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755
754화 기회 (2)
눈을 깜박였다. 크게 얻어맞은 듯 뒤통수가 얼얼해졌지만 생각보다 별 느낌이 없었다. 마취약에 취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지금, 일부러 이러는 겁니까?”
내 목소리는 꽤나 차분했다.
“초월자들이 그쪽을 노릴 테니까요? 절 떼어 놓으려고 그딴 식으로 말하는 거라면-.”
성현제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약간, 꾸며낸 듯한 안쓰러운 시선을 보내왔다. 어리고 불쌍한 것을 보듯이. 입을 다물었다. 숨이 갑갑해져와 다시 열었다. 내 머리가 생각을 토해냈다. 내가 원하는 결과물은 아니었다.
“…그쪽이, 제가 쉽게 짐작할 헛수고를 할 리가 없겠지요. 위험하다고 억지로 밀어 놓으려 들면, 제가 오히려 더 반발할 거란 것쯤 잘 알고 계실 테고.”
날 떼어놓으려고 차갑게 대한다, 라는 행동은 성현제가 하기엔 너무 얕은 수작이었다. 그렇다면 왜. 입안이 천천히 메말라 갔다. 낯설 정도로 담담한 눈을 마주대하기 힘들었다.
“제가 방심했고 실수한 건 맞습니다. 솔직히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이제는 한유진 군이 걱정할 일이 아니야.”
“지금, 내가!”
버럭 소리치던 목이 콱 막혔다. 자꾸만 팔다리에 힘이 빠졌다. 무슨 헛소리냐며 멱살 잡고 드잡이질 할 기운도 그리고 그럴 자격도 사실 없었다. 어느새 시선이 바닥을 향했다. 설마 이제 와서. 그렇지만 언제든 돌아설 수 있는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들 또한 이런 기분이었겠지. 믿음과 의심이 한데 뒤섞였다.
어지러웠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성현제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대로 도망치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나는 특별하지 않아.’
성현제가 나만 계속 봐줄 이유는 없다. 흥미가 떨어지면 다른 이들에게 그랬듯이 언제든 떠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지금이라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원래 그런 사람이잖아. 솔직히 계속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기도 하고.
멍하니 슬펐다. 무기력함 속에서 지금 이 상황을 피하자는 메아리가 빙글빙글 물결쳤다. 이대로 돌아서서 문을 열고 나가면 위로받을 수 있다.
“…….”
그냥 올 것이 온 거다.
“…아니, 저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조용히 가라앉은 금색 눈동자가 아팠다.
“그래도 성현제 씨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도망치는 대신 말했다. 나는 그를 의심했고 어쩌면 조금 두려워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겪어 온 시간들이 있었다.
“그리고, 저만은 예외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떨리는 손끝을 꽉 잡았다.
“여태까지, 큼, 여태까지 별별 일을 다 함께했는데. 그쪽 생각은 어떤지 몰라도요, 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잖아요. 그, 그 정도면 특별할 수도 있는 거지.”
목구멍이 아렸다. 이런 내 모습이 구차해 보이진 않을까 싶으면서도 내뱉었다.
“저는, 그럴 자격 있잖아…요.”
가슴이 부풀 정도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성현제 씨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자괴감이 밀려들었다. 내가 무슨 소리를 한 건지 모르겠다 싶어졌다. 다행히 더 견디기 힘들어지기 전에 대답이 들려왔다.
“그래.”
성현제의 목소리가 천천히 흘러나왔다.
“나는 한유진 군을 특별하게 좋아했었어.”
…과거형이었다. 달아나지 않으려 주먹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손바닥이 따끔거렸다.
“그래서 묻어 두었다네.”
“…묻어 두다니, 무슨.”
“나는 지치고 낡았어.”
오래된 시를 읊조리듯 성현제가 말했다.
“생은 길고도 지루했으며 다다라야 마땅한 죽음은 박탈된 기억과 함께 흘러내렸지. 그럼에도 살아가길 멈추지 않았으나 그렇기에 그 끝을 바랐다네. 온전한 나로서.”
금색 눈이 살짝 휘어졌다.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한유진 군. 나는 다시금 즐거워졌어. 꽤나 신이 났지. 어린애처럼. 재미있는 일이 가득한 어린아이는 죽음을 생각지 않아. 흘러가는 시간이, 다가오는 내일이 기다려질 뿐이지.”
“…그런데, 그러면.”
나도 느꼈었다. 회귀 전의 성현제와 만나고 더욱 확실하게 체감했었다. 현재의 성현제가 그보다 더 젊어 보였다. 진심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래서라네.”
