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744
743화 슬리핑 뷰티 (3)
“한유현 망부석 됐네.”
박예림이 성문 앞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성을 둘러싸고 있던 가시덤불은 사라지고 잠깐 열렸던 성문은 한유진이 들어간 후 다시 닫혔다. 한유현은 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문현아가 무어라 말을 걸었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한유진이 다시 나타나거나 그에 대한 소식을 듣기 전까지는 한유현 홀로 단절된 세상에 머무는 것만 같았다. 한유현이 타인과 소통하는 통로가 한유진이었기에 사실상 다르지도 않았다.
“아저씬 괜찮겠죠? 그 이상한 사람 아저씨 좋아하긴 한댔으니까요.”
“내가 보기에도 걔가 이상하긴 해서 말이야.”
황림이 깃발이 펄럭이는 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박예림이 눈썹 사이를 확 좁혔다.
“참, 중국에서 같이 있었죠?”
“가깝게 지낸 건 아니지만.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앞일 생각 안 하는 인간들 있잖아.”
“대책 없다고요?”
“위기감을 느끼지 못하는 타입? 보통 사람들은 내가 무슨 일을 하면 어떠한 결과가 나올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고 살지. 그런데 박하율은 지극히 충동적으로 움직였어. 한유진을 좋아하니까 구해 줘야지! 라며 곧장 행동으로 옮겨 버렸잖아.”
“…아저씨가 싫어할 텐데도 말이에요.”
“실제로 진이가 화냈지. 하지만 박하율은 그때도 아무 생각 없더라고. 머릿속이 정말 깨끗하다고 해야 하나, 자신감이 넘쳐난다고 해야 하나. 초월자의 씨앗이라면 이해가 가긴 하지만.”
황림이 목을 가볍게 꺾으며 말을 이었다.
“무의식중에 타인을 배려할 필요 없다고 느끼는 걸지도?”
조그만 애완동물을 귀엽다 예쁘다 하면서도 그 짐승이 무얼 원하는지 깊게 고민하지는 않는다.
“우리 진이를 햄스터 정도로 치면 말이야. 주위를 맴도는 고양이를 쫓아내고 안전한 우리에 가두는 정도겠지. 자기 입장에선 이상할 거 하나 없고 햄스터의 찍찍거림은 무시해도 상관없는.”
“진짜 그런 걸까요.”
“그냥 멍청한 걸 수도 있고~ 둘 다일 수도 있고~.”
어느 쪽이든 한유진에게 좋을 건 없었다.
“아저씬 유독 이상한 사람이 많이 꼬이는 거 같아요.”
“인기 정말 많다니까.”
“그러니까요. 바로 옆에도 있고요.”
“세성 길드장 씨 말이지.”
“중국인이요.”
“출신으로 차별하면 안 된다구.”
박예림이 어휴, 한숨을 내뱉곤 발을 떼었다.
“저도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박예림이 성문으로 향하자 피스도 그 뒤를 따랐다. 이내 셋이 나란히 성문 앞에 섰다. 황림이 길게 기지개를 켜며 몸을 돌렸다.
“잠깐 화장실 좀.”
누가 봐도 딴 속셈으로 들렸지만 막아서는 사람은 없었다. 침묵 속에 무기를 정비하는 달칵임만 간간히 들려왔다. 성을 향해 있던 송태원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였다. 중장비 사이로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이 그의 눈에 비춰졌다. 헌터도 섞여 있었지만 그보다는 비각성자 직업군인이 더 많았다.
“평소라면 지켜 줘야 할 이들이지.”
성현제의 나직한 목소리가 송태원의 귀에 찔러들었다. 돌아본 금안이 옅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많은 사람들.”
이곳까지 오며 마주쳤던 사람들. 대다수가 민간인이었다. 평생 무기를 들어 본 적 없는 자들도 있었다. 익숙한 야구방망이며 골프채, 옷걸이 봉 따위를 휘둘렀다. 면접용 정장에 잠옷과 슬리퍼, 앞치마를 걸친 모습도 보였다.
누가 시킨 것이 아니다. 비록 죽지 않고 다치지 않는다 해도 스스로 나선 사람들이었다.
“…저는.”
“즐거워 보였지.”
송태원이 예상했던 비꼬는 목소리 대신 가벼운 미소가 돌아왔다.
