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730
729화 꿈의 도시 (2)
바람이 희었다. 뺨을 스치고 부드럽게 맴을 돌았다. 햇살을 가득 머금은 물처럼 쉼 없이 반짝거리던 눈앞이 서서히 뚜렷해져간다. 그럼에도 한 꺼풀 얇게 비치는 베일을 쓴 듯했다.
나는 가로로 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커다란 유리문이 활짝 열려 앞이 훤히 트인 채였다. 그 너머로 여름의 정원이 보였다. 초록이 한창이었다. 저마다 부서지는 빛과 흐드러지는 그림자를 품었다. 그 속에서 아주 느릿한 시간의 흐름이 느껴졌다. 여름은 이곳에 있으나 동시에 서서히 떠나가고 있었다. 그 계절의 숨결이 평온했다.
푸르던 잎이 알록달록 물들고 바스락 떨어져 쌓일 때까지 이대로 멍하니 바라만 보아도 지겹지 않을 듯했다. 흰 눈이 소복이 가지의 빈자리를 대신하고 흙이 쩌억쩌억 얼어붙고… 그리고 눈발 사이로 이른 꽃망울이 고개를 내밀 것이다. 눈만큼이나 새하얀 꽃이 불현듯 그리워졌다.
잘랑. 어디선가 작은 종소리 같은 게 들려왔다. 발가락이 간지러운 듯하여 시선을 내리자 하얗게 햇살이 늘어진 맨발이 보였다. 슬리퍼는 낡고 익숙했다. 발가락을 조금 꼼지락거리는 내 앞으로 불쑥 손이 내밀어졌다. 막대 아이스크림이었다. 연하늘색 바를 받아 쥐었다. 동생이 내 옆에 앉았다.
꿈이구나.
“응. 꿈이야.”
스물다섯 살의 동생이 말했다. 편한 옷을 입은 유현이는 여름 방학을 맞은 대학생 같았다. 동생의 손에도 내 것과 같은 하늘색 아이스 바가 들려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그래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살짝 단단한 아이스크림의 끝을 깨물었다. 꿈속이건만 차갑게 단맛이 입안에 퍼져 나갔다. 옆에서도 와삭, 바를 깨무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쩌면 가질 수도 있었을 시간이었다.
유현이는 편안해 보였다.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나를 바라보았다. 반팔 티 아래 드러난 팔도 아이스크림을 쥔 손도 상처 하나 없이 깨끗했다. 문득 예전에 가족을 먼저 보낸 사람의 말이 떠올랐다. 꿈에 죽은 이가 나타났노라고.
‘별말도 없었어. 그저 생시처럼 있다가 갔지. 잘 있다는 말도 없이 그냥 편해 보였어.’
살았을 적 돌보던 화분에 물을 주고 소파에 앉아 창 너머 하늘을 바라보며. 그냥 편안하게.
‘이제는 흘려보내라 하는 거 같더라.’
그렇게 말했었다.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 나 또한 내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유현이를 보내고도 한참이 지났다.
여름의 입구, 늦은 봄으로 시간을 되돌리고 벌써 해를 넘겼다. 여름은 물론이요 가을도 다 지나가고 겨울도 무르익어 떨어질 날만 기다리고 있다. 일 년을 채우진 못했어도 아홉 달쯤 되었다. 움푹 팬 가슴에 얇게나마 새 흙이 쌓일 시간들이 흘렀다.
“내가 미련스러운 거 나도 알아.”
남들이 보기엔 죽은 사람이고 몸뚱이일 뿐일 터였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살아야 하는데.
“나는 아무래도 놓질 못하겠다. 그런 사람도 있는 거 아니겠냐.”
타고나길 그 모양이로 타고난 모양이지. 남은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막대기를 들고서 유현이를 돌아보았다. 동생이 나를 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애정 어린 눈빛이요, 얼굴이었다.
“이런 네 모습 보니까, 더 포기 못 하겠다.”
그 전에 어떻게 지냈는지를 아니까.
“마지막에라도 집에 와야지. 유현이 넌, 나랑 같이 있고 싶어 했잖아.”
욕먹든 말든 어떻게든 붙어 있어야 했는데. 나 버리면 죽겠다고 지랄이라도 쳐볼걸. 상황이 아무리 악화된다고 해도 둘이 마지막까지 부둥켜안고 있는 편이 훨씬 나았을 텐데.
