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753
752화 속삭임 (3)
“지금…….”
혼돈은 초승달의 말을 이해했다. 하지만 쉽게 받아들이지는 못하였다.
“유사 근원에게 접근하는 초월자들을, 그것을 채우는 데에 쓸 거라고 말한 거냐.”
“대부분은 종속이나 화신을 보내겠지만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무리해 난입하는 자들도 있을 터이니. 약화된 초월자라면 얼마 남지 않은 달을 채우기에 충분해.”
“약화되었다고 해도 초월자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겠다고?”
“제아무리 강한 자아를 지닌 자라 할지라도 수없이 갈아엎어지고 뿌리 없이 떠돌아다니게 된다면 닳고 닳아 스러지기 마련이지. 그러나 그 아이는 바뀌었어.”
그럼에도 살아가려 한다. 금빛 어린 은색 눈이 웃었다.
“스스로가 다룰 수 없으리만큼 쌓이고 쌓인 존재는, 초월자라 하여도 범접하지 못하는 깊이를 지녔으니. 작은 달이 자신의 생을 살아가고자 하는 이상 나는 그 아이를 빼앗기지도, 잃지도 않을 거야.”
이전에는 달랐다. 그때에도 성현제는 죽음으로 도피하려 들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 스스로를 빼앗기고 완전히 잃게 된다면 분명 마지막 자유를 선택할 터였다. 회귀 전 이미 시도했었다. 자신을 삼킬 수 있는 월식을 곁에 두고 그 힘을 이어받아서.
그렇기에 초승달은 성현제를 더더욱 감추었다. 만월에 가깝게 쌓인 달은 초월자라 하여도 소멸시킬 수 없다. 하지만 그 스스로가 협조한다면 이야기는 달랐다. 깎아내고 깎아내어 죽음과 비슷한 상태로는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월식만으로도 위험하건만 초월자까지 손대게 해서는 안 되었다.
“이제는 월식도 위협이 되지 못하니.”
그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살아가기로 하였기에. 어린 혼돈의 눈매가 서늘히 일그러졌다.
“살아가려 하는 녀석은 제 마음대로 살아가게 둬라. 네가, 우리가 손댈 자격은 없다. 어떤 이유에서든.”
단호한 목소리에 초승달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따스하고 무감했다.
“나를 설득하려 애쓰지 마. 이 모든 것을 막을 방법은 두 가지뿐이란다. 단순한 힘, 또는 대신할 방법.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은 아니야. 나는 듣고 있어.”
그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지 않을 뿐, 모든 것을 듣고 보고 느끼고 있다.
“그러니 근원이 세상을 삼키는 것을 멈출 더욱 좋은 방법을 제시한다면. 미련 하나 없이 작은 달을 놓아줄 거야.”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에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더라도. 긴긴 시간이 수포로 돌아간다더라도 초승달은 일말의 여한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다만.
“내가 사랑하는 세상이 삼켜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니.”
“그것을 위해서 그 사랑한다는 세상의 일부를 짓밟겠다는 거냐.”
“그 모습 또한 내가 사랑하는 세상의 일부이니.”
오직 근원만이 그녀의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 그 밖의 모든 일은 모두 공평하게 품어 안을 뿐이었다. 풍요로운 초록 숲도 메말라 부서져 가는 황무지도 도덕과 질서 속의 평화도 무자비한 암흑의 혼돈도 초승달의 눈 아래에는 차이가 없었다. 그저 세상의 흐름이었다.
해야만 할 것도 하지 말아야 할 것도 없다. 서로 어우러지고 부딪치고 죽이고 살리며 이용하고 도와주며 증오하고 사랑하는 그 모든 흐름이 그녀가 사랑하는 세상이다.
“…너는.”
