는 이제 완전히 칙칙해졌다. 옅은 물색으로 흐느적거리고 있다.
“왜 그렇게 조용하신가. 아는 거 많잖아. 아직 시간이 있으니 떠들어 봐. 조금이라도 더 사셔야지.”
혹시 아냐, 사실은 영혼이 참 맑아 보이셔서 좋은 말씀 드리려고 온 거랍니다~ 하고 유용한 정보들 풀어 놓으면 이제라도 혹해서 따라나설지도. 얼굴 알려지기 전까지는 길에서 꽤 많이 잡히는 편이었는데. 진짜 힘들 때는 걔들도 안 잡더라.
“변변한 공격 스킬이 없는 건가. 환영이나 보여 주고.”
“못 쓰는 거야, 멍청아.”
무해의 왕이 툴툴대듯 말했다.
“육체에 비해 턱없이 강한 힘을 휘두르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으니까. 호수 물을 휴대용 가죽 부대에 담는다고 생각해 봐. 펑, 터져 나가지. 스킬을 약화해서 쓸 수도 있겠지만 우물 정도는 되어야 제대로 효과가 나타나는 것들이라.”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곤 입꼬리를 올린다.
“너도 그래. 그 몸, 얼마나 오래 갈 거라고 생각해?”
“뭐?”
“S급 이상 스킬이 대체 몇 개지? L급도 있을 거야. 말해 봐, 어차피 날 죽일 거잖아. 호기심이라도 풀고 가자.”
해파리 놈을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어차피 도망치지도 못할 테니 알 거 다 알아내는 편이 낫다. 무엇이든지.
“L급 칭호 두 개. 칭호에 따른 L급 스킬 다섯 개.”
무해의 왕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흐리던 눈이 새카맣게 물들며 빛을 품는다.
“가지고 싶어! 분석해 보고 싶어! 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하나하나 자세하게 속도 겉도 전부 다!”
“…곧 죽을 놈 주제에 호기심 한 번 대단하군.”
“오래 살려면 보통 세 가지야. 바위나 나무처럼 아무 생각이 없거나, 패륜아들처럼 평생 바칠 만한 목표를 가지고 있거나, 그리고 마지막은.”
얼마 남지 않은 안개가 흔들렸다. 검붉은 금속성 줄이 수십 가닥 치렁치렁 늘어뜨려진 지팡이가 해파리 놈 앞에 길게 세워졌다. 심상치 않다. 상대의 스킬도 무기도 모르는 상황에서 위기감이 들면 일단 피하고 보는 게 상책이다.
거의 곧장 순간이동을 썼지만.
“큿!”
“호기심! 흥미! 세상 모든 것을 파헤쳐 보고 싶은 탐구심!”
공간을 넘어 뻗어 온 검붉은 줄이 내 다리를 꿰뚫었다. 줄을 혈염으로 태워 보려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은혜를 SSS급으로 쓰고 있었으니, L급 무기쯤 되는 건가.
– 아빠!
체인질링이 깜짝 놀라며 앞발로 줄을 붙들었다. 하지만 날개만 파닥거릴 뿐 별다른 도움은 되지 못했다. 내 스킬은 물론 해파리 놈 공격에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더니 그 스스로도 직접적인 물리력은 제대로 쓸 수 없는 모양이었다. 환상종이란 것과 연관 있는 걸까.
줄은 아직 수십 가닥이 더 남았다. 이를 악물고 억지로 순간이동 스킬을 썼다. 살이 뜯겨 나가고 내 피가 흩뿌려진 자리로 콰득, 두 번째 줄이 들이박혔다.
상처를 치유하며 다시 순간이동을 쓰면서 전류와 탄식을 동시에 뿌렸다. 저 지팡이의 효과인지 전투예지도 잘 통하질 않았다. 공격을 가해 올 것이라는 예감은 들었지만, 방향은 특정할 수 없었다.
