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624
622화 해피 엔딩 (1)
“이번 해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내 동생, 이제 스물한 살이네. 해외 나와 있느라 떡국도 못 먹고.”
미리 준비한 연하장을 꺼내들었다. 한국과는 달리 일출이나 학, 복주머니 같은 건 없었다. 하얗게 눈이 덮인 나무에 아기 예수님과 천사가 그려진 크리스마스카드와 겸사겸사 쓰는 건가 싶은 해피 뉴 이어 카드였다. 이 동네 연하장은 이렇다니 어쩌겠어. 여기에 소소하니 용돈도 넣었다.
“자. 대학 졸업 전까진 새해 용돈 받는 거야.”
“고마워, 형. 형도 새해 복 많이 받아.”
유현이도 연하장을 내게 건네자 예림이가 눈을 크게 떴다.
“우리 오기 전에 산 거예요? 나도 카드 살걸!”
“예림이 너도 새해 복 많이 받고 올해는 더 열심히 학교 다니고. 방학이라 다행이지.”
“네에, 아저씨도요. 이거 베르사유죠? 가보고 싶었는데.”
“집에 가기 전에 잠깐 들르지, 뭐.”
프랑스까지 와서 파리에 안 가보면 아쉽잖아. 화려한 궁전 안의 곰인형 컨셉 연하장을 예림이가 기뻐하며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인형 가지고 올걸, 프랑스에서 하나 살까요? 하면서. 이어 결이와 피스, 노아 씨와 송 실장님에게도 연하장을 건넸다.
“프랑스 풍경밖에 없어서, 노아 씨에겐 좀 지겨우시려나요.”
“아니에요. 오히려 반가운걸요. 감사합니다, 유진 씨.”
“송 실장님, 지난 한 해 고생 많으셨습니다.”
“…저는 졸업한 지 오래입니다.”
송 실장님이 연하장과 함께 건넨 용돈 봉투를 되돌려주며 말했다.
“그거 돈 아니에요, 보세요.”
송 실장님의 봉투를 열고 그 속의 종이를 꺼내들었다.
[도담 사육소장 1회 이용권]“작년의 죄송함을 듬뿍 담아 올해는 송 실장님의 말씀을 더욱 귀담아듣겠다는 의미로 드립니다! 그걸로 서랍 속 밀수품 목록도 요청하실 수 있어요. 오늘 하루 얌전히 계십시오도 됩니다. 자숙 기간 최대 일주일까지 가능!”
“…….”
“헐, 아저씨! 저도요! 용돈 말고 이용권!”
“형, 나도.”
“아빠, 결이도!”
미안하지만 얘들아, 송 실장님 한정이란다. 특히 연말의 밀수품 대잔치가 양심에 많이 찔렸다. 송 실장님은 한숨을 내쉬면서도 이용권을 챙겼다. 그리고 한 명 더. 빙그르 몸을 돌렸다. 성현제가 자기 차례냐는 듯 미소 띠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해피 아홉수! 이젠 진짜 내일모레 마흔!”
외치고 나니 조금 미안해졌다. 멀쩡한 결혼이었으면 말이야 나도 내버려 뒀을 텐데. 계단을 올라가 공손히 연하장을 건네주었다. 성현제가 연하장을 뒤적이더니 다시 나를 바라봐왔다.
“나는 한 장뿐인 건가.”
“그 나이에 뭘 바랍니까. 이용권은 내가 받아야 할 판이고요.”
청첩장도 안 줬으면서. 그런데도 연하장을 챙겨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니냐.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성현제에게 너무 잘해 주는 것 같았다. 새해엔 좀 대충 해줘야지.
“거 뭐야, 원래 아홉수엔 결혼 안 하는 거래요. 살다 보면 또 좋은 인연 생기겠죠. 다음번에는 적어도 서른은 넘긴 상대와 만나시고~”
성현제에게 조금 더 바싹 다가가며 목소리를 최대한 낮췄다.
“어떻게 된 거예요? 아무 대책 없이 식 올릴 생각은 아니었을 테고. 혹시 방해한 건 아닙니까?”
