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615
613화 남은 시간 (2)
“약속대로 지원은 아끼지 않을 거예요.”
마리가 냉랭히 말했다.
“그러니 가짜 세성 길드장과 이사벨라, 사미르 그 두 사람을 잡아 진실을 밝히도록 하세요.”
SNS에 올라간 사진과 세성 길드장의 약혼에 대한 헛소문을 최대한 빨리 바로잡아야 했다. 지금으로선 그녀가 진짜 세성 길드장과 결혼할 사람이라고 나선다 해도 흔한 헛소리 정도로 치부될 게 분명했다. 그런 사람이 처음이 아니었으니까.
“그 과정에서 송태원과 한유진이 사망한다면 더욱 반가운 일이고요.”
[저희는 한유진을 살해할 생각이 없습니다.]통신기 너머의 예언자가 말했다.
[그는 우리를 바깥과 연결시켜 줄 중요한 제물이거든요.]“아무렴 어때요. 어쨌든 치워 주기만 하면 돼요. 제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
결혼식만 무사히 치른다면 그 이후로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던전 숭배자들이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든 짓거리를 하든, 아무래도 좋을 일이었다.
[한유진이 아프리카 어딘가에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정확히 북동 아프리카 쪽이겠지요. 최대한 범위를 좁혀가고 있으니 예비 신부님께선 탈출로를 감시해 주십시오.]“네, 그렇게 전하도록 하죠.”
몇 마디 말이 더 오간 뒤 통화가 끊어졌다. 조용해진 방에서 탕, 테이블 다리를 걷어차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게 뭐람.”
잔뜩 부은 얼굴을 하며 마리가 투덜거렸다. 길게 땋아 내린 옆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려 감기를 반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일은 공주님이 하는 게 아니라고요.”
약간의 시련은 겪지만 결혼식만큼은 곱게 차려입고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는 게 보통이었는데. 하지만 지금 상황은.
“악역 같잖아. 나쁜 마녀라거나.”
왕자를 납치해 가둬 두고 결혼식을 방해하는 자들을 없애려 하고 있다. 마리는 으으, 이를 조금 깨물다가 두 손으로 뺨을 매만졌다.
“아니야, 괜찮아. 시대가 변했잖아. 요즘 공주님들은 적극적이라고 했어! 세상이 변했으면 따라가야 맞는 거지. 게다가 왕자님의 선택을 받는 것보단 직접 선택하는 편이 더 좋잖아? 마음에 안 들면 차버릴 수도 있고!”
그래, 지금도 괜찮아. 요즘 세상은 달라. 울컥한 마음을 가다듬으며 마리는 빠르게, 동시에 우아하게 걸음을 옮겨갔다.
‘하율이 걔는 아직 모르고 있고.’
무력적인 능력은 중급 헌터만도 못했지만 박하율은 그녀로선 아무렇게 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래서 한유진에 대한 거짓 정보를 던져 주어 다른 곳으로 빼돌렸다.
‘이사벨라 공주라니. 하필 공주님이야!’
너무 늦기 전에 처리해야 했다. 가장 쉬운 방법은 진짜 성현제를 내세우는 것이었지만. 햇살이 비쳐드는 실내정원 앞에서 마리의 발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그림 같은 풍경 속에 고급스러운 포장 상자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연보랏빛 수국 앞에는 전신거울이, 새하얀 테이블 위에는 카탈로그들이 펼쳐졌다.
그 가운데 성현제가 앉아 있었다. 핏자국을 모두 지우고 새하얀 예복 차림에 두 눈의 빛도 선명하였다. 마리는 잠시 홀린 듯 그 광경을 감상하였다. 지루한 표정으로 기다란 손가락 끝이 카탈로그의 페이지를 넘긴다.
“시시한 것들뿐이로군.”
상품을 준비한 자들이 잔뜩 긴장한 채 굳은 입술 끝을 애써 올렸다. 성현제가 마리 휘하의 헌터가 아닌, 비각성자를 해친 적은 없었다. 단지 배려를 해주지 않는 것만으로도 포식자 앞의 조그만 피식자처럼 움츠러드는 것이었다.
“모두 최고의 브랜드예요.”
마리가 정원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금안이 그녀를 흘끗 향하였다가 다시 컬러 페이지로 돌아간다.
“내 일상품이라는 뜻이지.”
“그…야.”
드레스 자락을 꾹 움켜쥐려던 마리의 손이 다시 곱게 펴졌다. 완벽한 왕자님이긴 한데, 그가 깨어나고 며칠 만에 살짝, 아주 살짝 그녀의 마음에 금이 가는 느낌이 들었다. 솔직히 까다롭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런 대접을 받을 만한 사람이며 일상적으로 누려 왔다는 사실에 대놓고 대충 하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브랜드 이전에, 센스의 문제라네.”
