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534
532화 미국 갑니다 (1)
그 누구보다도 오래된 남자의 손에 금빛 날을 지닌 월도가 쥐어졌다. 빙그르 반원을 그린 칼끝이 주인의 손을 꿰뚫는다. 그대로 길게 뜯어내듯이 칼을 그어, 흘러넘친 피와 살점이 후두둑 바닥을 적셨다. 금빛 날에 새겨진 문양이 피를 머금고 희미한 빛을 발했다. 그것을 바라보던 신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위험한 건 아니죠?”
“이번에는 약간 아슬아슬했다.”
어린 혼돈이 대답했다. 말의 내용과는 다르게 태평스러운 어투였다.
“하나같이 얽힌 것들이 많아. 한 놈 외엔 죄다 어린 주제에. 결국 제일 나이 든 놈이 원흉이기는 하다만.”
자신의 피를 잔뜩 흡수한 해주의 검을 검붉게 물든 바닥에 꽂으며 어린 혼돈이 말을 이었다.
“그 녀석 하나만 빼내면 반쯤은 해결될 것인데.”
“강제로 데려가실 수도 있지 않으세요?”
“살고 싶다잖아. 이곳에서.”
비록 기억이 없다 하나 겹겹이 쌓인 시간을 느끼고는 있을 터였다. 그렇기에 가장 늙은 검은 이해하고 공감했다. 성현제 또한 그에게 알고 있지 않느냐고 물었었다. 스스로를 가엽게 여길 줄도 모르는 주제에 남의 동정심을 교묘하게 끌어내려 들었다. 어린 혼돈의 눈썹이 기우뚱 찌푸려졌다.
“첫째 놈은 팔자가 왜 그래. 이렇게 엮일 거라면 몸뚱이라도 튼튼하든가. 둘째만으로도 감당하는 게 용한데 이놈 저놈 줄줄이 끌어다 눈 동그랗게 뜨고서 다 챙겨야 한다고 앵앵.”
“허니가요, 일단은 양육자잖아요.”
“토끼 무리에서 멀쩡하게 섞여 자란 토끼가 늑대 품고 있으면 미친 거지. 둘째까지야 자기가 키웠으니 그렇다 쳐도, 다른 놈들은 뭐야. 하여간 첫째가 제일 문제다, 문제야.”
신입이 귀를 쫑긋했다. 어깨를 으쓱하는 것과 비슷한 의미였다. 혼돈의 저 투덜거림을 하루 이틀 듣는 게 아니다 보니 익숙하게 네네 하며 흘려 넘겼다. 그사이 칼날이 새카맣게 변색했다. 어린 혼돈이 검을 뽑아 거두었다.
그에게는 살아온 긴 세월만큼이나 기억도 다 하지 못하는 온갖 제약들이 뒤엉켜 있었다. 자잘한 저주야 셀 수도 없었으며 굵직한 것들도 여럿이었다. 특히 강대한 초월자가 죽어가며 남긴 원한은 수천, 수만 년 이상 그를 옭아매곤 하였다.
그렇기에 오늘처럼 여러 초월자들과 엮인 이들에게 과도한 개입을 하면 뒤엉켜 있던 저주들도 독사처럼 고개를 치켜들었다.
“마지막 원한을 퍼붓는 초월자들은 유독 고독을 저주로 삼더구나. 그놈들도 긴 세월 쓸쓸하기라도 했던 것인지.”
초월자들끼리 어울리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상당수는 자신의 세계를, 과거를 떠나온 사실을 잊지 못했다. 부모, 형제, 친구, 자식. 길고 긴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에 익숙해지고 감정이 마비된다 하더라도, 그 근원은 결국 사람이었으니.
어린 혼돈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맺혔다.
“역시 나는 살아가는 이들이 좋아.”
별의별 꼴을 다 봐왔음에도, 오히려 그렇기에 더더욱.
“하지만요, 사람 개개인에게 관심을 두면 힘들어진다고 했어요.”
“정이란 것은 무서우니 말이다. 초월자라 해도 마음을 도려내지 않는 한 곧잘 감정에 휘둘리곤 하지. 그래도 나쁠 건 없다. 그게 사는 것이야.”