너무 얌전하게 옷까지 차려입고 계셔서 말이야. 성현제 또한 작게 말했다.
“목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 이 상황 또한 충분히 즐거우니.”
그가 다시 원래대로 목소리를 높이며 말을 이었다.
“내일모레 마흔의 혼사는 도담 사육소장님께서 책임져 주시겠지.”
“거 제 코가 석 잡니다! 31년 차 솔로에게 뭘 바란담. 예비신랑 소리 듣고 결혼식장에라도 서본 사람이 나보단 낫지!”
성현제가 연애…는 제대로 했을 거 같진 않지만 대쉬는 많이 받았을 테니까. 타인을 자신과 동등한 사람 취급을 해야 연애란 것도 할 수 있지.
요란하게 폭죽이 터지고 수분이 지났건만 식장에 뛰어드는 사람은 여전히 없었다. 도하민이 쥐의 도움으로 살펴보았을 땐 상급 헌터도 여럿 있었다고 하니 아마 무슨 소란이 일든 오지 말라고 막아둔 듯했다.
돌아서서 우뚝 서 있는 마리를 바라보았다. 동그랗게 커진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석상처럼 내내 굳어 있던 그녀가 얼굴을 확 찌푸리며 쓰고 있던 베일을 벗어 바닥에 내던졌다.
“엉망이 되어 버렸잖아!”
화가 난 목소리였지만 그렇게까지 절박하지는 않았다. 아주 중요한 일을 망쳤다, 라기보다는 그냥 어린애 투정 정도로만 느껴졌다.
“마리 씨.”
계단을 훌쩍 뛰어내렸다. 그녀에게 사랑합니다, 라고 말한 순간 메시지창이 떴다.
[대상이 다른 유사한 스킬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키워드 적용이 불가능합니다.]박하율에게 키워드를 적용했을 때와 똑같은 메시지가. 다시 말해 마리는 누님이 아니었다. 박하율과 클로이처럼 누님이라는 자의 스킬을 적용받은 각성자들 중 한 명. 그리고.
‘박하율도 클로이도 뭔가 조금 이상했지.’
박하율은 첫 만남부터 살짝, 음, 나사를 하나 빼놓은 듯해서 잘 몰랐지만 클로이까지 더해지니 미심쩍어졌다. 물론 나는 클로이를 방송으로만 접하였고 방송과 실제가 다른 경우야 흔하다고 하지만, 그래도 타인을 쉽게 희생시킬 만한 사람으로는 느껴지지 않았었다.
‘내 스킬도 나를 양육자로 여기게 하는 추가 효과가 있었으니.’
비슷한 계통이라는 누님의 스킬도 정신적인 이상 효과를 지녔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그래도 설마 싶었는데 마리를 직접 만나자 더더욱 내 추측에 확신이 더해졌다.
마리가 나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그녀 앞으로 다가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연하장을 내밀었다. 마리가 다시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얼굴이 확 펴지자 더욱 어려 보인다. 성현제 이 양심 없는 인간아 납치결혼이라도 어떻게든 도망쳤어야지 꽁꽁 묶어 놨어도 기어서라도 벗어나야 할 판에 두 다리도 멀쩡한데 애가 결혼식장 들어올 때까지 죽치고 앉아 있냐 역시 이 결혼은 반대다.
“뭐, 뭐예요!”
“연하장이죠. 비둘기 싫어하세요?”
“…좋아해요! 하지만 내 결혼식을 망쳐 놓고! 너무 뻔뻔해!”
화를 내면서도 마리가 연하장을 받아 들었다. 은박이 박힌 한 쌍의 흰 비둘기가 들어간 예쁜 카드였다. 퍽 마음에 들긴 한 모양이었다.
“결혼은 역시 좋아하는 사람과 하는 거잖아요?”
용돈 봉투도 내밀었다. 나보다 어려 보이는데. 유현이나 노아 씨 또래 아닐까. 역시 성현제 이하생략 양심 없는 이하생략 반대.
