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39
39화 사기다
“갑자기 웬… 방송입니까.”
정말 뜬금없었다. 하지만 테이블 너머의 능구렁이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 모양이었다.
“얼굴을 확실히 알려 놓자는 겁니다.”
“…제 신변 보호에는 그 반대가 낫지 않습니까?”
“아니죠. 어차피 협상 끝나고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유진 씨에 대한 정보는 전 세계로 퍼져 나갈 겁니다. 숨겨 봤자 소용없어요.”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타인의 입으로 들으니 새삼 걱정이 들었다. 스탯 등급은 낮으면서 유용한 특수 스킬을 가진 각성자를 대상으로 한 각종 범죄들이 줄줄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구나.
내 몸값은 얼마쯤 할까.
“그러니 차라리 많은 사람이 알아보게 만드는 편이 더 안전합니다. 누구나 다 주목하고 있는 상대에게 접근하는 것이 그 반대의 경우보다 훨씬 까다로우니까요.”
맞는 말이긴 했다. TV 같은 데 나와서 관심을 받게 되면 지켜보는 시선이 그만큼 더 많아진다는 뜻이니까.
“만약 납치 같은 걸 당한다더라도 목격자가 연락해 올 가능성이 높아질 테고요. 해연 길드원이 왜 엉뚱한 곳에 다른 길드 사람들과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길드원이 아니라 직원입니다. 일반 직원이요.”
은근슬쩍 길드원 취급을 하려 드네.
“하하하, 유진 씨가 워낙 친근하게 느껴지다 보니 꼭 길드원 같네요. 일반 직원은 거리감이 있지 않습니까.”
“차별하시면 안 되죠.”
“맞습니다. 길드원이나 일반 직원이나 다 같은 한 식구죠. 한유진 씨도 우리 식구고요.”
“…구별은 해 주시고요.”
역시 이 아저씨는 상대하기 피곤하다.
“귀엽게 생긴 몬스터가 방송에 나오는 건 처음이니 주목도를 끌기는 쉬울 겁니다. 더군다나 피스는 애교도 많다면서요?”
“착하고 귀엽고 사랑스럽죠.”
이젠 꽤 멋있어도 졌다. 아직 어린 티는 남아 있지만 목 갈기가 더 풍성해지고 꼬리도 길어졌다. 뿔도 금빛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뉘 집 앤지 참 잘생겼단 말이야.
무심코 흐뭇하게 미소 짓자 석시명도 덩달아 흐뭇하게 웃었다. 댁은 왜 웃어. 그것도 날 보고.
“비밀 보장 때문에 협상이 끝난 후에나 준비 시작할 수 있겠지만 미리 철저하게 계획을 짜 놓겠습니다. 믿고 맡겨 두시지요.”
“석 팀장님의 일 처리 실력이야 믿을 만하지요. 안심하고 기다리겠습니다.”
물론 일 처리 능력만 믿는다.
내 말에 능구렁이가 안방 금고에 고이 넣어 둔 금송아지를 떠올리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참 궁금하지가 않네요.
“궁금하거나 필요한 것이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연락 주십시오.”
“하하, 네.”
석시명과는 한동안 자주 엮이게 되겠지. 혀로 난도질당하던 때보다야 나으니 잘 지내 봅시다.
* * *
“우리 피스, 얌전히 잘 있었어?”
– 그르릉.
내 침대 위에 누워 있던 피스가 풀쩍 뛰어오며 가르랑거렸다. 우리가 좁아진 데다가 유명우에게도 마수 사육 스킬에 대한 건 감추고 있었기에, 피스는 집에서 제일 너른 내 침실로 잠자리를 옮겼다.
침대가 털투성이네. 알레르기가 없어서 다행이야.
“곧 자유롭게 다닐 수 있을 테니 조금만 참아.”
피스를 품에 안아들며 말했다. 처음에 비해 훨씬 무거워져 두 팔이 묵직했다. 피스의 성장은 점차 느려져 셋째 날에는 고작해야 0.5kg 더 늘어나는 것으로 멈추었다. 첫째 날에 2.8kg, 둘째 날에는 3.1kg이 늘어난 것에 비해 확연히 차이가 났다.
등급 또한 여전히 C로 표시되었다. 힘은 훨씬 더 강해졌으니 처음에는 C급 하위 던전 몬스터 수준이라면 지금은 C급 상위 던전 몬스터 수준은 되겠지만.
‘성체로 탈태라더니, 어느 정도 자란 뒤에는 더 크지 않다가 조건이 충족되면 단숨에 성장해 버리는 걸까.’
성장 소요 시간은 훈련한 만큼 꾸준하게 줄어들었다. 이대로라면 머잖아 성체가 될 것이다.
피스와 잠깐 놀아 주고 밥도 먹인 뒤 다시 밖으로 나왔다. 이제 명우도 챙겨 줘야지. 할 일이 왜 이렇게 많냐.
명우가 미리 사 놓은 다양한 날붙이들을 들고 해연 길드의 장비 관리팀으로 향했다. 대형 길드라면 하나씩 갖추고 있는 부서로, 각종 아이템을 유지보수 하는 곳이었다.