“그, 그런가요.”
“실망이로군.”
성현제의 손끝이 책자를 덮었다. 물러가라는 가벼운 눈짓에 사람들이 우르르 물건을 들고 정원을 빠져나간다. 마리가 작게 한숨을 삼켰다.
“아직도 모습을 드러내실 생각은 없으신 건가요?”
“결혼식이 완벽하게 준비가 된다면 고려해 보겠다 대답했었네만.”
그러나 성현제는 식장은 물론 준비한 모든 것들을 냉정하게만 바라보았다. 몰래 촬영이라도 할까 했지만 그의 능력 탓에 불가능했다. 붙잡아는 두었으나 완벽하게 무력화시킨 것은 아니었다. 성현제가 협조해 주지 않는 이상 마리가 그의 진짜 약혼녀라는 증거를 세상에 내보이는 건 힘들었다.
“…그래도 거부하시는 건 아니라 다행이에요.”
마리가 애써 웃으며 말했다. 성현제는 그녀의 말을 반쯤 귓등으로 흘려보내며 보이지 않는 사슬에 묶인 발목을 까닥였다.
“결혼식 자체는 내 마음에 들어야 하니.”
보다 완벽한 장소에서. 시종일관 차갑던 금안이 살짝, 부드럽게 휘어졌다. 가장 중요한 두 명의 하객이 그곳으로 그를 찾아올 것이다. 틀림없이. 그러니 성심성의껏 준비를 해드려야지.
“손이 둘이라 다행이야.”
“…네?”
그때의 즐거움을 위해서라면 조금쯤은 참아 줄 수 있었다.
며칠을 반쯤 잠에 빠져서 보냈다. 그간의 피로가 일순 몰려든 듯 힘이 쭉 빠졌지만 다행히 열이 더 심해지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바깥 걱정은 되었지만, 키워드 감화창의 이름들은 그대로였다. 단순히 이름과 등급만이 아닌 좀 더 자세한 상황도 알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부상 유무라도 말이다.
“정말로 괜찮은 거야, 아빠?”
그간 열심히 내 병간호를 한 결이가 눈썹을 이리저리 들썩이며 말했다. 불행 중 다행이도 결이는 꽤 잘 지냈다. 정말로 몸살이 심한 정도로 보일 뿐 심각하게 아프다곤 느껴지지 않아서인지 이내 나를 돌보는 것을 즐기기 시작했다. 일어나 앉아 있는 정도는 가능했기에 같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보드게임도 하고, 크리스마스카드를 만들기도 했다.
“응, 많이 괜찮아졌어. 바로 나가지는 못하겠지만 슬슬 준비는 해야지.”
뜬금없는 크리스마스 장식품을 밖에 던져 놓았으니 공항을 감시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도망칠 수 있는 상태가 된 다음에나 나가는 편이 안전할 것이다. 고양이 모습이라도 갑자기 툭 튀어나오면 의심스러울 테니까.
“크리스마스카드는 다 챙겼어?”
“응. 인벤토리에 잘 넣어 놨어.”
결이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팔을 쭉 뻗으며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마음 같아선 바로 나가고 싶었지만 내내 늘어져 있었더니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그럭저럭 움직일 만은 했지만 가능한 멀쩡한 얼굴로 나가야지.
“아빠 잠깐 지하실에 갔다 올게.”
“지하실?”
“루가 폐야의 아이템들이 있는 곳이야. 나가기 전에 한번 살펴보려고.”
아직 하나도 꺼내질 않았다. 지하의 아이템 창고는 보안 구역이기에 내 권한으로는 아직 외부인을 데리고 갈 수 없었다. 일부러 은혜도 빼놓고 71번과 함께 지하로 내려가 진열되어 있는 아이템들을 뒤졌다. 각종 다양한 아이템들 중에는 내가 찾던 것도 있었다.
‘손안의 사냥감.’
목표로 하는 상대의 상태를 알려 주는 아이템이었다. 숨을 한번 삼키곤 나를 대상으로 아이템을 사용했다. 아이템에서 흘러나온 마나가 내 몸을 훑고, 이내 창이 나타났다.
[신체등급 F종합 가치등급 ?
약점부위 ALL
활력 F
생명력 –F
속도 F
도주가능성 없음
취약상태
부상 없음
병증 없음
중독 없음
저주 없음
기타 상태이상 없음
개체 예상 생존일 30~35]
…그래도 병 같은 건 걸리지 않았나 보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상태가 많이 안 좋은 모양이었다.
“한 달이 뭐야.”
이걸 정말로 믿을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살날이 30일에서 35일 남았다니. 너무 확 줄어들었잖아. 희미하게 빛을 발하는 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기분이 묘했다.
“이제 좀, 받아들일 수 있을 거 같았는데.”
