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616
614화 되감기
“뒤는 우리한테 맡기고 그대로 달려!”
크게 소리친 예림이가 몰려드는 무리를 향해 도끼를 겨누었다. 파바박, 피스의 네발이 땅을 긁으며 급선회하고 그대로 돌풍처럼 내달려나간다. 예림이의 주위로 물방울들이 맺히고 바이크와 군용차량과 부딪치기 직전, 피스의 등을 박차고 높이 뛰어올랐다.
“안-녕!”
촤아아! 물과 함께 예림이의 도끼가 헌터 무리를 휩쓸었다. 급류를 타고 물고기 떼를 덮치는 상어처럼 도끼날에 닿는 것을 닥치는 대로 깨부순다. 그런데.
– 아빠가 좀 이상하대요.
“대부분의 스킬을 봉인당했어.”
– 우애?
“채터박스의 힘을 얻은 듯한 헌터들이 지닌 능력이야. 봉인 기간은 매번 다르지만 짧게는 하루에서 길게는 일주일까지. 계속 충돌하다 보니 계속 봉인당해서 다들 스킬은 쓰지 못하게 되었어.”
아니 채터박스 그놈은 죽어서도 말썽이네! 그래서 피스가 불도 안 쓰고 예림이가 순간이동도 비행도 쓰지 않았구나. 물은 스킬의 범주를 벗어난 힘이라서 사용 가능한 것이고.
– 웽.
앞발로 유현이의 다리를 톡톡 건드렸다. 유현이 너도 그래?
“내 불은 사용할 수 있어. 스킬로 나타났지만 내 본질적인 힘이기 때문인 듯해. 저건 스킬만 봉인할 뿐이야. 박예림이 송 실장님 스킬로 실험해 봤는데 송 실장님은 물을 다루는 능력도 등급을 하락시킬 수 있었어.”
그렇군. 송 실장님은 단순한 스킬만이 아닌, 성현제의 존재 자체를 삼킬 수 있도록… 태어난 존재니까. 그럼 순수하게 타인의 능력을 막는 힘은 아닐 테고, 채터박스의 시스템을 다루는 능력과 연관이 있는 걸까.
차는 빠르게 달려 나가 예림이의 모습이 멀어졌다. 예림이와 피스 둘만으로 괜찮을까 걱정이 되었다. 심지어 스킬도 거의 못 쓰잖아!
“걱정하지 마. S급은 하나뿐인 듯했고 최근엔 늘 있던 일이니까.”
내가 불안해하는 것을 눈치챈 유현이가 말했다.
‘…늘?’
“다른 사람들도 박예림과 곧 합류할 거야. 같이 다니는 헌터 있어.”
누구지. 유현이가 같이 다니는 헌터라고 칭하는 거 보니 잘 아는 사이는 아닌 듯했다. 예림이가 새 친구를 사귄 걸까.
‘아, 유현아! 네 검!’
얼른 군림자의 검을 꺼냈다. 유현이가 미소 지으며 검을 받아 인벤토리에 넣었다.
“군림자의 검은 나와 계약된 것이나 마찬가지라 인벤토리 밖으로 뽑아 들었으면 내가 위치를 알아차릴 수 있어.”
헐, 그런 줄 알았으면 검 들고 구석에 조용히 숨어 있을걸. 서랍에 들어간 덕분에 푹 쉬긴 했지만.
그때 앞쪽에서 또다시 바이크 소리가 들려왔다. 적인가 싶어 유현이의 옷자락 사이로 다시 숨으려는데 동생의 눈을 통해 익숙한 모습이 들어왔다.
‘송 실장님?’
송태원이 상당히 험하게 다룬 흔적이 남은 육중한 바이크를 타고 있었다. 유현이처럼 아랍 풍 겉옷 차림의 그가 잠깐 내렸던 입가를 가리는 천을 다시 올렸다. 그리곤 검은 선글라스를 착용한다. 공직자니까 형식적으로라도 얼굴을 감추기 위해서인 듯했다.
“이대로 쭉 북쪽으로 가십시오.”
