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395
393화 예언가 (1)
아무리 몸이 재빠르고 순간이동까지 쓴다 하더라도 내리는 비를 전부 피하기란 불가능했다. 얼려서 막는 것에도 한계가 있어, 결국 박예림의 그림자에 당예의 물이 닿았다. A급, 지금 스탯은 S급에 준하는 만큼 움직임이 약간 둔해지는 정도에 그쳤지만 그럼에도 효과는 충분했다.
약화된 박예림에 비해 당예에겐 추가 버프가 들어갔다. 그림자 없는 낮의 기본 버프까지 포함한다면 부족한 경험을 메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에 더해 끌어낸 물의 기세도 여전했다.
당예의 지배력 하에 놓인 물은 박예림이 얼려 조종하는 데에 평소보다 더 많은 힘이 소모되었다. 심지어 얼음이 녹아 버리면 이내 다시 당예의 손아래에 들어가 버리곤 했다. 마치 밀려드는 바닷물을 양동이로 퍼내는 것과도 같았다. 박예림의 능력도 결코 낮진 않아 실제로는 대형 펌프쯤 되겠지만 역부족이라는 사실은 마찬가지였다.
“이런. 나 마나 바닥났어!”
흠뻑 젖은 박예림이 한쪽 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외쳤다. 마나 포션도 없으니 사실상 패배나 다름없었다.
“내 거 줄까?”
역시나 옷 입고 수영하다 나온 꼴의 당예가 말했다. 박예림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던전에 나만 있는 거 아니잖아. 보통은 말도 안 통하고, 싸워서 해결해야 하니까 아껴.”
박예림이 얼마 안 남은 마나로 얼음 벤치를 만들었다. 마나를 너무 써서 두통 온다면서 벤치에 등을 기대 늘어지듯 앉았다. 당예도 다가와 옆에 자리 잡았다.
“마나 얼마 안 남으면 기절할 수도 있다던데. 포션 하나 정돈 써도 괜찮아. 넉넉해.”
“그 정도는 아니야. 게다가 상급 헌터는 익숙해지면 한 1퍼센트만 남아도 버틸 만하거든.”
보통은 잔여 마나량이 1할, 10퍼센트 미만이면 정신을 잃게 된다. 하지만 기본 스탯이 받쳐 주는 상급 헌터쯤 되면 마나 부족 현상에도 내성이 생기곤 했다. 특히 마력 스탯이 높을수록, 기본 마나량이 많을수록 쉽게 잘 버텼다.
“난 아직 이렇게 깔끔하게 만들긴 힘들 던데.”
당예가 얼음 벤치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마치 공장에서 찍어 낸 듯 모양도 균형도 완벽했다.
“단순한 모양은 쉬운데 좀만 복잡해지면 머릿속에서 상상한 것과는 다르게 만들어져.”
“그것도 연습해야지.”
“연습한 거야?”
“응. 그리고 이건 센스 쪽이야, 센스. 종이와 연필만 있으면 누구나 그림을 그릴 순 있지만 모두가 잘 그리지는 못하잖아. 단숨에 잘하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보통은 연습이지.”
“…그럼 미술 공부도 해야 하는 거야? 뭐가 그렇게 많아!”
“토목 쪽이 좋아. 특히 균형이나 힘의 분산 같은 거 있거든. 배워 두면 적은 힘으로 더 큰 효과를 낼 수 있어. 같은 얼음벽이라 해도 구조에 따라 강도가 달라지니까. 게다가 팀으로 공략할 때 다양하게 쓰기 좋거든.”
당예가 울상을 지었다. S급으로 각성하면 공부는 좀 덜해도 될 줄 알았는데.
“근데 진짜 날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응?”
“유진이 아저씨 말이야.”
박예림이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내며 말했다.
