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30
30화 도깨비 (2)
예림이는 다른 일정을 위해 떠나고 유명우도 먼저 올려 보냈다.
석하얀과 둘만 남자 가슴이 살짝 설렜다. 나한테 호감을 가진 여자와 단둘만 있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 …처음인가?
비록 석하얀은 학구열로 가득 차 있었지만.
그녀가 눈을 빛내며 종이에 던전 입구를 그렸다. 그림은 못 그리네.
“던전 포화 상태를 입구의 형태와 마나 분포도를 계산해 추측할 수 있다니, 놀랍네요. 지금은 단순 평균치 계산이라 이따금 급하게 공략을 시작해야 하는 경우도 생기잖아요. 발생한 지 삼 일 이내인 던전은 초록색, 브레이크가 일어나기 하루 전의 던전은 붉은색이라는 지표 외에는 없으니까요.”
“아직 추측일 뿐입니다. 장담하기에는 자료가 너무 부족하죠. 특히 한국에는 던전의 수가 그리 많은 편이 아니니까요.”
내 말에 석하얀이 안타까움 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맞아요! 너무 적어요. 아, 이런 소리 밖에서 하면 돌 맞겠지만요. 그래도 좀 더 많은 던전을 조사해 볼 수 없는 게 안타깝다니까요.”
“다수의 던전을 조사, 통계를 내어 본다면 뭔가 새로운 걸 발견할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그러니까요! 아니 왜 대부분의 나라가 외국인은 조사도 못 하게 하는지 모르겠어요. 공략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살펴만 보겠다는데. 솔직히 전 세계가 협력해야 할 일이 아닌가요. 던전에 대해 더 잘 알게 되면 사람들이 더욱 안전해질 수 있는데!”
울분에 차 외치던 석하얀이 이번에는 감동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은 국내에선 유진 씨가 처음이에요! 아직 던전은 무작위의 예측 불가능한 재앙이라는 설이 대세거든요. 그런데 규칙성이 있다고 확신하고 조사, 연구까지 하는 사람을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이야.”
그녀가 덥석 내 손을 잡으며 얼굴을 들이댔다. 아니, 잠깐만요. 저 연구 같은 거 안 하는데요.
“저랑 같이 연구실 차리지 않으실래요?”
“…사양하겠습니다.”
“왜요? 우리 둘이라면 분명 엄청난 발견을 할 수 있을 거예요!”
누가 삼촌조카 아니랄까 봐 석시명이랑 하는 짓도 비슷했다.
“저는 그냥 몸으로 뛰며 수박 겉핥기식으로 알아본 거라 책상 앞에서 머리 쥐어짜는 건 못합니다.”
“괜찮아요. 계속 몸으로 뛰시면 돼요. 정리는 제가 다 할게요. 통계학이 제 전공입니다!”
“검정고졸이라 학력이…….”
“문제없어요. 저 교수 자격 있거든요. 안 그래도 빽으로 던전이나 각성자 관련 학과 신설할 생각이었고요. 세상에서 제일 상냥한 교수님이 되어 드릴게요. 논문도 그냥 통과시켜 드립니다!”
빽으로 학과 신설할 거라니, 집안이 대단한 아가씨였구나. 대학 졸업증 공으로 얻게 해준다는 말이 솔깃했지만 그래도 이제 와서 공부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게다가 던전학 권위자가 될 사람과 길게 엮여 봐야 순식간에 밑천 털리고 말겠지. 그냥 가끔 아는 척이나 하는 편이 나았다.
“죄송하지만 전 이제 다른 쪽에 관심이 더 많아져서 던전과 각성자에 대한 연구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른 쪽이요?”
“네. 몬스터에 대해 공부해 볼 생각입니다.”
키우다 보면 겸사겸사 공부도 되겠지.
“몬스터…….”
아련하게 중얼거리던 석하얀이 돌연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한유진 씨 연구실과 제 연구실, 협력하죠.”
“저 연구실 없습니다. 세울 계획도 없습니다. 그냥 마수 한 마리 키우고 있을 뿐입니다.”
“키우고 계세요? 벌써요? 와, 역시 몸으로 뛰는 연구자!”
석하얀이 본받아야겠다며 호들갑을 떨고 있을 때였다.
탁!
“어?”
갑자기 불이 꺼졌다. 창이 없는 지하인 데다 복도의 불까지 죄다 꺼져 버려 한 치 앞도 제대로 보이질 않았다.