차를 스쳐 지나가며 송 실장님이 말했다. 선글라스 뒤의 시선이 옷자락에 반쯤 가려진 나를 일순 향한 것도 같았다. 아무튼 송 실장님까지 합류했으니 안심이었다.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얼마쯤 달려가자 반짝, S급 헌터나 겨우 알아차릴 정도의 희미한 빛이 신호를 보내왔다. 유현이가 나를 옷자락에 감추듯 안고 차에서 내렸다. 앞발을 뻗어 차를 서랍에 넣고 신호가 보인 곳으로 향했다. 암벽 틈 사이로 역시나 천으로 온몸을 감싼 노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성별도 나이도 국가도 심지어 종족도 다르지만 어째 다들 이 동네에 잘 적응한 것 같구만.
“이쪽이에요. 유진 씨는요?”
노아가 당연히 내가 있을 거라는 투로 물었다. 하기야 유현이가 나 없이 자리를 떠날리 없으니까. 옷자락 사이로 머리를 살짝 내밀었다. 노아의 눈이 약간 커졌다. 고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놀랍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늘 위에서 잘 보이지 않도록 암벽 틈을 따라 이동해 조용한 마을로 들어섰다. 그중 한 집에서 사미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 왕자님이랑 같이 움직이고 있었던 거야?
“사미르 헌터도 유진 씨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노아가 말했다. 주위를 휙 살피곤 유현이 품을 벗어나 인간으로 돌아왔다. 델로우즈 스킬이 유용하긴 하지만 역시 인간의 몸이 편해. 기지개를 쭉 켜는 나를 유현이가 날카로운 눈초리로 살펴보았다. 겉으로는, 멀쩡하지.
“정말로 그 고양이가 한유진 헌터였다니…….”
사미르가 중얼거렸다. 놀랍겠죠. 저도 제가 고양이 노릇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답니다. 인생 참… 알 수 없다니까.
“형, 옷 좀 벗어 보면 안 돼?”
“흠집 하나 없단다. 그간 잘 먹고 잘 쉬었어. 출국 경로가 다 막혔다고 들었습니다만, 정확히 어떤 상황이죠?”
“들으신 그대로예요. 우리를 쫓아다니며 감시하고 이 주변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자칫하면 민간 피해가 커질 상황이라 일부러 적당히 모습을 드러내 주고 있고요.”
“목적은 역시 저겠죠.”
“그에 더해 나와 이사벨라도. 정확히는 세성 길드장 때문인 듯한데, 대체 무슨 일이야?”
“어… 납치혼? 그러니까… 아마도 세성 길드장은 원치 않은 결혼을 하게 된 것 같은데 이사벨라라는 가짜 약혼녀가 등장한 상황이니… 음. 저도 잘은 모르겠네요.”
사미르가 납치혼이라고? 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성현제와 납치혼이라니 정말 안 어울리긴 했다. 하지만 이사벨라와의 다정한 사진이 SNS상에 퍼졌는데도 아직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역시 붙잡혀 있는 거겠지.’
자유롭고 멀쩡하다기에는 너무 조용했다. 이 난리가 났는데도 말이다.
“어쨌든 제 책임도 있으니 해결해 보도록 노력은 하겠습니다.”
“벨라가 받아들인 일이니 감수해야지. 그 밖의 우리 가족 문제도 섞여는 있는 모양이고. 그럼 일단은.”
사미르가 겉옷을 벗었다. 그리곤 유현이에게 옷을 내밀었다.
“해연 길드장이 자리를 떠났으니 한유진에 대한 소식을 들은 거라고 짐작하겠지. 죽어라 쫓아올 거야.”
“저와 사미르가 유인하겠습니다. 마침 사미르의 체격이 한유현 헌터와 비슷하니까요.”
확실히 그랬다. 심지어 원래도 어두운 색의 머리칼이었지만 지금은 아예 검게 물들인 채였다. 곱슬기도 약간 있어서 멀리서 뒷모습만 보면 착각할 만했다.
“그래도 조금만 접근하면 피부색 차이 때문에 바로 들키지 않을까요.”
“앞머리 내고 눈만 보이게 하면 돼. 눈동자 색도 대충 비슷하니. 그리고.”
사미르가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손끝에서 검은 불이 작게 피어오른다. 뭐야!
“공략 중에 얻은 E급 스킬.”
불의 색이 노랗게 바뀌었다. 그리고 초록색, 빨간색, 하늘색으로 연달아 변하며 흔들린다.
“평범한 불에 색만 변하는 보조계에 가까운 것이지. 하지만 지금 우리 중에서 검은 불을 일으키는 사람은 해연 길드장뿐이라고 알려져 있으니까.”
