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627
625화 해피 엔딩(4)
마리사가 읽고 있던 책이 의자 위에 놓였다. 딸이 결혼하는 날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으리만치 차분하고 수수한 옷차림은 텅 비고 낡은 교실에 홀로 남은 교사처럼 비춰졌다. 어둑한 그림자가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이는, 하지만 세월의 흔적이 분명하게 남은 얼굴 위로 길게 내리덮인다.
“…저는 무사히 식을 마치려고 노력했어요.”
마리가 눈을 깜박거리며 변명했다.
“그런데 S급 헌터들이 아주 많았고 한유진이 갑자기 변하기도 했고요. 그리고 저흰 별로 안 맞는 거 같아요.”
“선택은 그 아이가 하는 것이었지.”
마리사가 나직이 말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갖추어 둘 뿐.”
한유진은 모른 척할 수도 있었다. 성현제를 제물로 바칠 수도 있었다. 자신이나 친분 있는 송태원을 끌어들이기 싫었다면 마리에게 그 역할을 넘길 수도 있었다. 혹은 성현제에게 희생을 부탁할 수도 있었다. 주위의 다른 이들에게 사실을 털어놓고 짐을 나눌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홀로 끌어안았다.
마리사의 시선이 성현제에게로 향하였다. 금안은 서늘하게 차가웠다. 표정의 변화는 없었지만 호의적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는 안광이 감돌고 있었다. 실상 그가 조금만 더 절제의 끈을 느슨히 하였더라면 마리사는 물론 이 앞 저택 전체가 무사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독특하다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성현제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는 과거 마리사와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때 그녀가 평범한 B급 헌터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하지만 굳이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마리사로부터 그와 비슷한 성질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지루하고 따분한 동종의 기운. 태생 S급이라는 것부터가 성현제에게 있어서는 시시한 축에 들었다. 유독 강하고 뛰어난 존재들이란 그만큼 변화의 폭이 좁다. 굳이 환경에 따라 바뀔 필요가 없었기에.
그에 더해 이미 세상에 질린 티가 나는, 그와 비슷한 감성을 지니기까지 한 사람이라니. 그보다 더 재미없는 존재가 또 있을까.
“조금쯤은 관심을 두었어야 했나.”
하지만 마리사의 움직임에 그 주위가 변화하는 것은 즐길 만하다 생각했다. 성현제의 주요 활동 영역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이라는 것도 한몫 더하였다. 그래서 그녀의 특이성을 알면서도 일부러 자신의 눈을 가리고 있었다. 적대적인 세력이든 호의적인 세력이든 중립적인 세력이든 그가 모르는 무언가가 태어난다면 좀 더 재미있게 될 것이니.
일종의 오만이었다. 그 오만이 발목을 잡아챈다 하더라도, 아예 넘어뜨려 버린다 해도 성현제는 오히려 더 즐거워하였을 것이다. 그에게 좀 더 손안에 두어 지켜보고 싶은 존재가 생겨나지 않았더라면.
“언제부터였지.”
“오래되진 않았습니다.”
마리사가 느릿하게 대답했다.
“본래의 저는 초승달과 연관이 없었습니다. 그녀와의 연결점이 생기게 된 것은 당신이 저를 살해한 직후였지요.”
“회귀 전의.”
성현제의 눈이 어둑한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새하얀 산봉우리가 솟아나 있다.
“일이었나. 스위스에서 양을 키웠다, 라고 하더군.”
“자세한 것은 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때의 기억을 가지고 있진 않으니까요. 어쩌면 당신에게 죽음을 부탁하였을지도 모르지요.”
마리사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때의 저는 지금보다 더더욱 질려있었을 터이니.”
태생 S급. 그러나 옅은 마력만을 느낄 뿐 각성하지 못하고서 삶의 반 이상을 살아왔다. 비각성자라 해도 마리사에게 있어 세상은 쉬우며 동시에 지루했다.
“질렸다는 것 치고는 꽤 활발히 활동을 하셨더군. 그것도 세상을 지키는 쪽으로.”
“파괴보다는 보존이 더 어렵습니다. 부수는 건 어린아이들의 놀이일 뿐이지요.”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보존 또한 시시하지 않나.”