정전인가?
“불 나갔나 봐요.”
“그러게요. 휴대폰 손전등 켤게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어 홈버튼을 눌렸다. 희미한 빛이 들어오며 내 책상 앞에 서 있는 석하얀의 얼굴이 비춰 보였다.
놀라다 못해 경악으로 굳어 버린 얼굴이.
“…석하얀 씨?”
갑자기 왜 저러지. 휴대폰 빛 속에서 보니까 엄청 무섭—
“꺄아아악!!”
“뭐, 뭡니까?!”
찢어지는 비명에 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기겁하며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자.
퍼렇게 뜬 피투성이 얼굴이 안개 같은 빛과 함께 둥둥 떠 있다. 하얗게 뒤집어진 눈이 내 눈과 똑바로 마주쳤다.
시, 시발…….
덜컹덜컹덜컹덜컹!
의자와 책상이 마구 흔들린다. 강의대 위의 프린트물들이 태풍에 휘말린 듯 이리저리 나부꼈다.
“꺄아악! 엄마아!!”
나는 석하얀의 비명 속에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린 게 아니라 의자가 흔들려서 떨어진… 젠장, 비명 안 지른 게 어디야! 이게 대체 무슨… 세상에 귀신이 어디 있… 던전에 몬스터도 있으니 귀신도 있나……?
아니 그보다 공포 저항 스킬 있는데 왜 온몸이 떨리고 눈물 날 것 같이 무섭… 아.
껐지. 끄고 안 켰다. 나는 바보인가.
얼른 공포 저항 스킬을 다시 활성화했다. 그러자 곧장 마음에 안정이 찾아왔다.
‘아침에 상태가 안 좋았던 것도 스킬 끈 탓이었나?’
스킬 설명은 위압 무효뿐이었지만 L급 스킬이니 다른 효과가 더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거기다 패시브니 아마 평소에도 정신력을 좀 높여 주고 있지 않았을까.
그래도 내 원래 멘탈이 약한 편은 아니었는데 스킬 꺼졌다고 불안에 휩싸이다니. 이래서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건가.
“석하얀 씨!”
놓친 휴대폰을 주워 손전등을 켜고 얼른 석하얀에게 다가갔다. 바닥에 풀썩 주저앉은 그녀는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괜찮아요?”
어깨를 가볍게 흔들자 흐느적거리다가 아예 푹 쓰러져 버린다. 숨은 멀쩡히 쉬고 있고. 단순히 기절한 건가. 나는 그녀를 품에 안은 채 외쳤다.
“그만해! 도깨비!”
대낮에 갑자기 귀신이, 그것도 이런 과장된 퍼포먼스를 보이며 나타날 리 없잖은가.
머릿속이 차가워지자 범인은 금방 떠올랐다.
도깨비다.
장난치기를, 특히 사람 놀래키기를 좋아하는 도깨비.
“알았어, 알았어. 화내지 마~”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를 중성적인 목소리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이어 복도의 불이, 교육실의 불이 탁, 탁, 탁 차례로 켜졌다.
“만나고 싶다기에 와 준 건데.”
낄낄거리며, 책상 위에 인영이 나타났다. 붉은 도깨비 가면에 푸른 도포를 늘어뜨린 사람이었다. 녀석이 피투성이 푸른색 얼굴 모형을 휘휘 휘둘렀다.
“내가 조금 심했나. 기절까지 할 줄은 몰랐어. 진짜야. 원래는 조절 잘하는데 오랜만이라 그랬나 봐.”
“다행히 다치지는 않은 것 같지만…….”
나는 도깨비를 올려다보았다.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키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작은 편도 아니었다. 괴짜에 장난스럽지만 선량한 인간.
중거리 공간이동, 은신, 나중에는 초장거리 포탈까지 지니게 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헌터.
탐난다.
게다가 앞의 둘만 있는 지금도, 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던전을 조사할 수 있지.’
석하얀이 미국까지 갈 필요 없이 국내에서 던전 생성 법칙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장난치기 좋아하는 도깨비. 남을 깜짝 놀라게 하는 데 목숨 걸었다는 소리까지 듣는 도깨비.’
이건 기회다.
나는 비웃듯이 입꼬리를 올리며 도발적으로 말했다.
“전혀 무섭지도 않은 장난은 그만 치지 그래?”