확실히 저거라면 쉽게 속아 넘어갈 것이다. 유현이가 겉옷을 벗어 사미르의 것으로 갈아입었다. 그사이 예림이가 도착했다.
“아저씨!”
예림이가 반갑게 인사하며 대놓고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뭘 바라는지는 알겠다만 모르는 척했다. 예림아, 아저씨에게는 인권이 있단다.
“우리 결이 귀여워라!”
나 대신 결이를 끌어안은 예림이가 부드러운 하얀 털을 쓰다듬었다. 결이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 아빠 따라 변한 거야!
“결이 대단하네!”
이어 피스와 송태원, 그리고 이사벨라가 들어왔다.
– 끄우웅, 꺄앙!
유체화한 피스가 내게 달라붙어 몸을 비볐다. 우리 피스, 아빠 많이 보고 싶었어. 오랜만에 피스를 안아 주었다. 아이고, 털에 흙먼지 묻은 거 봐라. 불을 쓰질 못하니 애가 좀 꼬질해졌네. 씻겨 주고 싶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송 실장님도 그간 고생 많으셨어요.”
안 봐도 뻔했다. 송태원이 고개를 약간 숙여 보이곤 말했다.
“혹 세성 길드장에 대해 아는 바가 있습니까?”
“아뇨. 저도 모르겠어요. 결혼 소식 듣고 깜짝 놀랐다니까요.”
성현제가 지금 어쩌고 있는지는 나도 무척이나 궁금했다. 억지 결혼 앞두고 묶여서 울고 있지는 않겠지. 그 성격에 싫은 결혼 할 리가 없는데 어떠려나.
“새끼는 어떻게 친 거야?”
“…네?”
나와 결이를 빤히 쳐다보고 있던 이사벨라가 뜬금없는 소리를 던졌다. 아니 새끼를 쳤다니. 결이가 내 애가 맞기는 하지만… 그러니까. …생각해 보니 이거 마석 조합에 대해 모르고 그에 대해 밝힐 수도 없는 사람에게는 설명하기가 무척 애매했다. 그냥 몬스터잖아요, 해도 되긴 하지만, 결이 앞에서 그러기는 아무래도 꺼려졌다.
“요정용이 고양이로 변한 거야.”
다행히 예림이가 결이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결이가 아저씨 애인 건 맞지만.”
– 우리 아빠야.
요정 고양이가 자랑스럽게 말하고 이사벨라가 귀여워, 하고 중얼거렸다.
“나도 안아 볼래.”
“아직 안 돼. 나도 막 왔잖아. 그리고 결이는 고모인 나를 더 좋아한다고.”
“치사해.”
예림이와 이사벨라가 투닥거리기 시작했다. 둘이 은근 사이 좋아 보이네.
“문현아 헌터는 연이은 비행기 테러로 인해 도착하지 못했습니다. 한유진 씨의 소식을 듣고 일단 리에트, 강소영 헌터와 함께 던전관리를 위해 귀국하였습니다.”
“하긴 벌써 한 달가량 한국을 떠나 있었으니까요.”
한국의 던전 포화 속도가 느려졌다고 해도 계속 비워둘 수는 없었다. 에블린 또한 귀국했다고 하고 소영 씨는 코메트와 함께라면 S급 헌터 수준이니까 충분히 커버할 수 있겠지. 해연은 성한 씨에 더해 블루와 유니콘들도 있으니 신규 S급 던전이 나타나는 게 아니라면 문제없고.
“형만 빠져나가면 테러는 멈출 거야. 형의 탈출을 막기 위해 저러는 거니까.”
“그렇긴 한데…….”
“피스가 회복되길 기다리는 편이 가장 안전하고 빠를 겁니다. 비행기는 민간인 피해가 커질 확률이 높으며 배편도 구하기가 힘듭니다. 헬기는 쉽게 격추당했습니다.”
모여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다들 큰 부상 없이 건강해 보였지만 그간 피로가 많이 쌓였을 것이었다. 피스가 스킬을 사용할 수 있을 때까지 서랍 속에 머물러도 되겠지만 그럼 바깥 소식을 듣질 못하니까.
“잠깐 밖에 나가도 될까요? 아니면 좀 넓은 공간이 있는 장소도 괜찮아요.”
“아직 여기까지 찾아내진 못했겠지만… 건물 가운데에 빈 터가 있습니다.”