“세상은 희생 없이 유지되지 않습니다. 위인들은 대부분 자발적인 희생양입니다. 누군가의 희생 위에 다수의 삶이 이어지고 나아져 가기에 세상은 희생을 찬양합니다.”
자신의 능력, 시간, 때로는 목숨까지.
“또한 인간은 충분히 많으니까요. 그중 일부를 소모해 발전하는 것은 인류의 당연한 흐름이었습니다.”
성현제는 굳이 그 희생에 자기 자신이 포함되어도 같은 말을 할 것이냐고 묻지 않았다. 마리사의 눈에 비치는 모든 인간은 동등했다. 그녀 스스로도 그 중 일부일 뿐 굳이 예외로 두지 않을 터였다. 회귀 전, 무슨 이유에서인지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던 것처럼.
마리사의 태도는 감정 없는 시스템과 흡사했다. 최선의 방법을 찾아 효율적으로 실행할 뿐이었다. 그녀의 삶에 감정적인 가치를 둘 만한 것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자연히 그렇게 자리 잡았다.
“한유진 군이 회귀한 시점은 생각보다 오래전이더군요. 초승달이 접촉해 온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잠들어 있었기에.
“초승달로부터 받은 정보는 말할 수 없습니다. 초승달은 제게 신뢰를 주기 위해 자신의 의식의 일부를 공유해 왔습니다.”
그로 인해 초승달이 바라는 바를 정확히 알고 느낄 수 있게 되었지만 공유된 의식은 발설할 수 없다는 제약이 주어졌다.
“세상을 구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행히도 결혼식은 엉망이 되어 버렸다네. 신랑도 신부도 보시다시피 꼴이 이렇지.”
성현제가 두 팔을 가볍게 들어 보였다. 순백의 예복은 피로 물들어 검게 굳어 가고 있었다. 그의 뒤에 숨은 마리의 드레스 또한 멀쩡하지 못했다.
“당신이 초승달의 손에 떨어졌다면 그대로 모든 일이 마무리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제 초승달은 한유진 군을 대신 얻게 되었지요.”
“···계약이라도 한 건가.”
“계약은 없습니다. 초승달이 몸에 깃들었다 해도 한유진 군에게 있어 소중한 이들을 해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목숨을 해하려는 순간 그 육신과 정신이 강하게 반발할 테니까요. 그러니 강제적인 계약을 하긴 어렵습니다.”
“나는 두 번이나 죽었는데.”
성현제가 조금 뚱하게 말했다.
“죽은 것은 지금의 당신이 아니니까요. 다만 이것으로 두 번.”
마리사는 성현제의 뒤쪽으로 길게 뻗은 복도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한유진 군은 초승달을 받아들였습니다. 세 번째는 지금보다 제약이 줄어들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한유진 군이 거부한다면 여러 조건을 갖추지 않는 한 깃들기 불가능해지겠지만.”
“…원할 수도 있겠지.”
한유진이라면. 성현제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초승달의 힘은 유용한 것이니.”
“그것이 아니더라도 좀 더 오래 자유를 즐기고 싶으시다면 죽이십시오. 당신 뒤의 제 딸과 한유진 군을.”
마리가 움찔 성현제의 등에서 두어 발 떨어졌다.
“현재 준비된 몸은 그 둘뿐입니다.”
“마리 양은.”
“전 이제 세성 길드장님과 결혼할 생각 없어요!”
“그렇다 하고.”
한유진은. 지금이라도 돌아가 충고를 해 줘야 할까. 망설이는 성현제에게 마리사가 말했다.
“너는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단다.”
초승달의 전언이었다.
“언제나처럼 바라만 보며 손가락 사이로 흘려보낼 뿐이지.”
어디에도 머물지 못한 채 지금도. 스스로의 손으로 숨통을 누르거나 물러나 멀어져 가는 모습을 지켜보거나.
“진실한 마음들은 시들어 누우며 다정한 이들은 바람결에 사라지니. 사랑스런 이들은 이미 잠들었으나 너는 홀로 황량히 살아남을 것이다.”
“여름의 마지막 장미꽃 하나.”