“기억하고 있었으면 이런 거 네게 이미 말해 줬을 텐데. 내가 말해 준 거, 대부분 아저씨랑도 이야기했던 거야. 아저씨 헌터 정보 수집하는 거 좋아하거든. 그래서 도하민 아저씨랑도 아닌 척 죽이 잘 맞았고.”
“어, 하민 아저씨면 나도 아는데.”
“정보상으로 유명하지. 근데 네 나이 땐 아직 알려지지 않았을 텐데?”
“아저씨가 고용했어.”
“뭐? 나는 기억 못 하면서 그 좀생이만 기억해? 평소엔 짜증 난다고 투덜댔으면서!”
박예림이 억울해하며 발을 탕 굴렀다. 그러다가 이내 걱정스런 표정으로 바뀌었다.
“1년 전에 뭔가 문제가 생겼던 걸까. 직접 찾아 가 볼걸, 나도 자리잡느라 바빠서 가 보진 못했어.”
“가서 물어보자!”
당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말에 박예림이 눈을 크게 떴다.
“뭐?”
“아, 넌 못 나가지. 내가 가서 데리고 올게.”
“잠깐, 아저씨가 여기 와 있어? 여기가 진짜 던전이면, 최소 S급일 텐데? 아저씨 F급이잖아!”
무슨 미친 짓이냐는 박예림의 외침에 당예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게, 이 던전이 정상적인 게 아니라서. 강제로 들어오게 된 거거든. 그리고 아저씨가 상급 던전 들어온 게 처음도 아니야.”
“처음이 아니라고? 상급 던전을? 미쳤어, 진짜! 대체 왜 그런데? 해연 길드장과 화해했다며. 그런데 왜 또 위험한 일을 하는 거야?”
“…어쩌다 보니까?”
당예로서도 뭐라 해 줄 말이 없었다. 아무튼 얼른 갔다 올게, 하고 훌쩍 날아오른 당예가 얼마쯤 날아가다가 턱, 투명한 막에 부딪쳤다.
“윽! 뭐야?”
[보스 몬스터의 패배 선언을 듣지 못했습니다! 공략자는 구역 공략 완료 후 해당 구역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시스템 메시지 창이 나타났다. 당예가 멍하니 메시지를 바라보았다.
“뭐? 아니, 배구공 씨!”
처음엔 이런 말 없었잖아! 하고 당예가 소리쳤다. 잠깐만 나갔다 오겠다고 해 봐도 새로 뜨는 메시지 창은 없었다. 허공을 배회하는 당예를 향해 박예림이 돌아오라고 손짓했다.
“공략하기 전에는 못 나간대!”
“그래?”
“응. 치사하게!”
“이런 식으로 바꿔 준 것만 해도 많이 도와준 거 아냐?”
박예림이 자신이 끼고 있던 반지를 빼내며 말했다.
“SS급 반지야. 두 개의 속성력을 담을 수 있어.”
푸른빛 도는 은과 붉은빛 도는 금의 두 개의 링이 얽힌 반지였다. 당예가 얼떨결에 반지를 받아 들었다.
“…독도 담겨 있잖아? 왜 독은 안 썼어? 난 독 저항 스킬도 없고 독 저항 장비 등급도 낮아서 효과 좋았을 텐데.”
“힐러가 근처에 없잖아. 잘못되면 어쩌려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인데. 그리고… 어?”
창도 건네주려던 박예림이 멈칫했다. 그녀의 앞에 시스템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내가 줄 수 있는 보상 아이템은 하나뿐이래. 반지가 낫겠지? 그거 진짜 어렵게 구한 거거든.”
보상 아이템. 그 말을 들은 당예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미간을 좁힌 채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나는, 그러니까, 몇 번 더 싸워 보고 싶은데.”
“응, 재밌었어.”
“응! 나도!”
“어쩌면 난 그냥 진짜 내 자리로 돌아가게 될지도 몰라. 그럼 반지 어쨌냐고 난리 나겠다.”