“저희는 그러면 안 되잖, 아야!”
혼돈이 검지를 굽혀 신입의 머리통을 톡 두드렸다.
“네 녀석들도 사람이다. 그냥 좀 오래 살고 강할 뿐이지. 강하기에 중심을 잘 잡아야 할 필요는 있다만, 그렇다고 신이라도 된 것처럼 착각해서야 될 일이냐. 잘나도 사람이고 못나도 사람이야. 잘난 놈이 못난 놈 인생 책임지다 못해 이끌 필요도, 자격도 없어. 호의도 선을 넘어서면 무례고 횡포다.”
“그래도요… 저희가 도와줘야 세상을 더 많이 구하죠.”
“어린 것들이란 자신만만하지.”
“그건 혼돈님도─”
“나는 그럴 능력이 되고.”
신입이 입속으로 구시렁거렸다.
“토끼야. 시스템이고 초월자고 없던 시절에도 사람들은 살아갔다. 시스템이 생겨나고 더 많은 사람이 살 수 있긴 했겠지. 그래도 네놈들 없이도 세상은 굴러가.”
시스템도 그에 속한 초월자들도 그저 도우미, 보조 역할일 뿐. 시작은 분명 그러했었다. 신입이 흰자위 없는 눈을 데굴 굴렸다. 그때 반짝, 동그란 구슬 같은 것이 나타났다.
“앗, 잠시만 갔다 올게요. 선배 연락이에요.”
혼돈에게 양해를 구하고 훌쩍 장소를 이동한 신입이 괜히 목소리를 낮추며 구슬에다 대고 말했다.
“무슨 일이세요, 나무 선배.”
[신입아, 허니 칭호스킬 조정은 아직이야?]“아, 네.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얼굴이 보이지도 않건만 신입은 한껏 곤란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L급으로 등록은 되어 있지만 시스템으로 정확한 파악이 힘든 종류잖아요. 아무래도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처음 잡은 기간도 5년이었고요.”
[그건 최대한으로 잡은 거 아니었어? 빠르면 반년이라고 했던 거 같은데.]“이런 일은 원래 마감 기간 꽉 채우는 법이라고요, 선배.”
[하지만 지금 타이밍이 딱 좋은데. 채터박스가 저렇게 나섰으니 허니도 거부할 가능성이 낮고. 허니에게 말이라도 해보는 건 어때?]“안 돼요!”
신입이 고개까지 저으며 크게 소리쳤다.
“아직 준비도 끝나지 않았잖아요. 그러잖아도 의심스러워하고 있는데 잘못했다간 다시는 절 찾아오지 않으려 할지도 몰라요.”
[이러다가 만에 하나 허니가 채터박스의 손에 넘어간다면 그게 더 큰일이잖아?]“그걸 막는 게 저희 일이죠. 그러니 잘 지켜봐 주세요.”
나무가 작게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신입이 불안하게 귀 끝을 움찔거렸다.
[반대로 채터박스가 실패한다더라도 곤란해. 만약 효도중독자 애들이 이 세계에서 물러난다면, 이대로 끝나 버리겠지. 허니 세계의, 허니 주위의 인간들은 충분히 강해졌고 빠르게 성장하고 있어. 현재 수치대로라면 효도중독자의 개입만 없다면 자신의 세상을 지켜낼 수 있을 거야.]던전을 계속해서 공략해 나가서 일정 이상 힘을 소모한 근원이 물러나게끔 만드는, 정석적인 세상을 지키는 방법이었다.
[그럼 허니는 그것으로 만족하겠지. 우리를 도와줄 리 없어.]“그렇, 지만요. 어쨌든 세상 하나는 구하는 거니까 나쁠 건 없잖아요? 성공한 거라고요.”
[신입아, 세상은 별처럼 많아. 더 많은 세상을 구할 수 있는 기회를 우리는 놓쳐서는 안 돼.]“…네, 알고 있어요.”
좀 더 많은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신입은 그렇게 배웠다. 탑에 갇힌 왕은 그렇게 살아왔다. 자신을 가두어 수많은 사람의 풍요를 지켜왔고, 더 많은 세상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세상을 집어삼켰다.