어린 혼돈은 말을 잃었다. 수많은 초월자와 마주쳤으나 그들은 모두 자신의 선을 가진 사람이었다. 저마다 다른 삶을 살아오고 그로 인한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지향하는 선과 악이 뒤바뀌고 완전히 다른 문화가 충돌하는 등 스스로의 기준은 제각각이었으나 분명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달빛에게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많이 변했구나.”
허탈히 그리 내뱉었다. 초승달의 말대로 대안을 제시하거나 힘으로 막아서는 방법 외에는 없었다.
“나도 네가 이렇게 나설 줄은 짐작하지 못했어.”
자신을 막으러 온 초월자를 향해 여전히 오랜만의 손님을 대하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초승달이 말했다.
“시스템은 네 오래된 친구들, 그 자체이니. 초월자들이 악용한다더라도 근본부터 손을 댈 수는 없었겠지. 첫 번째 세계에서 처음과 같이 그대로 지켜나갈 뿐.”
“손대려고 해도 뭘 알아야 손대지. 이래저래 묶이기도 한 몸뚱이라.”
“긴 시간 눈감아 온 죄책감일까.”
혼돈이 짧게 웃었다.
“죄책감 같은 것에 휘둘렸다면 옛날에 뒈졌다. 난 원래 살려고 발버둥치는 어린애를 좋아해.”
어린 것이 살겠다고 매달려 온다면 더더욱. 눈길이 가고 마음이 갈 수밖에 없었다.
“나도 그렇게 살아남았고. 아직 내 세상에 있을 적에 그런 어린 것들 여럿 거둬 키웠고. 그냥 낡은 습관이다.”
스승님, 하며 졸졸 따라붙던 어린 것들.
“초월자라 하여도 결국 원래 살던 세상의 사람이지. 고향이고 집이고. 떠나고 사라진다 해도 벗어날 수 없어. 자기 자신을 이루는 근본이니.”
그것을 밟고 서서 더 높은 곳으로 오르며 성장할 수는 있어도 발판 자체를 치워 버려서야 무너질 뿐이다.
“그러니 이번에도 매달리는 어린애를 주웠고 어느 정도 책임도 질 생각이다.”
“그러렴.”
이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했다. 어린 혼돈은 몸을 돌렸다. 그의 모습이 달빛 사이로 사라져간다. 초승달은 고개를 들어 일렁이는 어둠을 바라보았다.
“새로운 잔에 새로운 물을.”
근원을 대신할 새로운 법칙이 생겨난다 해도 처음에는 혼란이 일 것이다. 그것을 가라앉힐 초월자는 필요했다. 작은 달을 감춘 것은 그 이유 또한 있었다. 만월이 완성되기 전에 유사 근원을 둔 다툼이 벌어진다면 유용한 말을 여럿 잃게 될 것이기에.
하지만 이제는 상관없었다. 여럿이 소모된다 해도 보충할 수 있었다.
“네가 바랐던 대로 될 거란다.”
물방울. 지금은 잠든 인어여왕. 그녀가 만들길 원했던 세상을 삼키지 않는 새로운 초월자의 요람. 그 아이 또한 준비되고 있었다.
* * *
금색 눈이 느릿이 떠졌다. 낯선 얼굴이 그 안에 비춰진다. 상체를 숙여 그를 들여다보고 있던 얼굴이 깜짝 놀랐다는 표정을 짓는다.
“어, 깨어났네! 세성 길드장 진짜 죽은 건가?”
“…너는 뭐냐.”
아직 잠기운이 어린 목소리가 물었다. 황림이 시그마를 부축해 일으키며 대답했다.
“설명하자면 좀 긴데, 일단 내가 이중 스파이 비슷한 거거든. 그런데 한국말 잘한다? 아이템은 없는 것 같은데. 스킬?”
“배웠다.”
“네 보호자한테?”
“보호자?”
“인형술사 말이야.”
시그마가 무슨 말이냐는 듯 미간을 좁혔다. 첫인상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이었는데 말하는 것도 꽤나 거슬렸다.