성현제의 기다란 손가락이 자신의 가슴을 가볍게 내리누른다.
“살고 싶어진 ‘나’는 죽지 않아. 쌓이고 쌓인 힘을 제대로 다루진 못하더라도 그 또한 내 것이니 내 의지에 영향을 받게 되지. 초승달이 거의 차오른 나를 계속해서 감춰 둔 것도 그 때문이었어.”
“성현제 씨가… 죽음을 받아들이려 해서라고요?”
“강제적인 불사를 지녔다 하더라도 만월로 차오르기 전에 무너진다면 초승달이 원하는 새로운 근원이 아닌 단순한 괴물이 되어 버릴 수 있으니. 내가 지쳐갈수록 초승달로서는 신중을 기해야만 했을 거라네.”
완성되기 전에 흠이 생겨나지 않도록. 그 긴 시간 속 수많은 세계를 쌓아가면서도 스스로를 유지해 낼 사람을 또다시 찾아내기란 힘들 것이니.
쌓이면 쌓일수록 불멸에 가까워졌지만 동시에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변했지.”
“…초승달이.”
눈치챘다면. 아니, 알아차렸기에 내게 성현제를 죽이게끔 한 것이었다. 이제 그는 초월자들의 난입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만월로서 채워질 수 있기에.
소리 없는 웃음을 머금은 눈길이 나를 향했다.
“한유진 군에 대한 내 마음을 묻어 둠으로써, 닿을 수 없는 죽음에 대한 갈망을 되찾았다네.”
저릿했다.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 슬펐으며 그렇게까지 해야 하게 만든 내 존재가, 솔직하게 기뻤다. 실패했을망정 나는 틀리지 않았다.
“그, 어떻게.”
“회귀 전의 내가 있었지. 그로부터 꽤 많은 것을 알아냈다네. 그를 표면으로 내세우고 내가 물러난 것에는 초승달을 속이기 위함도 있었지.”
“…회귀 전의 성현제 씨는 여전히 마지막을 원하고 있었으니까요.”
“초월자들과 직접 엮이는 게임에 현재의 내가 참가하는 건 위험요소가 컸어.”
초승달이 지켜보지 않았을 리 없었다. 아마 꽤 혼란스러웠겠지. 그래서 내기 중에는 굳이 관여하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나를 나누는 방법 또한 연습하였고. 쌓인 것 모두가 나지만 동시에 분리되어 있기도 하니. 덕분에 한유진 군에 대한 마음만을 떼어 놓을 수 있었다네.”
“그럼.”
“기억은 그대로야. 하나 그 시간들이 내게 감정적인 영향을 미치진 못하지.”
성현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지금 내 앞에 있는 그는 회귀 후 처음 만났을 때의 그였다. 적당한 호기심을 담은 무심한 시선.
“왜, 말을. 아니, 미리 말할 수는 없었겠죠. 그래도…….”
나는 초승달과 연결된 채였으니까. 하지만 이렇게까지는.
“내가 한유진 군을 배려해 줄 이유는 없어.”
성현제가 단조로운 어조로 말했다.
“돌아나갔다면 그것으로 끝이었을 거라네.”
설명 하나 없이 그대로.
“‘나’는 그러지 않기를 바랐지만.”
“…바랐다고요?”
“그래서 한유진 군의 뜻에 따랐지. 떠올려 보게. 작고 약한 모습으로 한유진 군이 이끄는 대로, 예전의 관계와는 정반대로.”
회귀 전의 성현제에게 몸을 빼앗긴 후의 성현제는… 분명 그랬다. 내 말에 따라 주고 나를 보조하며 도왔다. 꿈의 세계에 들어와서도 먼저 직접 나서는 일은 드물었다. 항상 내가 앞장섰다.
차가운 말과 시선에도 도망치지 않았던 것에는 그런 시간의 영향도 컸다. 성현제가 나를 믿고 따라와 주었었으니까.
“그대로 성공했다면 그것 또한 괜찮았겠지. 실패하였지만.”
대놓고 언급되는 실패라는 단어가 여전히 아팠다. 정말 다르긴 하구나.
“그럼 이제, 어쩌려는 겁니까.”
“초승달이 나를 노출했다는 뜻은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갈 것이라 판단했다는 소리라네. 그러나 나는 죽음을 되찾았어.”
불길한 감각이 등허리를 차갑게 기어 올라왔다.
