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467
465화 좋은 사람도 (1)
호텔도 통으로 빌리고 오케스트라도 정말로 초청을 했다. 하지만 실제 명목은 먼 길 와주신 번케이브 길드를 위한 만찬이었다. 물론 그 소란을 떨어댔으니 이 자리가 기승수 사육소 소장이 클로이 앨저에게 잘 보이기 위해 마련한 것이다, 라는 사실을 모르는 참석자는 없었다. …쪽팔려라.
그나마 가십거리 기사가 쫙 깔리는 일까진 벌어지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회귀 전이었으면 해연 길드장 형이 주제도 모르고 외국인 상급 헌터 어쩌고 나라망신 저쩌고 했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는 사람만 떠들 뿐 외부에서는 조용했다. 상급 헌터 이미지 관리 체계가 잘되어 있긴 하다니까. 나야 상급은 아니지만.
“결아, 절대로 말하지 말고 평범한 새끼 몬스터인 척해야 해.”
내 어깨에 올라앉은 요정용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현제와 문현아에게 클로이에 대해 말해 놓았으니 두 사람이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잠시나마 나와 클로이, 단둘만 같이 있는 건 불안했다.
‘박하율은 은혜에 대해 어느 정도 눈치챘을지도 모르니까.’
그 녀석 앞에서 은혜를 벗었었지. 그때는 전혀 모르는 듯했지만 혹 모른다. 게다가 은혜가 있다 해도 납치나 질식사 등은 막지 못한다.
‘하지만 체인질링이 있다면 시간 정도는 벌 수 있지.’
잠깐이나마 내 능력치를 올려서. 그러려면 요정용이 무해하게 비쳐야만 했다. 등록은 삐약이와 마찬가지로 F급 몬스터로 되어 있으니 말을 알아듣고 할 수 있다는 것만 감추면 된다.
다른 차를 타고 온 명우, 노아 씨와 합류해 호텔로 들어섰다. 조용한 로비에는 호텔 직원들만이 대기하고 있었다. 만찬장으로 향하기 전 스위트룸으로 올라갔다. 먼저 와 있던 석시명이 준비된 옷을 내어주었다.
“한 소장님께서는 사랑이 깊은 분이신 듯해 걱정이 됩니다.”
석시명이 직접 내 옷시중을 들어 주며 나직이 말했다. 듣기 좋은 목소리로 속삭이기까지 하니까 귀 끝이 근질거리는 것 같았다.
“한번 빠지면 물불 가리지 않는, 그런 사람들도 있지 않습니까.”
“저도 연애할 때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어요. 설사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 하더라도 유현이와 예림이가 우선이고요. 그러니 할 생각 없습니다. 예의가 아니잖아요.”
“그렇게 말씀하시니 더 걱정되는 겁니다. 가볍게 사귀실 분이 아니니.”
석시명의 손이 넥타이를 들어 내 목에 감았다. 나도 손 있는데.
“제 욕심으로는 한 소장님께서 앞으로도 계속 길드장님을 가장 우선시해 주셨으면 합니다.”
달콤하게 부드러운 목소리와 달리 안경알 너머의 눈빛은 서늘할 정도로 차분했다. 만에 하나 내가 유현이에게, 해연에게 해를 끼칠 존재가 된다면 석시명은 더할 나위 없이 냉정하게 나를 처리하려 들겠지. 그래서 도리어 믿음은 가지만.
“그런 소리 남에게 하면 욕먹어요.”
그냥 평생 동생 뒷바라지나 해달라는 거 아니냐.
“욕 좀 먹고 붙잡아 둘 수 있다면 남는 장사죠. 하지만 한 소장님께서는 동생을 무척 많이 아끼시니까, 이렇게 부탁만 드려도 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석시명의 입매가 올라가며 다정한 미소를 머금었다. 넥타이가 적당할 정도로 조여졌다. 욕먹는 것만 감수할까, 범죄도 충분히 저지를 수 있겠지. 뭐, 내가 석시명 입장이었어도 못 놓친다. 여태까지 얻은 것만 해도 얼만데. 만에 하나 남에게 빼앗기게 된다면.
‘차라리 부수는 게 낫지.’
내가 유현이에게, 해연에 해준 것을 다른 길드에, 다른 헌터에게 해주게 된다면. 위협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환경 참 잘 잡혔단 말이야.’