“마리 씨는 정말로 세성 길드장을 좋아합니까?”
“좋아해요, 그야, 물론.”
“솔직히 성격 나쁘잖아요.”
마리가 용돈 봉투를 받으며 입을 꾹 다물었다. 응, 역시 그랬구나. 하기야 근 한 달을 같이 지냈는데……. 음.
“계속 같이 있으라 하면, 싫지 않아요?”
“…조용히 있을 땐, 괜찮았는데.”
“마리 씨는 어떤 사람과 함께 살고 싶어요? 쭉 같이 지내고 싶은 사람.”
마리의 눈동자가 데구르, 굴러간다. 나와 내 주위 사람들을 흘끔흘끔 바라보았다. 연하장 끝을 손가락으로 조금씩 구기며 마리가 입을 열었다.
“나는, 다정한 사람이 좋은데.”
성격 중요하지. 마리가 내가 바싹 다가왔다. 유현이가 반사적으로 나서려는 것을 손을 들어 막았다. 은혜가 있는 데다가 이쪽이 수적으로 훨씬 유리한걸. 비밀스럽게 이야기하고 싶은 듯해 고개를 숙여 주었다. 마리가 내게 속삭여왔다.
“사실은 성현제 님은 너무 큰 거 같아. 저기 오른쪽 끝 정도가 좋아요.”
“노아 씨요? 노아 씨 진짜 동화 속 왕자님 같잖아요.”
“그리고 저 애도.”
예림이도 딱 주인공 스타일이지.
“하지만 나는.”
마리가 뒤로 물러섰다. 긴 드레스 자락이 사르륵 붉은 바닥을 미끄러진다.
“엔딩을 맞이해야 해.”
비둘기 카드가 팔랑, 레이스 사이로 떨어져 내린다. 마리의 주위로 강력한 마력이 휘몰아쳤다. 나 또한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나고 내 앞을 유현이와 송 실장님이 막아섰다. 뒷걸음질 쳐 계단을 한 단 오르는 내 발치로 피스가 다가왔다.
자르르르─ 사방에 달린 유리구슬들이 일제히 흔들리고 촛불이 일순 훅 사그라진다. 순간 어두워진 식장 안으로 달빛이 짙게 스며들었다.
“마리 씨, 어차피 당신이 이기긴 힘들어요.”
마리가 설사 태생 S급이라 할지라도 지금 이 전력으로는 충분히 사로잡을 수 있었다. 이용당하는 듯한 그녀가 걱정되어서도 있지만 누님이라는 인물에 대해 알아내기 위해서라도 포기해 주면 좋을 텐데. 하지만 마리로부터 느껴지는 마력은 더욱 강해지고.
지이잉!
휴대폰이 울렸다. 응? 반사적으로 꺼내자 알람이었다. 혹시나 싶어 맞춰 놓은 열두 시 정각, 자정의 알람. …잠깐만.
‘지금이 자정이라고?’
확실히, 우리가 뛰어내린 건 십 분쯤 전이었는데 폭죽이 다 터진 시간은 고작해야 오 분도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결혼식은─
달빛이 더욱 짙어졌다. 눈앞이 검게 물들었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을 때.
“…여긴.”
별들이 흐르는 어둠 속이었다.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나를 커다란 손이 감싸들었다.
가장 먼저, 성현제가 느꼈다. 느긋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금안이 순식간에 얼어붙으며 한유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직후 한유현이 급히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의 형이었기에.
송태원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갑작스런 위협을 저지하는 대신 공중에 떠 있던 소년을 향해 팔을 뻗었다. 거의 동시에 다른 쪽 팔로 박예림을 낚아채며 몸을 날렸다.
“아저씨!”
“아빠!”
박예림과 한결이 소리쳤다. 한유현이 한발 늦게 피스의 뒷덜미를 붙잡았다. 노아가 치유 스킬과 강화 스킬을 씀과 동시에.
