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589
587화 기억의 안개 (1)
숨이 거칠어졌다. L급의 공포 저항을 넘어설 정도의 존재는 아니었다. 그랬다면 아예 효과가 없었겠지. 하지만 일부만 먹혀들었다. 공포 저항으로 감소되었지만 여전히 뒷목을 쭈뼛하게 만드는 위압감이 전신을 덮쳤다.
최소 SSS급. 아마도 L급. 현재의 우리 세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존재감이었다. 몬스터조차 SS급 이상은 나타난 적이 없었는데.
‘…대체, 이게.’
자욱하게 깔린 안개 사이로 인영이 나타났다. 채터박스였다.
평소와는 다르게 하얀 테일 코트에 가면도 쓰지 않았다. 흰 머리카락 아래로 새파란 눈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부드럽게 미소를 띤 채로 그가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오싹함과 동시에 기이한 감정이 들었다.
채터박스가 깃든 몸뚱이는 객관적으로 잘생긴 편인 게 맞았다. 하지만 내게 있어서는 불쾌감이 더 앞섰다. 아무리 잘나도 싫은 놈이니까 마주치면 절로 인상이 찌푸려지려 들었었다.
그런데 지금은.
“뭘… 어떻게 한 거야.”
호감이 느껴졌다. 박하율의 스킬과 비슷한 감각이었다. 아니, 그보다 좀 더 우상적인 쪽에 가까웠다. 감탄스러우며 매력적이고 이상적으로 우러러볼 만한.
이성과 충돌되는 감정에 속이 메슥거려 왔다. 미간을 좁히는 나를 채터박스가 올려다보았다.
“채터박스는, 그런 존재입니다.”
“…뭐? 그보다, 이거 계약 위반이잖아!”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하지만 꿋꿋이 채터박스와 시선을 마주했다.
“초월자, 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안 될 텐데?”
초월자 수준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 세상에 끌어들일 만한 힘도 아니었다. 이게 되면 그냥 개입해서 다 쓸어버리고 끝! 하겠지!
채터박스가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 나를 묶고 있는 줄들이 아래로 내려간다. 발이 땅에 닿을 정도는 아니었다. 여전히 공중에 띄워진 채라 무게가 쏠린 팔이 아파 왔다.
“기 오스 사누스는 사라졌습니다. 이곳에, 당신 눈앞에 서 있는 자는 인간 채터박스지요.”
“…무슨.”
푸른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옷에 맞추어 하얀 장갑을 낀 손이 내게 뻗어와, 엉망이 된 옷자락을 매만진다.
“초월자는 이 세계에 간섭할 수 없습니다. 시스템을 통하여 허락된 힘만을 휘두를 수가 있지요.”
…그렇기에 채터박스는 파티 내내 우리를 던전으로 이동시켰었다. 던전 밖에서는 공간이동만 주로 사용했었다. 부상과 사망을 완벽하게 되돌려 주기는 했지만, 그건 신입도 했던 일이다. 지금 이곳도 아직 던전 속이니까, 그래서 저런 존재감을 가질 수 있는 것일까. 하지만 그렇게 가벼이 생각하기에는 아무래도 이상했다.
“그러나 채터박스는 다릅니다. 이 세계의 존재로 만들어진, 이 세계의 구성원. 그렇기에 제약이 없습니다.”
“제약이, 없다고 해도. 그 몸, 기껏해야 S급이었을 텐데.”
“제 기억으로는 A급이었지요. 특수 계통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채터박스, 수십억의 지성체가 인지한 놀라운 존재.”
찢겨지고 더러워진 내 옷이 스르르 복구되었다. 살쾡이 세트가 사라졌다가 바닥에 털썩털썩 떨어진다. 은혜 또한 챙그랑, 군림자의 검 옆에 나뒹굴었다. 부츠 대신 자리한 것은 구두였다. 저번의, 원형 경기장에서의 복장과 똑같았다.
