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481
479화 이번에는 납치범 (2)
파르륵, 어느새 유현이의 어깨 위로 올라온 이린이 성난 짐승이 갈기털을 세우듯 불을 일으켰다. 유현이가 내 옆으로 바싹 다가붙고 예림이가 크게 숨을 내뱉었다.
“…갑갑해요.”
“그러게. 목이 콱 막히는데.”
문현아도 예림이의 말에 동의했다.
“전에는, 이렇지 않았어요.”
대장간 지하실에 와 본 적 있는 노아가 말했다. S급 헌터들의 불쾌감 어린 시선들 속에서도 명우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명우가 내게 미안해하며 말했다.
“많이 거슬려? 아직 조절이 잘 안 되어서, 미안.”
“…조절?”
“예전에는 말이 주인이지 이곳을 단순히 소유한 것에 지나지 않았거든.”
그 말을 듣자 무해의 왕이 준 서랍이 떠올랐다.
“혹시 그, 공간 이해도와 장악력이 올라간 거야?”
내 말에 명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유진이 너도 알고 있어?”
“어, 조금. 그게 완벽해지면 공간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든가, 그러더라고.”
“맞아. 나는 그 정도까지 가려면 한참 멀었지만. 이런 공간은 말하자면 인조적인 작은 세계라고 할 수 있어. 물론 진짜 세계에 비하면 훨씬 조잡하고 한계도 있지만 말이야. 외부와 차단된 인공적인 생태계를 만들어도 오래 못 버틴다고 하잖아. 유지에는 간섭이 필요해.”
“무해의 왕이 준 서랍도 마나를 보충해 줘야 한다더라고.”
“그 마나가 세계를 만들고 유지하는 근원의 힘이니까. 결국 근원 없이는 이런 인공 세계를 만드는 것도, 유지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뜻이지. 진짜 세계는 근원만이 만들어 낼 수 있다, 라는 거야.”
무해의 왕도 그렇게 말했었다. 대장간이나 서랍처럼 유사 미니 세계를 만들 수는 있어도 결국 근원이 그 바탕이 되어야만 했다.
“그렇다 해도 이곳을 완벽하게 다루게 된다는 것은.”
“…신이랑 비슷한 걸까?”
신입과 무해의 왕을 떠올리며 말했다. 주위 풍경을 바꾸기도 하고 온갖 물건을 바로바로 만들어 내기도 하던 모습을. 단순한 환각이 아닌, 실제 하는 것들이 둘의 의지대로 나타나고 사라지곤 했었다.
“거창하긴 하지만 대충은? 조그만 세계에 한해서만 전지전능한 거지만. 나는 아직 초입 정도지만, 진짜 주인으로서의 발판은 다진 상태야. 그래서 마나에 예민한 사람들은 불쾌감을 느끼게 되는 거지.”
명우가 나를, 내 주위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 지배하의 영역, 이라는 표식을 대놓고 드러내고 있는 거니까. 밖의 세계는 공유지지만 여기는 아니야. 단순히 남의 집에 들어온 정도가 아니라 모든 것이, 숨 쉬는 공기조차 내 소유하에 있으니 불편할 수밖에. 샅샅이 감시당하는 느낌도 들 테고.”
그래서 갑갑해진 건가. 좀 더 능숙해지면 조절 가능할 거라며 명우가 재차 양해를 구했다. 그리곤 내게 앉으라며 손짓하자, 의자가 하나가 불쑥 나타났다.
“…만든 거야?”
“아니. 즉석에서 창조까진 아직 멀었어. 단순히 공간이동 시킨 거야.”
“공간이동은 인간은 하기 힘들다고 그랬는데.”
“이 공간 자체가 내 거니까. 모형 집의 가구 옮기는 거라고 생각하면 돼.”
재차 앉으라고 권하면서 명우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의자를 내어주었다. 나는 등받이에 팔걸이도 있는 안락의자였고 예림이와 노아도 심플하지만 평범한 의자였다. 하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제각각이었다. 큼직한 상자, 나뭇등걸, 바위 같은 앉을 수는 있는데 의자와는 거리가 먼 것들이었다. 의자가 세 개밖에 없었나? 더 있었던 거 같은데.
내가 제일 편한 곳에 앉자니 미안해져 머뭇거리자 유현이가 나를 앉히곤 옆에 지키듯 섰다. 내 어깨 위로 건너온 린이가 작게 속삭거렸다.
