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509
507화 우선순위 (1)
“옷부터 갈아입자. 이러다 감기 걸려.”
서랍 속 응접실에서 좀 말리긴 했지만 아직 축축하게 젖은 내 꼴을 보고 유현이가 말했다. 결이와 내게 건너온 린이도 동의하며 꼬리를 까닥였다. 우리 방이 있는 위층으로 먼저 올라가자는 걸 거절했다.
“괜찮아. 그보다─ 주위에 듣는 사람 없지? 성현제가 더 급해.”
기척이 느껴지면 알려 달라고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이었다.
“지금 상태가 좀 안 좋거든.”
인형술사의 주 목표는 송태원이었다. 하지만 성현제도 노리고는 있다고 하였다. 심지어 꺼리는 기색이라고도 했으니 방심할 수는 없었다.
‘황림 외의 연락하는 씨앗이 더 있을지도 모르고.’
독화살 개구리야 말도 안 통하겠지만 하급 각성자라면 자잘한 심부름 정도는 시킬 수 있다. 그리고 아까의 성현제는 하급 각성자도 들고 튈 수 있을 정도였다. 기절도 했으니까. 일단은 내게 호의적인 초월자라고 해도, 초월자는 초월자다. 우리와는 생각의 기틀 자체가 다를 수도 있었다. 신입만 해도 처음엔 정떨어지는 소리 종종 했었으니 조심해야지.
“클로이를 통해 박하율 쪽을 좀 더 파헤쳐 보고 싶었는데, 일단 보류해야겠어. 성현제가 사라져서야 죽도 밥도 안 되니까. 박하율 스킬은 풀어지기도 했고.”
“박하율이 왔었어?”
“아니, 황림이. 그 복제 스킬로 대신 해제해 줬어. 박하율에게 의뢰를 받았었대.”
황림 이야기가 나오자 유현이가 또 영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놈이 그렇게나 마음에 안 들어? 초화운에 비하면 별짓 안 했는데.”
“초화운과 달리 황림은 죽일 생각 안 하잖아.”
“그야… 그 정도로 나쁜 놈은 아니긴 하고.”
초화운은 어차피 죽일 놈이니 싫어할 필요도 없다는 건가.
“그리고 황림은 이젠 좀 건드리기 곤란해져서.”
초월자를 뒤에 업고 있다. 조금 전에도 인형술사가 데리고 가기도 했고. 아니었으면, 좀 잔인하긴 해도 힘줄을 자른다거나 했었겠지. SS급 구속구 없이 서랍 밖으로 데리고 나오려면 흙 때문에라도 잠시 무력화시켜야 하니까. 아예 싹둑 자르는 건 붙이기 힘들고.
“나한테 직접적으로 해 입힌 건 없으니 너무 그러지 마.”
“담배.”
“…안 피워.”
게다가 내 나이가 삼십, 아니 스물다섯인데. 물론 애들 있는데 담배 같은 거 피우면 안 되지만. 진짜 끊어야지.
“그럼 줘.”
“알았어, 알았어. 너한테 말고, 다른 사람에게 넘길게.”
동생에게 담배 건네는 건 좀 그랬다.
“…한유진 씨.”
묵묵히 걸음을 옮기던 송태원이 우뚝 멈추며 말했다.
“예?”
“잠시 손 좀 주시겠습니까.”
무슨 일인가 싶어 손을 내밀었다. 송태원이 내 손을 잡고 자세히 살펴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역시 한유진 씨의 손과 비슷합니다.”
“뭐가… 아.”
인형술사의 손. 어쩐지 눈에 익다 싶었다. 내 손과 비슷해서 그랬구나.
“약간 더 크고 흰 편이었지만 형태는 거의 같습니다.”
“무슨 소립니까. 형의 손과 비슷하다니요.”
“황림이 초월자와 연관 있는 모양이더라고. 서랍 속에 들어갔을 때 그 초월자가 손만 내밀어 황림을 잡아갔어.”
