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434
432화 안개의 파편(1)
급히 총을 꺼내어 루가 폐야를 향해 겨누었다. 마른침이 꼴깍 넘어갔다. 분명히 그때 죽었잖아! 내가 죽였는데, 그런데 어떻게!
“걱정하지 마. 나는 나의 파편일 뿐이야.”
그녀가 웃으며 빙그르 돌았다. 하얀색 옷이 둥글게 부풀어 나풀거리고, 인간의 것과 같았던 손이 다시금 여러 가닥의 촉수로 변하였다.
“도깨비라는 새로 만들어진 종족이 있었잖아. 마침내 권속의 힘을 지녔기에 나중에 조사해 보려고 건드려 두었지.”
“그래서 네 일부가 남게 되었다고?”
“맞아! 내가 죽기 직전까지 계속 연결되어 있었던 내 파편이야. 그래도 그 자체만으로는 별다른 일을 할 수 없었는데 던전이 생겨났지. 내 권속이 주가 되는 던전이.”
던전 제작자에 무해의 왕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던전이 만들어지면서 파편이 영향을 발휘하게 된 거였나. 자세한 거야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해연 길드에서 본 메시지창은 네 것이었나?”
“그곳에선 두 가지 길이 있었어. 한유진과 한유현이 L급 악몽과 맞선다. 또는 한유진이 S급 악몽과 맞선다. 후자를 선택한 것은 바로 너야.”
“선택한 기억은 없다만.”
“정말로?”
물론, 선택지를 주었다면 당연히 후자를 골랐을 것이다. 스킬 중복 공유라는 편법을 쓰지 못했더라도 상대가 S급이면 방법이 없진 않았을 테니까. 더 힘들긴 했겠지만 있긴 있지. 공략법이.
“난 작은 달이 단순히 초승달의 아이 중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루가 폐야가 마치 춤을 추듯 흔들흔들거렸다. 물속에서 헤엄치는 커다란 해파리 같기도 했다.
“좀 더 뛰어나고 마음에 드는 아이라고 말이야. 그런데 세상에! 겹겹이 쌓아 가고 있었다니. 몇 개의 세계를 거쳐 온 걸까. 나도 시도해 보고 싶어! 초승달도 치사하게 혼자서만 재미 보고! 나라도 입 다물었겠지만 그래도!”
순수한 흥미만으로 들떠 하는 꼴을 보자 속이 거북해졌다. 피해자는 언제 자아를 잃고 끌려가게 될지 모를 처지인데 나도 해 보고 싶어는 뭐냐. 하기야 저 녀석, 날 보자마자 한 소리가 즐겁고 재미있다였지.
이 던전 속에서의 사람들의 발버둥이 무해의 왕에게는 단순히 재미있는 구경거리, 흥밋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자신과 같은 사람으로 여겨지진 않는다는 뜻이었다. 실험용 생쥐 정도 될까. 생쥐도 정이 들면 불쌍해지는데 말이야.
이래서 초월자들이 꺼려질 수밖에. 어르신 빼고. 신입도 지금은 꽤 변했지.
“어린 혼돈이 나타날 줄도 몰랐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네 몸에 초승달이 들어간 것도 흥미로웠어. 아무리 던전에 남은 흔적의 일부라고 해도 자아 유지율이 예상보다 훨씬 높았거든!”
“…뭐?”
“좀 더 초승달의 특징이 나타날 줄 알았는데. 보통 화신체면 육신도 상당히 변하게 되거든. 그런데 눈만 변했잖아. 가장 먼저 변하는 게 눈이고 그다음이 체모야. 그리고 동화 정도에 따라 육신 자체도 변하게 되지. 종족이나 성별이 바뀌기도 해.”
와 씨, 안 변해서 천만다행이었다. 무해의 왕이 반짝거리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역시 존재 등급이 생각보다 높은 걸까? 칭호들 때문에? 양육자 칭호가 제일 수상해. 시스템적 수치와 실제 수치가 다른 경우도 이따금 있었거든. 아, 내게 시간이 좀 더 있었더라면!”