한때는 정원이었지 싶은 공터로 나갔다. 그리곤 송 실장님을 향해 죄송스럽게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고는.
“헐, 아저씨.”
“…한유진 씨.”
서랍 속에서 전투기를 꺼냈다. 송 실장님이 참지 못하고 크게 한숨을 내뱉었다.
“아니, 비싼 거 아니에요. 성능 떨어지는 오래된 거거든요. 무기 탑재도 안 했고, 그냥 딱 비행용! 세성 길드장에게 슬쩍 물어봤더니 전투기 조종할 수 있다기에, 혹시 쓸 일 있을까 싶어서요. 헬기는 느리고 일반 항공기는 너무 크니까. 그냥 속도 빠른 경비행기예요.”
“…….”
“…아저씨 아마 길드장에게 잘해 주세요.”
“어, 응. 잘해 줘야지. 연하장 보내고 설날에 선물도 줄 거야.”
크리스마스카드도 썼다. 여러모로 고맙긴 고맙지. 송 실장님이 결국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반드시, 돌려주십시오.”
“예에. 그래도 딱이긴 하잖아요. 조종만 할 줄 알면.”
S급 헌터라고 해도 전투기 따라잡긴 힘들지. 크기도 작아 속도도 빨라, 무사히 날아오르기만 하면 끝이다.
“일단 제가 기초적인 훈련은 받았습니다.”
“나도 단순 조종은 가능해.”
송 실장님과 사미르의 말에 유현이가 약간 초조한 눈빛으로 전투기의 조종석을 바라보았다. 딱 두 사람 앉을 자리밖에 없었다. 고양이 모습으로 안겨 가도 되려나?
“하지만 저는 가급적 정식 출국해야 합니다.”
“…형을 믿을 수 없는 사람과 단둘만 보낼 순 없습니다.”
“해연 길드장님은 까다로우시군. 그럼 배워 볼래?”
사미르가 전투기 날개 끝을 가볍게 툭 두드리며 유현이에게 말했다.
“비행기는 아무것도 조종 안 해봤어?”
“헬기만, 조금.”
“그래도 없진 않네. 비행만 할 거고 S급이니까 속성으로 기본만 해도 돼. 이륙 성공하면 착륙이야 사람 있는 곳만 피해.”
무책임한 소릴세. 하지만 맞는 말이었다. 엉뚱한 곳에 처박아도 멍이나 좀 들고 말겠지.
“다만 유럽 쪽으로 가면 격추당할 가능성은 있어. 정체불명의 전투기니, 바다에 추락시키는 편이 나을지도.”
“그건 내가 연락해 두면 돼.”
노아가 말했다. 그가 나와 유현이를 돌아보았다.
“타국을 최대한 거치지 않고 곧장 프랑스로 가세요. 가능한 사람이 없는 곳에 착륙하시고요.”
“그래도 돼요?”
“전 아직 프랑스 헌터이기도 하니까요. 특히 그 주위는 누님의 영향력이 크기에 그 정도 편의는 봐줄 겁니다. 현재 일어나는 테러를 끝낼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고요.”
노아 씨가 무척이나 믿음직스럽게 보였다. 역시 현지 사람 인맥이 최고구나.
“그럼 한유진 씨는 한유현 헌터와 함께 프랑스로 향하십시오. 한유진 씨가 아프리카를 빠져나간 사실을 알게 되면 저희 또한 방해 없이 출국할 수 있을 겁니다.”
“해연 길드장님, 이것 봐 봐.”
송 실장님과 사미르가 유현이에게 전투기 조종 방법을 가르쳐 주기 시작했다. 내 동생 똑똑하니까 금방 배우겠지.
예림이의 품에서 빠져나온 결이가 인벤토리에서 산타 모자를 꺼내 썼다. 이어 예쁘게 리본을 단 카드를 꺼내든다.
– 결이가 아빠랑 만든 크리스마스카드야.
내밀어지는 카드에 예림이가 감격 어린 표정으로 결이를 바라보았다.
“고모는 아무것도 준비 못 했는데! 고마워, 결아! 집에 가면 결이 가지고 싶은 거 뭐든 사줄게!”
– 아니야, 괜찮아. 결이 좋아해 줘서 고마워, 고모.
