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289
287화 포식자 (2)
이린이 유현이에게 들키지 않으려는 듯 내 옷깃 안쪽에서 주둥이 끝만 살짝 내밀었다. 유현이는 시시오를 완전히 제압하기 위해 두 팔을 마저 부러뜨리는 중이었다. 우리 대화를 눈치챈 기색은 없었다.
– 유현이는요 지금 불안정해요. 유현이의 불 말이에요.
조그맣게 붉은색 불꽃이 이린의 콧등 위로 피어올랐다.
– 원래라면 평범한 붉은색이었을걸요. 형이 없었더라면요. 하지만 형이랑 같이 있고 싶어서 검은색으로 억눌렸어요.
사회에 섞이기 위해 본성을 억누른 결과였다.
– 계속해서요! 그대로 두면 거기에 맞게 성장하거나 변형되었겠죠.
절로 회귀 전이 떠올랐다. 스스로 몸에 상처를 내어, 그 피를 따라 타올랐던 독기를 머금은 흑혈염. 그때는 그저 강력한 스킬이라고 여겼었다. 피를 흘려야 한다는 건 못마땅했어도 그 불꽃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지금은, 대체 어떤 심정으로 그렇게. 그렇게까지 되었을까, 그 가시가 가슴에 박혔다. 속이 할퀴어지듯 아프다.
– 형?
“응.”
크게 숨을 내쉬었다. 피스가 걱정하듯 나를 돌아보았다. 부드러운 털로 휘감긴 목덜미를 쓰다듬어 주며 쓰게 웃었다.
“그렇게 되면 안 되지.”
이번에는, 유현아.
“지금은 다시 변했잖아.”
푸른빛을 띠고 있다. 그때,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
“…왜, 변한 거지.”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혹시 내가, 유현이가 스스로를 억누르게 만든 장본인이 잠깐이나마 사라져서, 그런 덕분이라면.
– 형이 많이 사랑해 줘서요.
“뭐?”
그때 유현이가 이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린이 얼른 내 옷 안쪽으로 완전히 숨어들어 갔다. 좀 더 린이의 말을 들어 봐야겠는데.
“유현아! 일본 헌터들 상태 좀 살펴봐 줄래? 아마 길드 전력 너무 약해지면 귀찮아져. 뜯어먹을 것도 적어지고. 그러니 목숨 붙어 있을 만큼 치료도 좀 해줘라. 사용한 포션 청구해야 하니 개수랑 등급 기억해 두고.”
아마테라스 길드가 약화되어서 일본 내 괜한 길드 다툼이라도 벌어지면 나도 손해다. 그냥 사자 놈이 왕 하게 내버려 둔 채 두고두고 조공 바치게 하는 편이 낫지.
“알았어, 형.”
“고마워!”
유현이가 고개를 끄덕이곤 쓰러져 있는 일본 헌터들에게로 다가갔다. 한둘이 아니니 시간 좀 걸리겠지. 이린이 다시금 머리를 살짝 내밀었다.
– 형이랑 화해하고 같이 살기도 하고 또 형이 계속 믿어 준다고도 했잖아요. 그래서 느슨해졌어요. 또…….
이린이 갑자기 내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 오해하지 마세요, 형. 오해하면 안 돼요!
“응? 뭘?”
– 유현이는 형과 관련된 사람만 받아들인 거예요. 형이 유현이한테 백이면 구십구, 아니 천, 아니 십만이면 구만구천구백구십구지만요! 딱 일만큼은 다른 사람들도 생각해요. 하지만 그거 다 형을 바탕으로 한 거니까 형이 백 퍼센트예요! 진짜예요!
…아니 그걸 왜 필사적으로 변명하려 드는 거냐. 작은 목소리로 종알종알거리며 이린이 간절한 눈빛을 보내왔다.
“오해할 일 없어. 유현이한테 다른 친한 사람들이 생기면 좋은 일이잖아.”
– …어째서요?
이린이 충격 받았다는 듯 입을 딱 벌렸다.
– 혀엉 왜 서운해하지 않아요? 형 말고 다른 사람도 아주 쪼금이지만 신경 쓰는데!
“아니 보통은 여러 사람과 어울려 살잖아.”
– 진짜 좋아하는 상대가 있으면 안 그래야 해요! 우리는 그런데! 순수하게 한 명만 바라봐야 하는데!