“약하고 평범하다 해서 보호만 받기를 원하진 않아. 바로 근처에도 좋은 사례가 있지 않나.”
“…….”
“그러니 송태원 씨도 좀 더 즐겨 보게나.”
송태원은 아무 말 없이 입을 다물었다. 각관실 헌터들의 얼굴이 문득 떠올랐다. 더없이 신나게 자신의 앞을 막아서던 표정들이.
하지만 그는 보호받아선 안 되는 존재였다.
“이런.”
송태원의 침묵 속에서 성현제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송태원 또한 시선을 들어 올렸다. 달빛이 짙어지고 있다.
보이지 않는 막에 가로막힌 듯 성 근처로 접근하지 못하고 있던 달빛이 서서히 뾰족한 지붕을 휘감아 내려간다. 송태원의 턱에 무심코 힘이 주어졌다. 성현제가 흥미 어린 눈빛을 머금었다.
“한유진 군이 달에 홀린 미치광이를 잘 다룰 수 있을까.”
“역시 혼자 보내는 게 아니었습니다. 애초에 이곳에 섣불리 와서는-.”
“결국은 와야 할 곳이니 조금이라도 빠른 편이 나아.”
“예?”
“시간이 흐를수록 박하율에 대한 초승달의 지배력이 더 강해졌을 테니. 아직은 말이 통하겠지만 며칠만 늦어졌어도 완벽한 꼭두각시가 되었을 거라네.”
초월자의 씨앗들은 그러했다. 성현제는 희미한 기억들을 더듬으며 말했다.
“한유진 군이 아닌, 초승달이 깨우게 된다면 더더욱.”
원래의 자아는 잃어버린 채 세상을 삼키기만 하는 멸망의 씨앗들. 그렇게 가득 차 새로운 초월자로 탄생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박하율은 아직 박하율이었다. 점점 더 짙게 성의 지붕을 감싸는 달빛을 바라보며 성현제가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초승달 또한 노리는 목적이 있으니… 씨앗이 불완전하게 깨어나게끔 둔 것이겠지만.”
그렇다 해도 가능성이라도 남아 있는 지금이 더 나았다. 송태원이 미간을 좁히며 성현제를 바라보았다.
“한유진 씨에게 미리 말해 줬어야 하는 게 아닙니까!”
“어디까지나 내 추측이라네.”
“당신은 이 모든 게-!”
구구긍- 공기가 묵직하게 울렸다. 하늘이 떨리며 구름과 달빛이 서로 섞여 산산이 부서진다. 매끄럽게 깨끗해진 하늘, 달의 표면으로 선명한 영상이 나타났다.
[안녕, 여러분!]박하율이었다. 웃고 있는 얼굴이 커다랗게 하늘 위로 비춰진다. 이곳에서만이 아니었다. 대기 중인 각지의 군부대 위로도, 콘서트 장 위로도, 북적이는 공항 위로도 영상이 떠올랐다. 사람들이 박하율을 바라보았다. 선명한 파란색 눈이 한껏 휘어진다.
[나는 이 세계의 주인이랍니다! 짜잔!]박하율이 두 팔을 활짝 펴며 빙그르 돌았다.
[원래는 내가 지구를 멸망시켜야 했나 봐요. 근데 꿈속으로 들어와 버렸네요? 대체 누가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구를 구한 거라니까요! 역시 형이 한 거야?]박하율만 커다랗게 비추던 영상이 주위까지 담아냈다.
“형!”
“아저씨!”
– 크르릉!
한유진의 모습이 나타났다. 연미복 차림의 그는 둥근 창문 앞의 기둥에 묶여 있었다. 창 너머로 쏟아져 들어오는 달빛에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은빛이 스며 감돈다. 한유진이 미친 놈 대하듯 박하율을 노려보았다.
[나 혼자는 아니고, 이 정신 나간 새끼야. 그 머리카락 사실은 잔디지?] [응? 초록색으로 염색할까요? 초록색 좋아해요?] [대가리에 맑은 물이 가득 찼으니 그렇게 풍성하게 잘 자랐지.] [어, 예전에 피스가 이만큼 뜯었는데! 금방 자랐어요! 잘 자라더라고요. 어떻게 아셨어요?]박하율이 해맑게 웃었다. 한유진이 속 터져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정말정말 좋아하는 유진이 형! 세상도 구하고 나도 구하고! 형이 왕자님이 되어 잠자는 나를 깨워 줬지요!] [아니야! 깨울 생각 없었거든!]“잠자는 공주님이라면.”