카드를 받아 든 예림이가 안의 글을 읽었다. 너무너무 좋다는 눈빛으로 카드를 인벤토리에 넣고는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저씨, 고마워요. 메리 크리스마스!”
“응, 나도 메리 크리스마스.”
– 자, 삼촌. 아빠랑 만든 거야.
유현이에게도 카드가 전해졌다. 결이에게 고맙다며 카드를 받은 유현이가 카드 글을 읽고는 역시나 인벤토리에 고이 보관했다.
“형, 고마워. 나도 사랑해.”
“선물 제대로 못 챙겨 줘서 미안하다. 준비 안 한 건 아닌데, 늦어졌네.”
“아니야, 괜찮아. 이걸로도 충분해.”
“야, 한유현! 내 선물은 아저씨와의 시간이야. 프랑스 가서 생일날 아저씨랑 같이 지내. 우리가 여기서 시간 끌어 줄게. 어때요?”
“전 괜찮아요. 하루이틀 정도 더해져도 상관없습니다. 고마워, 결아.”
노아가 카드를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그래도…….
“우리만 편히 쉬기에는 좀…….”
“일 년에 한 번이잖아요. 그리고 지금 상태요, 나쁘진 않아요. 솔직히 쫌, 꽤 재밌어요!”
예림이가 인벤토리에서 도끼를 꺼내들며 말했다.
“스킬 대부분을 못 쓰게 되니까 전투경험 쌓기엔 더 좋더라고요. 제가 너무 스킬에만 의지하긴 했거든요.”
“스킬도 예림이 네가 가진 힘인걸. 그런데 그 도끼는 뭐야?”
“어떤 공주님이 원거리 주제에 호흡 못 맞춘다고 불만이 한~가득이시라서요.”
“맞잖아?”
“너도 엉망이었잖아.”
“그것도 맞지만.”
“다른 종류의 무기를 직접 다뤄 보면 좋다고 송 실장님이 조언해 주셨어요. 팀원만이 아니라 적으로 만나도 대응이 유연해진대요.”
그렇게 말하는 예림이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잠깐 눈을 뗀 사이에도 아이들은 성장한다더니. 어쩐지 가슴이 뿌듯해졌다.
“역시 송 실장님.”
“나도 다른 헌터들에게 맞추려고 연습하고 있어. 좋은 선생님이야.”
송 실장님이 잠깐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으음, 고생 많으셨구나. 정말로. 송 실장님도 선생님 칭호 하나 얻어야 하는 거 아니냐.
– 송이 아빠 아저씨도 메리 크리스마스!
“감사합니다.”
– 피스도 메리 크리스마스!
– 끼앙.
이사벨라가 부러워하는 눈으로 카드 배달하는 요정 고양이를 바라보았다. 이사벨라와 사미르 것도 만들걸 그랬나. 이렇게 같이 행동하게 될 줄은 몰랐지.
– 아빠, 카드가 남아 버렸어…….
“조금 늦어져도 괜찮아. 다들 금방 만나게 될 거야.”
– 응. 그리고 결이도 여기 있을게. 결이가 요정용 모습으로 있음 유인하기 더 쉬울 거야.
“그건 그렇지만, 같이 가도 돼.”
– 아니야. 아빠랑 오래 같이 있었으니까! 잠깐은 괜찮아. 그리고 이건 아빠 카드! 아빠 잘 때 만들었어.
별과 하트로 예쁘게 장식한 카드가 내게 내밀어졌다.
[사랑하는 아빠, 메리 크리스마스! 결이 사랑해 줘서 고마워요. 크리스마스에 산타 할아버지한테 아빠가 건강했으면 좋겠다고 소원 빌 거야. 그리고 행복하고. 그리고 오래오래 다 같이 살고. 아빠 사랑해!]코끝이 찡해졌다. 우리 착한 결이.
“고마워, 결아. 아빠는 결이 선물 준비도 못 했는데.”
– 벌써 받았어! 아빠랑 같이 즐거웠으니까! 진짜 좋았어.
결이를 꼭 끌어안아 주었다. 유현이가 속성 교육을 마치고 전투기를 다시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실제 연습은 하지 못했지만 어떻게든 잘 되겠지.
사미르와 노아가 결이를 데리고 먼저 나가 우리를 쫓는 헌터들을 유인하기로 했다.
“여기가 누님의 별장 중 하나예요. 관리인에게 연락해 놓았으니 편하게 사용하세요.”