– 형, 린이 여기 싫어.
“많이 불편해?”
– 다른 정령이 있잖아요. 나이도 엄청 많은 거 같아서 기분 나빠. 밖에선 린이가 처음인데!
이스무아르의 영역이라서도 있지만 자기가 더 어린 게 싫은 모양이었다. 파르르 몸을 떨면서 꼬리를 연신 탁탁 내리친다.
“생각보다 더 흥미롭군.”
성현제가 바위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사용자에 따라 등급이 올라가는 수색자의 사슬이 있어서인지 다른 헌터들에 비해 명우에게 크게 관심이 없던 그였다. 장비가 필요한 휘하 헌터들이 있으니 대우야 잘해 주긴 했지만. 그런데 지금은 꽤 흥미를 담아 명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또 못된 버릇 꺼내려고.
“제 주위 사람들은 건드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어린애 한정 아니었나. 유명우 헌터는 한유진 군과 동갑일 텐데.”
“애들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거고요, 사육소와 빌딩 쪽 사람들도 안 돼요. 뭘 자꾸 이 사람 저 사람 찔러보려 드는 겁니까?”
좋게 끝나면 몰라,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았다면서. 게다가 명우는 바쁘다고. 안 그래도 떡고물 노리고서 귀찮게 구는 사람들이 한가득인데 대왕 벌레가 붙게 놔둘 순 없었다. 괜한 짓 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며 성현제를 노려보았다. 성현제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유명우 헌터와는 마음이 잘 맞을 것 같았는데 아쉽군.”
“맞긴 뭐가 잘 맞아요. 완전 다른데요.”
둘이 비슷한 점이라곤 개미 눈곱만큼도 없다.
“다시 한번 말해두지만요, 이 사람 저 사람 가지고 노는 짓거리 뭐 막지는 않겠습니다. 애들 말고 비각성자 말고 하급도 말고 상급 헌터라면요.”
그쯤 되면 성현제 때문에 인생 말아먹을 정도는 아닐 테니까. 강제적인 것도 아니고.
“하지만 제 주위는 안 됩니다. 그런 꼴 못 봐요. 절대 못 두고 봐서 성현제 씨 눈을 콱 찔러 버릴 테니까.”
“보통은 자기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이라고 하지 않던가.”
“멀쩡한 가해자 눈알 두고 뭐 하러 제 눈을 겁니까? 속담이 잘못된 거예요. 내 눈이 아니라 너 새끼 눈에 흙 들어가기 전이라고 해야 하는 건데.”
정 안 되면 네놈 파묻어 버리겠다는 게 맞지 않냐고. 아무튼 명우에게 조심하라고 말해둬야겠다.
“그리고 성현제 씨는 거기 그렇게 버티고 앉으면 어떡합니까. 아직은 관여하지 않은 척하시라니까요.”
클로이가 끝까지 비협조적으로 나오고 박하율 쪽에서도 협상에 응하지 않을 때를 대비해 성현제는 한 발 물러나 있는 편이 나았다. 그래서 이왕이면 오지 마시고 꼭 끼어드시겠다면 또 헬기 끌고 오지 마시고요 차도 일반 차량 끌고 오세요, 했건만.
“나중에 세성 길드장님께서 클로이 헌터를 구출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말입니다.”
“자연스럽게 연기할 자신이 없군.”
“구하러 왔습니다, 공주님! 또 하시든가요.”
“진짜 한 적 있어요?”
내 옆자리에 앉아 있던 예림이가 물어왔다. 아니, 그게.
“리에트가 한 소장님 납치해서 덮치려고 했을 때 말이지? 드레스도 입었어?”
“그럴 리가 없잖아요! 애초에 누가 던전 갈 때 드레스를 가지고 가요!”
장비 중에서도 드레스 같은 건 없다. 싸우다 옷자락 밟고 넘어질 일 있나. 어휴, 내 입이 방정이지 뭐 하러 그때 일을 꺼내서는. 세상에서 제일 뻔뻔할 거 같은 사람이 연기할 자신 없다는 헛소리를 한 탓이잖아.
“세성 길드장 밖으로 내보낼까?”
“그럼 저도 부탁드리겠습니다.”
명우가 말하자마자 송 실장님이 손을 들어 올렸다.
“혼자 밖에 두기에는 잡혀 있는 헌터들의 안전이 불안합니다.”
“정보를 얻기 위해 일부러 살해하진 않겠다고 약속했다네.”
