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392
390화 크리스마스 캐럴 (4)
“아니, 부길드장이라고 하셔야죠, 부길드장님.”
근처의 헌터가 작게 참견해 왔다. 그 말에 박예림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아직 받아들이지 않았어.”
부길드장. S급이 아닌 A급 헌터에 나이도 어렸지만 그럼에도 실력은 확실히 인정받고 있는 듯했다. 박예림은 자신보다 서너 살쯤 많아 보이는 자신을 살펴보았다.
키는 지금보다 더 컸다. 170은 가볍게 넘어 보였다. 어깨에 살짝 닿는 길이의 머리카락에 확실히 더 어른스럽게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경계심 어린 표정 때문인지 지금과는 달리 눈매가 약간 사나워도 보였다.
어릴 때의 모습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많이 다르게도 느껴졌다.
대놓고 관찰해오는 시선에 던전 속의 박예림의 얼굴이 더더욱 차가워졌다.
“사천당가라면 중국 출신 헌터인가? 목적을 밝혀라.”
박예림의 냉랭한 말에 박예림이, 지금은 당예가 활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목적이라고 해도…….’
어떻게 해야 하지. 박예림이다. 미래의 자신이었다. 아니, 이곳은 던전이니까 몬스터일 가능성이 높았다. 공략자들의 기억이 영향을 준 크리스마스 캐럴 던전.
‘그러니까, 아저씨가 회귀하기 전의 시점인 걸까? 아저씨랑 만나지 못한, 미래의 나……?’
한유진으로부터 회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궁금하기는 했었다. 원래의 나는, 박예림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한유진을 만난 박예림보다는 힘들고 외로웠을 것 같아서 일부러 자세히 묻지 않았었다.
어쩌면 알기 싫었을지도 모른다. 불행한 미래의 가능성 따위는.
“…생각보다는 좋아 보이네 뭐어.”
“뭐라고?”
“그게, 나는, 어, 그냥 지나가던 길이었다!”
솔직히 좋은 해결책이 떠오르질 않았다. 상대가 몬스터라고 해도 싸울 의욕이 나지 않았을뿐더러 함부로 건드려도 괜찮을지도 걱정이 되었다. 당예는 자신의 경험 부족을 깨끗이 인정했다. 일단 아저씨부터 만나서 어떻게 할지 물어보자. 그렇게 결론짓고 순간이동을 쓰려는 순간.
사아아아-
주위의 공기가 얼어붙기 시작했다. 차가운 탄식. 새하얀 안개가 빠르게 나타나며 당예의 퇴로를 차단했다. 공간이동이 아닌 순간이동으로는 저 안개에 닿지 않고 빠져나가기 불가능했다. 하지만 당예는 거침없이 순간이동 스킬을 썼다.
사르륵,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이동하는 당예의 몸에 안개가 휘말려 흩어진다. 냉기가 적을 얼리고 붙잡아 두려 했지만 당예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렇게 쉽게 빠져나가나 싶었는데.
“냉기 저항을 가지고 있어?”
박예림이 의아해하면서도 순식간에 그녀의 뒤를 따라붙었다. 똑같은 순간이동 스킬이었다. 당예가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뭐야, 네가 더 빨라?”
스킬 숙련도는 물론 박예림이 더 높았지만 그렇다고 속도가 더 빠른 것은 아니었다. 박예림이 곧장 당예를 쫓을 수 있었던 것은 주위에 깔아 놓은 차디찬 안개 덕분이었다. 탄식의 냉기가 흩어지는 것을 눈보다 마력으로 먼저 느끼고 방향을 예측, 곧바로 따라붙은 것이었다.
마력적인 능력만큼은 S급 헌터에 뒤지지 않는다는 평을 듣는 박예림이었다. 각성한 지 아직 2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그 전투능력은 초기 각성 헌터들 못지않을 정도였다. S급인 또 다른 그녀에 비해 경험도, 감각도 뛰어나다. 심지어 던전의 버프를 받아 능력치가 S급 수준으로 상승했다.
즉, 박예림이 밀릴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다들 물러나라! 중급 이하는 지하실로 대피해!”
박예림이 길드원들을 향해 외쳤다. 건물 밖에 나와 있던 헌터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안으로 들어가고 소수의 A급은 지원대기를 위해 남았다. 주위가 빠르게 정리되자 박예림이 기세를 사납게 끌어올렸다.
“왜 우리 길드를 노리는 거지?”
“아니야! 노리긴 무슨!”
“냉기 저항을 준비해 왔으면서 거짓말하지 마. 순간이동도 도망치기 좋은 스킬이지.”
당예를 첩자로 단정 지은 박예림이 더욱 짙게 한기를 흘려내며 말했다. 당예가 억울해하며 콧등을 찌푸렸다.
“내 스킬 내가 가지고 있는 게 뭐가 문제야? 그리고, 난, 나는 해연 길드 소속이야!”
“뭐?”
박예림이 미간을 좁혔다.
“해연의 헌터라고?”
“그래! 길드장과도 잘 아는 사이라고. 해연 길드장이 나한테 간편식도 만들어다 바치, 앗!”