“물론 단순한 인식만으로는 현실화시킬 수 없습니다. 이 세계의 지성체들의 대부분은 아직 낮은 수준의 마력만을 소지하고 있으니까요. 십억 이상의 상급 각성자가 똑같이 생각하고 느낀다면, 현실에도 뚜렷한 영향을 미치겠지만. 그래서 패륜아들도 방심했을 겁니다.”
뜯겨 나갔던 셔츠의 단추가 다시 나타났다. 채터박스의 손끝이 천천히 셔츠 단추를 여민다.
“사람들이 환호하는 채터박스가 완벽히 현실화되지는 않았지만, 형태는 이 세계에 자리 잡았습니다. 도안이, 틀이 준비되었다고 볼 수 있을까요.”
흰 장갑에 감싸인 손가락이 내 귀를 건드렸다. 붉은 이어링이 사라지고 은혜 근처에 투둑 떨어졌다.
“그 틀이 가장 강력해지는 순간에. F급 헌터가 왕좌를 차지하는 그 순간에. 한 명의 초월자를 소멸시켜 그 대가로 채터박스를 완성시켰습니다.”
“…미친놈.”
채터박스가 웃었다. 진짜 미친놈.
“그럼, 채터박스의 틀을 만들기 위해서 파티를…….”
“기틀이 없이는 제대로 이 세계에 자리 잡지 못하고 상당수가 흩어져 버렸을 테니까요.”
“왜…….”
그렇게까지, 라는 말은 내뱉지 못했다. 초월자의 자리를, 힘을 버리는 게 미친 짓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도 이미 한번 비슷한 짓을 했었다.
소원석.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그 아이템을 시간을 되돌리는 데에 사용했다. 만약 지금 또다시 소원석을 손에 쥔다면, 설사 그것으로 초월자가 될 수 있다고 해도 내가 빌 소원은 한 가지뿐이었다.
“물론 처음에는, 각성자 육성을 위한 모임이었습니다. 적당히 강력한 헌터들과 계약해 아이템과 능력을 주고 당신들을 잡는 정도로 끝내려 했었지요.”
넥타이가 내 목에 매졌다. 매듭을 짓는 손길이 꽤나 정성스럽다.
“그러나 내 사랑이, 한유진을 선택했으니까.”
파란색 눈이 즐거운 빛을 띠었다.
“사랑스러운 내 안개는 세상 모두의 찬사를 받았습니다. 안개가 닿지 않는 곳은 없었으며 모든 이가 그녀를 두려워하면서도 우러러보았지요.”
“…그러니까, 나와는 거리가 좀 많이 머신 분이신데.”
“그에 비해 당신은 많이 모자라지만, 이 세상 대부분의 지성체가 대단하다고 인지했습니다. 이번 게임으로 자의식이 덧씌워졌다면 더욱 완벽하였겠지만… 어쩔 수 없지요.”
채터박스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젠장, 그래서 어쩌려고! 날 잡아다 골방에 틀어박히기라도 할 셈이냐? 이젠 초월자도 아니잖아! 여기 갇힌 셈 아닌가?”
“이 세상이 근원에 삼켜지기 직전까지 느긋하게 지내야겠지요. 내 사랑의 무덤에 함께 잠드는 것도 행복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채터박스 놈이 태연스럽게 지껄였다. 그래, 저런 힘을 가졌으니 우리 세상 멸망하기 전까지 잘 먹고 잘살겠지. 세상 망해도 좋고 망하지 않아도 좋다는 건가. 여기서 무해의 왕이 죽었으니까?
절로 어금니가 꽉 다물려졌다. 생각보다 더 미친놈이었다. 누워서 침 뱉기가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그래도 난 아직 살아 있으니 욕해도 된다. 심지어 나는 나 혼자 짊어지고 끝내려고 했다고. 죽을 거면 저 혼자 그놈의 사랑 무덤에 누워서 셀프로 흙 덮든가. 왜 나까지 끌어들여서 순장하려고 지랄인 건지 이 개새끼야.
