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314
312화 피곤하긴 한데 (2)
짧지만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더듬거려 피스를 끌어안고 유현이 쪽으로 고개를 돌리게… 이쪽인가? 평소 선생님 스킬을 쓸 땐 잘 몰랐는데 내 시야가 완전히 차단되니 은근 어지러웠다. 다행히 피스가 유현이를 쳐다보았다.
검붉게 가라앉은 눈이 내리꽂히듯 나를 향하고 있었다. 피스의 시선이라 한참 올려다보게 되어서인지 평소보다 더 크게 느껴진다.
“…그, 좀 쉬면 괜찮아질 건데.”
내가 말을 꺼내기 무섭게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 더더욱 싸늘해졌다. 유현이가 화를 가라앉히려는 듯 길게 숨을 내뱉었다.
“쉬면, 될 거라고.”
이 갈며 말하지 마라. 치과 예약자 명단 늘어난다.
“응. 야, 전에도 그렇게 오래가진 않았잖냐.”
“아예 안 보이지도 않았지.”
“어, 그게.”
“S급 헌터의 힘을 쓴다는 거, 무리 가는 거 맞지, 형.”
곧장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유현이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솔직하게 말했다간 당장 칼 빼들고 성현제 목 따러 가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도 그때는 내가 나설 수밖에 없었는데.
“내일까지는 진짜 꼼짝 않고 얌전히 있을게. 얌전히 먹고 자고 쉬기만 하마.”
“내일까지만?”
“…계속 쉬기엔, 곧 추석이잖아. 다른 할 일도 많고.”
동생 녀석이 입을 일자로 꾹 다물었다. 그러더니 손을 뻗어 나를 달랑 들어 올렸다. 와, 예전 생각나네.
– 끼앙!
“야, 유현아!”
피스의 눈에 동생에게 들려가는 내 모습이 비춰졌다. 피스야, 고개 약간만 돌려 봐. 어디로 가는 거지, 내 침실인가.
“명절인데! 너랑 예림이 한복 사러도 가야 한다고. 그리고 선물도, 추석 선물 돌려야 해!”
“그건 해연 쪽에 맡겨.”
“아니, 사육소 생기고 첫 명절인데 그래도 내가 챙겨야지. 사육장 맡아 주는 헌터들이랑, 그리고 빌딩 쪽이랑. 별로 안 많아, 금방 끝나!”
“눈도 안 보이면서 헛소리 그만해.”
유현이가 차갑게 말했다. 하지만 기대하고 있었단 말이다. 이젠 돈도 많으니까 최고급 한우로 싹 돌릴 생각이었는데. 헌터 쇼핑몰에서 포션 선물세트 나온대서 헌터들한테는 그거 사주려고 했는데.
“밖에 나갈 생각은 하지도 마.”
“잠깐만, 잠깐만. 진정해 봐!”
허우적대던 손에 문틀이 잡혔다. 문틀에 매달려 나름 버텨 봤지만 동생 놈이 가볍게 당기는 것만으로 손가락 끝이 주르륵 미끄러졌다. 이대로라면 최소 눈이 보일 때까지 갇혀 살게 될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내 편 들어 줄 사람도… 없고. 잔소리하며 등짝 두들길 사람은 많다만.
“차례상도 차려야지! 집에 제기도 하나 없어.”
“여태까진 그냥 밥에 국만 떠놓고 말았잖아.”
“그건 그때고, 지금은 다르잖냐. 또 예림이도 챙겨 줘야지. 많이는 말고 간단하게 과일이랑 떡 사고, 형 전 잘 부친다. 육전 하나만 딱 하자. 예림이 고기 좋아하잖아. 생선 한 마리만 찔까? 아냐, 그냥 포 사도 돼. 송편은 빚을 거지?”
“…형.”
유현이가 한숨과 함께 나를 내려놓았다. 피스가 졸졸졸 따라왔지만 여전히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새삼스럽게 내 꼴이 말이 아니구나 싶었다. 옷도 엉망이고 다친 흔적도 고스란히 남아 있고 앞이 제대로 안 보여서인지 엉거주춤했다. 선생님 스킬을 쓴다 해도 내 눈이 아니니 부자연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피스가 나밖에 안 봐서…….
대충 유현이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눈을 향했다.
“안 해도 될 일들이잖아. 며칠이라도 얌전히 쉬면 안 돼?”