원래라면 다른 대형 길드들이 나와 해연의 관계를 못마땅해하다 못해 갈라놓으려 난리를 쳤어야 하는데. 심지어 초기에나 기승수 사육소는 중립이에요~ 했지 지금은 대놓고 동생 편들어 주고 있다. 그럼에도 별말이 없는 것은 세성은 애초에 해외로 진출할 예정이었으며 브레이커는 독립이 더 골칫거리여서였다. 한신은 회귀 전에도 자리보전 정도나 하려는 성향이 강했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인지 조용한 편이었다. 제일 공격적이었을 MKC와 수담은 일찌감치 망해 버렸고. 협회는 이따금 불만을 표해 온다고 하지만 무시해도 될 정도였다.
“석 팀장님께서 해연에, 해연 길드장님에게 충실한 이상은 부탁조차 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내 옷깃을 마저 정돈하고, 석시명이 뒤로 한 발 물러났다.
“제 마지막은 해연의 마지막이 아니겠지만, 해연의 마지막은 저의 마지막입니다.”
석시명이 잘못되어도 해연길드는 그대로겠지만, 해연길드가 무너지면 석시명도 운명을 같이하겠다는 소리였다. 따지고 보면 그저 몸담은 회사일 뿐인데 거창하다. 하지만 틀린 소리도 아니었다. 해연이 버티지 못하게 되면 세상도 망한다는 뜻이나 마찬가지니까. 석시명이야 거기까진 모르겠지만.
“그러시다면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거실로 가자 유현이와 예림이가 먼저 나와 있었다.
“형, 이거.”
유현이가 손수건, 행커치프를 내 가슴 포켓에 꽂아 주었다. 예림이도 손수건을 들고 팔랑였다.
“눈물 나면 그걸로 닦으세요. 한 장 더 드릴까요?”
그런 의미였냐. 울긴 왜 울어.
“워터프루프? 화장도 있대. 울어도 안 지워진다고 했어.”
“…형 안 운다.”
“괜찮아. 힘들면 언제든지 말해. 형이 거절하는 것도 실연은 실연이라니까. 실연여행 같은 것도 간다던데, 며칠 시간 낼까? 중국 다녀오느라 밀렸던 일도 다 끝냈어.”
“제주도 갈래요? 아니면 부산이나, 실연하면 역시 바닷가죠.”
내가 옷 갈아입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둘이서 내 실연 대비를 하고 있냐. 유현이는 여전히 내가 차일 거라고 생각진 않는 모양이고. 결이도 한마디 거들고 싶은지 테이블 위에서 빙그르 맴을 돌았다.
“한동안은 형 먹고 싶은 거 마음껏 먹어.”
“저랑 같이 카페 탐방해요. 단거 잔뜩 먹으면 기분 좋아진대요.”
신경 써 주는 건 정말 고맙다만 그런 거 아니야, 얘들아. 하지만 지금 털어놓을 수는 없으니 떨떠름히 고개만 끄덕거렸다.
“인벤토리에 들어가는 거야.”
명우가 작은 유리병을 내밀어왔다. 안에는 금빛 도는 과자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꿀타래 비슷한 건데 예전에 터진 던전 있잖아. 벌 나오는 곳. 거기 꿀로 만들었어.”
최근에 공략되어서 신선한 꿀이 마켓에 판매 중이라고 하였다. 바쁠 텐데 이런 것까지 만들어 주고.
“고마워.”
“힘내고.”
아직 고백하기도 전인데 왜 그런 눈빛으로 보는 거냐.
“하민 형이 차이고 돌아오면 금동이 직접 볼 수 있게 해주겠대요.”
노아 씨가 역시나 안타까워하는 시선을 보내오며 말했다. 필요 없어, 그런 거.
“민의 형이 소개팅 자리 마련해 주겠다고도 했고요.”
걔는 자기 코가 석 자면서 무슨. 만찬장이 있는 층으로 내려가자 복도에서 대화 중인 문현아와 송태원이 보였다. 문현아가 먼저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왜 빈손이야. 꽃다발 정도는 들고 와야지.”
사정 다 알면서 정말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송 실장님이 나와 내 주위 사람들을 바라보며 딱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한유진 씨가 클로이 헌터와 교제하게 될 시, 클로이 헌터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다면 해연 길드를 우선적으로 조사하겠습니다.”