“뭐?!”
도깨비가 펄쩍 뛰었다.
“무섭지 않다고?! 기겁해서 완전 창백해졌던 주제에! 다리 풀려서 주저앉아 벌벌 떨었으면서!”
“네가 잘못 본 거겠지. 어두워서.”
“아니거든? 봤거든? 똑똑히 다 봤거든?”
억울해하는 도깨비를 향해 덩달아 울컥하는 표정을 지으며 일부러 말을 더듬었다.
“그, 그건. 그냥 예상치 못해서 그런 거고.”
“역시 놀란 거 맞잖아! 예상했으면 안 놀랐을 거 같냐? 겁쟁이~ 겁쟁이~”
“예상했으면 당연히 안 놀라지! 솔직히 네 장난 유치해.”
“유치! 고전적인 거야!”
도깨비가 발을 동동 굴렀다. 슬슬 낚싯줄을 당겨 볼까.
“그럼 내기라도 해 볼래?”
“내기? 내기 좋지, 내기! 뭐 걸게?”
“날 놀래키지 못하면 내가 너보다 더 대단하다는 걸 인정하고! 음… 3년간 내 부하 노릇을 하는 거야.”
좀 유치한 말이었지만 도깨비는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어깨를 으쓱하더니 하하하 웃는다.
“좋아, 좋아. 하지만 난 무척이나 유능하고 대단한 인재라고! 내 3년이면 넌… F급이지만 해연 길드장 형이니까 특별히 깎아서 20년 부하로 삼아 줄게!”
나에 대한 것도 알고 있었나 보군. 그래도 속속들이 다 파악하진 못한 듯했다. 하긴 도깨비가 아무리 대단해도 몸은 하나니까. 고작 F급짜리 일거수일투족을 살펴볼 리는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 엮인 이상 앞으로는 좀 더 조심하는 편이 좋을지도.
“계약서 가지고 있지?”
내 말에 도깨비의 웃음소리가 뚝 멈췄다. 가면 너머의 눈이 나를 똑바로 바라봐 왔다.
“계약서라고? 계약서까지 쓰게?”
역시 애들 장난 같은 부하 노릇이라 생각했나 보군. 하지만 그럼 안 되지. 확실하게 해야지.
“당연히 정식으로 계약서 써야지. 왜, 겁나?”
“아니! 하지만 이해가 안 가네. 너무 수상하잖아? 게다가 너무 자신만만하고.”
도깨비의 몸이 공중으로 두둥실 떠올랐다. 내 쪽으로 스르륵 다가 와서는 빙글 맴을 돌며 나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저항 스킬은 패시브니까 없을 테고, 아이템 쓰려고?”
“안 써. 의심스러우면 계약서에 아이템 불가 조항 추가해도 돼.”
“그럼 정신력 올려 주는 스킬?”
“그것도 안 써. 어차피 내 스킬은 고작해야 5% 상승이라고. 티도 안 날걸? 스킬도 계약서에 추가할게. 나는 물론이고 타인의 액티브 스킬도 사용하지 않을 것, 정도면 되겠지?”
그렇게 말했지만 도깨비는 여전히 의심을 풀지 않았다. 감이 좋네.
“으으음, 이상해, 수상해. 뭔가 감춘 게 있는 거 같단 말이야! 분명 질 텐데? 조금 전에도 엄청 놀랐는데? 다리도 풀렸는데?”
감추긴 감췄지. 일단 저 녀석을 안심시켜야 할 듯했다. 이대로라면 계약서에 쉽게 사인하지 않을 태도였다.
“솔직히 말해… 속셈이 있긴 있어.”
조금 쑥스러운 척하며 말을 이었다.
“사실 진다 해도 내겐 손해가 되지 않는 내기니까.”
“손해가 안 된다고?”
“그래. 나는 평범한 F급 헌터고 넌 그 유명한 도깨비지. 이기면 대박이지만 져 봤자 도깨비의 부하 타이틀을 따게 되는 거잖아?”
이번에는 부끄러워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연기하려고 노력할 것도 없이 김성한에게 30번 고백한 사실을 떠올리자 금세 목덜미가 붉어졌다. 쪽팔려, 젠장.
“너는… 네 말대로 대단하고, 또… 음, 팬… 까진 아니지만. 그, 그러니까 부하가 된다면 영광… 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나한테 나쁘게 대할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또…….”