유현이에게 있었던 일을 간략히 설명해 주었다.
“모습이야 쉽게 바꿀 수 있는 모양이니까. 전엔 유현이 네 모습으로 나타나더니 이번엔 내 모습인가 보지 뭐. 혹시 내가 수상쩍게 굴거든 조심해.”
“형을 못 알아볼 리 없잖아. 말투나 움직임, 눈빛 등을 완벽히 흉내 내긴 힘들걸.”
“하긴 회귀한 직후에도 내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었지.”
“…그때는, 분명 형은 맞는데, 낯선 부분도 있었으니까.”
5년 동안 새롭게 밴 습관들이 툭툭 튀어나오곤 했을 것이다. 아무튼 내 모습을 하고 있다니, 좀 껄끄럽구만. 이상한 짓 하는 건 아니겠지? 내 손으로 황림 놈 머리 쳤다고 생각하니 조금 기분 좋아지긴 했다.
“성현제 씨, 들어갑니다.”
노크하고 문을 열었다. 여전히 잠그진 않은 모양이었다. 상태가 안 좋으면 문이라도 잠그고 있어야지. 중급 헌터만 되어도 소용없긴 하겠지만, 그래도.
“아무래도 불안해서요. 한동안 혼자 있지 마시고요, 믿을 만한 사람… 음.”
송 실장님이 최고긴 한데 문제는 그놈의 흙이었다. 그래도 성현제는 에블린 씨라도 있지만… 비록 거침없이 활을 쏘긴 했지만……. 성현제가 약해졌다는 거 알면 보호보다는 활부터 쏠 거 같은 예감이 드는데.
“안전가옥 같은 거 더 있죠?”
거실로 들어서며 말했다. 소파에 앉아 있던 성현제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잠깐 사이 또 무슨 일일까.”
“잠깐 사이 여러 가지 일이 있었죠. 송 실장님도 피해 있는 게 좋을 거 같은데─”
“그럴 필요 없습니다.”
송태원이 말했다. 그리곤 나를 지나쳐 성현제 쪽으로 걸어가다가, 나와 성현제 중간 지점 즈음에 멈춰 섰다.
“한유진 씨는 여기까지 하십시오.”
“…네?”
“저는.”
그가 나를 향해 돌아섰다.
“한유진 씨를 믿고 있습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송태원에게 다가가려는 나를 유현이가 붙잡았다. 등 뒤에서 끌어안듯이 단단하게. 뭐야, 둘이 나 모르게 짜기라도 했나? 당황하는 내게 송태원이 이어 말했다.
“초월자들의 간섭만 사라진다면 이 세계를 구해낼 거라고요.”
“그건, 송 실장님. 믿어 주시는 건 감사하지만요!”
“처음에는 불안하게만 느껴졌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한유진 씨는 저조차도 지키려고 하는, 사람이니까요.”
“왜 지금, 그런 말을 하세요.”
꼭 작별인사라도 하는 것처럼.
“사람의 일은 사람에게.”
송태원이 쓰게, 하지만 분명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니 한유진 씨.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뭘 그동안─! 유현아, 놓아줘!”
“괜찮아, 형.”
“안 괜찮아! 송 실장님, 대체 어쩌시려고요!”
소리쳐 물으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짐작이 갔다. 그래서 더더욱 속이 타고 목이 말랐다. 젠장, 역시 송 실장님 계신 곳에서 말해서는 안 되었는데! 그래도, 그래도.
“기다리세요, 너무 급하게 결정하지 마세요! 송 실장님은 아무 잘못도 없고, 그냥, 송 실장님도 그냥 사람인데. 그냥 평범하게 살아도 된다고요!”
“그렇게 말씀하시기에, 더욱 안 됩니다.”
나를 담고 있는 검은 눈이, 그 어느 때보다 차분하고 또 곱게 느껴졌다.
“그 말이 달게 느껴지기 시작했기에 더 늦출 수 없습니다. 저도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당연하죠. 당연하겠죠.”
