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393
391화 크리스마스 캐럴(5)
두 명의 박예림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번에는 큰 쪽이 작은 쪽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어릴 때랑 비슷하긴 한데. 혹시 몬스터인가.”
“몬스터는 내가 아니라-”
박예림이 말을 하다 말고 삼켰다. 머릿속으로는 이 던전 속 사람들이 몬스터겠거니 생각하면서도 말로 내뱉기는 어쩐지 꺼려졌다. 대신 다른 변명을 얼른 생각해 냈다.
“다른 세계에서 왔어, 난.”
“다른 세계?”
“그 뭐지, 평행 우주 같은 거야. 너랑 나는 같은 박예림인데 좀 달라졌다고 해야 하나. 네 기억 속엔 나 같은 모습은 없었잖아. 그치?”
작은 박예림이 두 팔을 벌려 보았다. 열다섯 살인데도 박예림은 이미 각성자였다. 짧은 머리카락에 키도 더 커졌다. 귀에 달린 푸른 보석 귀걸이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무기랑 그밖에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몬스터나 헌터가 모습을 딴 거라기엔 다른 점이 너무 많긴 한데.”
“맞아. 일부러 박예림인 척하려면 너랑 똑같이 했겠지! 하지만 난 다르거든. 물론, 나는 나지만, 박예림이지만 차이가 나.”
큰 박예림이 미간을 잔뜩 좁혔다. 난데없이 평행 우주에서 온 자기 자신이라니. 믿기 힘든 소리였지만, 무시하기에는 이미 세상이 너무 많이 변해 버렸다. 던전과 각성자만 해도 옛날이라면 말도 안 되는 공상이라고 했을 테니까.
“일단은…….”
길드 건물 쪽을 힐끔 쳐다보며 큰 박예림이 말했다.
“조용히 대화할 만한 곳으로 옮기자. 적은 아니야! 조사하고 올 테니 대기하고 있어!”
길드원들을 향해 크게 소리친 그녀가 앞서 걸음을 옮겨 갔다.
“얼굴은 다시 가리고, 우리 집으로 가자.”
“집? 어디 사는데?”
“이 근처야.”
작은 박예림이 설레어 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지금의 집에 아무런 불만 없이 만족하고 있지만, 그래도 여기 박예림의 집은 온전히 혼자서 만들어 낸 자리일 것이었다. 박예림이 홀로 독립해서 직접 돈을 벌어 얻은 집. 그 사실에 가슴이 살짝 두근거리며 앞서 걸어가는 자신이 새삼스럽게 어른처럼 느껴졌다.
아마도 혼자 살고 있겠지. 그럼 원룸일까? 상급 헌터는 돈을 잘 버니까 제법 큰 아파트일지도 몰랐다.
“고등학생 되면 알바해서 독립하려고 부동산 사이트에서 집 구경 많이 했는데.”
“가게 일손 부족하다고 허락 안 해 주더라.”
“뭐? 삼촌 진짜 치사해! 알바비도 안 주면서! 고딩 땐 줬어?”
“쥐꼬리만큼.”
“그럴 수가! 여전했구나, 진짜!”
박예림이 잔뜩 투덜거리고 박예림이 작게 웃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길을 건너 모퉁이를 돌았다. 거의 다 왔다며 건널목 앞에 선 그때.
탁!
“…어?”
무언가에 가로막힌 듯 박예림이 걸음을 멈추었다. 투명한 막이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냈다가 다시 사라졌다. 아무렇지 않게 막 너머로 한 발 내딛은 박예림이 뒤를 돌아보았다.
“왜 그래?”
“여기, 뭐가 있는데.”
뭐지, 하며 박예림이 손으로 허공을 더듬거렸다. 손이 닿은 곳에 단단한 막이 나타났다. 두 박예림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뭐, 뭐야 이게? 내 손에는 안 잡혀!”
“방어막? 결계 같은 건가?”