휘익! 공기를 가르며 또다시 줄이 나를 옭아매려 덤벼들었다. 설사 은혜를 신화급으로 쓴다 해도 내 몸이 묶이는 건 막을 수 없다. 지금보다 보호 등급을 높이기엔 마나가 걱정되고. 마나의 샘이라 해도 아직 어리다 하니 무한은 아니겠지.
내 주위로 펼쳐 놓은 전류와 탄식에서 전해지는 감각에 의지해 아슬아슬하게 줄을 피했다. 마력감지가 눈보다 더 빠르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줄을 내 몸 속에 직접 이동시키지는 못하는 모양이었다.
‘마력 저항력 때문이겠지.’
공간이동은 물론 다른 스킬들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예림이가 적의 몸 속의 수분을 직접 얼려 버리려 해도 B급쯤만 되면 아예 통하지 않았다. 타인의 마력이 농도 짙게 지배하는 공간에서 자신의 마력을 움직이기란 어지간한 등급 차이로도 어려운 일이었다. C급 이하야 그런 힘든 컨트롤 할 필요 없이 통으로 얼음덩어리 만드는 편이 낫고.
“한 번만 분해해 보자, 응? 죽기 전의 소원이야.”
지팡이의 줄들을 조종하며 해파리가 말했다. 놈도 무사하진 못했다. 하락한 스탯을 넘어서는 힘을 쓰고 있는 중인지 몸뚱이가 흐물흐물 녹아내리고 있었다. 이미 한쪽 팔은 진흙처럼 뚝뚝 바닥으로 떨어져 사라졌다.
버티기만 하면 알아서 죽을 판이다.
“뭐 예쁘다고 네놈 소원을 들어주겠냐! 읏, 정 바란다면 일단 뒈져 봐. 죽은 사람 소원은, 들어주는 게 도리지!”
맹렬하게 날아든 줄이 발목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은혜를 봉으로 변형시켜 줄을 휘감았다. 수정으로 이루어진 듯 반투명한 봉에 검붉은 금속 줄이 휘감겼다. 해파리 놈의 무기도 은혜를 부수진 못했다.
“공간이동은 공격할 때만 사용하더라?”
회수는 평범하게 거두어졌다. 즉, 공격 시에만 해당되는 옵션일 테니. 그대로 줄을 당겨 지팡이 자체를 빼앗으려 하자 수 개의 줄이 한 번에 몰려들었다.
“살벌하네.”
은혜를 재빠르게 가는 사슬로 바꾸어 휙, 당겨 줄에 휘감긴 것에서 빼낸 뒤 너른 방패로 변형시켰다. 방패로 막는 척했다가, 방패 바깥쪽으로 순간이동했다.
콱! 콰각!
내가 있던 자리로 공간이동 한 줄들이 사납게 쏟아져 내린다. 공간이동 쓰는 거 뻔히 아는데 대놓고 방패로 막으려 들겠냐.
여러 개의 줄을 한 번에 다룬 탓인지 무해의 왕이 크게 비틀거렸다. 오른쪽 팔을 넘어 어깨와 그와 이어지는 허리께까지 사라진 채다. 안개로 가려진 하반신 또한 무사한 것 같진 않았다.
텅, 확연히 힘을 잃은 줄을 다시 봉의 형태로 변한 은혜로 쳐냈다. 열심히 마지막 발악을 하긴 했지만 슬슬 끝이 보였다.
“목숨 거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는데. 남의 성의를 받아 줄 줄을 모르네.”
“목숨 건다고 성공하는 건 픽션에서나 통하는 거고. 현실에선 팔 할이 그냥 죽어. 팔 할도 많이 쳐줬다.”
흔들리던 금속 줄들이 모두 힘없이 바닥에 늘어졌다. 지팡이가 흐릿해지더니 이내 사라진다.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죽어가는 무해의 왕을 보니 쓸 만한 건 아니지 싶었다. 원래의 능력치였다면 훌륭한 무기였겠지. 한두 개가 아니라 수십 개의 줄을 사방으로 공간이동시키면 어떻게 당해 내냐.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직은 서 있지만 그 존재감 자체가 흐려져 가는 무해의 왕을 바라보았다.
