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396
394화 예언가 (2)
“한 대 칠 수만 있으면 쳤다 진짜.”
우리 쪽 성현제가 다시 보일 정도였다. 만나면 잘해 줘야지. 한 3분 정도.
“내 일인데 왜 몰라도 상관없다는 겁니까? 우리 애들이 왜 싸웠냐고요! 그리고 전 대체, 어떻게 되었던 겁니까?”
송태원이 죽기 전. 그 즈음은 나도 그럭저럭 자리를 잡았었다.
던전이 나타나고 내가 가장 힘들었던 건, 동생의 가출 직후를 제외하곤 막 각성했을 때였다. 혹시나 모를 희망이 무너지고 잘못된 계약까지 해버렸다. 그 정도였다면 그래도 유현이가 어쩔 수 없는 척 도와줬을지도 모른다. 물론 난 동생의 도움을 거절했겠지만, 억지로라도 날 지켜 주려고 들었겠지.
하지만 이때 각성센터 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쏟아지는 하급 헌터와 미흡한 교육. 그에 따른 인명피해가 부지기수로 늘어나며 화살은 상급 헌터들에게까지 겨누어졌다. 사실 잘나가는 상급 헌터들을 보며 불만이 생기지 않기란 불가능했다. 목숨 걸고 던전을 공략해 나라를 지킨다는 식의 이미지 작업으로 막고 있었던 그 불만이, 일순간 쏟아져 나온 것이었다.
그때 가장 많이 공격받았던 것이 해연 길드였다. 어린 나이에 대기업과 같은 후원도 없이 길드를 세워 자리 잡아 가고 있었으니 얼마나 아니꼽게 비쳤을까. 그것도 단순히 운 좋게 S급으로 각성했다는 이유만으로.
세성과 수담도 자수성가형이라는 이유로 말이 나왔지만 유현이에 비하면 훨씬 덜했다. 재벌이 복권에 당첨되면 가벼운 이야깃거리로 끝나지만, 서민이 당첨되면 여기저기서 득달같이 뜯어먹으려 드는 것과 비슷했다. 미성년자 고아로 시작한 한유현과 이미 사회에 자리 잡고 있었던 어른들의 차이였다.
거기에 나까지 엮을 수 있었으니 문제의 근본인 헌터 협회가 방패 삼아 내세우기 딱 좋았다.
‘그래도 결국 가라앉긴 했었지.’
꽤 오래 고생했고, 그 뒤로도 날 물고 늘어지는 놈들은 계속 툭툭 튀어나왔어도 각성하고 3년째 접어들고 나서는 숨통이 좀 트였었다. 물론 여전히 쬐끄만 길드에도 속하지 못한 F급에, 헌터로서 경력이 쌓이려나 싶으니 다리가 부러져 버리긴 했지만.
…내 인생도 참. 이래서 옛날 생각 떠올리기 싫었는데. 그 엉망인 기억조차 온전하지 못하다니, 진짜 뭐 이러냐.
‘그즈음에, 술이 꽤 잦긴 했던가.’
그전에도 안 마신 건 아니었지만 다리를 다친 후로는 더 늘었다. 이유야 여러 가지지만 진통제가 잘 통하지 않은 탓이 컸다. 유현이는 내가 술이나 마시고 다녀서 오히려 더 안심했을까. 던전도 경력 대비 비교적 쉬운 곳으로 가야 했고.
고개를 들, 이 아니라 약간 내려 성현제를 바라보았다. 술집이라면.
“혹시 저한테 술 사준 적도 있습니까? 하급 헌터들 자주 찾는 가게들 있잖아요.”
“사주겠다고 했더니 술잔을 던지더군.”
“…죄송합니다. 그때 제가 성격이 더러웠어서.”
게다가 장소가 장소다 보니 괜히 유현이 이야기 꺼내는 새끼들도 종종 있어서 예민했을 거고. 잠깐만, 혹시 성현제도 유현이 운운했던 거 아니야? 곱게 말한 상대에겐 술잔까진 안 던졌을 텐데. 애초에 유현이 관련으로 확인하러 온 거였으니 말 안 했을 리가 없었겠지. 사과 취소다.
“그래서 절 구경하면서 논 겁니까? 그때면 소영 씨가 길드장 대리 맡고 있겠다, 반쯤 은퇴한 채로요?”
그즈음의 성현제는… 이전처럼 조용히 나가는 게 아니라 아예 대놓고 해외진출을 노린다고 했었다. 대략 지금으로부터 2년 쯤 후의 일이었다. 각성센터 일도 마무리되고 해연 길드가 안정적으로 거대 길드화된 후에. 세성 길드장이 해외 쪽에 더욱 신경을 쓰겠노라 발표했었지.