박예림의 손에 창이 들렸다. 냉기 어린 창끝이 막을 향해 강하게 휘둘러졌다.
텅!
큰 소리가 났지만 막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어 막 밖의 박예림이 스킬을 썼다. 얼음 가시가 나타나 막을 향해 날아들고 파바박, 그대로 통과해 보도블록을 얼리고 깨부쉈다.
“내 공격은 그냥 통과… 어, 이런 거 본 적 있는데.”
박예림의 머릿속에 도깨비들을 구출했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그때도 투명한 막이 쳐지고 도깨비들만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이거, 던전…….”
“던전의 막과 비슷해. 아니, 같아. 그중에서도…….”
막 안의 박예림이 이를 앙 다물었다가 말을 이었다.
“일정 구역 몬스터를 가둬 둔 막과.”
“어, 저기, 그게.”
“그러고 보니 사람이 없네.”
박예림이 냉정한 눈빛으로 주위를 살펴보았다. 텅 빈 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이 시간대에 차도 사람도 보이지 않을 리가 없는데. 여긴, 던전 안이구나.”
들켜 버렸다. 박예림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침착하게 상황을 이해하려 애쓰는 박예림을 바라보았다. 어쩌지. 뭐라고 변명해야 하지. 그때 그녀의 옆으로 윤윤이 불쑥 나타났다.
“나도 들은 적 있어! 그런 던전! 그럼 저 몬스터는 못 나오는 거지?”
“윤윤!”
질책이 담긴 박예림의 외침에 윤윤이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막 안쪽의 박예림이 윤윤을 보고 신기해했다.
“도깨비 맞지? 얼굴은 처음 보네. 도깨비는 던전에 들어가지 못하는 거 아니었어?”
“맞아! 작은 김 서방이 큰 김 서방이 된 것처럼 보이는 몬스터야. 원래는 못 들어갔어.”
“자꾸 몬스, 그렇게 부르지 마!”
“왜?”
“내가 몬스터야? 역시?”
막 안의 박예림이 의외로 담담하게 말했다. 안색의 변화도 거의 없었다.
“그, 그게, 아마도 그런 거 같은데… 괜찮아……?”
“사실 실감이 잘 안 나서.”
박예림이 뒤로 두어 발 물러서며 당황해하는 어린 자신을 바라보았다.
“도플갱어 종인 건가? 기분이 이상하긴 한데, 나쁜 건 또 아닌 것 같아. 내가 너무 멀쩡하게 잘 있어서 그런가?”
열다섯 살에 각성해서 대형 길드에 들어간 자신이 눈앞에 서 있었다. 아까 한 말이 사실이라면 다른 상급 헌터들과도 친하게 지내는 모양이었다. 강소영과 에블린, 한유현은 물론 성현제까지도 아무렇지 않게 불렀다.
“진짜 해연 길드에 들어갔어? 내가 열다섯 살 때면 브레이크 길드에 들어갈 거 같은데.”
“…해연 길드장이 아저씨 동생이니까.”
“아저씨… 참, 사육소 소장은 또 뭐야?”
“한유진 아저씨야. 아저씨가 내가 소질 있다고 날 찾아와서. 그래서 각성하게 된 거거든.”
“아저씨가?”
“너도 아저씨라고 부르… 어? 잠깐만. 아저씬 나 만난 적 없댔는데?”
분명 TV에서나 봤지, 직접 마주친 적은 없다고 했었다. 그런데 회귀 전의 박예림은 퍽 친근하게 아저씨, 라고 부르고 있었다. 박예림이 자세히 캐물으려다가 말고 윤윤을 돌아보았다.
“지금 하는 이야기는 남이 들으면 안 되는 거야. 미안하지만 잠시만 자리 좀 피해 줄래?”
“응. 엿듣지도 않을 테니까 걱정 마, 작은 김 서방!”
“고마워.”
윤윤이 훌쩍 사라지고 박예림이 다시 말을 이었다.