가느다란 얼음 화살 십수 개가 당예를 향해 날아들었다. 깜짝 놀랄 만큼 빠른 속도였다. 당예는 얼른 순간이동을 써서 피했다. 파바박, 얼음 화살이 보도블록에 박히고 박예림이 기다란 창을 꺼내 들었다.
“해연 길드장 한유현이 길드원과 그렇게 친하게 지낸다고? 그 냉혈인간이? 정말 어설픈 첩자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아니, 나도 한유현 싸가지 없는 건 아는데! 그래도 아저씨, 자기 형한테는 잘해 주잖아. 엄청 나쁜 놈은 아니…”
박예림의 손끝에서 창이 빙글 맴돌았다. 새하얀 냉기가 창날에 어리며 당예를 향해 날아들었다. 냉기 저항이 없었더라면 창이 닿기도 전에 몸이 얼어 제대로 피하기 힘든 공격이었다. 하지만 당예는 아무런 영향 없이 가볍게 뒤로 물러났다.
“잘해 주긴 뭘 잘해 줘. 그 새끼가.”
박예림이 나직이 으르렁거렸다. 당예를 스치고 지나간 박예림의 창이 그대로 주차된 차를 내리찍었다. 콰드득, 승용차가 얼어붙으며 반으로 쩍 갈라진다. 창의 끝이 갈라진 차의 반쪽을 떠내듯 휘둘러 쳤다. 반토막 난 차체가 당예가 몸을 피한 자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싸울 생각 없다고오!”
당예가 버럭 소리치며 들고 있던 활을 크게 휘둘렀다. 반쪽짜리 차가 테니스 채에 맞은 공처럼 붕 떠올랐다가 바닥을 데굴데굴 구른다. 그 잠깐 사이, 박예림이 순간이동으로 당예의 코앞까지 치달았다. 빙 속성 공격은 통하지 않는다는 걸 확인했기에 번뜩이는 창날이 냉기가 아닌 전류를 품고서 날아들었다.
“뭐, 뭐야!”
예상치 못한 속성력에 당예가 당황하며 순간이동을 썼다. 하지만 박예림 상대로는 별 소용이 없었다. 순간이동을 쓰면 똑같이 순간이동해 곧장 따라붙는다. 당예가 허둥지둥 활을 들어 공격을 막았다. 콰득! 창날이 활대를 후려치고 활대에 희미한 상처가 생겼다. 그것을 본 당예의 눈매가 확 일그러졌다.
“잠깐! 타임! 스톱! 이거 빌린 거라고!”
“그 잘 안다는 해연 길드장이?”
“아니, 에블린 언니가.”
당예의 말에 박예림의 표정이 더더욱 차가워졌다.
“세성 길드 미국 지부 길드장에게 무기를 빌리는 사이라니. 대단하네.”
“어? 미국 지부? 에블린 언니 한국에 없어?”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자꾸만 말이 이상하게 헛돌았다. 박예림은 의아함을 느끼고 뒤로 훌쩍 뛰어 물러섰다. 정보를 캐내기 위해 모른 척한다기엔 저 당예라는 자는 널리 알려진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한국의 세성 길드 길드장은 강소영이잖아. 공식적으론 길드장 대리지만 길드장이나 다름없─”
“소영 언니가!”
당예가 입을 딱 벌렸다.
“우와 세상에! 세상에! 소영 언니 결국 세성 길드 먹은 거야? 그럼 세성 아저씨, 성현제 아저씨는?”
“…….”
박예림이 더더욱 이상하다는 듯이 당예를 쳐다보았다. 성현제, 세성 길드장의 행방이 묘연해진 지 벌써 1년째였다. 한국인이 아니더라도 헌터인 이상 그 사실을 모를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세계 1위의 랭커가 갑자기 사라진 것이니.
“너, 대체 뭐야.”
“나는.”
당예가, 박예림이 당당하게 어깨를 펴며 말했다.
“기승수 사육소장 한유진 아저씨의 보호자이자 미래의 해연 길드, 그러니까 해외 지부 길드장이자 한유현도 성현제 아저씨도 눌러 버릴 미래의 세계 최강의 헌터다! 물의 정령도 생길 예정이고 내 기승수도 생겼어!”
“…어린애가 상급 헌터로 각성하면 터무니없는 꿈을 꾸기도 하지.”
박예림이 창을 거두며 한심하다는 눈빛을 보내왔다. 어려 보인다 싶었는데 진짜 헛된 망상을 품은 어린애였나 보다. 그녀의 말에 당예가 발끈했다.
“터무니없다니! 반쯤은 다 된 거거든? 나는 너와는 다르…….”
당예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박예림과 박예림은 다르다. 박예림은 당연히 이룰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일들이 박예림에게 있어선 상상조차 하지 못한 헛소리였다.
어린 박예림이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이런 기분은 느끼고 싶지 않았다.
이곳의 박예림도 나쁘진 않아 보였다. 건물로 보아 그리 큰 길드는 아닌 듯했지만 그래도 작지는 않은 곳에 부길드장으로 인정도 받았다. 하지만 지금에 비하면, 많이 다를 게 분명했다.