이린이 어떻게 그러냐고 칭얼거렸다. 음, 불의 정령에게 편견 같은 게 생길 것만 같다. 설마 물의 정령도 이런 특이한 성향 같은 게 있는 건 아니겠지. 무척이나 섭섭해하는 이린을 인간은 다르다며 달래 주었다.
– 인간은 다른 거 린이도 알아요. 그래서 형이 유현이만 바라보지 않아도 참고 있는걸.
“유현이도 인간이야. 어울려 살 수 있다면 그래야지. 물론 억지로 어울리게 시키진, 않을 거지만.”
동생이 평범한 인간이었더라면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하고, 좋은 사람 만나고, 그러길 여전히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단순한 내 욕심 같았다.
행복하면 됐지 뭐. 꼭 친구가 많아야 하고 연애를 해야 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가져야 하나. …그럼 좋긴 하겠다만, 자기 자신이 원한다는 게 가장 중요할 것이다. 남에게 피해 안 주는 선에서 마음 내키는 대로 사는 게 최고지.
“그런데… 유현이가 신경 쓰고 있다는 사람들 말이야. 누군지 말해 줄 수 있을까?”
괜히 동생 쪽을 힐끔거리며 물었다.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있기는 있다는 거잖아.
– 십만 중에 일이에요, 딱 일이요. 그중에 80퍼센트 정도는 피스랑 박예림이요. 린이는 박예림 별론데.
옷 안쪽에서 꼬리를 탁탁 친다. 속성 때문인가. 물의 정령 태어나면 둘이 싸움 붙는 거 아닌지 걱정되네. 유현이와 예림이도 처음 만났을 때 서먹하긴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예림이는 물론이고 유현이도 예림이를 생각해 주고 있다니. 어쩐지 뿌듯해졌다.
– 남은 부분은 유명우랑 노아랑 해연 길드 사람들 일부랑요. 그리고 문현아랑 성현제랑 송태원도 조금이요. 전부 형이 바탕이에요! 확실해요! 형 아니면 조금도 신경 안 썼을 거라고요!
안 그래도 된다니까. 하지만 이린은 내가 서운해하기를 무척이나 바라는 시선을 보내왔다.
“음, 유현이에게 나 말고 다른 좋아하는 사람들이 생겨서 섭섭하네.”
– 그쵸!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요. 형도 서운하죠?
“그래. 하지만 유현이에겐 절대 말하지 마. 난 괜찮아.”
린이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유현이의 불꽃에 대해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 조금이지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생겨서 더 가벼워졌을 거예요. 그래서 약간 바뀌었지만요, 지금은 검지도 파랗지도 않아요. 어중간해요. 완전히 새파래져야 하는데! 그럼 아마 특별한 능력도 생길 거예요.
혈염처럼 말인가. 흑염이든 청염이든 어느 한쪽으로 정해져야만 제대로 성장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후자여야 하겠지. 스스로를 상처 내는 짓은 해서는 안 된다.
“어떻게 해야 완전히 푸른색으로 바뀔 수 있을까?”
– 린이도 정확히는 몰라요. 하지만 유현이가 너무 참아서 까맣게 된 거니까, 형이 안 참는 유현이랑 만나 줘요!
“…그랬다간 나는 물론이고 유현이도 위험해질 거 같다만.”
동생 녀석이 참고 있다는 내용이, 익명으로도 상담 못 할 그런 거라서. 누구한테 말하든 당장 신고하세요, 하지 않을까.
– 형이 죽었다고 생각했을 때 유현이는 버텼잖아요. 그러니까 억누르지 않아도 형을 덜 해칠 날도 분명 올 거예요! 예전 같았으면 린이도 형한테 부탁 안 했어.
아카테스에서 유현이는 나를 기다려 줬다. 미안하면서도 기특하고, 또… 잠깐만.
“덜 해친다고? 안 해치는 게 아니라?”
– 그건 유현이가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지 않는 이상은 불가능하고요, 형. 불은 꺼지지 않는 이상 태울 수밖에 없어요. 형도 그 정도는 괜찮잖아요.
“어, 그래 뭐.”
– 그래도 형이 너무 위험해지면 안 되니까! 전에 린이한테 들어왔을 때처럼요. 유현이한테 들어가 주세요.
전이라면, 디아르마의 스킬을 사용해서 정신 속으로 들어간 걸 말하는 건가. 성현제에게도 한 번 사용했으니 유현이에게도 쓸 수 있을 것이다. 확실히 거기서라면 죽을 일은 없지.
“내가 잘할 수 있을진 모르겠다만, 알았어. 그렇게 하면 안전하게 유현이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겠지.”