“한유진 아저씨를 아는 거야? 만난 적 있어?”
“있다고 해도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잖아. 나와 너는 다르니까.”
“그게! 그러니까, 그게! 으으음, 던전 안이고 어차피 회귀 전이니까 괜찮겠지. 사실 넌 내 미래이자 과거야!”
“…응?”
“한유진 아저씨가 과거로 돌아왔어. 회귀했다고. 원래라면 내가 너랑 똑같아졌을 텐데, 아저씨가 과거로 와서 날 찾아왔고, 그래서 바뀐 거야. 여긴 던전이긴 하지만 아마 실제로 있었던 미래이자 과거의 사람들이 그, 몬스터로 나타난 거지 싶고.”
자신도 잘 설명을 못하겠다며 박예림이 울상을 지었다. 잠깐 생각에 빠졌던 막 안쪽의 박예림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나는 던전이 만들어 낸 미래의 환상 같은 것이 아니구나. 실제로 있었어.”
“응! 맞아!”
“과거로 돌아가다니, 그런 일도 할 수 있었네. 난 한유진 아저씨와는 아는 사이야. 몇 번 직접 만나기도 했어.”
“진짜? 하지만, 아저씨는 전혀 기억 못 하시던데…….”
한유진의 성격상 모르는 척 할 리는 없었다. 심지어 회귀 사실까지 털어놓지 않았던가. 박예림과 아는 사이였다는 사실을 새삼 숨길 이유가 없었다. 의아해하는 박예림을 보며 막 안의 박예림이 인상을 확 찌푸렸다.
“못 본 지 오래되긴 했어. 아저씨가 자기랑 아는 사이여서 좋을 거 없다면서 오지 말랬거든! 그런데 1년 전부턴 아예 연락이 안 돼. 그 전엔 헌톡 답장 정도는 해 줬었는데. 해연 길드장이 무슨 짓을 했나?”
“한유현이라면 충분히 가능성 있어.”
박예림이 진지하게 동의했다.
“아저씨를 자기 집에 가두고 외부 연락을 완전히 막아 버린 거 아냐? 그래도 기억까지 지워 버릴 거 같진 않은데.”
최석원 사건 때 기억을 일부 잃어버린 사람들이 속출했었다. 그러니 타인의 기억을 조작하는 아이템이 나왔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한유현이 한유진의 기억에 손대는 짓까지 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박예림의 말에 박예림이 무슨 소릴 하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자기 집에 가둔다니. 한유현은 자기 형 쳐다도 안 보잖아. 싫어하는 거 같던데. 아저씨를 만나러 온 적도 없어. 내 기억으로는 확실해.”
“그럴 리가! 한유현 걔, 아저씨한테 목숨 걸었어. 아저씨가 잡혀갔을 때 울면서 상처 치료도 안 하고 쫓아가려고 했다던대. 시체 둘 치우게 되는 줄 알았다고 리에트 언니가 그랬어.”
막 안쪽의 박예림이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울어? 해연 길드장이? 진짜로?”
“그래! 그리고 완전 아저씨 껌딱지야. 길드장만 아니었으면 종일 아저씨만 따라다녔을걸. 아저씨만 옆에 있으면 세상 만족한 얼굴을 하는데 진짜 웃기지도 않…….”
박예림의 말끝이 흐려졌다. 회귀 전에는 지금처럼 빨리 화해하지 못했다, 라는 한유진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설마, 둘이 아직 화해 못 한 거야?”
열여덟 살 때 각성한 박예림이 부길드장 자리에 오를 만큼, 헌터로서 자리 잡은 시점이었다. 그러니 최소 1년 이상 헌터 활동을 했을 텐데, 그럼 무려 4년이었다.
7년이 넘게 두 사람이 떨어져 지냈다니. 그녀가 몇 달간 봐 온 한유진과 한유현을 생각한다면 도무지 믿기 힘든 사실이었다.
“지금은 화해했나 봐.”