성현제가 상체를 약간 굽혀 무릎 위에 팔을 얹으며 말했다. 약속했다는 건 민지수 씨를 말하는 것이겠지. 기억을 읽으면 어떻게 사망했는지도 알 수 있을 테니까. 계약서를 작성했을지도 모르고. 성현제의 말에 송 실장님이 미간을 좁혔다.
“예전에 네 명 중 한 명을…….”
자세히 꺼내들 만한 이야기가 아닌지 도중에 목소리가 끊겼지만, 그 내용은 짐작이 갔다. 성현제가 직접 죽이지만 않으면 된다. 밖의 헌터들은 마침 세 명이니까 그들의 손으로 한 명을 살해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교묘하게. 정확한 방법은 몰라도 성현제라면 분명 깔끔하게 처리했겠지. 민지수 씨가 거슬려하지 않을 정도로.
…솔직히 시체로부터 정보를 빼내는 게 가장 쉬운 방법이긴 했다. 그래도.
“두 분 다 여기 계세요. 안 보이도록 가림막이라도 치면 되겠죠.”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얇은 판이 성현제와 송태원 앞에 나타났다. 어떻게 한 건지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성현제가 판을 두드려 보는지 가볍게 흔들렸지만 그 안의 움직임은 역시나 알 수 없었다.
“너도 안 느껴져?”
“응, 전혀.”
혹시나 싶어 유현이에게 물어보자 기척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대답해왔다.
“목소리는 들리는군.”
“판 너머의 존재에 대해 인식만 흐리게 만드는 겁니다.”
“밖에서도 쓸 수 있는 거야?”
“아니. 아이템 효과가 아니라 내가 공간을 약간 비틀어 놓은 거야. 저 판은 가림막 겸 경계선이고. 아직 서툴러서 눈에 보이게 선을 그어 놓아야 하거든.”
정말 별걸 다 할 수 있구나. 나도 명우에게 배우면 서랍에 마나 보충 정도는 해줄 수 있을까. 그때 성현제가 있는 판 너머에서 목걸이 하나가 홱 날아왔다. 정확히 자신에게 날아든 그것을 예림이가 받아 챘다.
“꼬마 아가씨에게 빌려주지.”
“고마워요! 근데 세성 아저씨도 통역 아이템 가지고 다녔었어요?”
“전 세계 모든 언어에 능숙한 것은 아니라.”
하긴 제아무리 성현제라 하더라도 오지의 토속어 같은 것까진 할 줄 모를 것이다.
“현아 씨는 어쩌실래요?”
“음, 혹시 모르니 나도 숨어 있을까? 일단은 형님보다 클로이와 더 오래 안 사이니까 성현제 대신 내가 구출해 주는 척할 수도 있고.”
“네. 그렇게 하죠.”
문현아 또한 판 너머로 가려졌다. 판이 막 나타났을 때는 조금 이상해 보였지만 잠깐 시간이 지나자 마치 벽처럼 느껴졌다. 이것도 명우의 능력인 걸까.
‘…그러고 보니 나만 남았네.’
클로이를 설득할 사람이. 예림이는 물론이고 유현이나 노아 씨에게 시킬 수도 없었다. 괜찮을까. 숨을 삼키며 어깨를 펴고 다리를 꼬았다.
“깨워 줘. 근데 어떻게 기절시킨 거야?”
S급인데도 한참을 꼼짝 않고 정신을 잃은 채인 게 신기했다. S급 헌터는 목숨이 위험할 정도로 심각한 부상이 아니면 기절도 잘 안 하는데. …유현이만 봐도 차분하기까지 했었지.
“마력 흐름을 뒤틀어 놓았어.”
“그게 돼?”
“이스무아르의 마력이 훨씬 강한 데다가 여긴 내 영역이니까. 밖에서는 못 하지. 그래서 잡는 거야 금방이었지만 의식을 잃게 하는 데 더 오래 걸렸어.”
큰 부상을 입히면 쉬웠겠지만 내가 신경 쓰였다고 했다. 아무튼 상냥하다니까. 명우가 쓰러져 있는 클로이의 뒷목 부분을 매만졌다. 그러자 이내 감겨 있던 눈이 번쩍 뜨였다.
“…설마 대장장이를 이용할 줄은 몰랐습니다.”
클로이가 차분하게 말하곤 묶여 있는 그대로 몸을 일으켜 앉았다. 조금 서늘한 시선이 나를 향했다.