“내가 보호자다.”
“네가?”
“내 인형이니까.”
그의 것이고 그가 돌봐왔다. 한유진이라고 부르는 걸 싫어하기에 이름도 새로 붙여 주었다. 그러니 당연히 자신이 보호자였다. 황림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주위를 살폈다. 잘 꾸며진 침실은 잠자기 딱 좋게 어둑어둑했다. 천장에는 동글동글한 별 모양 수면 등이 희미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아직은 고요했지만.
“네가 깨어나면 위치를 들키게 되어 있어. 그러니 바로 이동해야 해.”
“이동? 들키다니, 누구에게 말이지. 그보다 여긴 어디냐.”
“노리는 사람이야 많겠지만 일단은 정원사. 어쩌다 보니 인형술사가 사기쳐먹은 꼴도 되어서 열 좀 받았을 거야.”
“…또인가.”
“또라고?”
“역시 원본이 탓이 크겠지.”
시그마는 까마득하면서도 얼마 지나지 않은 기억을 떠올렸다. 그 녀석은 처음부터 속여먹으려고 들었었다. 단순히 겉모습만 복제하는 도플갱어 인형이었다고 하나 영향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황림이 으음 고개를 끄덕이며 인형술사가 건네준 플라스틱 지도를 꺼내들었다.
“누굴 말하는지 알겠다. 아무튼 정원사 널 수거하려 들 거거든. 나비라도 날아오려나.”
“본체가 움직이긴 쉽지 않다고 알고 있다. 종속이라면 상대할 만해.”
“그래? 하긴 너도 오래 살았을 테니 준초월자 정도는 되겠지. 언제 다시 잠들지 모르니까 조심하는 편이 낫겠지만 붙게 된다면 승산은 있으려나.”
손바닥보다 조금 큰 플라스틱 지도에 마나를 넣어 이동 위치를 찾으며 황림이 말했다. 시그마가 눈길을 슬쩍 피했다.
“…다.”
“뭐라고?”
“나는 그놈과 연결되어서, S급이다. 원래는 SS급이었고 더 강해지기도 했었지만.”
시간이 합쳐지며 현재의 성현제와 동일한 등급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C급에게는 비밀로 해라. …람다에게도.”
“C급? 람다는 또 누군데?”
“네 녀석에게 알려 줄 생각 없다.”
“…웬 도련님이람. 인형술사가 곱게 키웠나 보네. 그래도 세성 길드장급 능력이라면 상대해 볼 만-.”
황림이 입을 딱 다물었다. 시그마 역시 미간을 좁혔다가.
“보통이 아니…….”
말하다 말고 다시 잠들었다. 황림이 얼른 쓰러지는 시그마를 들쳐 멨다.
“내가 계약 잘한 건지 모르겠네!”
지도가 또 다른 침실의 위치를 나타내고 무거운 기운이 사방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팔랑, 검은 나비가 날아온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십여 마리가 수십 마리로 불어나고.
화르르-
불길이 일었다. 공간의 벽을 순식간에 녹이며 새카만 불이 나비와 뒤섞여 파도처럼 쏟아졌다. 모든 것을 휩쓰는 화염을 간신히 피하며 황림이 지도를 따라 공간 이동했다. 무시무시하던 열기가 사라지고 새로운 침실이 나타났다. 황림이 한숨을 내쉬며 시그마를 침대에 눕혔다.
“흑염이라니 진이 동생 생각나네.”
지금은 색이 바뀌었지만. 한유진의 동생이 이런 곳에 있을 리도 없었다. 아무튼 일단은 무사히 피했다.
“이대로 푹 자라고, 공주님.”
보호자든 피보호자든 왕자님이든 깨우러 오기 전까지는.
* * *
천천히. 규칙적인 고동이 전해져왔다. 부서졌던 심장이 다시금 뛴다. 무심코 이를 악물었다. 감겨지지도 않았던 금색 눈에 희미한 빛이 감돌다가 스르르 닫힌다. 되살아나고 있다. 성현제는 죽지 않는다. 하지만.