“제가 좋아하는 것이, 즐거운 일이 생기게 되면 더욱 저를 위해 욕심을 내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사람인걸요.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평범한 사람이잖아요. 누구나 다 그래요.”
“그렇기에 안 됩니다.”
“젠장, 왜 안 돼요! 그냥 살라니까요?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 보고! 그때 가서 안 되겠다 싶으면 다시 고민해 봐요. 같이 머리 맞대 줄 테니까, 얼마든지!”
유현아, 좀 놔 봐봐! 버둥거려 보았지만 내 몸을 감싼 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송태원이 돌아섰다. 그가 성현제를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몸을 낮추었다. 무릎이 바닥에 닿고, 이제는 성현제가 송태원을 내려다보았다.
“죄송합니다.”
나직한 사과에 이어, 송태원이 말했다.
“함께 가주십시오.”
“데이트 신청은 아닐 것이고.”
금안이 가늘게 휘어졌다.
“인형술사라는 초월자가 저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정확한 목적은 모르지만 한유진 씨에게 호의를 품고 있으며, 제 목숨을 노리지는 않는 자입니다.”
…만약 단순히 송태원을 죽이고자 했다면, 황림이 쉽게 목을 잘랐을 것이다.
“저와 세성 길드장, 당신을 한유진 씨의 옆에서 치워내려는 듯싶었습니다.”
“한유진을 보호하기 위해서, 인가.”
“우리가 떠난다면, 우리와 엮여 있는 초월자들 또한 이 세계에 관심을 두지 않을 겁니다.”
“이미 늦었어요!”
뭘 다 짊어지고 떠나려고!
“채터박스가 노리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접니다!”
“예. 그리고 한유진 씨는 그를 막을 수 없습니다. 초월자를 물리치는 건 초월자만이 가능합니다.”
“그건, 하지만… 이미 둘이나 잡았다고요!”
물론, 여러 가지로 운이 따라 준 덕분이었다. 순수한 힘으로 맞붙는다면 이겨낼 방법이 없었다.
“저를 쓸 수 있을 겁니다.”
“송 실장님!”
“채터박스와 초승달. 이 둘만 떠난다면 괜찮아질 겁니다.”
“그러니 나도 데리고 가려는 건가.”
성현제가 가볍게 미소하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당신을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두고 가기엔 너무 위험합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말인가.”
“세성 길드장님, 또다시 상태가 나빠졌다면 이제 약속을 지키십시오.”
유현이의 목소리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약속이라니.
“무슨 말이야, 무슨 약속.”
“또다시 형의 도움을 받진 않겠다는 약속. 나와 박예림에게 했어.”
“…뭐?”
“형에게 부담되는 일이었잖아. 그때.”
성현제를 덜어냈던 걸 말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래도. 성현제를 바라보는 유현이의 시선이 무심하게 서늘했다.
“너무 신경 쓰지 마, 형. 어차피 오래 버티진 못할 거였어. 형도 알고는 있잖아.”
“유현아!”
“그래서 나도 거슬리는 걸 눈감아 준 거였고. 머잖아 사라질 것이니까. 다만 형이 세성 길드장을 생각보다 많이 좋아하는 듯해서.”
유현이가 작게 한숨을 내뱉으며 말을 이었다.
“솔직하게는, 형. 신입이나 어르신을 통해 초승달에게 성현제를 넘기는 편이 가장 깔끔할 거야.”
“그건 안 돼!”
“그 대가로 초승달에게 채터박스를 막아 달라 부탁하고. 가능성은 충분히 있어. 초승달도 세계들을 구하려 하는 초월자니까. 성현제를 원하는 이유도 근원을 없애기 위해서라고 했잖아?”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유현이의 말이 맞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알고는 있지만, 어떻게 그래.
“송태원 씨의 청을 거절하고 싶진 않지만.”