달래듯 동생이 말했다. 유현이 말대로 하지 않아도 되는 일들이다. 꼭 내가 할 필요도 없다. 대신 부탁할 사람들도 많고 돈으로 고용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하고 싶어.”
“형.”
“유현아, 언제 또 다 같이 추석 쇨 수 있을지, 알 수 없잖아. 물론 내년은 더 여유로울 수도 있지만 바쁠 수도 있지. 급하게 공략해야 할 던전이 생겨서 너나 예림이는 자리에 없을 수도 있고, 던전 브레이크가 터져서 명절 보낼 상황이 못 될 수도 있고.”
일 년 뒤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그 사이 무엇이 어떻게 변해 버릴지 까맣게 모를 일이었다. 내가 회귀하고 채 반년도 지나지 않았다. 고작 몇 달 사이 많은 일이 있었고 일 년 사이엔 더 많은 일이 생기겠지.
“그리고 유현아, 그냥 명절이야. 한동안 별일 없을 거고 또 던전도 느긋하게 공략해도 돼. 아직 조사가 다 끝난 건 아니지만 지금 한국 던전은 포화 속도가 많이 느려졌대.”
“…포화 속도가?”
“응. 세 배 가까이. 한 달에 한 번 공략하던 거 석 달에 한 번 들어가도 된다나. 그러니까 다 같이 추석 쇠자. 던전이고 뭐고 없는 것처럼.”
손을 뻗었다. 더듬거려 동생의 팔을 찾아 위로 올라가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세상 망할 판에 뭔 명절이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말이다. 괜찮잖아. 내가 고생한 것도 다 이러고 살려고 한 짓인데. 너희랑 추석도 쇠고 설도 쇠고.”
채터박스가 복수하려 들고 초승달이 깨어나고 던전의 몬스터는 계속 강해져 갈 테고. 막막하지만 그래도. 아니, 오히려 그러니까 더더욱 할 거 다 하고 싶었다. 재난물이나 세상 망해가는 영화, 드라마 같은 거에서 기념일 챙기는 거 정말 뻔하고 작위적인 짓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
그게 사는 거겠지. 힘들고 막막하다고 다 놓아 버리면 진짜 끝나는 거니까. 반대로 살려고 발버둥치느라 죄다 흘려보내는 것도 쓸쓸한 일이다. 목숨만 붙어 있다고 해서 제대로 사는 건 아니잖아.
“나는 볼 수 없으니까, 내 한복 네가 골라줄래?”
“형.”
“응.”
“…내일까지는 꼼짝도 않기로 약속하는 거야.”
동생은 내키지 않는다는 투로 말했다. 그럼에도 내게 져주었다.
“집 바로 옆에 던전이 터져도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으마. 너랑 예림이가 막아 주겠지.”
“그리고 딱 추석 쇠는 일만 해. 시력 다 회복될 때까지 다른 일은 안 돼.”
“알았다, 알았어. 추석이랑 관련된 일만 하마.”
고개를 끄덕이자 동생 녀석이 어리광부리듯 나를 끌어안아왔다. 화는 풀린 듯하지만 여전히 토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음식 하는 건 안 돼. 해도 내가 해.”
“네가 어떻게 한다고.”
“왜 못 해. 내가 안 했어? 돌아오기 전에.”
“…어?”
무슨 소리냐는 말을 급히 꿀꺽 삼켰다. 유현이는, 모른다. 우리가 괜찮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 그럴 상황이, 아니었거든. 명절 지낼 만한 상황이.”
동생을 마주 안아주며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지금보다 더 팍팍했으니까. 넌 많이 바빴지. 많이.”
“하긴 기승수가 없었으니 던전 공략에 시간도 오래 걸렸을 거고. 박예림도 없었고. 김성한 헌터는?”
“S급에 가깝다는 말까진 들었지만 그래도 A급에 머물러 있었어. 일이 년쯤 더 지났으면 S급이 되었을지도.”
“그럼 형이랑도 생각보다 자주 못 봤겠다.”
“응. 야, 한국 최고의 헌터가 한가했겠냐.”
못 봤지. TV에서나 봤지. 그래도 나는 화면 너머로나마 많이 봤는데, 넌 어땠을까.
“지금 자면 저녁때 다시 일어날 수 있겠어? 약 먹고 잘래? 이르긴 하지만.”
“모르겠다. 잘 수 있으면 그냥 푹 자는 게 낫긴 할 텐데.”
“그럼 씻고 나서 약 먹자. 공휴일 되기 전에 치과 예약 잡고.”