“어, 으응. 정말 사이 좋아.”
“보나마나 아저씨가 받아 준 거겠지. 뻔해.”
박예림이 투덜거리면서도 그래도 다행이라며 중얼거렸다.
“어쨌든 내가 몬스터니까-”
“몬스터라고 하지 말라고! 일단, 지금은 내가 당예 할게! 네가 나이가 더 많고, 언니인 셈이잖아. 그리고 내가 들어온 거기도 하고, 헌터로서도 후배고, 아무튼!”
박예림이, 당예가 말했다. 과거와 미래, 혹은 회귀 전과 휘귀 후로도 나눌 수 있겠지만 그러긴 싫었다. 박예림은 그냥 박예림인 게 좋았다. 당예가 복잡해진 속을 정리하듯 커다랗게 숨을 토해 냈다.
“아저씨가 왜 나를 기억 못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무의식중에 남아 있었던 걸까? 그래서 날 찾아와 준 걸까?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원래 알고 있어서, 그래서 찾아와 준 것이 아닐까. 바람을 슬쩍 담은 말에 박예림이 어깨를 으쓱했다.
“나야 모르지. 정확히 뭐라고 하면서 찾아온 건데?”
“그냥, 내가 미래에 A급 헌터가 된다는 걸 알고 있어서. 그때 아저씨를 보호해 줄 사람이 필요했거든.”
“그럼 기억이 있든 없든 너를, 나를 찾아온 거잖아.”
“하지만!”
당예가 크게 고개를 저었다.
“A급 헌터야 많잖아! 수백 명은 된다고. 천 명 넘나? 그러니까 기억도 없다면, 그냥 우연이고 운인 거 같아서… 좀, 뭐랄까 자신이 없어져. 난 아저씨한테 진짜 많이 받았거든. 아저씨가 데리러 와 줘서 일찍 삼촌 집에서 나왔고,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고.”
당예는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주섬주섬 털어놓았다. 시간도 장소도 뒤죽박죽 섞여 엉망인 이야기를 박예림은 귀 기울여 들어 주었다.
“그래서 아저씨가 원한 헌터가 내가 아닐 수도 있었다는 게, 조금 무섭기도 하고 슬퍼지기도 해.”
“그건 아닐걸.”
박예림이 딱 잘라 말했다. 당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떻게 확신해?”
“그야 난 최고니까.”
자신 있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설사 내가 아저씨를 만난 적 없었다고 해도, 모르는 사이였다고 해도, 박예림 아니면 어떤 A급이 눈에 차겠어? 나는 각성했고, 노력했고, 특출나게 눈에 띄는 헌터가 되었어.”
S급 못지않다는 소리도 여러 번 들었다. 경력 대비 어느 A급에도 뒤지지 않을 거라고도 했다.
“내가 대단하니까, 나를 찾아온 거야.”
“…네가?”
“내가.”
박예림이 웃었다.
“나는 너잖아.”
박예림이니까. 다른 누구도 아닌 나니까. 박예림도 뒤늦게 웃었다. 눈물이 그렁해졌지만 환한 얼굴이었다.
“나라서 아저씨가 와 준 거구나. 내가 열심히 해서. 내가 기억에 남을 정도로 잘나서.”
내 자리는 내가 만들었다. 박예림이 만들어 낸 박예림의 자리였다.
“고마워.”
“네가 나인데 뭐가 고마워.”
“그래도 난 사실 아저씨가 없었으면, 그럼 난 더 힘들고 외롭고, 그리고 지금보다 더, 초라할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진짜 멋있어. 나는 잘 살고 있었어.”
“당연하지.”
“정말 잘 살아가서, 그래서 내가 있는 거야.”
활짝 웃는 박예림에게, 당예에게 박예림이 말했다.
“그래서 이제 어쩔 거야?”
“응?”
“몬스터를 잡아야만 던전 공략이 가능하잖아.”
아차. 당예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