“던전 아이템은 파손율이 일정 이하라면 평범한 방법으로도 수리 가능하거든. 물론 재료는 던전 부산물이어야 하지만.”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며 명우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러니 일반적인 보수 도구도 있을 거야. 이왕이면 관리팀 사람들과 친해지는 것도 좋고. 관련 스킬이 생기면 너도 거기서 일하게 될 가능성이 높으니까.”
단순히 일하는 게 아니라 팀장쯤은 따 놓은 당상이지만. 아니면 아예 새로 부서를 만들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관련 스킬을 가진 보조가 필요할 테니 미리 알아 둬서 나쁠 것은 없었다.
“그렇게만 되면 진짜 좋겠다. 던전 공략은 솔직히 하고 싶지 않아.”
“그래. 던전은 가끔 레벨 업용으로나 급 낮은 거 쉬엄쉬엄 돌면 돼.”
SS급 대장장이님한테 미쳤다고 위험한 짓 시키겠냐. 던전 갔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전 세계적인 손해다. 안전하게 버스나 태워 드려야지.
장비 관리팀은 보안 검사를 한 번 더 거쳐야 들어갈 수 있었다. 책걸상과 컴퓨터 따위가 있는 평범한 사무실을 지나 두꺼운 문을 열자, 후끈한 공기가 흘러나왔다.
저기 저 보호벽 너머로 보이는 게 마나열로구나. 소형 용광로와 비슷해 보이지만 정제한 마나석을 끓여 각종 던전 금속을 녹여내는 도구였다. 아이템 수리에는 필수적인 장비였다.
“숫돌 스킬 가진 애송이가 둘 중 누군가.”
보호 장비 걸친 덩치 좋은 중년이 다가와 물으며 파란 수건 같은 걸 하나씩 던져 주었다. 받아 들어 보니 아이스팩처럼 시원했다. 주위의 다른 사람들도 이 파란 수건을 목에 걸치거나 허리에 묶고 있었다.
“이거 참 유용해 보이네요. 아이스팩과 달리 얇고 온도도 적당하고.”
“유지하는 데 마석 든다.”
비싸다는 소리로군. 이래서 던전 부산물로 개발된 물건들은 보편화되기가 힘들다니까. 마석이 더 저렴해지기 전까진 무리였다.
“전해 들으셨겠지만 필요한 것은 날붙이를 갈기 위한 기계입니다.”
꼭 숫돌 고이 놓고 하나하나 정성껏 갈아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혹 모르니 시험이라도 해 봐야지.
내 새끼 스킬창을 켜서 스킬 성장 대상자의 유명우 상태창을 열었다.
[날붙이 10,000개 날 갈기(진행도 71/10,000)]내가 피스를 훈련시키는 동안 유명우도 주방에서 열심히 칼을 갈았다. 명우의 말에 따르면 칼을 갈다 보면 스킬을 쓰지 않았음에도 숫돌의 날카로움 버프가 적용된다고 했다.
‘스킬이 자동 적용될 만큼 날을 갈면 1개 치 인정된다는 것이겠지.’
확인하기 쉬워서 좋다. 또한 스킬 효과가 사라진 칼을 다시 갈 수도 있었다. 숫돌의 지속 시간은 3시간이니 실제로 만 개나 되는 날붙이가 필요하진 않다는 뜻이었다. 사흘간 명우가 간 날붙이도 열세 개밖에 되지 않았다.
“여기 특수 그라인더라네. 던전 금속도 부드럽게 갈아 주지.”
중년 남자가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는 기계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여기 있는 사람들은 전부 장비 관련 특수 스킬의 소유자인가? 그런 것치곤 수가 너무 많은데. 호기심이 들어 눈앞의 남자부터 상태창을 확인해 보았다.
[각성자 – 이민석현재 스탯 등급 C
각성 가능 스탯 등급 D~C
최적화 초기 스킬
섬세한 땜질(B) 획득
두드리기(C) 획득 실패
체력 업(D) 획득]
섬세한 땜질이라. 척 봐도 수리 관련 스킬이었다. 두드리기는 이름만 봐선 분류가 애매한데 획득 실패했네. 만약 C급 특수 스킬이라면 아깝긴 하지만 잘사는 아저씨까지 신경 써 줄 필욘 없겠지.
이어 다른 사람들도 살펴보았다. 이민석을 제외한 나머지 일곱 명도 전부 각성자였다. 하지만 그중 네 명은 스탯은 E급 이상이지만 스킬은 흔한 F급이었다. 물론 최적화 외의 스킬도 얻을 수 있고 10레벨 스킬이 좋은 게 나오기도 하니 진짜 F급 스킬뿐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다들 스탯만큼은 일반인 수준이 아니었다. 힘이 필요한 작업이라 그런가.
“유진아?”
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고만 있자 유명우가 팔을 툭툭 쳐 왔다.
“잠깐 구경 좀 했어. 칼 하나 꺼내 봐, 갈아 보자. 이거 어떻게 쓰는 겁니까?”