박예림이 웃었다. 하지만 당예는 쉽게 웃지 못했다. 박예림의 손을 들어 자신보다 작은 자신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게 아니더라도, 너는, 말하자면 내 미래잖아. 내가 있어서 네가 된 거니까.”
“그래도, 아쉬워.”
짧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박예림이 조금 쑥스러워하며 자신의 팔뚝을 손으로 쓸었다.
“아, 나도 미련 남을 거 같다. 빨리 끝내자. 내가 졌어! 박예림이 이겼어!”
박예림이 거침없이 소리쳤다.
[축☆공략 완료☆하]외침이 끝나기가 무섭게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동시에 박예림의 모습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잠깐만! 있잖아!”
“아저씨한테 안부 전해주고. 기억에 대해서도 알아봐. 그리고 또, 음, 내가 알아서 잘하겠지!”
박예림이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박예림, 파이팅!”
“어, 어… 응! 파이팅!”
박예림이 힘껏 소리쳤다. 그리고 조용해졌다. 혼자 남은 박예림이 손등으로 눈가를 비볐다.
“누가 나 아니랄까 봐, 성격 되게 급하네. 조금 더 있어도 되는데.”
손에 남은 반지를 손가락에 꼈다. 약간 큰 사이즈의 링이 줄어들며 박예림의 손가락에 딱 맞게 바뀌었다. 희미하게 광택이 도는 반지를 보자 눈물이 더욱 차올랐다. 단순히 작별이 슬픈 것만은 아니었다.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 울컥 넘쳐흘렀다.
“작은 김서방!”
“깜짝이야!”
“울어?”
“아니거든!”
박예림이 젖은 소매로 얼굴을 문질렀다.
“이건 그냥 물이야, 물!”
“알았어. 근데 가끔 궁금하더라. 왜 우는 게 부끄러운 걸까.”
윤윤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냥, 울면 약한 것처럼 보이잖아.”
“작은 김서방은 엄청 강한데?”
윤윤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저기 멀리 있었는데도 물이 치솟는 거 다 봤어. 대단해!”
“…응. 난 대단해.”
박예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어디서든지 박예림은 대단했다. 그녀의 앞에 둥그런 물방울이 나타났다. 박예림은 깨끗한 물로 세수를 하곤 젖은 머리카락들을 뒤로 확 젖혔다.
“아저씨 찾으러 가자! 해 지기 전에.”
“응. 근데 아까부터 해가 안 움직이더라.”
“어? 아, 그러게. 여기 올 때부터 노을 져 있었는데 아직 하늘이 그대로네?”
두 사람이 동시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때였다.
쿠르르릉-!
땅이 흔들렸다. 아니, 하늘까지도, 공간 전체가, 던전 자체가 크게 요동쳤다. 박예림과 윤윤이 반사적으로 서로 끌어안았다. 둘 다 상대를 잡고 순간이동과 공간이동을 쓸 태세를 잡았다가 아차 하고 다시 떨어졌다.
그사이 진동이 가라앉았다.
“기, 김서방! 뭘까……?”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이런 일이 있으면 백에 구십구는 아저씨야.”
박예림이 확신을 담아 말했다. 그러곤 얼른 해연 길드 쪽으로 가자고 하는데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다.
[세성 길드 구역이 임시 폐쇄되었습니다!]* * *
눈물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속도 계속해서 따끔거렸다. 내 몸을 휘감고 있던 달빛이, 사슬이 테이블 위에 나를 내려놓았다. 성현제가 울고 있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뭘 봅니까.”
“갑자기 동생이 보고 싶어져서는 아닐 테고.”
“보고 싶어졌을 수도 있죠. 내 동생은 봐도 봐도 좋거든요?”
대꾸하면서도 불안이 스며들었다. 왜 이런 감정이 갑작스럽게 몰려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원인은 짐작이 갔다. 유현이겠지. 회귀 전 정보로 만들어진 던전이라 공략자에게도 영향을 미친다더니, 이것도 그런 건가?