굳이 생각지 않으려던 사실들이 불쑥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만약 자신이 한유진을 만나지 못했다면.
“…저기, 넌 언제 각성했는데?”
“열여덟 살 때.”
박예림이 의아해하면서도 대답했다. 열여덟 살. 무려 삼 년 뒤였다. 박예림은 그때까지 독립하지 못한 채 삼촌 집에 얹혀살아야 했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심지어 각성한 직후에도 순탄했을 거라곤 생각하기 힘들었다.
상대적으로 가치가 떨어지는 A급에 도와주는 어른도 곁에 없다. 삼촌만 생각해 봐도 분명 여러 고난이 있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혼자, 였을 거잖아. 계속.’
삼촌 집에서도 혼자였다. 독립한 후에도 혼자였을 것이다. 다녀왔습니다, 라는 말에 대답해 줄 사람도, 어서 오라며 반겨 줄 사람도 하나 없이.
현재의 박예림의 집은 따뜻했다. 집에서는 물론이고 집 밖에도 좋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한유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S급 헌터와 달리 A급 헌터는 비교적 많았다. 그러니 회귀 전 한유진이 눈여겨 두었던 A급 헌터도 한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 A급 헌터들 중에, 박예림은 운 좋게 선택되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그냥 운이 좋아서. 우연하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것이 사실이었다. 눈앞의 박예림만 봐도 그러했다. 한유진과 박예림은 아예 모르는 사이일 수도 있었다. 아니, 이미 한번 그렇게 서로에게 아무것도 아닌 채 흘러갔었다.
박예림은 문득 진주조개가 보여 준 환영을 떠올렸다. 처음부터 아저씨와 가족이었으면, 한유현처럼 친혈육이었으면 어땠을까.
괜찮다고 했었다. 부럽지만 괜찮다고 했다. 내게도 사랑해 주는 부모님이 계셨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하려고 했다. 실제로도 괜찮은 것 같았다.
하지만 정말로 괜찮은 걸까. 이렇게나 많은 것이 불안한데.
“아니, 저기. 진짜 애들은 그런 경우 많아.”
어린 소녀의 눈이 울 듯이 일그러지는 것을 본 박예림이 조금 당혹해하며 말했다.
“내가 너 탓하려는 건 아니고. 당예라고 했지? 진짜 중국에서 왔어? 중국 쪽 사정 안 좋은 건 알고 있어. 부모님은?”
“…돌아가셨어.”
“그렇구나.”
“미안하단 말은 안 하네.”
“나도 부모님을 일찍 여의었는데 그런 소리 듣기 싫었거든. 미안하다, 안됐다, 불쌍하다, 그런 것들. 지금은 별로 신경 안 쓰는데 어릴 땐 진짜 싫더라.”
박예림의 말에 박예림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엽게 여기는 시선들과 목소리들이 싫었었다. 마치 넌 부모를 잃었으니 당연히 불쌍하고 불행해야 하는 거야, 라고 몰아세우는 듯했다. 실제로 행복한 처지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래서 더 밝게 지냈다. 반발심이기도 하고 가여운 어린애가 되기 싫은 방어적인 태도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눈앞의 박예림처럼 박예림 또한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박예림은 불쌍하지도 않고 가엽지도 않은, 강한 S급 헌터니까.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는데, 그래도 S급 헌터 이름 팔고 다니는 건 위험해. 밀입국했어? 상급 헌터면 범죄자가 아닌 이상 무조건 받아 줘. 어린 헌터가 상급 무기를 가지긴 힘든데, 혹시 그 활 훔친 거야? 그래서 도망─”
“빌린 거라니까.”
“돌려주자. 그 정도 흠집은 수리하면 감쪽같아질 거야. 내 잘못도 있으니까 수리비는 내가 내줄게.”
“나도 돈 많… 수리비 정돈 있어. 그리고 진짜 빌린 거 맞아.”
박예림의 말에도 박예림은 믿지 않는 눈치였다. 걱정 말라면서, 나도 막 각성했을 때 사고 좀 쳤다면서 어설프게나마 달래려고 노력하는 자신의 모습에 박예림의 입술 사이에서 작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굳었던 표정도 슬쩍 풀어졌다.
나쁘지는 않았다. 분명히. 한유진이 없는 박예림도, 괜찮았다.
“당예라는 이름 사실은 가명이야.”
“그래? 그럴 거 같았어.”
“중국인도 아니고, 한국인이고.”
“어쩐지 한국말 너무 잘하더라. 소속 길드도 없지?”
“아니. 해연 길드원은 맞아. 이건 진짜야.”
속일 필요 없는데, 라고 말하는 박예림을 바라보며 박예림이 얼굴을 가린 천을 풀어냈다. 반가발도 떼어 냈다. 낯익은 모습이 드러나자 박예림의 두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깜짝 놀란 표정에 어릴 때의 모습이 짙게 묻어났다.
“내 이름은 박예림. 열다섯 살의 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