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333
331화 셋째는
곱슬곱슬 포근한 털을 지닌 커다란 분홍토끼 인형이 한유진의 품에 안겨졌다. 그 옆의 한유현에게는 하늘색 긴 갈기의 포니 인형이 기대져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도 큼직한 얼룩 강아지 인형이 앉아 있다.
박예림은 인형에 반쯤 파묻힌 형제를 향해 휴대폰을 들이대었다. 신중하게 방향을 이리저리 바꾸고 필터도 다양하게 고르며 사진을 찍었다. 카메라음이 연신 울렸지만 둘 중 누구도 깨어날 기색이 없었다.
“삐약아, 한유현 머리 위에 올라가 봐.”
-삐약.
“아니, 아저씨 말고.”
한유진의 머리 위에 앉아 있던 삐약이가 둥실둥실 날아가 리모컨 위에 내려섰다. 조그만 발가락으로 꾹 전원 버튼을 누르는 모양새가 능숙했다.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는데 박예림이 리모컨을 확 빼앗아 TV를 꺼 버렸다. 삐약이가 박예림을 돌아보며 삑, 울었다.
“안 돼. 아저씨가 TV 보는 거 줄이랬잖아.”
-삐약!
“벨라레랑 장난감 가지고 놀아.”
-삐약삐약!
무어라 항의하던 새끼 새가 포기하고 날아올랐다. 피스는 한유진의 발치에 얌전히 웅크리고 있었다. 침묵이 내려앉고 나란히 앉은 형제를 바라보던 박예림이 자기 전용 욕실로 향했다. 욕실 옆에 붙은 화장대 위에 포장만 뜯었을 뿐인 화장품 몇 개가 뒹굴고 있었다. 광고 효과를 바라면서 들어 온 선물들 중 케이스가 예뻐서 집어 온 것들이었다.
박예림은 립스틱 두 개를 챙기고 인형용 머리핀과 머리끈도 몇 개 꺼내 들었다.
“한 번쯤 해 보고 싶었는데~”
던전이 생긴 이후 수학여행이 사라졌다. 타지에서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할 시 아이들을 안전하게 통제하기 힘들다는 이유에서였다. 지금은 분위기가 많이 완화되었지만 등하교 시 철저한 감시를 넘어 등교 자체를 꺼리는 경우도 많았다. 학생이 없는 학원이 줄줄이 문을 닫기도 했다. 대피 시설을 만들고 하급이나마 헌터를 고용해서 집에 혼자 두는 것보다 안전한 학원을 내세워 전보다 더 성황한 곳도 있었지만.
박예림은 가볍게 떠올라 다시 거실로 향했다. 형제는 여전히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었다. 둘의 표정이 제법 비슷해 보였다. 처음에는 별로 닮지 않았다는 소리를 듣던 두 사람이었다. 외양 자체는 피를 속일 수 없다는 듯 비슷한 점이 더러 보였지만 분위기가 너무 달랐던 탓이었다.
어린 나이임에도 모두의 위에 서는 냉정하고 강한 S급 헌터와 위태롭고 불안정한 기색의 잔뜩 위축된 비각성자. 이따금 두 명이 같이 기사나 방송에 비춰지거나 하면 가족이라도 S급은 다르긴 다르구나, 라는 평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닮았다는 소리가 더 많았다. 한유진은 편안해지고 한유현은 부드러워졌다. 비슷한 웃음을 머금은 얼굴은 정말 형제 같았다.
그럼 나는 어떨까. 박예림은 무심코 자신의 뺨을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완전히 타인이라도 같이 살다 보면 표정 같은 건 닮아 간다던데. 추석 방송을 떠올려 보았다. 비슷해 보였던가? 한 가족 같다는 댓글은 많았었다. 보기 좋다고, 잘 어우러진다고들 했었지.
박예림은 어깨를 으쓱하곤 손가락 끝에 작은 물방울을 만들어 냈다. 검지의 움직임을 따라 휙, 물방울이 날아가 한유현의 뺨에 찰싹 부딪혔다. 평소라면 잠들었다 해도 물이 뺨에 닿기도 전에 깨어나 증발시켜 버렸겠지만 지금은 아무런 반응이 없다.