“스탯이 낮은 친구를 혼자 내보내는 건 위험하지 않습니까.”
“제가 자청한 겁니다.”
명우가 클로이의 옆쪽으로 천천히 돌아서 내 쪽으로 다가왔다.
“유진이는 당연히 제 걱정을 했죠. 하지만 구경만 하며 앉아 있는 신세는 지긋지긋했던 터라.”
명우 너 중국 던전에까지 오지 않았었냐. 덕분에 도움 많이 받았다만.
“의외로 수가 적군요. 더 많을 줄 알았는데.”
클로이가 눈만 움직여 주위를 살피며 말했다. 역시 숨겨진 세 사람은 알아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우리 일이니까요.”
의자에서 일어나 있던 노아가 차갑게 말했다. 노아 씨의 말대로 엄밀하게는 사육소의 일이다. 유현이와 예림이는 해연 소속이지만 그 이전에 내 가족이고.
“목적이 무엇이든 당신들은 우리로부터 유진 씨를 빼앗아 갔습니다.”
“맞아요! 아저씨 안 그래도 몸도 약한데.”
“같은 무리라는 것만으로도 살려 둘 이유가 없어.”
방관자든 뭐든 상관없다. 이런 상황이 아니라면 당장에 검을 꺼내들었을 듯 싸늘하게 유현이가 말했다. 다들 내가 사라졌을 때의 분노를 되새기는 듯 흉흉한 분위기였다.
그 속에서도 클로이는 나만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생각보다 더 많이 사랑받고 계시는군요.”
“고맙게도요.”
미소를 지었다. 클로이로부터 싫다는 소리를 들은 게 꽤 아팠었는데, 지금은 의외로 아무렇지 않게 느껴졌다. 계속 아파하기에는 내 소중한 사람들이 이렇게나 든든히 버텨 주고 있는걸.
“혹시 제게 협조해 주실 생각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당연한 대답이었다.
“저는 어디까지나 피해자입니다. 그러니 보상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말씀하십시오.”
“우선은 박하율. 그의 스킬을 해제해 주십시오. 이건 보상이 아닌 당연한 요구입니다. 보상으로는, 채터박스의 초대장 전부. 그 정도면 되겠군요.”
“…채터박스라면.”
“초대장을 준 초월자입니다. 제 쪽의 정보다 그쪽보다 살짝 더 많거든요. 그렇잖아도 초대장을 어떻게 입수할까 고민 중이었답니다.”
성현제로부터 알아낸 것처럼 보이지 않게,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하였다. 공중에 치켜들린 발끝을 가볍게 까닥였다.
“아시다시피 우리 쪽에는 연락이 오질 않았어요. 채터박스와는 약간의 악연이 있었다 말해 두죠. 치사하게 처음 제안을 거절했더니 두 번째는 없나 보더라고요.”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다. 채터박스를 끌어들인 무해의 왕이 내게 제안해 온 건 사실이니까.
“죄송하지만 제가 답해 드릴 수는 없습니다.”
클로이가 담담하게 말했다.
“박하율의 스킬에 대해서는 정말로 유감스럽습니다만, 한 소장님의 세력이 예상보다 더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더욱 물러나기 힘들 듯합니다.”
“저를 계속 이용해먹고 싶다는 말씀으로 들리는데요. 누가 악당인지 모르겠군.”
내 표정이 절로 싸늘해졌다. 결국 S급이란, 라고 생각하자 절로 박하율의 말이 떠올랐다. 내 주위의 S급 헌터들은 같이 이리저리 구른 덕에 의심이 많이 옅어졌지. 정신계 스킬이란 상황에 따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니까. 유현이야 애초에 경계하지도 않았고.
하지만 클로이는 다르다. 오히려 처음부터 적에 가까웠다. 덕분에 그녀가 확실히 껄끄러워졌다.
“그럼 저도 악당 역할 좀 해볼까요. 이미 납치범이긴 하지만, 더 확실하게.”
클로이를 향해 웃어 보였다.
“클로이 씨가 사라지고 나서 동료분들이 구하러 왔더라고요. 물론 붙잡혀 있습니다.”
내 말에 그녀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아직은 무사합니다. 하지만 제 납치범 일당을 멀쩡하게 내버려 둘 이유는, 솔직히 없지요.”
침착하던 시선이 서늘하게 식어간다. 저도 이러고 싶진 않았습니다만, 내 사람들이 더 중요한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