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470
468화 좋은 사람도 (4)
“일단…….”
마른침을 삼켰다. 등 뒤로 스치는 바람이 새삼스럽게 차갑다. 11월로 접어들었으니 밤이면 제법 쌀쌀한 시기긴 하였다. 내가 회귀했을 때가 여름의 초입이었는데.
“어디까지, 알고… 언제부터.”
문현아는 이곳에 없었다. 나타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 이유 없이 나를 두고 자리를 비울 사람이 아니니, 무언가 일이 생겨 발목을 잡혔다는 뜻일 것이다.
“…젠장, 재밌었습니까?”
문현아를 떼어 놓을 준비까지 했다는 것은, 결국은.
“적어도 오늘 만찬 전에 접촉했겠죠. 그런데 구경만 해? 내가 차이는 꼴 보려고?”
“일단은, 보지 못했다고 대답하겠네.”
성현제가 눈꼬리를 약간 늘어뜨리며 말했다.
“예정대로 옥상으로 향했으며 한유진 군의 모습을 확인한 뒤 문현아와 헤어져 이곳으로 내려왔지. 그러니 도중부터는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네. 혹시 사귀기로 한 것은 아니겠지.”
“…아닙니다.”
어차피 차일 예정이긴 했지만 정말로 시원하게 걷어차였다.
“그보다 일부러 야외로 나온 건데 눈을 뗐다고요. 그 정도로 클로이 씨가 믿음직스러웠습니까?”
거리가 꽤 된다고 해도 옥상에서는 여차하면 바로 클로이에게 공격을 가할 수 있었다. 하지만 태평하게 실내로 들어와 엘리베이터 타고 내려오는 건, 아니지. 성현제가 잘났다고 해도 투시력까지 가지진 못했다.
“한유진 군을 믿고 있었지.”
“입 딱 다문 주제에 지랄. 미안, 결아. 귀 좀 막자.”
손으로 바싹 솟은 귀를 감싸려 하자 결이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재차 잠깐만, 하고 속삭이자 어쩔 수 없다는 듯 뾰로통한 표정을 짓더니 자기 앞발로 귀 끝을 잡아내려 막는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잔뜩 당겨져 있던 속이 조금쯤 느슨해졌다.
“그쪽 뻔뻔한 줄은 알고 있었는데요. 아, 그래. 알고 있으면서도 의심 한번 안 해본 내가 얼간이지. 자료 더럽게 빨리 갖다 바치시던데 그때부터였습니까? 그날 바로 둘이 만났어요?”
그럴 수야 있지. 성현제가 클로이든 누구든 내게 보고하고 만날 이유는 없다. 지금도 날 속인 게 아니라 알리지 않았을 뿐이다. 아예 끝까지 입 다물 수도 있는 것을 이렇게 먼저 나서 줘서 고맙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섭섭하다 못해 화가 났다. 최근에는 성현제가 나한테 많이 배려해 주긴 했었지. 그래서인가. 당연히 쉽게 도와주고 뭐든 말해 주지 않을까 하는 착각이라도 들었던 모양이었다. 저 인간에게는 그럴 이유가 없는데도.
“뭐, 됐습니다.”
숨을 길게 내뱉었다.
“제가 성현제 씨를 너무 편하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찬물 뒤집어쓰니 정신이 좀 드네.”
성현제는 별말 없이 눈썹만 조금 들어 올렸다.
“성현제 씨가 필요에 의해 내린 결정이라면 이해는 할 수 있으니까 말해 주십시오.”
저쪽에서 초승달로부터 확실하게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했으면 넘어갈 만하다. 솔직히 나도 네 동생 되찾게 해주고 소중한 사람들도 다 무사할 수 있어, 하면 혹할 테니까.
“잡아 줄 줄 알았는데.”
“뭐요, 진짭니까? 그리고 이해만 한댔지 봐주겠단 소린 안 했습니다. 나한테 방해되면 댁이라고 넘어가 줄 줄 아나. 일단은 같은 편이니까 애지중지하는 거지 남의 편이면 제일 먼저 밟아 놓을 겁니다.”
저 인간 처리하기 전까진 편히 눈 감고 잠도 못 잘 거다. 정말로. 능력도 능력이지만 아는 것이 너무 많았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가슴 안쪽이 서늘하게 식었다.
S급이 두 명. 은혜는 발목에 있으며 빌어먹을 성현제는 그 사실도 알고 있었다. 라운지까지의 거리는 꽤 멀었지만 가볍게 폭탄 하나만 터뜨려도 바로 달려들 올 것이다. 제이슨도 클로이 쪽일까. 문현아를 제외한다면 셋, 넷.
공격 스킬 두 배 공유는 가능하다. 성현제도 그걸 알고 있을 것이다. 노아 씨 스킬은, 아직 쓸 수 없고. 효과가 장난 아니게 좋은 만큼 대기 시간이 길었다. 그걸 쓰면 사실상 우리 편 승리니까 그럴 법하지만.
“성현제 씨.”
역시 확실하게 잡기 위해서는. 마침 밤이었고 달도 떠 있었다.
“그때는 제가 그쪽을, 꽤 봐준 거였는데.”