“디아르마 놈처럼 속속들이 헤쳐 보고 싶은데, 정신계 스킬 받아 줄 생각 없냐.”
걸어 보려고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무해의 왕이 피식 웃었다.
“네 이름. 이름을 말해 줘.”
“알고 있으면서. 한유진이다.”
“루가 폐야. 아주 오래된 종족의 왕이지.”
루가 폐야가 노래하듯 말을 이었다.
“안개가 퍼져 나가면 사람들은 모두 집으로 숨어들었어. 창을 닫고 문을 닫고 틈새에 진흙을 바르렴. 한 게으름뱅이가 늦잠을 자다가 때를 놓쳐 버렸네. 안개가 걷히고 집에 들어온 부모를 도둑이야! 외치고 창으로 쿡, 찔러 버렸어.”
옛날 일이야, 옛날 일. 한쪽만 남은 손이, 촉수들이 내게 손짓했다.
“가까이 와. 조금만 만져라도 보자. 대신 이야기해 줄게.”
정말로 안전한 것일까. 아직 여력이 남은 건 아니겠지. 내 어깨로 돌아와 앉은 체인질링을 힐끗 쳐다보곤 무해의 왕, 루가 폐야의 앞으로 다가갔다. 루가 폐야가 팔을, 가느다란 촉수를 뻗어 내 어깨를 두드렸다.
“이렇게 죽게 될 줄은 몰랐지만, 생각보다 나쁘진 않아. 그래도 아쉬워. 한유진. 지금도 널 가지고 싶어.”
촉수가 길게 뻗어나며 내 뒷목을 매만졌다. 반사적으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야, 기분 나쁘거든.”
“조금만 참아. 마나각인 덕분에 별짓 안 하고도 살펴볼 수 있을 거 같거든. 너도 네 상태가 궁금하잖아.”
“헛짓거리 안 하는 거 확실해?”
“계약서라도 쓰든가. 나 십여 분도 안 남았어.”
루가 폐야가 나를 반쯤 끌어안 듯 하며 촉수를 등 쪽으로 움직였다. 스르륵 기어내려 가는 움직임이 소름 끼친다.
“그래도 보조 스킬들은 몸에 부담이 덜 가. 낮은 스탯에 높은 스킬이 가능하다는 거지. 하지만 아주 영향이 없는 건 아니야.”
죽어가는 사람의 것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차분한 목소리였다.
“정신계 스킬도 있구나. 공포 저항. L급?”
“어.”
“스탯 F급에게 L급 정신계 저항 스킬이라니. 아마 패륜아들이 일부러 넣은 스킬일 가능성이 높아. 보상으로 얻었지? 보상은 적정선에서 조정이 가능하니까. 공포 저항을 가지고 있으면 다루기 쉬워지지. 두려움이 없으면 조심성도 자연스레 옅어지거든.”
그리고 또 뭐가 있을까, 하고 루가 폐야가 속삭이듯 말했다.
“양육자도 L급인 거지? 이 용도 네가 키워낸 걸 테고. 확실히 그러네. 디아르마의 스킬로, 우와. 대단해.”
“그래. 맞아.”
“정말 조심해야겠다. 초승달이 너에 대해 알게 되면 무척 좋아하겠어. 초월자들을 키워 낼 밑바탕으로 쓰려 하겠지. 물론 나도. 아쉬워, 너무 아쉬워.”
그러고 보니 무해의 왕이 초승달과 아는 사이라고 했었지.
“초승달은 대체 어떤 녀석이지? 한때 같이 일하기도 했다면서.”