“괘, 괜찮은 거예요?”
예림이가 엉거주춤 공중에 뜬 채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유현이가 당장이라도 내게 달려오고 싶은 표정으로 머뭇거리고 있었다. 살아났다고 말하려고 입을 뗐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크게 숨을 내쉬고 괜찮다는 표시로 손을 저었다. 그 손이 아직 붉은 것에 가슴이 덜컥였다.
안 죽어. 죽지는 않지만.
“하늘에…….”
문현아가 고개를 들었다. 나 또한 시선을 올렸다. 어느새 달이 물러나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거대한 달 주위로 별이 나타났다. 아니, 별이 아니었다. 나는 저 광경을 본 적이 있었다.
초월자들. 그들의 눈길. 초승달의 사슬 아래 쓰러져 가던 별들이 떠올랐다.
근원에 맞먹는 힘을 쌓아 온 존재를 초월자들이 눈치챘다. 아직 들어오지는 못한 채 지켜보고 있다. 길이 열린다면 이내 쏟아져 들어올 기세로. 목안이 꽉 막혔다. 어쩔 줄을 모른 채 되살아난 몸뚱이를 꽉 끌어안았다.
‘…내가.’
좀 더, 조심해야 했는데. 의심해야 했는데. 모두가 새로이 나타난 별들을 바라보는 가운데 나를 향한 동생의 걱정스러운 눈빛이 느껴졌다. 속이 뜨거워졌다. 내 욕심일까 싶어졌다. 내가 발버둥 치면 칠수록 오히려 더 상황만 악화시키는 건 아닐까. 처음부터 그냥 얌전히 있어야 했을까.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하지만 어떻게 그래.
“완전히 조종당한 건 아니야. 최면이나 암시에 가깝지.”
인형술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길게 한숨을 내쉬곤 여전히 멍하게 앉아 있는 박하율을 살펴보았다.
“초승달이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는데. 일단 이 녀석은 깨끗해. 이 녀석을 포기하고 네게 전부 몰아넣었으니 문제지. 그 반대라면 잠재우면 그만인데 귀찮아졌어.”
“……!”
여전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숨만 훅 내뱉어진다. 그것을 눈치챘는지 유현이가 더는 참지 못하고 인형술사에게 재촉하듯 물었다.
“형에게 다가가도 되는 겁니까? 저까지 다치면 안 됩니다.”
“저런 건 틈을 노리는 거니까 괜찮아.”
“형!”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유현이가 내게 다가왔다. 어느새 성벽 밖으로 나온 송 실장님도 접근해 왔다. 두 사람이 내게서 성현제를 떼어 놓으려고 했다. 나도 팔을 풀려고 했지만 제대로 움직여지질 않았다.
“형, 나를 봐. 응?”
“숨 쉬고 있습니다, 한유진 씨. 심박도 안정적입니다. 의식을 잃었을 뿐이니 제가 맡겠습니다.”
“…….”
놓아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안되었다. 유현이가 천천히 내 손을 감싸 긴장을 풀어 주려 쓰다듬었다. 송 실장님도 계속 달래었다. 현아 씨가 예림이와 소영 씨를 막고 다른 사람들 역시 물러나게 했다.
연신 길게 숨을 내뱉었다. 굽어졌던 손가락이 간신히 펴졌다. 유현이가 나를 부축했다. 송 실장님에게 들려 안기는 성현제의 모습이 보였다. 다시 붙잡아야만 할 것 같았다. 유현이의 손이 내 눈을 가렸다.
“일단은 떼어 놓자. 성현제 정신 차릴 때까지만이라도.”
“예. 그러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현아 씨와 송 실장님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그제야 몸이 떨렸다. 초승달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단다.]만월이 차오를 순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