“망할, 유현아! 형은 괜찮으니까!”
아직 방송 중인 걸까. 음성을 켜고 소리쳤다.
“섣불리 덤비지 말고, 어르신과 신입 조언을 받아! 어차피 못 벗어나!”
그나마 이 세상에 끝까지 붙어 있겠다고 하니까, 그러니까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채터박스 놈이 일종의 반칙행위를 저지른 것은 사실이니 신입이 어떻게 도와줄지도 모른다. 내가 없어도 신입을 만날 수 있게 해놓아서 천만다행이지. 거기에 명우도 신입과 계속 만나고 있으니까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너무 걱정하지 마. 괜찮, 아.”
안개가 부드럽게 뭉치며 내 발치로 밀려든다. 스르륵 기어올라 오는 감촉이 오싹했다. 마지막에 버리긴 했지만 이미 여러 번 사용했던 힘이라, 큰 저항 없이 내 마력과 섞여든다. 숨을 크게 삼키며 다시 음성을 껐다. 채터박스가 아쉬움 섞인 눈빛으로 나를 바라봐왔다.
“강제로 덧씌워야 하니, 힘의 소모가 크겠군요.”
“…그거 참 축하드립니다.”
등급이라도 하나 떨어지면 박수라도 쳐드리죠. 그럼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될 것이다. 바닥에 떨어진 군림자의 검이 눈에 들어왔다. 유현이에게 돌려줘야 하는데.
“다른 사람, 들은. 계약은.”
“소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각자 1인 대기실에 두었습니다. 지금 이 광경도 볼 수는 있겠지요. 안전히 풀려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계약도 물론, 채터박스에게 묶여 있기에.”
계약이 파기되지 않았다는 말에 조금쯤 안심되었다. 소름 끼치는 감각이 전신을 파고들었지만 어떻게든 표정을 관리하며 음성을 켰다.
“채터박스는 여러분을 먼저 공격하지는 못해요. 저는 정말로 괜찮을 테니까, 음. 잠깐 휴가 받았다고 생각하고, 쉬고 있겠습니다.”
설마 날 잡아가서 중노동이라도 시키겠냐. 푹 쉴 수는 있겠지. 애써 괜찮다고 말하고는 음성을 껐다. 영상도 끌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저 아이템들도, 돌려줘.”
최소한 검이라도. 흑룡은 어떻게 되는 거지. 떨어져 있어도 검을 성장시킬 수 있을까. 시야에 하얀 것이 어른거렸다. 안개인가 하고 고개를 조금 젓는데, 내 고갯짓을 따라 흔들거렸다. 하얀 실 같은… 머리카락?
“자, 잠깐! 내 머리!”
심지어 조금 길어졌다. 하얀 머리카락에 색색의 불빛이 번갈아가며 비치듯 물드는 모습에, 무해의 왕이 떠올랐다. 미친, 설마, 설마.
“덧씌우는 게, 외모까지! 설마!”
“짐작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옷까지는 각오했지만!”
수조 속의 루가 폐야 꼴을 보곤 저 비슷한 꼴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정도는 했었다. 그러니까 특수 분장 정도까지. 마력의 침입 때문이 아닌, 생리적인 혐오감이 오싹하게 심장을 조였다.
설마 눈도 하나 더 생기게 되는 건가. 거기에 촉수와……. 공포 저항 스킬이 다시금 발동되었다.
“이 미친 놈! 변태 새끼야!”
“겉도 속도, 바뀌게 될 겁니다.”
채터박스 놈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리고 당신은, 계약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지요.”
“계약이 왜…….”
“사랑스러운 내 안개는 당신 동생에게도 관심이 꽤 있었답니다. 해부라도 해보고 싶지 않았을까요.”
분명 루가 폐야가, 그런 적이 있었지만.