자기 혼자 신나서 떠들어 대는 모습이 실험 결과에 대해 설명하는 석하얀 씨를 보는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날 해칠 생각은 없고 곧 사라질 거라고?”
“맞아. 내가 이렇게 나온 건 던전 관리자로서의 보상 처리 때문이야. 다른 사람들은 신입이 맡고 있겠지. 작은 달과 월식도 궁금했지만 내 힘으론 한 명만 맡을 수 있어서 한유진 널 데리고 온 거고. 시스템 쪽은 그다지 소질이 없거든.”
아쉬워하는 루가 폐야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눈앞의 초월자에게 있어 나와 동생의 이야기는 그저 흥밋거리일 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유일하게 모두 지켜본 자였다.
내가 회귀한 사실을 알고, 나무 아래의 동생을 알고, 던전 속에 남겨진 두 명을 알고 있는. 그리고 내 슬픔을 공감하지 않고 내 상처를 돌봐 주지 않는. 나 또한 나를 너무 신경 쓸까 봐 걱정하거나 감출 필요 없는 상대.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후두둑 눈물이 떨어졌다.
“한유진?”
“…나도 말해 주고 싶었어.”
“응?”
“나도 유현이에게 괜찮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고! 그건, 그 마지막은, 어떻게 바꿀 수 없다고 해도. 그래도 말은 해 줄 수 있었는데!”
회귀하지 않고서는, 동생이 죽지 않고서는 라우치타스를 물리칠 수 없다. 그것만큼은 바꿀 수도 없고 변하지도 않을 결말이었다.
하지만 말은 할 수 있었다.
“조금은 시간이, 있었는데… 나도 사과하라고 할 걸. 아니, 그냥 다 용서한다고, 괜찮다고.”
나도 억지로라도 웃으면서.
“사랑한다고 말해 줄 수 있었는데…….”
걷잡을 수 없이 울음이 터져 나왔다. 아예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어차피 두 번 볼 상대도 아니니 부끄러울 것도 없었다.
“나도, 흐끅, 나도 사랑한다고, 말하고, 안아 주고!”
“음, 알아. 많이들 하는 후회잖아.”
“이걸로, 화해한 거라고, 흐으윽-.”
“던전 속의 다른 결말을 부러워하는 거겠지.”
“내 동생… 그렇게 보내 버려서…….”
어쩔 수 없는 끝이라고 해도, 좀 더 잘 끝낼 수 있었는데. 조금이라도 더, 조금이라도 더. 머리라도 한 번 쓰다듬어 줄걸. 웃는 얼굴이라도 한 번 보여 줄걸. 그랬으면 이 속이 조금이라도 덜 미어졌을까.
죽은 사람을 두고 하는 후회에 바닥이 있을까마는, 그래도.
펑펑 우는 내 앞에 손수건이 내밀어졌다. 주제에 인간적인 행동을 하네. 사양할 이유는 없기에 받아들었다.
“…세숫물도 줘.”
“다 울었어?”
“석 달 열흘 울어도 다 풀릴 일 없어.”
유현이를 되찾아 와도, 그래도 응어리는 남을 것이다. 어쩔 수 없다.
“그 녀석 잘 못 살기만 해 봐라. 진짜 잘 살아야 해.”
일어나서 둥근 그릇에 내어진 물에 얼굴을 씻었다.
“그래, 당연히 살아가야지. 거기서 끝나면 내가 다 원통할 일이다.”
생일만 챙겨 주고 끝나면 되겠냐. 새해도 맞이하고, 그놈 생일도 맞이하고, 그리고 봄도 올 것이다. 따스해지는 공기 아래 매화가 활짝 피겠지.
손수건으로 물기를 닦아 냈다. 운 흔적 남으면 안 되는데.
“저기, 뭐 좀 물어보자.”
“물어보렴.”
“너도 이 던전 제작자잖아. 이 던전을 폐쇄할 거라고 하던데, 그럼 그 안에 남은 존재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그건 정확히 알 수 없어.”