영원히 지지 못할 한 송이. 성현제는 웃었다. 초승달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이상 앞으로도 계속해서 스스로를 잃고 포기하는 그 순간까지.
마리사는 의자에 놓여 있는 책을 손에 들었다. 그녀가 마리를 돌아보았다.
“너무 늦게 들어오지는 말거라.”
“…네.”
마리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사가 다시 성현제에게 시선을 옮겼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겨 가는 그녀를 성현제가 묵묵히 바라보았다. 지금과 같은 무력감을 몇 번이나 느꼈을까. 언제나 그 홀로 남아 새로운 정원으로 옮겨지고 여름이 지나 떨어지는 낙엽 사이로 홀로 피어 있기를 몇 번이나.
“잘은 모르겠는데요.”
마리가 자신의 모친이 사라진 방향을 흘끔흘끔 쳐다보며 말했다.
“성현제 님도 힘든 일이 있으신가 봐요.”
세상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해피엔딩이 필요하세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는 시시한 소리라 생각하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두어 해 정도라도 평범한 일상을 누리고는 싶어지는군. 내게는 더 이상 평범한 일상이 아니게 되었으니.”
흔하고 시시한 것이라기에는 손에 넣기 극도로 어렵고 힘든 시간이 되어 버렸다. 성현제는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마리가 그의 뒤를 따라붙었다.
“평범하게요? 뭘 하시게요?”
“글쎄. 식사 초대를 해 볼까. 한유진 군은 투덜대면서도 기꺼이 와 주겠지. 송태원 실장은 조금 까다로울 거야. 그래도 일단 앉혀 놓으면 둘 다 맛있게 잘 먹어 줄 거라네.”
그리고 별것 없는 이야기를 하고.
“나는, 집에 가긴 가야 하는데.”
하지만 가기 싫은 마음도 있었다. 마리가 성현제의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겼다.
“어떻게 할까요?”
“공주님이시니 이제.”
성현제가 마리를 부드럽게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왕위를 물려받아 보는 건 어떻겠나.”
“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면서 마리가 볼을 부풀렸다.
“고집스러운 아이로구나.”
초승달은 미소 지었다. 한유진은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 이대로 달이 지고 해가 떠오른다면 초승달의 힘 또한 거두어질 것이다. 결국 작은 달은 되찾지 못하였지만 초승달은 즐겁게 자신과 연결 된 수많은 가닥가닥의 달빛을 손가락으로 휘휘 감아 흔들었다.
한유진은 성현제를 지킬 것이다. 그가 있는 한 월식은 달을 삼키지 못한다. 작은 달 또한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못할 것이다. 초승달이 가장 큰 근심 하나가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하나 더.
초승달의 손가락이 새로운 달빛 한 가닥을 가볍게 당겼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아주 가늘었지만 그럼에도 분명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하얀 새는 네게서 무얼 본 것일까.”
그리고 한유진의 몸에 깃들었을 때, 희미하게 느껴지던 초승달조차 짐작할 수 없는 힘은.
정확한 것은 이제 머지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결국 두 사람은 선택하게 될 것이다. 한유진이 작은 달을 포기하거나, 작은 달이 한유진을 살해하거나. 혹은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한 채 세상이 마지막을 맞이하게 되거나.
초승달은 결국 홀로 남을 작은 달을 거두어들이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만월이 태어난다. 오랜 시간 끝에 찾아낸 잠들고 싶은 정원을 또다시 잃어버리고 만 달이. 홀로 서는 새로운 신이.
추웠다. 한겨울 산의 차가운 바람 때문만은 아니었다. 속이 얼어붙었다. 꺽꺽 막히는 숨을 토해 내며 눈동자를 옆으로 움직였다. 피에 젖은 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피비린내가 아직도 짙었다.
‘…나는.’
성현제를 내어 줄 수는 없었다. 솔직하게는 그냥 초승달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싶었지만. 나를 감싼 유현이의 팔을 꽉 붙잡았다.
세성 길드장은 내가 걱정할 필요 없는 사람이었다. 강하고 어디 떨어지든 잘 먹고 잘살 테고 자기 자신을 항상 우선으로 할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흔들렸는데.
‘왜, 그런 꼴을 하고 있어서는.’