치과에 너무 집착하는 거 아니냐. 가기 싫다.
– 아빠, 나 왔어.
비몽사몽 중에 체인질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에서 덜 깼다는 핑계로 눈을 감고 더듬더듬 작은 용을 쓰다듬어 주었다. 내가 원해서, 날 도와준 건데 괜히 내 상태를 알려서 죄책감 가지게 만들긴 싫었다. 심지어 아직 애잖아.
“수고 많았어.”
– 응. 나도 잘게. 아빠, 잘 자.
손아래의 작은 부피감이 스르륵 사라졌다. 나도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진짜 안 보여요? 진짜?!”
예림이가 버럭 소리쳤다. 어젯밤 이르게 잠든 탓에 새벽같이 눈이 떠졌다. 오랜만에 푹 자긴 했는데 일찍 일어나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선생님 스킬도 가급적 쓰지 않는 편이 좋겠다 싶어 삐약이와 벨라레와 함께 그냥 침대에서 뒹굴거리고 있다 보니 유현이가 일어났냐며 방에 들어왔다.
그리고 아침 준비해 주겠다며 거실로 데리고 나가 주는 걸 예림이 눈에 딱 걸리고 만 것이었다. 감출 생각은 물론 없었지만.
“일시적인 거야. 어젠 귀도 잘 안 들렸는데 지금은 멀쩡해졌…….”
“형!”
“아저씨!”
“아주 조금 먹먹한 정도였어. 다른 덴 진짜 문제없다.”
유현이와 예림이가 동시에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피스도 뭘 아는 건지 크흥거렸다. 속상해하는 예림이를 열심히 달래 주는 도중에도 한숨이 끊이질 않았다. 땅 꺼지겠다, 이 녀석들아.
“잠깐이라고 해도 아무것도 안 보이는 거잖아요. 근데 한유현 넌 어제 왜 아저씨랑 같이 추석 선물 사러 가라고 한 거야?”
아저씨가 나간다고 해도 집에 가둬 놔야지! 하고 예림이가 아마도 유현이를 노려보았다. 안 보여도 애들 표정은 눈에 훤하다. 유현이는 대답도 안 하고 나만 쳐다보고 있겠지.
“선생님 스킬 쓰면 괜찮아. 피스는 데리고 다니기 힘들고, 벨라레의 도움을 받으려고. 얘가 시력도 좋고 열감지도 가능하거든.”
피스나 삐약이와는 다르게 벨라레가 다른 곳을 봐도 그럭저럭 주위를 감지하는 게 가능했다. 게다가 목에 감으면 내 눈높이와도 비슷할 거고.
“…아저씨, 진짜 몸 좀 아끼세요.”
예림이가 툴툴대며 내 옆에 앉았다. 소파의 흔들거림이 전해져 왔다. 예림이한테도 회귀 전 일을, 아… 회귀에 대해 말한 거 묻는다는 게 깜박했다. 던전 상태도 좀 더 자세히 알아봤어야 했는데. 채터박스 때문에 머리도 속도 복잡해진 탓인지 놓친 게 많았다.
유현이가 아침 차리러 주방에 들어가고 예림이가 소리라도 들으라며 TV를 켰다. 마침 어제 세성 길드장 자택이 날아간 내용이 나오고 있었다.
“저거 봐요, 아저… 죄송해요.”
“괜찮아. 나야 잠깐 안 보이는 거니까 신경 쓰지 마.”
잠깐 입을 다물었던 예림이가 다시 발랄하게 떠들기 시작했다.
“세성 길드장 머리색 말이에요! 핑크빛이에요! 은발에 분홍색 약간 비치는 거긴 한데, 그래도 핑크라니!”
저런. 결국 체인질링 머리색이 성현제 머리색으로 보이게 되어 버렸구나.
“전, 어… 베이지색? 이었던 거 같은데 염색한 걸까요. 웃기지 않아요? 어울려서 더 웃겨요!”
“생방송 탄 거 녹화해 줘. 두고두고 보게.”
“당연히 녹화했죠! 어제 저거 가지고 떠들썩했다니까요. 검색순위 1위 찍고 세성길드 날아간 것보다 더 화제였어요.”
어휴, 성현제 씨 인기 많네. 추석 즈음엔 잠깐이라도 깨어나려나. 차례 음식 좀 싸다 줘야겠다.
“한유현한테 대충은 들었는데, 저도 부르지.”
“안 그래도 예림이 너 있었으면 싶었어. 새 마수에 대해서도 들었어?”