해파리가 촉수를 하늘거리며 설명을 이었다.
“던전은 사실상 근원의 힘이야. 세상을 삼키려 하는 근원의 힘을 시스템이 비틀어 보다 안전하게 만들어 낸 거지. 다시 말해, 던전의 존재 자체는 시스템이 건드릴 수 없어.”
“…어. 그, 던전 속 세상이 그대로 유지 될지가 궁금한 건데. 우리 입장에서는 가짜잖아.”
“만들어진 것이긴 하지. 그렇지만 네 세상도 근원의 힘이 만들어 낸 것이잖아? 결국, 근본은 같으니 단순하게 가짜라고만 할 수도 없어. 그러니 폐쇄된 던전이 유지될지 사라질지는.”
루가 폐야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근원의 마음이 아닐까.”
“근원 마음이라고?”
“근원의 의지, 자아의 유무는 옛날부터 의견이 엇갈려 왔어. 대체로 패륜아들은 없다는 쪽이고 효도 중독자들은 있다는 쪽이지. 나는 있다고 생각해.”
눈이 내리는 하얀 나무. 그 거대한 존재를 떠올려 보았다.
“여태까지 하얀 새 외에는 근원의 의지를 확인한 사람은 없었어. 사실 하얀 새도 대화가 통하니까 저러는 게 아닐까, 추측만 할 뿐이고. 하지만 근원에게 최소한의 자기 보호 의지가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해!”
루가 폐야가 자신 있게 주장했다.
“때맞추어 나타난 월식!”
“…송 실장님?”
“내가 보기에 그건 일종의 항체야. 몸을, 근원을 공격하려 드는 바이러스에 대항하기 위한 방어 수단이지.”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설명은 들어야 하니 일단 참았다.
“보통 항체는 자연스럽게 생겨나긴 하지만, 그렇다기에 작은 달은 아직 미완성이잖아. 근원에게 해를 입히진 않았지. 아, 그럼 항체보다는 예방 주사라고 표현하는 게 나을까? 미리 들어가 기다리고 있다가 작은 달이 차오르기 직전 삼켜 버리는. 그리고 예방 주사는 의도적인 행위지.”
“그러니까 근원이, 다섯 번째 근원이 자기 의지가 있어서 위협을 눈치채고 송 실장님을 만들어 냈다… 고?”
“정상적인 존재는 아니니까.”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속상해졌다.
초승달이 근원을 없애기 위해 성현제를 만들었고, 근원이 성현제를 없애기 위해 송태원을 만들었다. 결국, 그런 소리겠지.
“그래도 사람은 맞잖아.”
“자기 자신과 주위 사람들이 인정한다면.”
그렇잖아? 하고 루가 폐야가 허공에서 다리… 촉수들을 꼬아 앉았다. 상식적인 말도 할 줄 아네.
“여기서도 초승달과 두 사람 사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정확히는 알 수 없어서…….”
“찾아봐 줄까?”
“응?”
“초승달이 사라져서 거의 흩어지긴 했지만, 조금쯤은 정보를 긁어모을 수 있을 거야.”
“진짜? 그게 돼? 어르신은 신입은 안 된다던데.”
“기억을 다루는 건 내 특기니까.”
“그럼 부탁할게.”
해파리가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이야. 역시 세상사는 알 수가 없구나.
“대신 한번 더 자세하게 살펴보게 해 줘.”
“…또?”
전에도 그러더니. 곧 사라질 파편인데도 호기심은 해결하고 싶은 걸까. 하기야 따지고 보면 사람도 끝은 정해져 있었다. 초월자들 눈에는 지금 내가 루가 폐야를 보는 것처럼 짧디짧은 순간으로 느껴지겠지.
그래도 사는 거고.
“촉수 말고 딴 건 없냐. 아까는 손이었잖아.”
“손가락은 짧고 수도 적잖아. 어느 세월에 다 만져 봐.”