알고 봤더니 이미 해외에 줄 많이 쳐 놓은 상태였지만.
“그렇게 한가하진 않았지만, 자주 찾아가긴 했었어.”
“일 좀 하시지. 딸뻘쯤 되는 소영 씨에게 다 떠맡기곤.”
“소영이가 알았다면 오히려 환영했을 텐데. 지금은 아닌가.”
“어, 음. 지금도 그렇긴 하죠.”
나한테 대놓고 요샌 길드장님 분위기 꿀꿀해도 걱정할 필요 없어서 너무 좋아요! 라고 말하기도 했었다. 내게 떠넘기면 되니까. …소영 씨 좀 너무하네.
“자주 찾아오셨다면, 제가 술잔 몇 번 던졌습니까? 성현제 씨 말씀하시는 꼴 보니 술병도 던졌을 거 같은데. 보나 마나 유현이랑 제 관계 캐겠다고 첫 만남부터 팍팍 긁어대셨겠죠.”
“울린 건 사과하지.”
무슨 짓을 한 거야 이 인간이! 성현제 놈이 술병도 물론 던졌다고 덧붙였다.
“배상은 내가 했고.”
“당연히 댁이 하셔야지! 불쌍한 F급을 대체 얼마나 괴롭혀댄 거야? 너무하네 S급이.”
성현제가 맘먹으면 석시명 뺨치게 날카롭게 찔러댔을 텐데 기억이 없다는 게 다행일지도 모른다. 혹시 이 인간 사고 치고 내 기억 날려 버린 거 아니냐.
“설마 맨날 술집에서 만나진 않았을 테고, 다른 데서도 마주쳤습니까? 유현이가 눈치채진 않았어요?”
“세성 길드장은 해외 순방 중이었지. 송태원의 접근은 바로 알아챘지만 그건 걱정할 일이 아니니까.”
송 실장님의 성향상 유현이는 오히려 안심했을지도 모른다. F급 헌터를 진심으로 보호해 주려 하는 유일한 S급이니까. 게다가 철저하게 공무가 우선인 사람이라 나와 좀 가까워진다고 해봤자 선은 뚜렷할 테고. 해연 길드장과 다르게 송태원을 노리고 내게 접근하는 사람도… 없겠지. 뜯어먹을 것도 없잖아.
“하지만 박예림은 경계했었지. S급은 아니지만 자질이 뛰어난 A급에 어린 나이까지. 어쩌면 질투였을지도.”
“그래서 둘이 싸울 뻔했다고요? 예림이가, 어, 저랑 친하게… 지내서?”
“어차피 떠날 겁니다. A급이잖아요. 저랑 가까이 지내서 좋을 것도 없고. 지금은 외로워서 그러는 거고, 금방 좋은 사람들 많이 생길걸요. 라고 했지. 한유진은.”
목덜미가 살짝 달아올랐다. 그, 뭐야, 맞는 말이긴 하네. 회귀 전은 나는 진짜 별 볼 일 없는 F급이었으니까.
“아 진짜, 난 전혀 기억 안 나는데. 저한테도 영향이 갔다는 건 뭔데요. 이건 저와 관련 있는 이야기잖습니까.”
말해 달라는 시선에 성현제가 눈을 가만히 내리떴다. 속눈썹 아래로 금안이 천천히 모습을 감추었다가 다시 떠올랐다. 내게로 옮겨오는 눈길에 등골이 순간 서늘해졌다.
“유진아.”
친근한 부름과 달리, 목소리는 냉정했다.
“너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어.”
“뭐…….”
“F급은 F급이지. 분명 특이하고, 유일하며, 내게 영향을 주었다고 해도. 그저 그뿐.”
…회귀하고, 성현제와 막 알게 되었을 때가 떠올랐다. 아니, 그보다 더 심했을 것이다. 회귀 전의 나는 쓸 만한 도구조차 되지 못했을 테니까.
비유하자면, 강아지나 고양이 정도였지 싶었다. 그것도 잠깐 귀여워해 주고 말뿐인 애완동물 같은 것. 혹은 실생활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이따금 들여다보기나 할 뿐인 희귀한 수집품이라거나.
무심코 이가 갈렸다. 분했지만 납득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더 화가 났다. 성현제가 자신의 한쪽 장갑 끝을 잡고 당겼다. 검은 가죽 아래로 드러난 맨손이 내 턱을 감쌌다. 엄지가 볼을 눌러 다물린 잇새를 벌린다.