“또?”
도깨비가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가면을 쓰지 않았더라면 히죽히죽 웃는 얼굴이 드러났을 게 분명했다.
“…멋있었어. 내 보따리 속에는 온갖 비밀이 담겨 있으나, 하고 선언했을 때. 진짜로 멋졌어.”
“내가 대단하고 멋지긴 하지!”
도깨비가 낄낄거리며 공중으로 훅 치솟았다. 저러다 천장에 머리 부딪힐라.
“너, 마음에 든다! 그냥 부하가 되고 싶다고 했으면 웃어 넘겼을 텐데, 도발해서 내기를 걸어오다니. 재미있어! 계약서까지 챙기는 것도 마음에 들어!”
“진다 해도 괜찮다고 했지만 이길 자신 있거든?”
“그래, 그래, 좋아!”
도깨비의 손에 한 장의 양피지가 들렸다.
“내기하자!”
낚시 성공이다.
유쾌한 웃음소리 속에서 석하얀을 고쳐 안았다. 이제 다 된 밥만 떠먹으면 되니까 이 아가씨 좀 어떻게 해 줘야지.
“그 전에 이 사람 의무실로 데려가 주지 않을래?”
내 말에 도깨비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곤 석하얀을 데리고 사라졌다가 이내 다시 나타났다.
역시 공간이동 스킬은 정말 좋구나. 나도 가지고 싶어.
“자, 계약서 작성하자!”
도깨비가 들고 있던 양피지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협회 보장으로 A급용 스탯 하락 계약서였다.
‘그러고 보니 도깨비 스탯은 어떠려나. 이름도 확인해 볼까.’
이름을 보면 성별까지 알 수 있을지도 몰랐다. 떡잎 스킬을 쓰자 베일에 가려진 도깨비의 상태창이 나타났다.
[각성자 – 윤윤현재 스탯 등급 B
각성 가능 스탯 등급 B
최적화 초기 스킬
누구게?(S) 획득
구름 발걸음(B) 획득]
…이름이 저게 뭐야? 누가 도깨비 아니랄까봐 괴상했다.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모르겠고.
스탯은 B로 높은 편이었고 의외로 최적화 초기 스킬 중 공간이동과 관련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누구게?는 은신 스킬인 듯하고 구름 발걸음은 비교적 흔한 비행 스킬이었다.
“작성 안 해? 그새 마음이 바뀌기라도 했어?”
상태창을 살피느라 잠깐 멍하게 있자 도깨비가 재촉해 왔다. 성격 급하네.
펜을 꺼내들어 계약서의 텅 빈 공간에 조건을 적었다.
“한 번은 애매하니까 삼세번으로 해~”
내가 쓰는 내용을 지켜보던 도깨비가 참견해 왔다. 애매해서가 아니라 자기 재밌으려고 횟수 늘리는 거 아니냐.
“딱 한 번이라도 안 놀라면 부하 1호로 올려줄게!”
“다른 부하도 있어?”
“너까지 셋!”
하긴 심복이 있어야 도깨비에게 불상사가 생길 시 그 보따린가 뭔가를 대신 풀어 줄 수 있겠지.
간간히 참견받아 가며 승부 판정 조건과 스킬 아이템 사용 불가 등을 적어 내려갔다. 도깨비가 이것저것 꼼꼼히 따지는 바람에 공간이 모자랄 정도였다.
까불거리는 태도와 달리 의외로 세심하다.
“불합리한 명령은 듣지 않겠다는 부분은 반드시, 상세하게 필요해.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 내가 진다면 타인의 비밀정보에 대해서는 묻지 않겠다는 것도 쓰고!”
“그런 건 당연히 안 물어. 네가 위험할 짓은 할 생각 없다고.”
귀한 몸이신데 소중히 다뤄 드려야지.
마지막으로 내기 기간은 일주일로 정한 뒤 사인까지 끝마쳤다.
“민폐니까 가능한 다른 사람까진 끌어들이지 마. 그리고 최소한의 프라이버시는 지켜 줬으면 좋겠어. 예를 들어 욕실이나 화장실 같은 곳 말이야.”
“걱정 마! 화장실이나 목욕탕은 몰래 들어간 적도! 그럴 생각 한 적도! 없어!”
“그래, 그래. 착하네.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해.”
나는 계약서를 소중히 챙긴 뒤 미래의 부하에게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