“네, 아주 조금만요. 자세한건 비밀이래서. 어디 있어요?”
그럼 성현제 대역 뛴 것도 못 들었겠네. 하긴 은발보고 염색한 거라고 했으니.
“지금은 잠들었어. 힘을 많이 써서. 체인질링 도움으로 예림이 네 스킬 써서 성현제 잡았잖냐.”
“진짜요?”
예림이가 다리까지 동동 구르며 소리 내어 웃었다. 그걸 직접 봤어야 하는 건데! 아니, 내가 직접 스킬 써줬어야 하는 건데! 하고 무척이나 아쉬워했다. 예림이가 있었어도 내가 직접 칼 꽂아야 했으니 S급 힘을 쓰긴 썼어야겠지만, 그래도 훨씬 수월했겠지.
아침 밥상에서 서로 나한테 먹여 주겠노라 다투는 바람에 식사하는 데 한참 걸렸다. 유현이는 바로 길드에 가 봐야 했지만 예림이는 오늘은 오후에만 일정이 있다고 했다.
“그럼 내일 나가서 추석 선물 사고 점심 먹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눈 안 보인다는 거 말해야 하지 않아요?”
“들켜서 좋을 거 없으니 외출은 선글라스 쓰고 할 거야. 명우와 노아 씨에겐 말하긴 해야 하는데…….”
“아저씨 또 잔소리 듣겠다.”
“으응.”
노아 씨는 걱정 정도만 하겠지만 명우는… 각인도 봐달라고 해야 하는데. 유현이한테는 흑룡의 심장 조각도 넣어 달라고 해야 하잖아. 일단 눈이 조금이라도 보이게 되고 나서 말하자.
“오늘은 푹 쉬기로 했으니까.”
“그래도 정원에 산책 정도는 나가요. 무조건 집에 들어앉아 있다고 휴식인가. 현아 언니한테 맛있는 거 사오라고 할까요? 연구실에 들를거랬는데.”
현아 씨에게는 내 상태를 알려 줘도 괜찮겠지. 고개를 끄덕이자 예림이가 곧장 문현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바로 코앞인 옥상정원이었지만 그래도 선글라스 쓰고 벨라레를 목에 감은 채 밖으로 나갔다. 열감지 능력이 상당히 뛰어나서 적응만 하면 멀쩡하게 움직일 수 있을 듯했다.
“형님! 성현제 집 날려 버렸다면서?”
예림이와 함께 옥상정원을 산책하길 잠시, 문현아가 불쑥 나타났다.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옥상으로 바로 뛰어올라 온 모양이었다. 천장이 높아서 거의 3층 이상 될 텐데.
“재미 좋았겠다.”
“재미는요. 살벌했거든요?”
“정말로 재미없었어? 진짜로?”
음, 솔직히 말하자면.
“좀 짜릿하긴 했죠.”
내 대답에 문현아가 웃으며 가지고 온 바구니를 정원 한쪽의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안에서 파이, 샌드위치, 음료수 등이 줄줄이 나왔다.
“그 통은 뭐예요?”
“미역국. 내가 특별히 받아 왔어.”
그러면서 컵 가득 따라주었다. 맛있긴 한데 컵에 미역국이라니. 그래도 맛있다. 음식을 먹으며 어제 일로 내 시력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간략하게 말해 주었다. 문현아는 S급 몬스터를 처리하는 도중에 S급 헌터들끼리 시비도 붙었다고 알고 있었다.
“단순히 S급 몬스터만 나타났으면 그 꼴 될 리가 없잖아. 그래서 물었더니 소영이가 그렇게 변명하기는 했다만, 믿지는 않아. 방송 나온 성현제 상태도 좀 이상하던데, 무슨 일이야?”
“전 말 못 해요.”
“에이. 아, 진짜 재밌었겠다.”
“그쵸, 언니. 아, 진짜 재밌었겠다.”
예림이에 문현아까지 있었으면 저택만 아니라 세성길드가 통으로 날아갔을지도. 음, 좀 재밌긴 했겠다. 그래도 너무 피해를 키우면 안 되지.
“형님 오늘 휴가라고?”
“네. 꼼짝 않고 있기로 유현이와 약속했어요.”
“집에 처박혀 있는 게 무슨 휴간가. 그러지 말고 우리랑 같이 나가자.”
현아 씨가 꼬드겨왔다. 나도 나가고 싶긴 한데, 동생한테 약속했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