“거기 고정대 있지? 단단히 고정시킨 뒤 버튼 눌러.”
“손으로 들고 가는 게 아닌가요?”
“스탯 F라며? 그러다 사고 나.”
특수 그라인더라더니 평범한 사람이 쓰라고 만든 게 아니구나. 기계가 다 해 주면 인정 못 받을 거 같은데.
혹시나 싶어 유명우에게 칼을 고정시켜 보라고 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기계가 날을 갈아냈지만, 강력한 기계의 힘에 칼이 갈리다 못해 망가질 때까지도 진행도에는 변화가 없었다. 역시 안 되네.
“이거 말고 평범한 기계는 없습니까?”
“평범한 거? 저쪽 세공실에 하나 있을 거네. 발의 압력으로 강약 조절이 가능해서 섬세한 작업에 좋지.”
그거면 딱이겠다.
“감사합니다.”
유명우와 함께 세공실로 들어갔다. 잡다한 도구들이 널려 있는 가운데 훨씬 더 소박하게 생긴 그라인더 기계가 보였다. 이번에는 성공했으면 좋겠는데.
명우가 그라인더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기계를 켜고 식칼을 하나 꺼내 들고서 발을 페달 위에 올린다.
이내 그라인더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명우는 조금 머뭇거리며 칼날을 들이밀었다. 귀 따가운 소리가 잠깐 들렸다가 멈추기를 반복한다. 초짜 티 팍팍 나던 손놀림이 점차 능숙해지기 시작했다.
잠시 뒤,
[날붙이 10,000개 날 갈기(진행도 72/10,000)]“됐어!”
성공이다. 문명의 이기 만세.
“잘됐네. 이거면 금방 끝나겠는걸.”
“응! 익숙해지면 하루에 백 개 넘게 갈 수 있을 거야!”
방금 몇 분 걸렸지. 얼마 안 지난 거 같은데.
잠깐 흥분했던 명우가 새로운 칼을 꺼내들었다. 자리 잡는 녀석의 표정이 평소와는 달리 차분하다. 저런 얼굴도 할 수 있구나.
이어 또다시 칼날이 갈려 나간다. 이번에는 더 빨랐다. 처음과 같은 머뭇거림도 전혀 없었다.
챙강.
의자 반대쪽에 갈린 칼이 떨어지고 새 칼이 손에 들린다. 고물상에 들러 한 무더기 대충 사 온 거라 낡고 바랬던 칼날이 빛을 품으며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냥 가는 것만으로도 저 정도까지 되나. 스킬 때문인가.
잠깐 딴생각하는 사이 네 개째 칼이 소리 내기 시작했다. 방향을 약간씩 틀어 가며 칼을 가는 손놀림이 완전히 능숙해졌다. 문외한인 내 눈에도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효율적인 움직임이었다.
칼만 한 십 년쯤 갈아 온 장인 같다.
‘…사기다.’
뭐가 저래. 여기 들어온 지 얼마나 지났다고.
‘쟤, 대체 왜 사무직만 전전한 거냐.’
기술직으로 갔어야지. 그놈의 인문대 물먹은 게 뭐라고. 진로만 잘 잡았으면 나와 만날 일도 없이 탄탄대로 걷고 있었을 텐데.
속으로 한탄하며 칼날이 갈려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단순한 작업의 반복임에도 쉽게 눈이 떼어지질 않았다.
그야말로 물 흐르듯 유려하게, 기계처럼 정확하고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이제는 소음마저 부드러운 리듬을 띠는 가운데 칼날에서 빛이 되살아난다.
냉각수가 적셔지며 물방울이 비산할 때면, 칼날의 반짝임과 어우러져 예술적으로까지 느껴졌다.
뭐랄까, 칼 가는 모습이 멋있어 보일 수도 있는 거였구나. 대단해. 역시 사기다.
챙강.
칼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기계가 멈췄다. 유명우가 손을 내려놓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아직 있었어?”
“어, 보다 보니까.”
잠깐만, 벌써 다 간 건가? 제법 많이 사 왔는데?
[날붙이 10,000개 날 갈기(진행도 115/10,000)]…마흔 개 넘게 갈았는데,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지. 재 보진 않았지만 한 시간 이내일 것이다. 그보다 더 빠를 수도 있다. 기계로 시간을 단축한다 해도 개당 4~5분은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대충 간 것도 아니고 수북이 쌓인 날붙이들이 죄다 신상품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스킬이 적용된 탓일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스킬을 쓰지도 않고 발동시키는 것 자체가 보통 일은 아닐 테니.
“너… 이 속도라면 열흘 만에 끝내 버리는 거 아니냐.”
“그러게. 기계가 좋네.”
명우 놈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무서운 놈. 평범한 척하더니 너도 역시 SS급 스킬 소질 보유자로구나.
“칼… 한 삼백 개 정도 더 사는 게 좋겠지?”
“응. 스킬 지속 시간 끝나려면 한참 남았으니까. 미안해.”
“아냐, 괜찮아. 완전 괜찮아. 신경 쓰지 마.”
얼마든지 투자해 드리겠습니다. 아무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