‘…하지만 단순히 슬픈 것만은 아니란 말이야.’
회귀 직전, 동생이 죽었을 때의 영향이라면 속이 뒤틀리고도 남는다. 하지만 기쁜 건 뭐지. 기쁘기도 하다는 건 유현이에게 문제가 생기진 않았다는 것일까. 당장이라도 동생을 찾아가고 싶어졌다.
“저기요, 성현제 씨. 제가 직접 성현제 씨를 데리고 오는 건 어떻겠습니까? 저 남는 계약서도 있거든요. S급이에요. 한 시간 내로 잘 꼬드겨다 눈앞에 대령해 드리겠습니다.”
“급한 건 아니니 괜찮아.”
“아니면 화장실 좀 갔다 올게요. 댁은 안 급하지만 제가 급해서. 바로 요 앞에 카페 있던데.”
성현제가 미소 지으며 나무가 우거진 쪽을 정중한 손놀림으로 가리켰다.
“노상방뇨는 범죄이자 민폐입니다.”
“이 건물 주인으로서 허락하지.”
“됐거든요.”
안 통할 줄 알았지만 역시나 안 통했다. 젠장, 그래도 이제는 마음이 좀 가라앉았다. 유현이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은 다 괜찮을지 모르겠네. 신입아, 잘 좀 부탁하마. 애들 좀 챙겨 줘.
“정말로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성현제가 툭 내뱉었다. 나는 짧게 고개 저었다.
“진짜 기억 안 납니다. 애초에 세성 길드장으로 나타나진 않았을 거 아닙니까.”
“그렇지만, 아마도…….”
성현제의 말끝이 흐려졌다. 매끈하던 미간에 골이 팬다.
“아마도 뭐요?”
“내 기억도 완벽하지는 않아.”
불쾌함 짙은 목소리였다. 성현제 씨 툭하면 기억이… 잠깐만. 약탈의 후유증인가. 가득 차올랐던 성현제가 무사히 알프스든 그리스든 갔다면 송 실장님이 약탈을 써 준 게 분명했다. 그 스킬을 정확히 어떻게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경험이, 기억이 덜어 내지긴 했겠지.
내가 체인질링의 도움을 받아 빼낸 것은 멀고 먼 과거의 정보뿐인 듯했지만 눈앞의 성현제는 이 세계에서의 기억 또한 일부 잃어버린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진짜 재수 없게 완벽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네게도 영향이 간 건가.”
“네?”
나? 내가 왜?
“나와 그리고 송태원. 나는 그렇다 쳐도 송태원도 기억하지 못하는 듯하니.”
“…송 실장님이 왜요?”
“박예림은 어떻지.”
응? 예림이가 여기서 왜 나와? 혼란스러워하는 나를 유심히 살펴보며 성현제가 말을 이었다.
“박예림과 한유현이 싸울 뻔한 것은.”
“그, 금시초문인데요! 걔들이 싸울 뻔했어요? 아니, 요샌 종종 그러긴 하지만, 제가 회귀하기 전에도요?”
속성이 속성이다 보니 싸움 붙이는 식의 기사가 없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회귀 전 예림이는 A급이라 흐지부지 끝나 버리곤 했다. 기껏해야 젊은 나이에도 한국의 S급 헌터 중 최강으로 자리 잡은, 더 나아가 세계 1위를 넘보는 한유현과 젊다 못해 어리지만 눈부신 활약을 보이는 A급 헌터 박예림으로 각 등급의 젊은 대표 정도로 엮는 게 대부분이었지. 등급이 다른 이상 전투로 나란히 세우긴 힘들었다.
“대체 어쩌다가요.”
“정말로 모르는군.”
성현제가 말을 해 줄 듯하려다가.
“이제는 몰라도 상관없는 일이지만.”
또 끊어먹었다. 일부러 저러나 슬슬 열 뻗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