그러니 데리고 와야 했다. 유현이가 머물고 싶은 장소가 내 곁인데, 시체든 뭐든 어떻게 혼자 떼어 놓고 편히 살겠냐. 평생 가슴 칠 거 아니라면 무슨 짓을 해서든 찾아가야지.
“그러니 설사 네가 괜찮다 해도 소용없어. 이건 나를 위해서이기도 해. 내가, 내 손으로…….”
“응.”
한없이 먼 듯 가까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릴게, 형.”
오직 나만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멀어졌다. 물에 잠겨들었다. 공기방울이 흩어진다. 번쩍 눈을 떴다.
[허니!]급박하게 깜박거리는 메시지 창이 보였다. 콜록이며 몸을 일으켰다. 사방이 어둑해 잘 보이지 않았다. 눈이 침침한 듯도 했다.
“어떻, 콜록, 다른 사람들은-.”
[따로 떨어졌어요!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꽤 멀어요. 어, 박예림, 노아, 리에트, 황림. 이렇게 네 명이 같은 지역에 떨어졌고요.]예림이 혼자가 아니라 다행이었다. 황림은 좀 걱정되지만 노아 씨와 리에트가 있으니 괜찮겠지.
[한유현, 피스. 이 둘이 따로 같은 지역에.]같은 시간에 떨어진 사람끼리 모인 모양이었다. 유현이와 피스면 나부터 찾아오겠구만. 이 둘도 별 걱정은 없는데, 설마.
[성현제, 송태원. 이 둘이 따로 같은 지역이에요. 세 팀 다 상당히 떨어져 있어서 빠르게 합류하긴 힘들 거 같아요.]…송 실장님 죄송합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성현제 송 실장님 괴롭히지 마라.
“연락은, 가능해?”
마리가 만들어 낸 꿈의 세계. 하지만…….
“아, 초승달이 여기가 마리의 꿈이 아니라고 했었는데.”
[네, 나무늘보 선배님도 그러셨어요! 마지막에 주체가 바뀐 것 같다고요. 어, 꿈꾸는 자가 뒤바뀌었다나요? 그래서 꿈을 실체화시키는 힘은 오히려 더 강력해지긴 했다는데…….]“…초승달이 심어 놓은 초월자의 씨앗일 거야, 아마.”
대체 어떻게 초월자의 씨앗이 마리를 대신하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초승달의 말을 생각해 보면 그런 듯했다. 그럼 마리 씨와 사미르 씨는 어떻게 된 걸까……. 무사히 현실로 돌아갔다면 좋겠는데.
[초월자! 초월자를 기둥으로 삼았다면, 그럴 법해요. 아무튼 허니, 그곳은 시스템 적용 전에 아직 마나도 불안정해서요.]“…헉.”
잠깐만.
“인벤토리!”
[네. 인벤토리 사용 불가능하고요.]“상태창도 안 열리는데?!”
[스킬도 사용하기 힘들고요.]“아이템도? 은혜야!”
대답이 없네. 보석의 빛이 흐릿했다. 별문제는 없는 거겠지?
[아이템 효과도 발휘되기 힘들고요. 또 스탯도 비각성에 가까운 상태가 될 거예요.]“뭐? 우리 애들 어째!”
나는 그래도 스탯 F급이었다. 물론 레벨도 좀 올렸기에 비각성 때와 차이가 좀 나긴 했어도 내 스탯치는 사실상 아이템빨이 더 크게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S급이었다. 비각성에 가까워졌어도 나보다는 강하겠지만 엄청나게 차이 날 텐데! 이거 피스가 제일 강해진 거 아니냐. 사자는 각성 안 해도 세니까.
아, 이러면 송 실장님이 성현제 제압할 수 있나? 키는 성현제가 좀 더 크지만 힘은 송 실장님이 더 셀 거 같은데. 비슷한가? 그래도 각성자일 때보다 대하기 편하실 테니 그건 다행이었다.
[시스템 적용되면 인벤토리는 쓸 수 있을 거예요! 마나가 안정 되는 건, 조금 더 걸리긴 하는데 그래도 불안정한 흐름 자체에 익숙해지면 괜찮아질 수도 있고요.]“그래, 신입아. 그보다 초월자들은? 초승달은? 일단 내 몸에서는 확실히 나갔는데.”