“그러니 새로운 안개도, 제 부탁 없이─”
은혜는 없다. 손은 움직일 수 있었기에 인벤토리도 사용할 수 있었다. 곧장 인벤토리에서 폭탄을 꺼냈다. 하지만 채터박스가 무슨 짓을 했는지 터지지 않았다.
“날 죽여. 그걸로 끝내.”
속이 차갑게 식었다. 내가 완전히 바뀐다면. 겉모습만이 아니라 속까지 한유진이 아니게 된다면. …스스로의 의지로 유현이를, 내 곁의 사람들을 해치려 할 수도 있다. 내 소중한 사람을 건드릴 수 없는 것은 채터박스다. 루가 폐야가, 루가 폐야가 된 한유진이 아니었다.
채터박스의 입술이 곡선을 그렸다.
“당신 손으로 끝내게 될 겁니다.”
숨이 막혔다. 차라리 정말로 막혀 버리기를 바랐다. 몸을 비틀었지만 검붉은 줄들은 꿈쩍도 하질 않았다. 방법이 없다.
그래, 완벽한 복수네. 나를 루가 폐야로 만들어 내 소중한 사람들을 죽이게 할 거라니. 심장이 펄떡대다 못해 뒤집어질 것만 같았다. 마음은 빌어먹을 채터박스 놈을 갈가리 찢고 있었지만 내 몸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안 돼.”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무력했다. 그런 한유진에 대한 원망이 솟아나자, 안개의 침식이 더 빨라졌다. 하지만 어떻게, 자책하지 않을 수가 있어……. 내가, 처음부터.
“…안 돼, 제발.”
결과가 어떻게 나든, 상처받게 될 텐데.
“나 하나로 끝내. 루가 폐야가 관심을 가진 건 나야. 처음부터 끝까지, 내게 가장 흥미를 보였어. 다른 사람들은 상관없다고!”
소리쳤다. 어떻게 해야 채터박스의 마음을 바꿀 수 있지. 뭘 내놓아야 나만으로 끝낼 수 있지.
“내게 이름을 가르쳐 주고, 더욱 살펴보고 싶어 했고, 그리고!”
눈꺼풀 위에 닿았던 감촉이 떠올랐다.
“무해의 왕은 되살아나기를 거부했어! 내가, 도와주겠다고 했었지만 그건 자신이 아니라고 말했다고! 그런데 이런 식으로 가짜를 만들어 내는 걸 바랄 것 같아?!”
채터박스의 목이 미미하게 기울어졌다.
“그녀라면 그렇겠지요.”
“오히려 싫어하겠지! 지금 네 짓을!”
“상관없습니다. 거부할 내 안개는 존재조차 하지 않으니까요. 사랑하는 이에게 맞춰 주는 것은, 사랑하는 이가 곁에 머무를 때의 일입니다.”
…그래, 그런 놈이다. 나를 옥죄어 오는 마력이 더욱 강해졌다. 반면에 채터박스의 존재감은 조금 약해졌다. 제 힘을 모조리 쏟아부어서라도, 나를 지우고 무해의 왕을 만들어 내려 하고 있었다.
그렇게 태어나는 무해의 왕은 유현이보다, 내게 소중한 사람들보다 강할 것임이 분명했다. 목이 타들어갔다. 누가 좀.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몇 명이나 보고 있는 거야? 내 안개에 기억이 가득 담겨 있어.]신기해하면서 그녀가 웃었다. 맑은 웃음소리가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다가.
“여러분, 안녕! 나는 루가 폐야, 무해의 왕이란다!”
밖으로 튀어나왔다. 어느 샌가 감겼던 눈을 번쩍 떴다. 채터박스가 나를, 아니 내 약간 위쪽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나 또한 고개를 꺾었다. 하얀 머리카락이 안개처럼 나풀거린다.
그녀, 루가 폐야가 그녀를 보고 있을 시청자들을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