– 안전한 건 아닌데요.
이린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 안전하면 형한테 몰래 말 안 했죠. 죽지는 않겠지만 삼켜질 수는 있을걸요.
“그럼 어떻게 되는데?”
– 못 나와요. 린이도 자세히는 몰라요. 아마 유현이랑 계속 같이 있게 되겠죠?
지금의 내 동생은 당연히 위험하다고 말릴 것이다. 하지만 본성 그대로라면 어떨까. 그나저나 린이 이 녀석, 정말 꿋꿋하게 유현이 편이구나. 지금도 안전하지 않다면서 당연히 해줄 거죠, 라는 눈빛을 보내오고 있다. 든든하긴 하네.
“우선은 집에 돌아가고 나서. 여긴 아직 위험하니까.”
아마테라스 길드 외의 다른 일본 헌터들도 속으로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을 것이다. 그래 봤자 우리 상대는 못되겠지만 너무 방심해도 안 되지.
“적당히 정리했어.”
유현이가 다시 이쪽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원래의 절반 정도로 줄어든 쇳물이 아직 주위를 빙그르 맴돌고 있었다.
“좀 아깝긴 하다. 그거 그대로 없어지는 거야?”
“응. 서서히 사라져. 사용할수록 더 빨리 사라지고.”
– 린이가 먹을래! 먹게 해줘!
이린이 소리치고 유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붉은 도마뱀이 불길로 화해 쇳물에 달라붙었다. 그리곤 야금야금 삼켜간다.
“S급 헌터는 전부 살아 있어.”
“수고했어. 그럼 계약서 작성을 해볼까.”
피스의 등 위에서 내려섰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시시오에게 다가가자 놈이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부러진 팔을 하고서도 억지로 일어나 앉는다.
“이것 참 유감스럽네요. 좋은 인연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도 저는 시시오 씨와 잘 지내고 싶답니다.”
두고두고 뜯어먹고 싶어요. 진심으로. 인벤토리에서 계약서를 꺼내 들었다. 가상세계에서 사두었던 SS급 계약서다. 우리 동네엔 SS급 계약서가 드물지만 저 동네엔 비교적 흔한 편이었다. 그래서인지 현실화하는 데 포인트도 얼마 안 들었다.
“보자, 시시오 씨 포함 S급 헌터 세 명의 목숨을 살려 준다. 이것만으로도 받을 게 참 많겠는걸요?”
“…왜 네놈이.”
“네?”
“네놈이 나서는 거냐! 날 제압한 건 저놈이다!”
시시오가 내 옆을 지키듯 선 유현이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뭔 소리를 하는가 했더니.
“유현아, 네가 맡을래?”
“아니. 형이 원하는 대로 해.”
이런 식의 거래는 밝혀져서 좋을 거 없으니까 내가 개인적으로 하는 편이 낫긴 할 것이다. 아마테라스 길드에서 먼저 공격해 왔다, 라고 해도 살려 줄 테니 가진 거 다 내놔, 는 부정적으로 비칠 가능성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나한테는 저주 저항이 있으니 여차하면 발뺌하기도 쉽고.
“들었죠? 다른 사람들 오기 전에 빨리 처리합시다.”
“…저 괴물이.”
“아 뭐래, 남의 동생더러.”
“괴물이 아니면 뭐냐! 아니, 네놈이 더 이상해!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저런 놈을 부려먹을 수가 있는 거지?”
“부려먹다니, 말이 심하네. 내 동생이 착해서 형 부탁을 잘 들어주는 거지.”
시시오 놈이 어이없다 못해 팔짝 뛰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젠장, 그래도 같은 S급이건만! 저놈은 전투가 아니라 사냥을 하는 듯했다! 같은 맹수가 아니라 우리를…….”
“먹잇감 취급?”
흐려진 뒷말을 대신 해주자 시시오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자칭 사자란 놈이니 자존심이 많이 상한 모양이었다.
“단순히 내 동생이 잘났다는 거잖아. 호들갑 떨긴.”
“다르다! 세성 길드장과도 달라!”
“다른 사람이니 당연히 다르지. 꽥꽥대지 말고 계약서나 쓰자고. 첫 번째. 향후 아마테라스 길드는 자신의 길드의 영향력이 미치는 모든 던전의 상세한 정보를 제공한다. 아이템도 당연히 포함이야.”
내 말에 시시오가 눈을 크게 떴다.
“뭐……!”