“고마워요, 노아 씨.”
“조심해서 가세요.”
– 아빠, 나중에 봐!
셋이 자리를 떠나갔다. 이어 예림이와 이사벨라도 일어났다.
“우리도 적당히 엎어 놓을게요.”
“고마워, 예림아. 이사벨라 씨, 우리 예림이 잘 부탁드릴게요.”
“응. 나중에 고양이로 변해 봐.”
“반대거든요! 제가 잘 데리고 다니는 거예요.”
역시 잘 맞는 모양이었다. 피스도 내게 한번 더 몸을 비비곤 아쉬워하면서도 두 사람을 따라가고 유현이와 송 실장님만 남았다. 다른 사람들이 헌터들을 충분히 유인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건물을 벗어났다.
“성현제 헌터의 결혼 소식이 흘러나온 곳도 유럽이라고 합니다.”
“그래요? 그럼 가는 김에 결혼식장도 들르면 되겠네요. 얼마 안 남았으니까요.”
“예. 유럽에서는 테러범들도 이 정도로 활개 치지는 못할 겁니다. 유럽 헌터 연합에서 가만있지 않을 테니까요.”
결혼식 전에 청첩장 받을 수 있으려나. 축의금 얼마나 해야 하지. 물론 성현제가 원치 않는 결혼이라면 파트너 된 도리로 엎어 줘야겠지만.
프랑스까지 최대 항속 거리가 아슬아슬했기에 가능한 가까운 방향으로 이동했다. 인적 없는 황무지에 도착해 유현이와 송 실장님이 임시 활주로를 만들었다. 비행기가 과연 무사히 잘 뜰까 걱정되었지만 유현이는 뛰어난 학생이었고 탑승 소감은… 역시 전용기가 최고구나 싶었다.
착륙까지도 어찌 무사히 하고 곧장 서랍에 전투기를 넣어 감추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프랑스 헌터 협회 직원에게 상황을 대략 설명해 주고 간략한 수속도 거쳤다.
“우리나라는 특히 화염 계열 스킬을 지닌 헌터들을 좋아한답니다. 즐거운 크리스마스 되세요.”
협회 직원이 걱정 말고 편히 쉬시라며 능청스럽게 윙크했다. 차도 한 대 빌릴 수 있었다. 거리 곳곳에는 크리스마스 장식이 가득했다. 광장에 세워진 커다란 트리에는 하얗게 가짜 눈이 쌓여 있었다.
“케이크가 남아 있으면 좋을 텐데.”
협회 직원이 알려 준 가게를 방문했다. 다행히 도심지가 아니라서인지 아직 남아 있던 케이크를 살 수 있었다. 비록 크리스마스용 케이크였지만.
“그래도 어떻게 같이 보내게 되어서 다행이다.”
내 말에 운전하던 유현이가 미소 지었다.
“응. 오랜만에. 형이랑 같이 크리스마스를 보낸 지 십 년쯤은 된 거 같아.”
“난 실제로 거의 십 년 만이야. 회귀하고 또 반년 넘게 지났으니 구 년쯤 됐나.”
“…미안.”
“아니, 네가 미안해할 일은 아니지. 어쩔 수 없었잖아.”
“앞으로도 계속 이랬으면 좋겠어.”
내비게이션을 따라 인적 드문 길로 접어들며 유현이가 말했다.
“형에게 많은 사람이 생겼지만, 딱 하루는 욕심내고 싶어.”
“야, 욕심은 무슨. 하나뿐인 동생 생일인데 당연히 형이 챙겨 줘야지. 어차피 크리스마스 하면 이브에 모일 거 다 모이고 파티며 데이트며 다 하니까 신경 쓸 필요 전혀 없어.”
동생이 기쁘게 웃었다.
“고마워. 내 크리스마스도 언제나 형을 위한 날이야.”
“널 위한 날이어야지.”
“형이 있으면 그게 날 위한 것인걸.”
리에트의 별장은 산속에 있었다. 제법 크고 번듯한 이층집에서 기다리고 있던 관리인이 우리에게 열쇠를 건네주었다. 커다란 벽난로가 있는 거실에는 트리도 세워져 있었다.
“신발 신고 다니려니 어색하다. 몇 시지? 우선 씻을까. 유현이 너 먼저 씻어. 나야 서랍 속에서 잘 지냈지만 넌 아니잖냐.”