“그래도 준비가 끝나야 하니까요……. 그게 더 안전하기도 하고요…….”
[알았어. 왜 풀이 죽은 목소리야, 괜찮아. 효도중독자 애들이 물러나서 핑곗거리가 없어지면, 그럼 우리라도 나서면 돼. 몇 년 뒤에 준비가 끝나면 새로운 효도중독자가 나타났다고 적당히 속일 수도 있으니까.]“네…….”
수고하라면서 나무의 목소리가 구슬과 함께 사라졌다. 신입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허니 한 명이랑…….”
수많은 세계.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여야 했다. 하지만 신입의 표정은 어두웠다. 문득 어린 혼돈의 말이 떠올랐다.
그저 내가 하고 싶어서.
“…전에는 저도, 세상 구하는 게 좋았는데요…….”
하지만 지금은, 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어린 혼돈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뭐라고 말할까. 분명히, 마음 가는 대로 하라고 대답해 주겠지. 신입은 길게 늘어진 자신의 귀 끝을 만지작거렸다. 선배들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사이였다.
그러나… 최근의 나날들이 즐거웠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언제 던전을 찾아올까 기다려졌다. 자신을 향한 다채로운 눈빛들이 기분 좋았다. 마치 까마득한 옛날, 기억조차 흐려진, 갇히기 전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었다.
“허니는 나를 싫어하게 되겠지. 다른 사람들도 다신 못 만나게 되겠지. 대장장이 씨도 나를 미워하게 되겠지.”
신입의 주위로 복잡한 마나의 선들이 이어졌다. 나무에게 한 말과 달리 한유진의 칭호스킬 조정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정확히는 마무리 단계를 계속해서 미루어 두었다. 만약 지금 조정이 끝나고 제안을 한다면, 한유진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신입은 눈을 꼭 감았다. 아직은 결정할 수 없었다.
* * *
“삐약아, 사고 치지 말고 얌전히 있어야 한다.”
– 삐약!
“벨라레 너도 삐약이 따라다니면 안 돼. 넌 공간이동을 못 하잖니.”
– 시익.
“호랑아, 위험해서 어쩔 수 없어. 같이 못 가. 착하지, 피스 금방 올 거야.”
새끼 여우가 머리를 쿠션 사이에 처박은 채 꼬리를 탁탁 불만스럽게 바닥에 내리쳤다. 언제나 그렇지만 애들 두고 집 떠나려니 가슴에 무거운 돌이 얹힌 듯했다. 오래 걸리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혹시 소록이가 지금보다 더 자란다더라도 웬만하면 도담에 두세요. 송이랑 같이요.”
그간 성장을 억누르고 있었던 탓인지 소록이는 내가 돌보지 않을 때에도 조금씩 자라고 있었다. 스킬을 적용할 때보다는 훨씬 느린 속도긴 했지만 그래도 혹 몰라 당부해 두었다.
“안 챙긴 거 없지? 냉장고도 비웠고, 불필요한 코드도 다 빼놨고.”
애들을 사육장에 맡겨 놓고 마지막으로 집을 점검했다. 채터박스는 파티 기간을 일주일이라고 알려왔다. 하지만 상황에 따라 변동 가능성이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인원수만 봐도 일주일보다는 길어지지 않을까. 랭킹전 본선도 시간 꽤 들였었는데. 뭐, 가위바위보 같은 걸로 초반 탈락자 우수수 떨궈내면 일주일로도 충분하겠지만.
“형, 여기. 혹시 모르니까 챙겨 둬.”
유현이가 틈틈이 만들어 놓은 인벤토리 보관 가능 간편식을 내게 건네주었다. 예림이도 몇 개 슬쩍 챙겼다. 물론 유현이가 눈치 못 챘을 린 없고, 봐주는 거였지만.
“피스 밥도 넉넉히 챙겼지?”
“응. 하지만 생고기는 부피가 커서.”