동생의 죽음도, 그리고 나도. 이제는 천천히 받아들여서, 모든 일이 끝난 후의 하루하루도 평범하게 이어 나갈 수 있을 거 같았는데. 5년도 짧았지만 한 달은 진짜 너무했다. 그렇게나 부담이 컸나.
“…음, 클 만하긴 했지.”
아마 무해의 왕으로 뒤바뀔 뻔한 것 자체도 내 몸에 악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채터박스가 사라지면서 놈이 책임지기로 했던 내 마나각인의 부담도 그대로 남았지 싶고. 돌이켜 보니 한 달이면 많이 남았다 싶어졌다.
‘실감은 잘 안 드네.’
방법이 아주 없지는 않겠지. 패륜아들도 내가 죽는 걸 원하진 않을 거잖아. 그리고, 잘될지는 알 수 없지만 생각해 둔 게 하나 있긴 있었다. 어르신이 들어줄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화는 내시겠지.
아이템을 내려놓았다. 하나쯤 가지고 나갈 걸 찾아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역시 조금 기운이 빠지긴 했다.
“애들 핑계 때문이 아니라, 그냥 나도 살아도 괜찮다 싶었는데.”
근데 이러기냐. 잠깐만, 내년 설이 언제지. 설은 넘겨야 하는데. 그리고 또… 그 밖에도. 성현제 결혼식은 갈 수 있겠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괜히 무거워지는 감정을 억지로 털어냈다.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닌데 뭘. 저 아이템이 잘못 판단한 걸 수도 있고. 던전에 들어가서 신입과 어르신을 만나 보는 게 더 확실하지.
숨 한번 크게 내쉬고 71번을 돌아보았다.
“이 서랍 상태는 어때? 너무 많이 쓴 게 아닌 가 걱정스러운데…….”
“최근에 충전이 되었습니다.”
“뭐? 어떻게?”
“주인님의 세계에 퍼진 루가 폐야의 힘의 영향입니다. 이 서랍의 제작자이니까요.”
감사합니다, 루가 폐야 선생님! 마지막까지 좋은 선물을 주시고 가시네요.
“또한 주인님의 공간 장악도도 소폭 상승하였습니다.”
“그래? 언젠가는 직접 관리할 수도 있겠네.”
언젠가는… 까지 살아 있을지가 문제지만. 괜한 생각 적당히 하자. 어쨌든 반가운 소식도 하나 있어서 다행이었다.
다시 위층으로 올라가 결이와 밖으로 나갈 준비를 시작했다.
“차에 이불도 넣을까? 결이도 운전할 수 있어. 아빠가 가르쳐 주면. 아빠도 면허는 없잖아.”
전에 썼던 차에 짐을 실으며 결이가 말했다. 아니, 결아. 그것만큼은 참자꾸나. 아빠가 면허증이 없어서 그렇지 실제로는 무사고…는 아니고 운전경력 꽤 된단다.
짐 챙기고 가벼운 운동을 하며 이틀 더 머무른 후 서랍을 빠져나갔다. 물론 결이도 나도 고양이로 변한 채였다. 마른 모래가 버석한 바닥이 발에 밟혔다. 이제 막 새벽이 되었는지 하늘은 어스름했다. 무너진 건물 파편과 전투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그곳에.
‘…….’
검이 꽂혀 있었다. 새카만 장검을 앞에 세우고, 사막의 모래바람이 어울리는 회색빛 천을 휘감은 채 앉아 있는 등이 보인다. 직감적으로 하루 이틀이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관리하지 못해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흔들리고 고개가 돌려졌다. 무심하게 가라앉아 있던 표정 위로 미소가 꽃핀다. 되살아나듯 환하게 밝아진 얼굴이 나를 바라보았다.
“형.”
유현이가 일어서 한달음에 내게 다가왔다. 유현아.
– 야옹.
– 삼촌!
결이가 날개를 꺼내며 포르르 날아올랐다. 유현이의 손이 나를 조심스럽게 안아든다. 동생의 뺨에 튄 핏자국이 보였다. 옷 군데군데에도 혈흔이 남아 있었다.
“다행이다, 역시 여기 있었구나. 송 실장님의 말을 듣고 기다리길 잘했어.”
…편지가 잘 전해졌구나. 아니, 그래도 그렇지. 언제 나올 줄 알고 내내 기다려. 괜히 목이 메여왔다. 이 상태로는 말을 할 수 없어서 얼른 사람으로 돌아갔다. 유현이가 들고 있던 나를 내려주곤 주위를 빙그르 도는 결이를 힐끗 쳐다보았다.
“흰 고양이는 요정용이었군.”
“아직도 요정용이냐. 결이야, 결이. 한결이.”
“응. 결이.”
– 결이가 아빠 돌봐 줬어, 삼촌.
자랑스러워하며 결이가 내 어깨에 내려앉았다. 유현이가 고맙다고 형식적으로 말했다. 조금만 더 친근하게 대해 주면 안 되겠니.