동생을 욕실에 보내 놓고 주방을 살펴보았다. 음식이 있긴 있었지만 낯선 것들 투성이라 서랍에서 먹을 것을 좀 꺼내 왔다. 거실 테이블에 음식을 차리고 케이크도 놓았다. 씻고 나온 유현이가 내 옆에 앉았다.
“우리 제대로 여행 가 본 적 없었잖아. 그럴 여유가 없었으니까.”
가게에서 함께 사 온 빵을 베어 먹으며 말했다. 학교에서 가는 것 말고는 없었다. 나도 어렸고 동생은 더 어렸고.
“너 수능 치고 나면 네 생일 즈음에 여행을 갈까, 생각했었어. 해외까진 힘들었을 거고 국내에 풍경 좋은 곳에.”
“난 어디든 좋아.”
“나도 어디든 좋았을 거야. 그냥 집을 떠나서, 너랑 같이 간다는 것만으로도.”
별일 없이 그날이 왔었더라면 내가 해야 할 중요한 일 한 가지를 끝낸 시점이었을 것이다. 여러 가지 감상이 들었겠지. 그중에서도 뿌듯함이 가장 컸을까.
“내년에는 내가 준비할 테니, 형 가고 싶은 곳으로 가자.”
“네 생일인데 왜 네가 하냐. 너 가고 싶은 곳을 생각해 봐. 지금부터 천천히. 형이랑 같이 가면 다 좋아, 하지 말고. 숙제야.”
유현이의 표정이 살짝 심각해졌다. 떠오르는 장소가 영 없는 모양이었다. 가고 싶은 곳을 생각해 내면, 꼭 같이 가줘야지. 어떻게든.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시차가 있어서 한국 시간으로 25일 자정이 프랑스에서는 오후 네 시 즈음이었다. 유현이가 태어난 곳은 한국이니까 한국 시간에 맞춰야지.
“선물 준비해 놓은 건 진짜다. 조금만 더 기다려. 크리스마스 딱 맞추고 싶었는데.”
지금이라도 스위스 잠깐 갔다 오고 싶었다. 공간이동 스킬이 필요해. 완성되긴 한 거냐. 마지막으로 연락했을 때 크리스마스 전에는 충분히 받고도 남는댔으면서! …내가 실종 상태라 줄 수 없었겠지만.
“지금 이렇게─”
“그거랑 선물은 다르지.”
“응, 형.”
유현이가 예쁘게도 웃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국 시간으로 자정이 가까워져 케이크에 초를 꽂았다. 생일 초 끝에 불이 발갛게 붙었다.
“내 동생, 생일 축하해.”
“고마워, 형.”
불이 꺼졌다. 굳이 듣지 않아도 짐작이 갔지만, 소원 뭐 빌었냐고 물었다.
“형이랑 계속 함께 사는 거. 마지막까지.”
“…그래. 그래야지. 당연히 그럴 거야.”
동생 소원인데 들어줘야지. 유현이는 내가 어떤 모습이든 형으로 받아들일 테니까, 괜찮을 거다. 유현이가 케이크를 잘랐다. 접시를 가져오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방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나를 유현이가 미소 띤 낯으로 바라봐왔다. 창 너머로 붉어져 가는 햇살이 길게 들어오고, 나 또한 마주 웃는 그때.
“형!”
유현이의 표정이 무너졌다. 날카로운 목소리 직후 동생의 몸이 소파와 함께 밀쳐지듯 날아간다. 쿵! 요란한 소리에 이어 피가 튀었다.
“유현아!”
동생에게 달려가려는 나를 단단한 팔이 감싸 붙잡는다. 유현이가 일어나려고 손으로 벽을 짚었다. 장검이 동생의 다리를 꿰뚫고, 바닥에 박혀 있었다. 나무로 된 바닥에 피가 스며든다. 내 등 뒤로 타고 남은 불의 냄새가 났다. 고개를 돌렸다.
“유현…….”
온통 새카만 옷 위로, 흰 얼굴이 보였다. 절대 잊을 수 없는 익숙한 얼굴이.
“괜찮아, 형.”
절대 잊을 수 없는 익숙한 목소리가. 내 손목에서 은혜가 떨어져 나갔다. 유현이가 나직이, 속삭이듯 말했다.
“나는 가짜야.”
콰득.
한유현과 한유현의 손이 붉게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