루가 폐야가 촉수를 뻗어 오며 말했다. 손으로 더듬거리는 것도 기분 묘하긴 하겠, 으아악.
“역시 촉수는 싫어!”
“이게 얼마나 편한데.”
“벌레들이 옷 속을 기어 다니는 거 같다고! 야, 등만 만져!”
“전체 다 확인해 봐야 정확히 알 수 있지. 마나 각인이 많이 안정화되었네.”
단순한 건강 검진이라고 생각하자. 검사 도구가 기분 나쁠 뿐 그냥 검진하는 것이라고……..
“입 크게 벌려 봐. 안쪽도 살펴보게.”
“뭐? 읍, 읍읍!”
얼른 입 다물고 손으로 가린 채 항의했다. 미쳤냐! 싫어!
“내시경이라고 생각해. 너희 세계에 그런 거 하잖아.”
“으읍!”
“다른 구멍은 아플 텐데. 귀라거나-”
“싫다고!”
“착하지, 사탕 줄까?”
망할 해파리가 익숙한 의사 가운으로 옷을 바꾸며 웃었다. 목에 청진기도 걸고 주위 배경도 병원으로 뒤바뀌었다. 손에, 아니, 촉수 끝에 들린 캔디케인 뭔데. 촉수 진짜 싫어…….
“축하해, 좀 더 건강해졌어.”
“…진짜?”
“화신체로 깃들 때는 보통 그릇을 단단하게 만들어 주는 작업이 들어가거든. 동화 정도에 따라 달라지는데 넌 아까 말했듯이 낮은 편이라 큰 차이는 없어. 다만, 마나 각인이 제대로 자리 잡아서, 수명 깎일 일은 덜해졌고 쓰기도 편해질 거야.”
“아무튼 좋은 거란 소리지? 동화율이 더 높았으면 더 튼튼해졌으려나. 스탯도 올라가거나?”
“신체가, 성별까지 변하는 수준이었으면 초승달이 사라졌어도 C급 정도는 되었겠지. 하지만 그 정도 동화율이면 초승달에게 종속되어 버려.”
문득 예전에 어린 혼돈이 수명을 늘리려면 보다 격 높은 상대에게 종속되어야 한다고 말한 것이 떠올랐다. 초승달의 잔여만으로도 C급까지 올라갈 수 있다니 본체면 S급도 가능하려나.
“종속된다는 게 정확히 어떤 건데?”
“종속에도 급이 달라. 가볍게는 자아가 그대로 남은 채 명령을 어기기 힘든 정도기도 하지만, 생명을 유지하는 것에도 허락이 필요한 수준도 있지.”
“가볍게도 웬만한 명령은 따라야 한다는 건가?”
“죽어라! 같은 극단적인 것을 제외하면.”
어르신은 왜 저런 위험한 걸 권하신 거냐. 물론, 좋은 상대를 만나면 내 몸만 건강하게 만들어 준 뒤 터치 안 할 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내가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보다 양육자 칭호의 힘이 더 강해진 거 같아.”
“강해졌다고?”
“원래 칭호나 스킬은 성장하는 거긴 하지만. 아, 선생님 스킬 머잖아 등급 오를지도 모르겠어. 열심히 썼네. 몸에 넣은 것들도 잘 자라고 있어.”
정말로 건강 검진을 받은 느낌이었다.
“문제는 그렇지 않아도 육체에 비해 강한 능력들이 성장까지 하고 있다는 거지만. 어떻게 될지 궁금하네. 내 예상보다는 멀쩡한 것 같아서 더 이상해. 분명 태생은 평범한 인간이 맞는데, 왜 이런 게 만들어진 것일까.”
“그냥 살다 보니 이렇게 됐다, 왜.”
“우연이란.”
“약속한 대로 초승달의 기억을 보여 줘.”
해파리가 고개를 끄덕이곤 뒤로 물러났다. 그녀의 주위로 짙은 안개가 밀려들었다. 이어 흐릿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는 인간을, 지켜 낸 겁니다.]송 실장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