포션을 쓰긴 했지만 뚫린 어깨가 약간 아팠다. 세성 길드장 가차 없다니까. 그래서 차라리 안심이기는 했다.
[…조심하세요, 허니. 어째서 허니와 초승달의 연결이 더 강해진지는 모르겠지만요. 이 이상은 진짜 위험하다고요!]“어, 응. 조심할게.”
그게 어쩌다 보니 초승달의 과거를 알게 되어 버려서 말이다. 초월자들이 괜히 이름 감추고 다니는 게 아니구나 싶었다. 본질을 아는 것만으로도 연결이 강해질 수가 있으니…….
[허니가 떨어진 꿈의 세계는 초월자들이 비교적 쉽게 간섭할 수 있어요. 그곳도 세계는 세계라 거부하는 힘이 있지만, 원래 세계의 꿈으로 일종의 복사본이잖아요. 그러니 시스템 적용까지 되면 본격적으로 허니에게 집적거릴 거예요!]“그 전에 우리 세계로 빠져나갈 방법은?”
[…없어요. 이동 자체가 시스템의 도움을 받아서 하는 거니까요. 초월자라면 모를까 허니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하잖아요. 그러니 허니, 일단 시스템 적용 전까지 일행을 찾으세요.]“모여 있다가 시스템이 적용되면 바로 빠져나가고?”
[쉽지는 않을 거예요. 방해도 있을 테고 마나도 안정이 되어야 안전하게 이동이 가능한데…….]메시지 창이 크게 흔들거렸다.
[조심하세요, 허니. 실체화의 힘이 너무 강해서 사실상 평범한 세계나 다름없어졌거든요. 여기서 다치거나 죽으면 어떻게 못 해요.]초월자가 당장은 간섭하지 못하니 위험할 일이… 설마. 천천히 주위를 살펴보았다. 어딘지 모를 집안이었다.
“…여기 몬스터 같은 거 있냐.”
[허니 세상 사람들의 꿈이잖아요.]꿈이면.
“어, 몬스터 꿈을 꾸면.”
[나오겠죠……?]세상에나. 어둠을 헤치며 일단 주방으로 향했다. 식칼과 나이프, 포크를 챙기고 식량도 찾았다.
[그래도 마나 상태가 불안정하니 몬스터도 하급뿐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평범한 호랑이도 사람을 찢어 놓는단다.”
라면에 참치 캔이랑 김… 한국이구나. 다른 사람들도 한국이면 좋을 텐데. 우리 세상과 똑같은 크기이니 지구 반대편, 이러면 시스템 적용 전에 모이긴 힘들지도 모른다.
[꿈을 꾸는 시간이 되면 사람들도 나타날 수 있어요.]“사람들이? 그 사람들이 꿈에서 다치거나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건데?”
가방을 찾기 위해 방으로 향했다. 드레스 룸 한쪽에 배낭이 있었다. 찢어진 상의도 갈아입었다.
[꿈에서 다치는 일이야 흔하잖아요. 깜짝 놀라며 깨어나겠죠. 흐릿하게 잊을 수도 있고요. 평범하게 꿈으로 찾아오면 아무 문제 없어요.]“그나마 다행이네. 나랑 마주치면 내 꿈을 꿨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구만.”
[네. 허니를 꿈으로 알겠죠?]그러나 사실은 진짜랍니다. 허리 색을 수선해 식칼을 찼다. 가방에 식량도 챙겨 넣었다. 어느 분 집이신지 몰라도 신세 좀 지겠습니다. 냉장고 속의 물을 마시고 사과를 베어 물었다. 진짜처럼 맛있었다. 싱싱하네.
“차키는 없나.”
이왕이면 트럭이 좋은데. 하급 몬스터야 대형트럭으로 밀어 버리면 되니까. 배낭을 메고 천천히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초월자들은 주로 내게 관심이 있지?”
[허니에게 뭔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시스템을 부순 것도 허니가 아닌가 말하긴 하는데, 불가능한 일이니 도와준 초월자가 있다고도 하고요. 대체 어떻게 한 거예요, 허니?]비밀이라고 할 만한 건 아니니까, 뭐.
“업적 정산. 막판에 내가 성현제 소속이 되었거든.”