우우웅─
한유진을 중심으로 공기가 울렸다. 보이지 않는 힘이 S급 헌터들을 덮쳤다. 쿵! 공중으로 떠오른 송태원의 몸이 후려쳐진 듯 벽에 처박혔다. 한유현과 노아 또한 마찬가지였다. 길게 뻗은 복도 저편으로 마리가 한참을 굴러가 하얗게 쓰러졌다. 그녀가 서 있던 자리에 베일과 부케, 연하장이 나뒹굴었다.
“…형!”
한유현이 소리치며 일어나려다가 다시 쓰러졌다. 너무도 쉽게 굽혀진 무릎이 꽃 속에 파묻힌다. 붉은 꽃잎이 짓이겨지며 비명처럼 향기를 토해낸다. 장미더미 사이로 피스가 으르렁거렸지만 뛰쳐나가기는커녕 유체화를 풀지도 못했다.
“마력, 이.”
날개를 반쯤 꺼내다 만 노아가 헐떡거렸다. 치유스킬은 늦지 않게 사용했지만 그 이상의 마력은 움직여지질 않았다. 마치 밀도 높은 액체 속에 잠긴 듯 단단히 눌리고 묶인 감각이었다. 박예림과 한결을 보호한 송태원 또한 무성한 수국 사이로 쓰러졌다. 그 위로 등꽃이 후두둑 떨어진다. 박예림도 한결도 연보랏빛과 연하늘빛을 띤 꽃 속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한유진의 눈이 가늘게 미소를 머금었다. 그 눈동자가 은빛을 띠고 있다. 탁, 가벼운 발소리와 함께 계단을 내려선 그가 한쪽 손을 가볍게 내밀었다. 그 손에 떨어진 베일이 들리고, 그가 다시 몸을 돌렸다.
“안녕.”
예복에 맞춘 새하얀 구두가 계단을 밟는다. 단상의, 발끝이 미끄러지며 대리석을 파고든 흔적 끝에 성현제가 무릎 꿇고 있었다. 힘겹게 올려다보는 그의 머리 위로 반투명한 베일이 씌워지고.
“나의 작은 달.”
그녀가 속삭였다. 사락이며 흔들리는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은빛이 스며든다. 부서진 천장 안으로 쏟아지는 달빛이 금속성을 띠기 시작했다. 바닥을 짚은 성현제의 손끝이 움찔거렸다. 기다랗고 하얀 손가락 사이로 희미하게 검은 것이 어린다. 그것을 내려다보며 초승달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너는 똑똑한 아이니까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하였겠지.”
한유진의 목소리가 말했다. 성현제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네 안 어딘가에 조각조각 흩어져 있을 회귀 전의 힘. 그중에서도 월식의 그림자. 그동안 얌전하게, 그것을 찾고 있었을 것이라고.”
회귀 전 던전 속에서 초승달을 물러나게 만들었던 힘. 던전 밖에, S급 헌터의 몸을 빌린 상태의 초승달이라면 그 힘의 조각만으로도 다시 한번 그녀를 쫓아낼 수 있을 것이다. 초승달의 말에 성현제가 입술 끝을 올렸다.
“인사 정도나 해둘까, 했을 뿐입니다만. 어떻게 불러 드려야 할까요.”
성현제가 몸을 일으켰다. 베일이 등을 타고 발끝까지 길게 휘감아 흘러내린다. 달의 마력은 짙었지만 그는 이내 익숙해질 수 있었다. 갑작스럽게 물에 잠기게 된 듯한 다른 사람들과 달리, 오래전 이미 물속에서 호흡해 본 적이 있었던 것처럼.
그의 눈이 한유진을, 초승달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달라진 공기에 적응하고 나자 눈앞의 존재가 터무니없이 강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갖은 제약 속에 갇히고, 심지어 그 원래의 육신은 F급이다.
성현제의 발이 앞으로 내디뎌졌다. 한유진의 얼굴이 그를 올려다본다. 익숙한 얼굴에 낯설기 그지없는 표정, 눈빛. 미세한 근육의 움직임 하나하나조차도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나와 돌아가지 않겠다면.”
커다란 손이 초승달의, 한유진의 목을 잡았다.
“이 아이를 죽이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