“좋아, 이번엔 꼼짝도 못하겠네.”
박예림은 활짝 웃으며 가운데 빨간 큐빅이 박힌 겹겹의 프릴 리본 머리핀을 곱슬기 있는 검은 머리카락에 가져다 대었다. 약간 오른쪽으로 치우쳐 달아주고는 만족스럽게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냥 자는 사람 머리에 핀을 꽂았을 뿐이다. 하지만 상대가 한유현이었다. 저 머리에 리본 핀을 꽂을 수 있는 사람은 자신과 아저씨 외엔 없다. 그것이 무척이나 뿌듯했다.
“깨면 지랄하려나?”
미리 물 한 양동이 퍼다가 놓을까. 분명 싫어하겠지. 하지만 그뿐이었다. 리본 핀은 불타겠지만 박예림은 그대로일 것이다. 이런 장난을 친다 해도 사이가 틀어지거나 갈라질 일은 없었다. 눈치 볼 필요도 없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저녁을 먹겠지.
박예림은 이번에는 립스틱 뚜껑을 열며 한유진을 바라보았다. 단순한 애정의 양은 당연히 한유현보다 한유진을 향하는 것이 훨씬 더 컸다. 비교가 무색할 정도였다. 많은 애정을 받았고 자연스럽게 돌려주었다.
다만, 한유진과의 관계에는 어쩔 수 없는 불안함이 존재했다.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주어진 사랑이었다. 네가 S급 각성자라서 그래, 라는 이유로는 부족했다. 심지어 한유진의 곁에는 뛰어난 사람들이 넘쳐났다. 한유진은 박예림을 분명 아껴 주었지만 박예림은 그에게 있어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기 힘들었다.
갑자기 얻은 것은 갑자기 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
애써 무시하려 했던 그 불안감을 잠재워 준 것은 다름 아닌 한유현이었다.
한유현은 박예림을 싫어했었다. 형이 그녀를 좋아하니까. 한유현은 박예림을 받아들였다. 그녀가 형을 좋아하니까. 한유현은 박예림을 인정했다. 그녀가 형을 지킬 능력을 갖추었으니까.
전부 한유진을 바탕으로 한 관계였지만 박예림은 오히려 그래서 더 안심되고 좋았다. 한유진이 자신의 전부이며, 그와 관련해서는 더없이 까다롭게 구는 한유현이었다. 그런 까칠한 녀석이 형의 옆에 박예림이 서는 것을 수긍한 것이다.
“이 색이 더 어울릴까?”
박예림은 립스틱의 색을 신중하게 비교했다. 장난이라고 해도 이왕이면 더 좋은 걸로 발라 드려야지.
한유현은 자기 머리의 핀보다 형의 입술을 더 신경 쓸 것이다. 투덜거리겠지만 그래도 박예림을 밀어내지는 않을 것이다. 한유진의 안전은 물론 자신의 안전까지 맡길 만큼 그녀를 믿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박예림도, 한유현이라면. 이라고 망설임 없이 말할 수 있었다. 서로 가장 믿을 수 있는 동료였다. 피스까지 포함해 셋은 같은 것을 바라며 같은 마음으로 움직였다.
한유진을 보호하여 지금의 생활이 계속되길 바라는 마음. 만약 한유진이 위험하다면, 그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셋 다 다른 둘을 가차 없이 뒤에 남겨둘 의리기도 했다. 그런 믿음이자 동료애였다.
어쩌면 가족 이상으로 든든한 소속감에 박예림은 안심할 수 있었다. 형제가 서로를 누구보다도 우선시한다는 건 잘 알았다. 이따금 저 사이에 끼어들어도 되나 하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박예림의 자리는, 위치는 확고했고, 그녀의 세계는 빠르게 넓어져 갔다.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는 든든한 집이 있기에 거리낌 없이 나아갈 수 있었다. 일본행을 큰 망설임 없이 수락한 것도 그런 안정감이 기초한 덕분이었다.