“좋지 않은 버릇이야.”
“F급은 이도 갈면 안 됩니까.”
“그래도 나는 한유진을 아꼈다고 말해 두지.”
“꼬리라도 흔들어 드릴까요?”
나도 내가 그저 버티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지금과는 다르게, 성현제에게 이상이 생긴다 하더라도 뭘 어쩌겠는가. 아니, 애초에 아무것도 모른 채 송태원의 사망 소식과 세성 길드장의 잠적 소식을 들었겠지.
“평범하다고 해서 억울해할 필요는 없어. 그렇게 타고났을 뿐이니까.”
“네, 물고기는 달리지 못하고 생쥐는 날지 못하죠. 그래도 사자와 생쥐 이야기도 있잖습니까.”
“그물이 사슬이었다면 생쥐의 이빨만 부러지고 끝나겠지.”
꿈도 희망도 없는 소리였다. 그래, S급한테 평범한 F급은 이도 안 박히긴 하겠지. 결국 회귀 전의 성현제는 나한테 일방적으로 접근해서 제멋대로 잘해 주다가 갑자기 사라져서는 엽서나 보내 줬다는 거 아니냐고.
그 기억 그대로 있었으면 망할, 쳐다도 안 봤다.
‘원래 저런 인간이긴 했지만.’
S급 헌터들한테도 이내 질려 버리는 인간한테 뭘 바라겠냐.
“손 떼. 콱 물어 버려서 내 이빨 나가는 꼴 보기 싫으면.”
“왜 이렇게 으르렁대는 건지 모르겠군.”
성현제가 달래는 투로 말했다. 모르긴 뭘 몰라.
“괜찮아. 내가 사라지면 이 세계는 평범하게 멸망을 향해 갈 테니. 멸망을 막아 낼 확률도 높은 편이고.”
성현제가 사라진다면.
그럼 정말로 별문제 없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본 디아르마의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그 용새끼는 성현제가 계약에서 벗어난 뒤, 그를 찾으려 했었다. 눈치 더럽게 없던 그놈이 나에 대해 알아차리고 유현이를 더욱 얽매려 한 것은 성현제 때문이었을 지도 몰랐다. 등급 높은 계약의 파기가 일어나자 불안해져서 유현이에 대해 더 자세히 캐낸 것일 수도 있었다.
만약 그게 아니었다면, 나를 끝까지 눈치채지 못했더라면.
패륜아들이 한 말도 떠올랐다. 우리 세계는 멸망을 막아 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평가되었었다고. 초승달이니 하얀새니 끼어들 일 없었다면 정말로 그랬을까. 성현제 없이도 던전을 무사히 공략해 나갈 수 있었을까.
그렇게 멸망에서 벗어나고, 유현이가 나를 찾아왔을까. 수년, 혹은 십 년 이상 후에라도. 서른이 넘은 동생과 마흔에 가까워진 내가 다시 만나서 깊은 골을 천천히 메꾸어 나갈 기회가 생겼을 가능성이. 있었던 것일까.
‘그동안 미안했어, 형.’
삼십대의, 하지만 스물다섯 살 때와 큰 차이 없는 동생이 그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아니라 동생 녀석이 먼저 사과하고, 나는 화를 내고. 사정을 들어도 바로 받아들이진 못했겠지. 그래도 결국은 천천히 괜찮아졌을 것이다.
그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댁 하나 사라진다고 해서, 이제 와서 해결되는 거 아무것도 없거든요.”
지금은 아니다.
“회귀요. 말이 좋아서 회귀지. 결국은 그게, 없었던 일 되진 않았습니다. 없었던 일이 되었다면 변하지도 않았어야지. 결국은요, 그냥. 나 빼고 다들 기억하지 못하는 셈이더라고요. 아니지, 초월자들은 또 다들 알잖아요. 근데 무슨 없었던 일이야.”
내가 기억하고 내가 달라졌고, 그래서 내 주위도 달라졌다. 그 바뀐 주위가 또다시 주위를 바꿔 나가고 있었다.
“이번에는 각성센터로 그 난리, 나지 않았습니다. 내가 하급 헌터들이 희생당한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헛되게 죽어 나갔다지만 그래서 이번에는 그런 일 생기지 않았어요. 던전 상태 감지하는 것도 이번에는 한국에서 만들었고, 던전 생성도 한국에서 알아내게 되겠지요. 그리고 모두에게 알려 주고 알려 줄 겁니다. 헌터 협회도 물갈이되었고 MKC도 벌써 망했어요. 횡포 부려댈 일도 없어졌죠. 디아르마 그 새끼도 죽었는데, 회귀 전의 일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대항했겠어요.”