“채터박스 쪽에서 피스 굶어야 할 상황 만들면 방송에다 호소해. 유체화 상태인 피스 보여 주면서. 항의 엄청 들어갈걸? 특히 미국 쪽은 동물권 강하게 챙기는 사람들 많다더라.”
피스를 데리고 간다고 하자 해연 길드 홍보팀 쪽에서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었다. 어린 동물이 최고라면서. 그 밖의 방송 관련 교육도 나는 물론이요 유현이와 예림이까지 따로 받았다. 나나 예림이는 우리 애 불쌍하다며 울먹거릴 수도 있지만 유현이 녀석은 잘할지 모르겠네. 피스한테 배고파하는 척하는 법이라도 가르쳐 줘야 하나.
“호두야, 집 잘 보렴.”
호두에게 인사를 하고 짐을 들고 집을 나섰다. 물론 애들은 내게 작은 가방 이상 들게 하진 않았지만. 얘들아, 몇 번이나 말하지만 나 이십대다. 서른이라도 한창이다.
“저희 파티만 참가해요? 라스베이거스 같은 데 가면 안 돼요?”
“시간 나면 관광하는 것도 괜찮겠지만 도박은 안 돼.”
“그냥 거기 유명하잖아요.”
미국 하면 곧잘 떠올리는 관광지긴 하지. 거기 말고는… 할리우드? 아무튼 도박은 안 하는 게 낫다.
“해외 유명인은 어때? 예림이 너 S급이잖아. 만나고 싶으면 만날 수도 있을걸.”
“요샌 S급 헌터들이 제일 유명한데요. 그리고 전 연예인 별로 관심 없어요.”
“나도 연예인보다는 헌터에 더 관심 많긴 했었지.”
…얼마 전이었다면 미국 간다고 했을 때 클로이 씨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들떴을지도 모르는데. 유현이가 차 문을 열어 주며 내게 물었다.
“누구?”
“한 명은 이미 봤잖아. 그 외에는 뭐…….”
“아저씨 한국에선 공무원 아저씨 제일 좋아했을 거 같은데. 아님 현아 언니나.”
“그야… 하지만 둘 다 지금이 더 좋아, 지금이.”
“세성 아저씨는요?”
“관심 없었어.”
“에이, 아니었을 거 같은데.”
“재수도 없었지. 지금도 좀 그렇고.”
어쩌다 알고 지냈다고 하지만 여전히 기억은 없었다. 나는 결국… 할 수 있는 일도 없었고. 성현제도 송 실장님도, 그리고 동생도. 그래도 그렇게 끝이 났기에 지금이 있는 것이지만.
“…나는?”
운전석에 오르며 유현이가 작게 물었다.
“너야 뭐, 당연히 항상 지켜봤지.”
정말로 싫으면 보지도 않았을 텐데. 그냥 키워 준 값이라 치고 돈 받아다 어디 시골에 내려가 조용히 살았으면 마음도 몸도 편했겠지. 내 무릎 위에 올라앉은 피스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그랬으면 지금의 우리 집도 없었을 것이다.
주차장을 벗어나자 기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유현이와 예림이가 동시에 인상을 찌푸렸다. 둘이 제법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네.
“나올 때마다 난리네요.”
“신경 쓰지 마, 형.”
“괜찮아. 이젠 분위기 많이 바뀌었잖아. 게다가 해외 나가면 어차피 한국인 응원한다더라.”
등급보다 우리나라 사람인 게 우선이라나. 그러니 내가 아주 죽을 쑤지 않는 이상 국내 분위기는 이대로 좋을 거라고 했다. 해외에서야 여전히 다른 나라 F급보다 우리나라 S급이 나갔으면 싶겠지만. 심지어 정부 차원에서 초대장 양도를 슬쩍 물어오기도 했었다나. 한국 정부야 당연히 거절했다.
공항에 도착하자 가슴이 조금 뛰었다. 파티 때문만 아니라 미국이잖아. 그동안 정식으로 출국한 곳은 일본뿐이었고 납치도 동아시아를 벗어나지 않았었는데. 한가한 생각이긴 했지만 역시 살짝 설레긴 했다. 관광할 형편은 아니더라도 직원들 기념품은 사와야지. 미국은 뭐가 유명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