피투성이가 된 성현제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대체 왜 그 꼴이야. 그냥 평소처럼 멀쩡하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다 해결할 것 같은 모습이었으면. 그럼 초승달에게 끌려가도 어떻게든 알아서 잘 빠져나오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을 텐데.
‘도망치라고 해도··· 말도 안 듣고.’
그러니까 더더욱 어쩔 수 없잖아. 사정조차 말해 줄 수가 없잖아. 혹여 자기는 괜찮다고 말해 버릴까 봐.
“형, 이제 좀 괜찮아졌어?”
내 울음소리가 잦아들자 동생이 다정하게 말을 건네 왔다.
“아저씨, 무슨 일이에요? 말 안 해 줘도 되지만요.”
예림이도 걱정스럽게 물어 왔다. 그래서 더 미안했다. 둘 다 더는 위험할 일도, 마음 고생할 일도 없어질 수 있었는데.
흰 머리카락이 시야에 어른거렸다. 조금 당황하며 내 머리칼을 잡았다. 크리스마스 던전에서는 눈 색만 변했다고 했었는데···…. 아침이 되면 원래대로 돌아가는 걸까. 그리고 초승달은.
“···송 실장님.”
“예.”
갈라진 내 목소리에 송 실장님이 곧장 대답했다. 동생에게 기대 쓰러지다시피 한 상체를 일으키며 주위를 살펴보았다. 아직 달이 떠 있었다. 퍼져 나가는 달빛이 내 마력처럼 느껴졌다. 성현제는 달빛이 닿지 않는 실내에 있는 모양이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건지 그에게 묻고 싶었지만 다시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언제든지, 아이야.]초승달이 내게 말했다. 해가 떠오르고 1일이 지나가 버린다 해도 기회가 전부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나는 두 번이나 초승달과 연결이 되었다. 내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초승달을 불러들여 다시금 거래할 수 있다고 그녀가 말했다.
[대신 네 수명은 어쩔 수 없이 소모될 것이란다. 그렇다 하여도 평화로운 한때를 손에 넣을 수 있겠지.]내가 방법을 찾지 못하는 한 결국 또다시 흔들리게 될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일단, 올라가 있으실래요? 애들도 데리고서요.”
“악, 잠깐만요!”
눈치 빠르게 도망치려던 예림이보다 한발 먼저 송태원이 그녀를 붙잡았다. 예림이가 벗어나려고 발버둥쳤지만 송 실장님은 꿈쩍도 하질 않았다. 노아도 결이를 두 손으로 감싸 잡았다.
-아빠!
“혹시 모르니까. 해가 뜨면 괜찮아진다고 했어. 유현아.”
“난 안 가.”
유현이가 고집스럽게 말했다. 송 실장님도 노아도 일단은 애들을 잡긴 했지만 물러나고 싶진 않은 기색이었다.
“잠깐만이야. 네가 있으면 불안해서 쉬지도 못해.”
-아빠, 결이는 공격도 안 당해!
“아저씨, 혼자 있으면 더 우울해진다고요! 저도 그랬거든요. 그래서 학교 가는 게 좋았는데!”
“···지금은 괜찮아?”
“당연히 괜찮죠! 그러니 같이 있어요. 불 좀 피우고, 천장 제가 막아 줄게요!”
“정확한 상황은 알 수 없지만 저도 한유진 씨 혼자 남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도요, 유진 씨. 말은 안 해 주셔도 괜찮아요. 같이 있어요. 저도 같이 있어서 좋았거든요.”
피스가 끼아앙 애교스럽게 울며 내게 몸을 비벼 왔다.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내가 머뭇거리자 예림이가 재빨리 천장을 향해 안개를 일으켰다. 안개가 굵은 물방울이 되고 이내 얼음 천장이 생겨난다. 이어 유현이가 불을 피웠다. 발갛게 흔들리는 불빛에 모두의 얼굴도 발그레해졌다.
“그 분홍색 가디건 꺼내서··· 어.”
홀로 떠나간 성현제가 생각났는지 예림이가 말끝을 흐렸다. 나도 입이 씁쓸해졌지만 가디건을 꺼내 걸쳤다.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