“…예? 그건 좀 억울한데요! 벌써 용의선상에 오르다니, 무죄추정의 원칙도 있는데.”
“상급 헌터 간의 분쟁은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특히나 이번 경우는 국제문제가 될 수도 있으니 부디 자중해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그래도 너무하시네. 어차피 사귈 일 없긴 하지만요. 괜한 걱정 마시고 송 실장님도 맘 편히 식사하고 가세요.”
“괜한 걱정이 아닙니다.”
송 실장님이 진지하게 말했다. 전에 차에서도 그랬지만 정말로 나와 클로이 씨가 사귀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시는 듯했다. 왜죠.
“생각을 해보세요. 첫 만남 때 송 실장님에 유현이 성현제 다 있었다니까요? 제가 눈에 들어오기나 하겠습니까. 안 그래요?”
내 말에 송 실장님의 미간이 희미하게 찌푸려졌다.
“세 명과 비교한다면 당연히 한유진 씨가 최선책입니다.”
그야 당연히… 예?
“네? 어… 네? 아니, 제가요?”
“예.”
옆에서 듣고 있던 현아 씨가 어, 맞네?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잖아, 형님. 성현제야 멀리서 구경하기만 좋지 옆에 두라면 백이면 백 진저리칠걸? 도련님은 너무 어리고, 나이를 빼더라도 정상적인 연애가 가능하겠냐. 데이트할 시간 나면 형님 운동이나 시키겠지. 송 실장님도 비슷하고. 셋 중엔 제일 낫지만 애인보다 S급 헌터들과 더 자주 만나실 분 아니냐. 속 뒤집어져.”
“그, 그건요…….”
“반면에 우리 한 소장님은 제일 성실하게 연애할 타입이지. 납치만 안 당한다면 아침마다 도시락도 싸줄걸.”
예림이도 그러네요,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 다 똑같다고 쳐도 말이에요. 한유현이야 당연히 최악이고 공무원 아저씨도 갑갑~ 하고요. 전 그래도 세성 아저씨가 쫌 나은 거 같은데. 하지만 의리 더해서 아저씨가 1등!”
“형이 제일 나은 게 당연하잖아?”
유현이가 길게 말해서 뭐하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건, 그게. 반박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노아 씨는 어때요!”
“네? 저요?”
“잘생겼고 어리고 착하고 다정하고 데이트할 시간도 많죠! 그리고 명우도 있잖아요. 적당한 나이에 몸도 엄청 좋아졌고 능력이야 말할 것도 없는 데다가 도시락이요? 저와는 비교도 안 되죠. 좀 바쁘긴 해도 다정하고 사람 잘 챙겨 주고요.”
“나 그렇게 다정하진 않아.”
“저도요, 유진 씨.”
둘 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아무튼 세상엔 좋은 사람이 무척이나 많다는 뜻이죠. 제 차례까진 안 와요.”
그리고 뭐, 유현이는 종족적인 벽이 있다고 할 수 있고 성현제는 너무 위험하지만 송 실장님은 괜찮은 거 같은데. 일 때문에 바쁜 현대인이야 널렸잖아. 바쁘다고 해도 송이 챙겨 주는 거 보면 애인한테도 분명 최대한 시간 내서 잘해 주겠지. 그러니 이왕이면 연애도 하시면 좋을 텐데.
결이를 예림이에게 맡겨 놓고 성현제를 찾아갔다. 흑백 영화에 나올 법한 고전적인 슈트 차림의 성현제 옆에는 중년의 남자가 서 있었다.
“한 소장님은 처음 만나는 것이겠군.”
성현제가 자신 옆의 남자를 소개해 주었다.
“이델 반테스라네. 특정한 직책은 없지만 내 보좌관이라 할 수 있지.”
이름은 몇 번 들어 봤다. D급 각성자고 앞에 나서는 일이 거의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수줍음이 많은 편이라 세성 길드원들도 직접 마주치긴 힘든 사람이라네. 외부인은 송태원 실장 정도나 만났을까.”
“제 등급이 낮은 편이다 보니 알아서 몸을 사리는 것일 뿐입니다. 헌터계가 유독 험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치곤 성현제 옆에서도 무척이나 태연했다. 보좌관이라면 상급 헌터들을 부리기도 하겠지. 나처럼 정신계 저항 스킬이 있는 게 아닐까. 낮은 스탯 등급으로 세성 길드장 옆에 머물려면 필수적이기도 할 테고. 헌터들 사이에서는 단순 정신력만으로 입이 무겁기는 힘드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한유진 소장님. 예전부터 한번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반테스가 온화한 미소와 함께 악수를 청해왔다.