성현제를 마주 바라보았다. 송태원은 죽었고 성현제는 초승달에게 회수되기 전의 짧은 유예만이 남았다. 한유현은 죽었고 한유진은 동생과 화해하지 못하고 시체조차 빼앗긴 채 혼자 남았다.
“그쪽이나 나나 망했죠. 근데 뭐, 어쩌라고. 또 망할 거 같으니까 미리 끝내겠단 건 진짜 개소리 아냐. 망한 덕분에 이렇게나 많이 바뀌었는데 뭘 단순하게 해결해 주겠다고 하는 겁니까. 그거 그냥 혼자 도망치는 거 아니에요?”
말하고 나서 조금 뜨끔했다. 꽤나 거슬릴 만한 소리였을 텐데도 성현제는 옅게 미소 짓고만 있었다.
“나도 변할 거라고 말하는 건가.”
“이미 꽤 변하긴 했거든요. 그리고 방법이.”
성현제의 몸 주위로 흔들리는 달빛에 시선을 두었다.
“없진 않을 거고요. 애초에 쉽게 포기할 성격도 아니잖습니까. 성현제 씨는.”
지금의 성현제는 답이 없는 상태라서일까. 이대로 초승달에게 묶인 채 이용당하느니 스스로 끊어내는 편이 더 성현제답기도 했지만, 그래도. 성현제가 테이블 위에 놓인 장갑을 들어 다시 손에 끼웠다. 기다란 손가락들이 살짝 구부러졌다가 펴진다.
“내가 있는 한, 초승달이 존재하는 한. 이 세계는 멸망하는 수밖에 없어.”
“…예?”
“내 문제를 마무리 지음과 동시에 겸사겸사 세상도 구할 수 있다는 뜻이지.”
“덤입니까, 세상이.”
스케일도 크시지. 초승달은 성현제를 어떻게 해서든 회수하려 들 것이다. 그 회수하는 행위 자체가 세상을 망하게 만드는 걸까? 과한 개입이라서?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몰랐다.
나는 입을 꽉 다물었다. 솔직히 자신 있게 제가 어떻게든 해드릴 테니 지금의 성현제 씨는 고이 보내 주시죠! 라고 소리치긴 힘들었다. 초월자를 둘이나 잡긴 했지만 그래도 초월자는 초월자였다. 디아르마 때는 신입과 인어여왕이 도와주었고 무해의 왕도 체인질링의 도움이 있었다. 그 체인질링도 디아르마를 잡지 못했다면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그런 것 없이 초승달을 상대해라, 라고 한다면 그저 막막할 따름이었다. 십중팔구 성현제가 끌려가는 걸 구경이나 하게 되겠지. 아예 구경도 못 할 처지가 되어 있거나.
‘냉정하게 생각해서는, 초승달과 성현제 간의 일에서 손 떼는 편이 낫겠지만…….’
초승달은 그래도 일단 패륜아 쪽이었다. 채터박스도 있는데 여기서 적을 더 늘리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러겠냐.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해도, 그래도.
그래도 어떻게든 해봐야 하지 않겠냐고, 입을 떼려 할 때.
[세성 길드 구역의 오류를 수정합니다!]시스템 메시지창이 떴다. 동시에 주위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단순한 지진은 아니었다. 무너진 건물이나 쌓인 잔해들은 그대로였다. 파편이 굴러떨어지는 일 없이, 말 그대로 통째로, 공간 자체가 뒤흔들렸다.
이어.
“…큭.”
성현제의 모습이 흐릿하게 일그러졌다. 퍼져 있던 달빛, 은빛 사슬 또한 흐려져 간다. 우리가 있는 공간에 어둠이 퍼져 나가고, 콰지지직,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파편이 흩어졌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흩어지는 파편을 쳐다보았다.
기억의 조각들이었다.
이 세상 이전의 성현제의 조각들. 쌓이고 쌓인 정보들이 강제로 흩어지고 있었다.
오류냐, 저게! 그때 내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새하얀 깃털의, 새.
‘하얀새!’
생각과 동시에 몸이 움직였다. 있는 힘껏 손을 뻗었다. 내 동생을 데려간 초월자. 초승달과 함께 이 모든 일에 깊게 관여했을 존재.
빠르게 흩어져 가는 정보의 파편에 내 손가락 끝이 간신히 닿았다. 성현제의 기억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