“그렇게 말하면 설렐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러니 솔직하게 털어놓아 보세요. 무슨 속셈인 건지.”
“제안은 받았지.”
성현제가 인벤토리에서 편지 한 장을 꺼내들었다. 편지지도 봉투도 모두 던전 부산물인 모양이었다.
“만찬이 시작되기 전에. 정확히는 한유진 군이 내려오기 직전이었다네.”
곤두세워져 있던 신경이 약간 가라앉았다. 그때라면 내게 말하지 않은 것도 이해가 갔다. 시간도 부족하고 거기서 계획을 변경하기보단 일단 클로이에 대해 확인부터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할 만하니까. 내가 아무것도 모른 채 클로이를 떠보는 편이 더 정확하게 판단할 수도 있고.
“그럼 현아 씨는요.”
“밀러 헌터도 상황은 잘 모르고 있지. 다만 그녀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을 뿐이야.”
내키지 않으면 내 부탁도 받아 주지 않는 편이거든, 하고 성현제가 말했다. 길드장인데, 라기에는 같은 S급 헌터니까. 예림이도 해연 길드원이지만 유현이가 멋대로 명령하며 부려먹을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아무튼 에블린을 시켜서 문현아를 떼어 놓은 모양이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다는 건요. 상황도 모르는데.”
“사고가 나도 책임자는 길드장이라는 뜻이라네. 아쉽게도 크게 부딪치진 않은 모양이지만. 아니면 장소를 옮겼다거나?”
그… 러니까. 에블린이 문현아에게 맘 편히 시비 걸게 판 깔아 줬다 이건가? 현아 씨가 일방적으로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에블린 씨도 현아 씨를 꺼렸던 건가. 아쉬운 건 또 뭐야. 둘이 싸우라고 부채질하냐.
“현아 씨 발목을 어떻게 잡아 놓았냐가 아니라, 이유 말입니다.”
그 편지 보여 주려고 떼어 놓은 거라면 환영이다. 보여 줘. 하지만 성현제는 편지를 다시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
어느새 내 손목이 붙잡혔다. 눈으로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였다. 그대로 춤이라도 추듯 당겨지며 빙그르, 반 바퀴 돌아 내 위치가 난간에서 유리문 쪽으로 옮겨졌다. 요정용이 작게 으르렁거리고 성현제가 내 손목을 놓았다. 난간에 세워진 등의 불빛이 그의 뒤를 비추어, 얼굴 위로 짙게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한유진 군에게만 알려 주기 위해서지.”
“…갈라서자고요? 떠날 거라고요?”
“너무 부정적으로만 생각하는군.”
“그럼 태도를 똑바로 하시든가. 한마디 찔러 주지도 않고 갑자기 이렇게 나오면 나더러 어쩌라고. 나한테 뭘 원하는지 정확하게, 분명하게 말하십시오.”
“이기적으로 굴어.”
성현제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예?”
“아니면 머릿속을 깨끗하게 지워 버리는 건 어떻겠나.”
“…무슨 개소립니까.”
우리로부터 약간 떨어져 서 있던 클로이가 눈살을 찌푸렸다. 송 실장님과 비슷한 성격이라면, 싫은 사람이라고 해도 F급이 S급에게 위협당하는 걸 눈감아 주지 않겠지.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성현제로부터 보호해 줄지도 모른다.
“그런 충동도 있다는 거라네. 중국에서 돌아오고 시간이 꽤 흘렀지.”
성현제의 입술 양끝이 올라갔다. 그린 듯한 미소였다.
“그동안 기다리고 있었다고 해야 할까. 크게 소란이 일기를.”
“진짜 못 알아듣겠습니다만.”
“내가 먼저 말해서야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까.”
“…뭘 원하는 건지 정말로 모르겠는데, 내가 뭔가 하기를 기다린다고요?”
“그래.”
내려다봐오는 눈길이 얼핏 서늘하게 느껴졌다. 동시에 나한테 뭘 바라는 거냐고 멱살이라도 잡고 싶어졌다. 시발 자기가 무슨 고대적 신이라도 되냐. 두리뭉실하게 몇 마디 던져 놓고 지켜보다가 자기가 원하는 길로 가면 칭찬이라도 해주고?
“내가 왜 댁이 바라는 대로 해야 하는 건데.”
“나만이 아니야.”
이젠 또 환장하게 상냥한 목소리였다.
“많은 사람이 바라는 것이지.”
“…한 대 패고 싶네, 진짜.”
“그것을 위해서라면 악당 역할을 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네.”
휙 뒤바뀌어 이제는 장난스럽게 성현제가 말했다.
“재미있기도 할 테고.”
“야 이 미친놈아.”
좀 변했나 싶더니 그대로잖아. 속도 모르겠고 종잡을 수도 없고 어디로 튈지 짐작도 안 가고. 그 전에 내가 어쩌길 바라는 건데, 정말로. 눈에 거슬리는 행동이라도 했나? 부족한 점이야 많긴 많겠지만, 열심히 했잖아. 그 고생을 했는데도 부족하다고 하면, 시발 그냥 내 배를 째라.