[아……! 허니 업적이… 그러네요. 우리는 계산에서 제외했지만 시스템은 기계적으로 모두 포함시켰을 테니……. 그래도 자동 제한 적용이 될 텐데. 그게요, 허니가 임시 관리자 이상의 영향을 끼치는 거 같아요.]들꽃이 나를 시스템 초기 제작자에 끼워 넣어 준 덕이었다. 이것까진 말하기 조금 꺼려져서 그런가 보다 대답하고 말았다. 조용히 문을 열었다. 아파트 복도가 나왔다. 자동 센서 불이 반짝 켜지는 것에 움찔 주위를 살폈다. 고요했다. 한국은 낮인가. 자는 사람이 별로 없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이른 밤일 수도 있고. 요샌 다들 늦게 자니까.
계단으로 내려갈까 하다가 27이란 숫자를 보고 얌전히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스태미너 포션도 못 쓰는데 체력 아껴야지. 아래로 내려가는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는 잘 작동되었다.
“성현제에게는 별 관심 없고?”
[체인이 강한 각성자지만 그 정돈 아니죠. 나중에 빼낼 후보 정도요?]신입은 아직 성현제에 대해 잘 모르니까. 다른 초월자들도 눈치채진 못한 모양이었다. 그럼 우선 타깃은 나겠구나. 마음 같아선 나를 미끼로 두고 나머지 사람들은 돌려보내고 싶은데… 안 되겠지. 일단 유현이는 무조건 남을 테고 예림이도 어떻게든 돌아오려 들 거고.
작은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1층을 누르고 문을 닫았다. 대형 트럭부터 찾아볼까. 근처에 자동차 판매소 없나. 그리고 가능하면 총화기도 찾고…….
띵!
소리가 났다. 1층이 아니었다. 19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추었다. 식칼이 꽂힌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대며 구석에 등을 기대었다. 문이 열리고.
“…어?”
약간 흐릿한 학생이 나타났다. 고등학생쯤 되어 보였다. 눈을 크게 뜨며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한유진 소장님!”
“…아, 네.”
“진짜야! 여긴 어쩐 일이세요? 우와!”
“잠깐 볼일이, 있어서요.”
“피스는요? 피스는 같이 안 왔어요? 어떡해, 근데 왜 혼자세요? 혼자 돌아다니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해연 길드장님은요? 보디가드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또 납치당하시려고! 우리 엄마도 하이고 F급이면 쌩 일반인인데 뭔 고생이 저리 많냐고 안쓰러워 죽겠다시는데! 저희 호메 놈이 F급이거든요. 비리비리해요! 근데 한 소장도 F급이라고, F급도 S급 뺨칠 수 있다고 헌터 하겠다고 나대다가 아빠한테 등짝 맞고-.”
그, 저런. 학생이 1층이 눌려진 걸 확인하고 내 옆에 섰다. 반짝이며 바라봐오는 시선이 살짝 부담되었다.
“같이 사진 찍어도 돼요?”
“물론 되죠.”
“휴대폰… 어? 와, 나 가방 안 들고 왔다. 미쳤나 봐.”
다시 올라가야겠다면서 한숨을 푹 내쉰다. 아무래도 꿈이니까 허술한 면이 있는 듯했다.
“사육소에 방문하면 사진 같이 찍어 줄게요. 이름이 뭐예요?”
학생은 꿈으로 치부하거나 기억 못 하더라도 나는 알아볼 수 있으니까. 내 말에 학생이 더 아쉬워했다.
“서울까지 가야 하잖아요.”
“…어, 여기가 어디죠.”
“부산이요.”
…헉. 억양이 조금 세다 싶긴 했는데 부산이었구나. 바다 근처로 떨어진 걸까. 비행기, 는 불안하고 KTX 운영 되나요. 서울까지 운전해야 하나. 1층에 도착하고 학생은 아쉬워하며 다시 위로 올라갔다. 잠깐 풀린 긴장을 다잡으며 아파트를 나섰다. 하늘이 어둑했다. 대략 9시나 10시? 그쯤 되어 보였다. 아직은 일찍 잠들거나 잠깐 눈 붙인 사람 외엔 깨어 있지 싶었다.
‘차부터 구해야 하니까, 휴대폰 매장부터 털자.’
엘리베이터도 작동 중이니까 인터넷도 되겠지. 상가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그때.
– 크르르르.
도로 위로 푸른 털의 늑대들이 어슬렁거리는 것이 보였다. 초기 던전 브레이크 때 부산에 나타난 하급 몬스터. 누군가의 악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