“두 번째. 아마테라스 길드의 수익 10퍼센트를 매달 말일 피해 보상금으로 지급한다. 기한은 30년으로 하죠. 너무 적게 받는다, 안 그래요?”
내가 너무 착해서 그래. 10퍼센트가 뭐냐, 10퍼센트가. 하지만 일본 던전 관리를 하려면 길드 유지보수 비용이 필요할 테니까. 우리나라와 너무 가까워서 문제다. 던전 터져서 몬스터 넘어오면 곤란하잖아.
“아, 여기서 아마테라스 길드는 길드장 또는 그에 준하는 위치를 시시오 씨가 차지한 길드에 해당됩니다. 괜히 이름 바꾸거나 해체 후 다시 만들어도 소용없어요. 혹시 모르니 부길드장이 시시오일 때와 주요 길드원의 30퍼센트 이상이 아마테라스 길드와 동일할 때도 포함시키죠.”
편법 쓸 틈을 주면 안 되지. 눈앞의 사내가 길드장 자리를 내줄 리 없으니 길드장이 시시오, 라고만 해둬도 되긴 할 것이다.
“세 번째. 아마테라스 길드의 아이템과 던전 권리를 매달 세 개씩 피해 보상으로 지급한다. 뭘 가져갈지는 물론 제가 정합니다. 목록 정확하게 보내세요. 이것도 기한 30년입니다.”
“그, 그런 폭거를! 우리 아이템과 던전을 죄다 뜯어 갈 셈이냐!”
“먹고살 만큼 남겨 줄 테니 걱정 마시죠. 그러게 누가 비겁한 짓 하랬냐. 네 번째. 아마테라스 길드는 한국 길드에 절대 위해를 끼칠 수 없다. 만약 한국 길드가 먼저 시비를 걸 시엔 한국 헌터협회에 연락해 시시비비를 가려 주길 부탁해야 합니다. 요건 평생.”
“절대 받아들일 수─ 컥!”
시시오의 다리를 꿰뚫은 창을 유현이가 발끝으로 가볍게 밀었다. 상처가 헤집어지며 멎었던 피가 다시 솟아났다.
“우리나란 일본에 관심 없으니까 걱정 마세요. 우리 찝쩍대지 말라고 넣는 조항이니까. 마지막으로 아마테라스 길드는 마수사육소 소장 한유진, 해연길드 길드장 한유현의 요청이 있을 시 적극적인 지원을 한다. 인력이든 물질이든 말입니다. 이것도 무기한.”
계약서에는 좀 더 상세하게 조건들을 적어 넣었다.
“대충 이 정도로 해두죠. 한 짓거리를 생각하면 다 뜯어내고 거지꼴로 굴려먹어도 시원찮겠지만 제 마음이 워낙 여려서. 감사를 표해도 됩니다. 이미 머리 숙이셨네, 도게 뭐라고 하던가. 바닥에 머리 박고 엎어지는 거.”
“아니, 억!”
유현이의 다리가 치켜들리더니 시시오의 머리를 뒤꿈치로 내리찍었다. 그대로 머리가 바닥에 처박힌 시시오가 분한 듯 으르렁거렸다. 끝까지 기는 안 죽네.
“죽이면 안 돼? 형에게 원한 품을 거 같은데.”
시시오의 머리를 짓밟은 채 유현이가 말했다.
“그러긴 아깝지. 계약서에 내 안전 관련 상세하게 적어 넣지 뭐. 이거 SS급이라 지금은 풀 수 있는 사람도 없어.”
나 빼곤 말이다. 내가 먼저 사인하곤 시시오에게 펜을 내밀었다. 더러워진 얼굴을 든 시시오가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펜을 받아들었다.
“차라리…….”
“죽게?”
“안 죽어! 군자의 복수는 십 년도 늦지 않다!”
그러곤 단숨에 서명을 해버린다. 잘한다, 잘한다. 이런 점은 마음에 든다니까. 두 장으로 나눠진 계약서 한 장 곱게 인벤토리에 넣고 활짝 웃어 보였다.
“이걸로 다 용서해 드리겠습니다. 앞으로 사이좋게 잘 지내 보자고요. 지나간 과거는 잊고, 미움도 원망도 다아 버리고, 사랑합니다 호구, 아니 시시오 씨.”
계약으로 묶어 뒀으니 키워드 적용해 둬도 괜찮을 거 같은데. 역시 한 번에 성공하진 않았다. 대신 시시오가 뭐 씹은 표정이 되었다. 그냥 너스레 좀 떤 거 가지고 떨떠름해하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