“대화를 이해할 수는 없지만 악행을 가볍게 저지르진 말아 주십시오. 특히 세성 길드장님의 위치라면 너무 피해가 큽니다.”
그때 클로이가 진지한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저런 말까지 하다니. 진짜 박하율 쪽 사람이 아닌 건가?
“혹시 말입니다, 클로이 씨. 제가 중국으로 납치된 것에 대해 아시는 바가 있습니까?”
두리뭉실하게 던져 보았다. 이런 식으로 묻는다고 해서 털어놓을 리는 없…….
“그 일에 대해서는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네?”
“이건 또 의외로군.”
성현제도 조금 놀라며 클로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클로이는 애초에 감출 생각도 없었다는 듯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공적으로는 세성 길드장님에게 편지를 전해드리기 위해 온 것이지만, 사적으로는 한유진 소장님의 상태를 살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어, 저 싫어하신다면서요?”
“개인적인 감정을 떠나 한유진 소장님께서는 피해자였으니까요.”
“그… 납치범들과 관련이 있다고 자백하시는 겁니까? 녹음해도 돼요?”
“저는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막지도 않았습니다.”
알면서도 막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인 모양이었다.
“가장 피해가 적은 해결책이라는 사실에는 동의도 하였습니다. 한유진 소장님께서 납치만 되시면 군부의 위험요소를 제거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조금 더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먼저 연락해 온 것은 황림이었습니다.”
…뭐? 아니, 조금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 인간은 진짜로 군부 편이 아니었구나.
“군부가 도깨비 왕을 완벽하게 다룰 수 있게 된다면 무림맹과의 대치 상태가 완전히 무너질 것이라 전해 왔습니다. 그것까지는 곤란하다더군요. 또한 장거리 포탈은 타국 침략으로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생각해 보면 섬뜩하긴 했다. 장거리 포탈을 통해 언데드 헌터들을 풀어놓으면……. 심지어 중국에는 알려지지 않은 상급 헌터도 많으니까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상급 언데드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절 납치해 한국의 헌터들을 끌어들인 겁니까? 그냥 협조 요청을 하는 방법도 있었을 텐데요.”
“그건 국가 간의 분쟁이 됩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내가 납치되었으니까 한국 헌터들이 중국에 가서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난리를 쳐도 별말이 안 나온 거였지.
“또한 한유진 소장님이 납치되어야만 자연스럽게 노산도로 향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한국 헌터들을 잡자는 계획도 실현 가능했을 거고요.”
“성공은 했습니다만, 만약 실패했다면 저희만 희생당하는 거 아니었습니까?”
“예상 이상으로 한국의 헌터들이 강했습니다. 원래라면 황림과 그의 파벌 일부가 협조할 예정이었습니다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더군요.”
…그래서 황림이 그때 초화운만 챙기고 떠나 버린 건가. 일단 도깨비들 탈주하고 윤윤은 폭주시켰으니 그걸로 자기 볼일은 끝난 거고?
“이렇게 다 말해 주셔도 되는 겁니까.”
“한유진 소장님의 상태가 괜찮다면 출국 전에 말씀드릴 예정이었습니다. 황림으로부터 편지도 있습니다만, 받으실 수 있겠습니까?”
클로이가 내 표정을 주의 깊게 살피며 말했다. 한숨을 약하게 내쉬며 손을 내밀었다. 솔직히 클로이 씨에게 싫다는 소리 들은 게 더 충격적입니다만. 황림이야 그냥 지나간 추억거리 정도지. 클로이가 인벤토리에서 편지를 내밀어 내게 건넸다. 무슨 헛소리를 써 놓았을지 궁금했지만, 일단은 인벤토리에 넣었다.
“결론은 저를 납치한 건 선의에서였다, 이겁니까?”
“당연히 잘못된 일입니다.”
클로이가 딱 잘라 말했다. 그럼 혹시.
“그, 아직 이름도 모르는 박하율의 누님 쪽과는 갈라서셨다거나, 그런 겁니까?”
“아닙니다.”
…뭐야, 그게.
“이 이상의 자세한 이야기는 해드릴 수 없습니다. 만약 보복을 바라신다면 이해합니다. 다만 반항하겠습니다.”
실례가 많았다며 내게 고개를 숙이고 이번에는 성현제를 바라보았다.
“출국 전까지 답장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곤 클로이는 돌아서서 유리문을 열고 나갔다. 시스템 메시지가 눈앞에 떠올랐을 때보다 더욱 기분이 이상해졌다. 방식은 나쁘지만 좋은 의도였다, 그런 소리가 더 가슴을 긁어 놓았다. 차라리 그냥 나쁜 사람인 게 낫지.
“한마디 거들자면.”
성현제가 나를 향해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좋은 사람도 언제든지 적이 될 수 있다네.”
“…알아요. 저 욕하던 사람들 중에서도 좋은 사람, 착한 사람 많았겠죠.”
“그리고 한유진 군을 해치려는 사람은 그 속이 어떻든 적일 뿐이지.”
방금 악당 노릇도 하겠다고 한 주제에 뭐래. 그럼 성현제 또한 그럴 수 있는 거냐는 말은 그냥 속으로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