성현제가 중얼거렸다. 성문 쪽의 문현아도 오, 하고 작게 감탄하고 박예림이 설마 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꽃다발로 처맞고 멋대로 깨어난 거잖아!] [감동이었어요, 형.]박하율이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다시 빙글 사람들을 향해 돌아선다.
[유진이 형은 너무 멋있어서 인기가 정말 많은 거 같아요. 나쁜 사람들도 막 달라붙는 다니까요.] [그게 너다, 너!] [그래서 내가 잘 돌봐 주고 싶었는데, 착한 형은 또다시 날 구해 줬어요.] [아니라고! 사람 말 좀 들어!] [형, 그러다 목쉬겠어요.]한유진을 묶고 있던 덩굴이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한유진이 덩굴을 물어뜯으며 으르렁거렸다.
[그래도 이렇게 성까지 마련했으니까! 기회는 줘야 할 거 같더라고요.] [읍, 으읍!] [형을 정말 많이 생각하는 사람들!]텅, 닫혀 있던 성문이 열렸다. 한유현이 기다렸다는 듯이 안으로 뛰어들었다.
“야! 한유현!”
잠깐 당황해하던 박예림도 한유현의 뒤를 쫓고 피스 또한 둘을 따랐다. 이내 문이 다시 닫히기 시작한다. 문현아가 혀를 쯧 차곤 거리가 멀어 올 수 없는 성현제와 송태원을 돌아보았다.
“뒷일은 맡긴다!”
아슬아슬하게 문현아까지 들어간 직후 문이 닫혔다.
[성문 앞에서 형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야~.]한유진이 허공에 발길질을 했다.
[생각해 보니까 형도 친구는 있어야 할 거 같더라고. 물론 쉽게 여기까지 오면 안 되니까!]쿠르르릉. 성이 커지기 시작했다. 달빛에 휘감긴 꼭대기 층이 순식간에 까마득히 높아졌다. 탑처럼 변한 외벽을 따라 계단이 나타나고 여러 개의 삼각 지붕에 가고일과 비슷한 몬스터들이 내려앉는다.
[그럴듯하네. 아, 하나 더!]박하율이 손뼉을 짝 치고.
– 크르르릉.
거대한 용이 성을 반쯤 감싸며 나타났다. 붉은 비늘을 번뜩이며 입을 크게 벌리더니.
콰아아아-
불꽃이 쏟아졌다. 길게 뻗어나간 브레스가 모여 있던 군대의 절반을 순식간에 휩쓸어 없앤다. 검게 타들어간 땅 위로 불티가 흩날렸다.
[이걸로 형은 준비 끝! 그럼 이제 내 일을 해야겠네요.]박하율이 영상 너머를 내려다보았다.
[근데 꿈속이잖아! 어쩌지?]그가 없애야 할 세상은 이곳에 없다. 이곳은 인어여왕의 바다에 비친 원래 세상의 그림자이자 꿈일 뿐이었다. 박하율이 고민하는 사이 검은 땅 위로 사람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 박하율 알아. 연예인이었는데 갑자기 잠수 탄 지 반년 넘었을걸.”
“용은 어떻게 잡지.”
“Hace frío aqui!”
“Who is 바카율?”
“Um, Korean?”
“야, 저 사람들한테 눈 파랗고 머리색 밝으니 한국인 아니라고 해봐라.”
“뭐 어때, 잡혀 있는 것도 한유진인데.”
이제는 성 주위로도 바로 이동이 가능한지 군인이 아닌 사람들이 속속들이 너른 공터를 채워 나갔다. 그중에서는 반가운 얼굴도 있었다.
“실장님! 무사하십니까!”
“어? 저희 길드장님 어디 가셨어요? 브레이커 길드장님! 언니!”
“저희 길드장님도 안 보이시는데… 한 소장님이 잡혀 계시니…….”
“길드장님, 감기약입니다. 강소영 헌터가 부탁했습니다.”