“아, 그랬지. 나도 원래 중립에 가까웠거든. 초승달은, 일단은 세계를 구하려고 하고 있어. 정확히는 근원을 없애고 싶어 한달까. 난 근원이 있는 편이 더 재미있다고 생각해서 갈라섰지만. 정체도 제대로 알아내지 못했는데 사라지는 건 아깝잖아.”
역시 이 녀석은 효도중독자란 명칭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냥 자기 재밌다고 근원 편 드는 거 아니냐.
“근원이 세상을 전부 삼키지 못하도록 초월자를 계속해서 키워내 막으면서, 동시에 근원을 소멸시킬 재목을 찾고 있는 모양이더라고. 특히 작은 달에게 거는 기대가 컸던 모양이야.”
“작은 달에게?”
“응. 처음에는 바로 초월자로 만들려고 했는데 작은 달이 거부했지. 많이 아꼈는지 버리지 않고 다른 세계로 옮겨 줬지만 또 거부하고.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다른 초월자가 건드리기라도 할세라 잘 감추기까지 했지.”
그래서 그 후의 일은 잘 모른다며, 작게 숨을 내쉰 루가 폐아가 무너져 내렸다. 반사적으로 붙잡아 부축했다. 하반신이 완전히 사라지고 대신 몸을 지탱하던 안개 또한 흩어졌다.
“나보다 오래 버틸 거랬지만 너도 그리 길게는 못 가. 이 세상 인간의 수명이 백년 정도였던가. 그 반도 못 갈 거야. 어쩌면 더 빠를지도 모르고. 네 스킬들은 널 갉아먹을 수밖에 없거든. 스탯이 S급은 되어야 괜찮아지겠지.”
“목표치가 너무 높은데.”
“몸 상태 안 좋아진 적 없어? 있지? 눈이 잘 안 보인다거나 팔이나 다리가 마비되거나 청각, 촉각, 혹은 말을 못 하게 된다거나.”
“어, 눈은 잠깐.”
“그것 봐. 이미 문제가 생겼었다니까. 너희 세상 인간치곤 마른 편이지?”
“그렇게 까진…….”
“그리고 네 속도.”
촉수 가닥이 내 가슴을 쿡 찔렀다.
“공포 저항으로 마비시켜 놓았지. 그것만 아니었으면 내가 데려갈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아쉬워. 루가 폐야는 몇 번이나 한탄했다. 이제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는 듯이 무해의 왕의 몸이 흐릿해졌다. 금방이라도 손안에서 사라질 것만 같다.
“시스템은, 패륜아들은 진짜 내 세상을 구해 주려 하는 거냐?”
“시스템은, 채터박스가 잘 아는데. 만나면 안부 전해줘. 패륜아들은, 음. 신입을 잘 꼬셔 봐. 걘 아직 물이 덜 들었을 테니까.”
“채터박스면 널 돕던─”
“만나서 반가웠어. 네가 어떻게 될지 지켜볼 수 있다면 더 좋겠지만. 마지막으로 정말 신기한 걸 봤으니 그럭저럭 나쁘진 않아.”
그럼 안녕. 짧은 인사와 함께 주르륵, 루가 폐야의 남은 몸뚱이가 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내 손가락 사이로 맑은 물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바닥에 고인 작은 웅덩이 가운데 마석이 보였다. 능력치가 하락된 상태로 사망해서인지 크기도 작은 편에 색도 SS급으로 보였다. 오색빛깔이 희미하게 감돌고 있었지만.
그것을 멍하니 내려다보다가 곧장 줍지 못하고 뒷걸음질 쳤다. 체인질링의 스킬이 아직 지속되고 있었지만 온몸에 힘이 죽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저항하지 않고 풀썩 주저앉았다.
– 아빠, 여기.
은빛 작은 앞발이 쥐고 있던 작은 구슬을 내밀었다. 인벤토리에 들어가지 않아 체인질링에게 맡겼던 유현이의 기억이다. 그것을 받아들자, 참았던 것이 울컥 올라왔다.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괜찮아. 이제 돌아가면 된다.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