“잘 칠해졌다! 그치, 피스야.”
한유진의 얼굴을 올려다본 피스가 뭐하는 거냐는 듯 머리를 갸웃했다. 박예림은 잠깐 고민하다가 이번에는 매니큐어를 가지고 왔다. 한유진의 오른손을 펼쳐 놓고 파스텔톤 펄이 살짝 들어간 연분홍 색상을 곱게 정성 들여 발랐다.
이어 한유현의 한쪽 손에도 바르고 나서 나란히 놓아 보다가 자신의 손톱도 한쪽 손만 칠했다.
“피스 너도 발라 줄까? 자, 여기 발 올려 봐.”
머뭇하던 피스가 앞발 하나를 내밀었다. 톡 튀어나온 발톱 위에 브러시가 닿았다. 동물에게 발라도 될까 잠깐 고민되었지만 여느 인간보다 훨씬 튼튼한 S급 몬스터니 해를 끼치긴 힘들 것이다.
“아저씨랑 똑같은 색이야.”
-크흥.
“그럼 이제 제일 중요한.”
매직.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내리며 박예림이 근엄하게 굵은 매직펜의 뚜껑을 열었다.
“뭐라고 써 줄까. 일단 이마에다 형바보라고. 아냐, 좋아할지도 몰라.”
뻔뻔하게 지우지도 않고 나다닐지도 모른다. 한유현이라면 그럴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그럼 뭐라고 적지. 한유현이 짜증 낼 만한 말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는 그때였다.
-삑! 나쁜 도마뱀!
갑자기 파랑새가 튀어나와 화가 난 듯 삑삑거렸다. 이어 이린이 한유진의 어깨 위로 올라가 소리쳤다.
-저리 가!
-삑! 삐이!
은혜가 파드득거리며 재빠르게 날아가 붉은 도마뱀의 꼬리를 콱 깨물었다. 이린이 몸을 돌리며 덩달아 은혜를 물려고 덤벼들었다. 둘이 엉켜 뒹굴뒹굴 한유진의 무릎으로 떨어졌다.
“…너희들 뭐하는 거야?”
-쟤가 먼저 덤볐어!
-삐익! 도마뱀 나빠!
“싸우지 마, 싸우지 마. 갑자기 왜들 그래?”
영문을 알 수 없어하면서도 박예림이 둘을 말렸다. 은혜와 이린이 한참을 씩씩거리다 각자 자신의 주인에게로 돌아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형!”
한유현이 번쩍 눈을 뜨고 이어 한유진도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자리에서 급히 일어나는 한유현과 달리 한유진은 다시 의식을 잃고 말았다. 박예림이 놀라 한유진을 불렀다.
“아저씨? 아저씨! 왜 그래요!”
-끄우응!
“구급상자 가지고 와. …입술은, 립스틱?”
한유현이 재빠르게 한유진의 상태를 살피며 말했다. 피스가 안절부절못하고 삐약이와 벨라레도 다가왔다. 당황하면서도 얼른 구급상자를 가지고 온 박예림이 물었다.
“무슨 일이야? 어떻게 된 건데!”
“무리했어.”
“뭐?”
“나 외의 다른, 우리보다 강한 자들이 침입해서… 형, 형! 잠깐만 정신 차려 봐. 독저항 풀어야 해.”
구급상자를 열어 주사기 형태로 된 해열제를 꺼내며 한유현이 말을 이었다.
“하루 정도 앓는다고 했어.”
“하루? 아저씨 괜찮은 거야?”
“일단은. 포션과 힐러는 쓰면 안 되고, 일반 병원에 입원시키라고 했는데.”
한유현이 한유진에게 주사를 놓았다. 독저항이 통하지 않는 약제로 만든 특별한 해열제였지만 그런 만큼 효과는 약한 편이었다. 멍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던 박예림이 퍼뜩 정신을 차리며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일반, 병원이면. 그래도 헌터전용이 낫지 않아? 세성 길드장한테 연락할게.”