성현제가 느긋한 목소리를 흘려내며 나를 향해 시선을 두었다.
“아직 선약이 있어서.”
“그, 렇죠. 수족관도 안 갔고. 그리고 또, 아무튼 더 있을 걸요.”
“친애하는 나의─”
금빛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마치 무언가 눈부신 것을 마주한 듯이. 그리고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내 파트너께서, 결정을 내려 주시게.”
“…예?”
“우선순위를 생각하여. 나 또한 도련님의 의견에는 동의한다네. 가장 깔끔한 방법이지.”
성현제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남의 일처럼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초승달이 거래에 응할 확률은 높아. 그녀는 나를 억지로 이 세계에서 꺼낼 방법이 없는 듯하고, 송태원과 나를 함께 두는 건 불안하겠지.”
초승달이 성현제를 빼낸 것은, 아마도 해당 세계가 멸망하기 직전 즈음이지 싶었다. 세계를 보호하는 힘이 약해졌을 때. 그때가 아니라면 디아르마나 무해의 왕이 제안해 왔던 것처럼 상대와 계약을 통해서만 빼낼 수 있는 듯했다.
“그러니 나를 대가로 제안한다면 채터박스를 막아 주려 할 거라네.”
“하지만, 성현제 씨는요!”
“죽지는 않겠지. 또 다른 세상에서, 지루하게 살아갈 뿐.”
성현제가 한숨을 흘려냈다. 심각한 태도는 전혀 아니었다. 그냥 싫어하는 음식을 먹어야 하게 되었다는, 가벼운 투정 같은 몸짓이었다.
“나로서 남기 위해 적당히 반항을 해보다가, 실패하면 초승달의 뜻대로 근원을 없애게 되겠지. 하지만 한유진 군이 여생을 살아가기엔 충분한 시간이 흐른 후일 거라네. 근원이 사라진다면 오히려 더 안전해질 수도 있고.”
“그건…….”
“한유진 군이 아끼는, 수명이 길고 길 아이들이 안전하게 살아가게 될 수도 있겠군.”
몇백 년 뒤에도, 안전하게. 평화롭게.
“성현제, 씨는, 싫으실 거잖아요.”
“단순히 다른 세상으로 옮겨지는 것까지 거절할 이유는 없다네.”
“…싫지 않냐고요.”
“한유진 군에게는─”
“싫냐고, 아니냐고!”
성현제가 입술을 살짝 벌렸다가, 웃으며 대답했다.
“싫어.”
“근데 왜 나한테 떠넘겨! 싫으면 가지 마! 송 실장님도요!”
젠장, 물론, 물론. 더 안전하고 가능성 높은 방법이었다. 저 두 사람만 포기하면 나머지는 다 살 수 있었다. 던전을 막는 거? 지금으로선 그리 어렵지 않을 터였다. 어르신으로부터 수업을 받고 있는 유현이와 예림이, 그리고 강력한 버프 스킬을 얻은 노아 씨. 이렇게만 있어도 웬만한 몬스터는 막아 낼 수 있었다. 여기에 명우의 대장간과 내 기승수들.
해외 헌터들을 적당히만 신경 써 준다면 단순한 근원의 공격은 충분히 버틸 수 있다.
“우선순위요? 당연히 우리 애들이지! 만약 유현이와 댁 중 반드시 하나가 죽어야 한다면 고민도 안 해요. 전 유현이 구할 겁니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잖아요!”
성현제도 송태원도 나를 바라보았다. 유현이 또한 계속해서 내게 눈길을 두었다. 성현제가 웃음기 띤 그대로 송태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시다는군, 송태원 씨.”
“알겠습니다. 강제로 데리고 가겠습니다.”
송태원이 몸을 일으켰다. 잠깐만, 잠깐만!
“초승달에게 넘기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할 수 있는 한, 끝까지 책임지겠습니다.”
담담하게 말하며 송태원이 성현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어떻게든 막고 싶었지만 나는 여전히 꼼짝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