“앞으로도 길드장님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예.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마주 고개를 숙이려는데 반테스가 그런 나를 막았다.
“쉽게 머리 숙이지 마십시오.”
“…네?”
“한유진 소장님은 길드장님의 옆에 서시는 분이 아니십니까. 반면에 저는 길드장님의 아랫사람입니다.”
“그건, 그렇지만요.”
“겸손한 것은 괜찮습니다. 하나 짐승들 앞에서 물러서는 것은 안 됩니다.”
“…짐승들이요?”
“예. 대부분의 상급 헌터는 힘을 따릅니다. 현재 헌터계의 서열은 오직 강함뿐입니다. 강한 자가 더 위험한 던전을 더 빠르게 공략할 수 있으며, 더 많은 것을 차지할 수 있는 세계지요. 그렇기에 여럿이 모이게 되면 자연히 서로를 가늠하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싸움도 일어나고 말입니다.”
성현제의 생일파티를 예시로 들며 반테스가 나직이 웃었다.
“그런 상급 헌터들의 모임을 주최하는 자가 얕보이게 되면 파티는 난장판이 될 수밖에 없지요.”
“…세성 길드장님도 크루즈 박살 내셨는데요.”
“그전까지 질서라는 흔적이 남아 있었던 것은, 길드장님께서 강하시기 때문입니다.”
하긴 생일파티 때 모인 헌터들은 나름 규칙을 지키긴 했었다. 파티 주최자가 배를 박살 내서 문제였지.
“아직 각성자의 역사가 짧은 탓에 저희 쪽도 자료가 많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길드장님 주최 연회에 더해 해외에서도 몇 차례 상급 각성자 모임이 열렸습니다. 관련 자료를 보내 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성현제에게 S급 각성자들 모임을 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고 물었더니 전문가를 소개해 주겠다고 했었다. 그게 이델 반테스인 모양이었다.
“오늘 만찬도 예행연습이라 생각하게.”
성현제가 나를 천천히 살펴보며 말했다.
“클로이 헌터와의 일은 잠시 잊고.”
“너무 태연해 보이면 의심 사지 않을까요.”
“간극이 큰 편이 더 그럴듯해 보일 수도 있지.”
그런가.
“내 앞에 서게. 거리를 적당히 띄워서, 나를 이끄는 듯이. 오늘은 특별히 한유진 소장님의 장식이 되어 드리지.”
“송구스럽네요. 제가 길 안내하는 시종쯤으로 비치지 않을까 싶은데요.”
“뒤를 신경 쓰지 마. 시선을 똑바르게, 정면만 바라보게. 시종은 주인의 움직임을 항시 살피는 법이라네. 반면에 가장 강한 자는 누구도 살필 필요가 없지.”
“손님도요?”
“그건 시종의 역할이라네. 문제를 찾아내고 확인하여 조용히 알려 드리는. 주인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거나, 저으면 그만이야.”
어느 나라의 황제냐. 성현제야 그런 거 신경 쓸 필요 없이 평소대로 행동해도 되겠지만 나는 아니니까. 거창하다 싶었지만 조언에 따르기로 했다.
“오늘은 단순한 저녁 식사이니 들어설 때만 조심하게. 자리에 앉은 뒤에는 편하게 식사하는 모습이 더 나을 것이니.”
노크 소리와 함께 손님들이 모두 착석하였다고 직원이 알려왔다. 성현제를 한번 돌아본 뒤 걸음을 옮겼다. 역시 이런 건 영 안 맞아.
만찬장으로 들어서자 일시에 시선이 모였다. 아무렇지 않게, 늘 있는 일이라는 듯이 가볍게 미소로 받아 주며 내 자리로 향했다. 뒤쪽의 성현제는 신경 쓰지 말자. 없는 셈 치자. 세성 길드장을 뒤에 붙이고 아무렇지 않아 하면 확실히 그럴듯하게 비칠 듯했다. 정말 좋은 장신구시네요.
클로이에게도 최대한 담담히 시선을 한 번만 보내고 모인 사람들에게 간단한 인사말을 건넨 후 자리에 앉았다. 좋아, 괜찮은 거 같았어.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