“대체 며칠이나 여기 있었던 거야? 다친 곳은?”
“없어. 몇 차례 습격이 있었지만 괜찮았어.”
“괜찮았긴 무슨! 다른 사람들은? 아, 초화운이 여기 와 있었어!”
“다들 무사해. 있잖아, 형.”
유현이가 무척이나 부드러운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고마워.”
“…응?”
“나를 포기하지 않아 주어서.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어.”
동생이 웃었다. 회귀 전의 기억을, 그래, 유현이도 보았었으니. 상처 입지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그런데.
“내가 어떻게, 널 포기하겠어. 내 동생인데. 절대로… 포기 못 하지.”
내 동생들을. 민망하게도 눈가가 화끈해졌다. 유현이가 당황하며 변명을 했다.
“형이 힘들었던 건, 물론 알아. 미안해. 나는 형이, 나를 끝까지 놓지 않아서… 그게 좋아서.”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
유현이의 팔을 잡았다. 동생을 올려다보았다.
“유현이 넌, 그래서 행복한 거지?”
“…응. 정말로.”
동생이 나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타고 남은 불의 냄새가 났다. 메마르고 버석한 공기가.
“그래서 기다리는 것도 힘들지 않았어. 오히려 즐거웠어. 형이 돌아올 곳을 지키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이제는 형을 웃으며 맞이할 수 있으니까.”
“…그래, 그거면 돼. 나도 그거면 다 좋아.”
“형. 많이… 힘들었지?”
“응. 하지만 이제는 괜찮아. 네가, 고맙다고 생각해 줬다면, 그걸로 충분해.”
그 애도 그랬더라면. 내가 마지막까지 발버둥친 것이 위로가 되었더라면. 달라졌고 많이 달라져 가겠지만 그래도 유현이니까, 그렇게 느꼈더라면.
소매로 눈가를 누르며 조금 멋쩍게 동생에게서 한 발 떨어졌다. 이린이 내게로 폴짝 건너와 참았던 말을 터뜨렸다.
– 형! 린이도 형 보고 싶었어요! 안녕, 결아!
– 안녕.
– 빨리 커서 마음대로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너무너무 답답했어!
“그래, 나도 린이 보고 싶었어. 다른 사람들은 어디에 있어?”
“흩어졌어. 형이 아프리카를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려는지 비행기를 모두 막아 버렸거든.”
“뭐?”
– 보통 사람들이 탄 비행기도 멈춰 세우곤 부수려고 들었어요!
아니 미친 거 아니냐. 하기야 채터박스를 따르고 던전을 숭배하는 놈들이 그런 거 따지겠냐마는. 회귀 전에도 테러범으로 유명했었지.
“그래서 공항 근처에는 접근하지 않고 대놓고 행적을 보여 주기로 했어.”
“…내가 너무 오래 쉬었나 보다.”
“아니야, 형. 일단 이동하자. 고양이로 변해서.”
“알았어. 차는 있어? 꺼내 줄까?”
“응. 바이크는 부서졌거든.”
서랍에서 차를 꺼내곤 다시 델로우즈로 변했다. 유현이가 나를 안고 차에 올라탔다. 옆자리에 내려놔도 되는데.
“내가 있는 곳에 형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는지 처음 며칠은 계속해서 덤벼들었어.”
차를 몰아가며 유현이가 말했다.
“하지만 내가 꼼짝하지 않고 형의 모습도 보이지 않으니, 지금은 가끔 드론을 보내 확인만 해.”
– 삼촌, 아빠가 밥은 잘 먹었는지 물어봐.
“던전 공략용 간편식을 넉넉히 챙겨왔어.”
– 아빠가 화내.
– 아우웅, 애오액
“영양학적으로 아무 문제 없어, 형.”
아니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것만 먹고 지내냐! 던전 안도 아니고 평범한 음식도 챙겨오지! 그때 머리 위쪽으로 드론이 날아들었다. 유현이가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다른 손으로 가느다란 침 같은 것을 날렸다. 불길에 휩싸인 침이 드론에 꽂히고 이내 펑, 작은 소리와 함께 부서진다.
“곧 쫓아올 테니 조심해, 형. 내게서 떨어지지 마.”
유현이 말대로 바이크와 차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거의 동시에.
“야! 한유현! 대답할 필욘 없어! 대충 알겠으니까!”
경쾌한 예림이의 목소리가 묵직한 발소리와 함께 들려왔다. 예림아! 근데…….
‘…웬 도끼니?’
피스의 등에 탄 예림이가 너덜너덜해진 외투자락을 흩날리며 거대한 도끼를 호쾌하게 치켜들고 있었다. 음, 못 보던 사이에 많이 야성적으로 변했구나. 아무튼 건강해 보이니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