공손히 내밀어오는 감기약을 성현제가 괜찮다며 사양했다. 세성 길드 헌터들이 쭈뼛거리면서도 앞으로 나섰다.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요.”
“길드장님 앞으로 나설 거라곤 꿈도 못 꿔봤지.”
“우린 꿈은 많이 꿨죠.”
속삭임 사이로 각관실 헌터가 끼어들었다. 세성 길드와 각성자 관리실은 이래저래 엮일 일이 많았다 보니 나름 친하면서도 원수 같은 사이였다.
“한 소자아아앙!”
우렁찬 외침과 함께 시시오가 하늘이 무너진 듯한 얼굴로 영상 너머의 한유진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몬스터 잡는 거 이제 슬슬 익숙해졌어!”
“동생아, 꿈과 현실은 다르다. 깨어나서 헌터 한다고 깝치진 마라.”
달빛 사이로 다시금 쏟아지는 몬스터를 향해 사람들이 저마다 다양한 무기를 들었다. 자신만만하고 의기양양하게 정면으로 나아간다. 박하율이 그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맞아, 헌터!]그랬었지, 하고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거어기, 두 명은 꿈이 아니라 진짜잖아.]박하율이 성현제와 송태원을 가리켰다.
[안 그래도 짜증 났었는데. 저 두 사람을 없애면 내가 선물을 드립니다~.]“…무슨 헛소리야?”
“어차피 꿈이잖아.”
[당신이 원하는 꿈을 현실로!]두 팔을 활짝 벌리며 박하율이 웃었다.
[난 할 수 있거든.]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영상을 향했다. 몇몇이 믿지 못하겠다며 소리쳤다. 박하율이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진짠데. 엄청난 것까진 안 되지만. 그게 되면 지구를 멸망시켰지~ 하지만 개인적인 소원은 현실로 만들어 줄 수 있다고요.]박하율의 뒤에서 한유진이 유독 강하게 몸부림쳤다. 사람들 사이의 술렁거림이 커져갔다.
[많은 돈을 가지거나 나처럼 잘생겨질 수도 있고요. 똑똑해지거나 힘이 세지거나.]박하율이 신나게 떠벌거렸다. 그 말에 무심코 귀 기울이는 사람들 속에서 송태원이 가만히 성현제에게 접근했다.
“피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낮은 속삭임에 성현제가 미소를 머금었다.
“즐거워 보였다 하지 않았던가.”
“…예?”
“보호받는 것은, 결국 당하는 것이지. 하지만 누군가를 지키는 것은 자기 자신이 가장 앞에 놓이는 것이라네.”
그리고 그들은 이미 지켜냈다.
“실장님은 내가 지킨다!”
각관실 헌터가 버럭 소리쳤다. 잠에서 깨어나려는 듯 큰 고함이었다. 그 외침에 세성의 헌터도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이거 평생 자랑거린데.”
헌터가 아니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아 씨, 내가 지키긴 했잖아.”
“난 강남에서부터 따라왔다고. 휴가 내고 계속 자는 중인데.”
“우리가 세상도 구하고 S급들도 구했지.”
내가 보호하고 지켜낸 사람들이었다. 단순한 타인도, 멀리서 바라만 보았던 S급 각성자가 아닌 그들의 업적이자 자랑거리였다. 박하율의 보상에 혹하는 사람들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스스로의 자랑이, 자기 자신이 중요한 이들이 더 많았다.
“사람은 의외로 도움을 받는 것 이상으로 주는 것을 좋아하지.”
성현제가 말했다.
“순수한 선의도 있겠지만 베푼다는 것은 그 자신을 높이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라네. 또한 그 어떤 사람이라 해도 칭찬은 달가워하는 법이야.”
대단해지길 원한다.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욕망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누구보다도 강한 존재들을, 세상을 구한 사람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는.”
“그리고 여기서는.”
성현제가 근처의 차랑 위로 가볍게 뛰어올라갔다. 송태원이, 사람들이 그를 바라본다. 사람들을 향해 성현제가 우아하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감사를 표했다.
그 누구보다도 강하다 칭해지는 S급 헌터가.
사람들의 표정이 바뀌었다. 헌터든 비각성자든 그 누구든. 그들은 가장 위에 서는 자를 지키고 보호하는 자가 되었다. 이 순간 그와 대등하게, 혹은 그 위로 당당히 올라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