“세성 길드장이라니?”
한유진을 깨우려 애쓰면서도 한유현이 의아하게 물었다.
“박예림 너, 연락처를 알고 있다고?”
“비상용이야. 아저씨한테 급한 일 생기면 연락 달라고 해서. 아무튼 세성종합병원이 안전하잖아.”
연락한다, 하고 박예림이 전화를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세성 길드장님!”
[무슨 일인가, 꼬마 아가씨.]“무슨 일이긴요. 아저씨 병원 가야 한대요! 근데 힐러랑 포션은 쓰면 안 되고요.”
짧은 침묵 후 휴대폰 너머에서 한숨소리가 옅게 새어 나왔다.
[헬기를 보낼 테니 옥상정원으로 나와 있게. 자세한 것은 병원에서 듣지.]“네, 고맙습니다. 한유현, 빨리 가자!”
한유현이 자신의 형을 안아들었다. 해열제가 통했는지 한유진이 힘겹게 눈을 떴다.
“유현, 아. 예림이…….”
“아저씨! 저 여기 있어요!”
“형, 독저항!”
“별일 아니니까, 걱정 말고.”
“걱정 안 하는 건 힘든데 너무 많이는 안 할게요. 아저씨야말로 걱정 마세요.”
한유진은 고개를 작게 끄덕이곤 독저항을 끈 뒤 다시 잠들었다. 집 밖으로 나가는 둘의 뒤를 피스와 삐약이, 벨라레도 쫓아갔다. 박예림이 삐약이와 벨라레를 안아들었다.
“진짜 크게 아프신 건 아니지?”
“…몰라.”
“모른다니!”
“처음 보는 초월자가 있었는데. 믿을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어.”
한유현이 인상을 조금 찌푸렸다. 어린 혼돈. 한유진은 이미 그를 많이 믿고 있는 듯했지만 한유현으로서는 꺼림칙했다. 도움이 필요하니 받기는 하겠지만 믿음까진 가지 않았다. 오히려 경계심이 더 컸다.
언제든 형을 빼앗아 갈 수 있는 상대다. 그에 더해, 한유진의 안전을 포기한 스스로에 대한 죄책감이 어린 혼돈을 더욱 꺼리게끔 만들었다.
“…아저씨한테 또 이상한 게 붙었어?”
“…어.”
긴 말이 필요 없었다. 둘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옥상정원을 올라 가 헬기를 기다리던 한유현이 조금 꺼림칙한 눈길로 박예림을 돌아보았다.
“세성 길드장과 개인적으로 연락하는 건.”
“아저씨를 위한 비상용이랬잖아. 아저씨가 사고는 잘 치는데 한유현 넌 잘 모르는 남의 연락 안 받고 안 하니까. 다 비서실 통하고. 송실장님 것도 있어. 물론 현아 언니 것도 있고.”
내가 한유현 너 같은 줄 아냐며 박예림이 휴대폰을 들어보였다.
“목록 보여 줄까?”
“필요 없어.”
“에휴, 나 아니면 누가 꽉 막힌 길드장님이랑 어울려 줄까. 박예림 진짜 천사가 따로 없다.”
“형만 있으면 돼.”
“네, 네. 그 소리 귀에 새겨지겠어. 이마에 적어 줄까? 아예 문신으로 새기시지요. 아저씨는 어때?”
“열은 좀 내렸어.”
그때 헬기가 나타났다. 옥상정원에 착륙한 헬기에서 내린 사람들이 한유현을 보고 순간 당황했다. 그들의 시선이 향한 곳을 눈치챈 박예림이 앗, 하고 재빨리 손을 뻗어 한유현 머리의 핀을 뜯어냈다. 우직, 리본핀이 박예림의 손아귀에서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게 일그러졌다.
“…뭐야.”
“아니, 아무것도. 머리에 뭐가 묻었는데 몰랐어?”
한유현은 알았지만 신경 쓸 필요 없었다는 눈빛을 던지곤 걸음을 옮겨갔다. 이내 헬기가 다시 공중으로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