“먹이를 쏟아부어 주려 하니 그것을 발판 삼아 쌓인 존재를 소화해 보려 시도할 거라네. 성공 가능성은 희박하지.”
“…실패한다면.”
“일찍이 맞이하였어야 했던 마지막을.”
성현제의 시선이 묵묵히 서 있는 송태원을 짧게 향했다. 그 순간 더 참지 못했다.
“죽겠다고요? 그게 방법입니까?!”
눈앞에 선 남자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옷깃만 일그러질 뿐 꿈쩍도 하지 않는다.
“살고 싶다면서!”
“나로서 살아가기 위한 노력이지.”
거친 숨을 내뱉었다. 문득 내게도 아무런 방법이 없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래도.
“송 실장님, 송 실장님은요!”
성현제의 멱살을 놓고 돌아섰다. 송 실장님 앞으로 급히 다가갔다. 묵묵한 눈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송 실장님도 무사할 수 없다는 거 아시잖아요! 왜 다시, 이렇게!”
“한유진 씨는 다정한 사람입니다.”
무겁게 부드러운 목소리가 떨어져 내렸다.
“저 또한 분명 그에 이끌렸습니다.”
“그런데 왜요! 그, 저 학교 지을 거라고 했잖아요. 송 실장님도, 좀 더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을 돕고. 그리고…….”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는 일을 하기를 바랐다.
“예. 한유진 씨가 계속 사람이라 말해 주어서인지 저도 짧은 꿈에 손끝을 적셨습니다. 그러나 제 의무입니다.”
“목숨 내놓을 의무는 없어요!”
“그리고 버려둘 수 없습니다.”
송태원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드리웠다.
“악연입니다. 하나 의지한 것 또한 사실입니다. 세성 길드장은 한유진 씨와 저를 삶과 죽음이라 말했었지요. 제게도 비슷합니다. 성현제는 저를 사람으로 남도록 지탱해 주었고 한유진 씨는 저를 벗어나 걸어가라 당겨 주었습니다.”
“…전, 그런.”
짙게 검은 눈이 느릿이 감겼다가 떠졌다.
“이대로 나아갈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저는 아직 망설이고 있으며.”
송태원의 시선이 성현제를 향하였다.
“저 사람이 온전하길 바랍니다. 회귀 전의 저 또한 비슷한 마음이었겠지요.”
“…송 실장님.”
“이번에도 풀어 주려 시도해 볼 겁니다. 그러나 불가능하다면 그가 스스로를 지키길 바랍니다.”
목소리가 짧게 끊겼다가 다시금 이어졌다.
“저는 그를 지키고 싶습니다.”
“송 실장님께선 나를 무척 좋아하신단 말이야.”
성현제가 웃었다. 송태원이 나를 다정하게 바라보았다. 그 어떤 때보다도 짙게 감정이 어린 눈길이었다.
“그리고 한유진 씨가 무사하길 바랍니다.”
“전…….”
“벗어나지 못하는 저를 어리석다 생각하십시오.”
원래 만들어진 목적대로. 어쩌면 송 실장님은 홀가분하게 느낄지도 모른다. 예정된 길을 받아들여 자기 자신을 괴롭혀오던 존재 자체의 의문과 혐오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달라요.”
울컥 막혀오는 목구멍으로 억지 침을 삼키며 말했다.
“송 실장님 말씀대로, 지키는 거잖아요. 근원이 월식을 만들어 낸 목적과는 다르다고요. 송 실장님은 끝까지 송 실장님이에요. 정말로 끝까지.”
“고맙습니다.”
고개를 저었다. 말과는 달리 어떻게든 막고 싶었다. 억지로 묶어 두기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떠오르는 방법이 없었다.
초승달은 성현제가 살아갈 것이라 생각하고 그를 노출시켰다. 성현제는 그것을 염두에 두고 만약 자신이 사망한다면 생의 의지를 잠재우도록 대비했다. 사실 처음부터 나에 대한 감정을 지우는 편이 안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내게 기회를 주었고 나는 실패했다.
성현제는 죽으려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지키려 할 뿐이다.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었다.
“초승달이 한유진 군까지 노릴 가능성이 높지만 그래도 내게 더 집중하겠지. 틈을 찾을 수 있을 거야.”
“저도 도울 겁니다.”
시선을 들어 성현제를 마주 바라보았다.
“방법은 없지만.”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여전히 지쳤고 여전히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도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컴컴한 어둠 속에서 오히려 더 밝게 빛나고 있었다.
“저는 두 분 모두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습니다.”
이성적으로는 답이 없지만 좋아하는데 어쩌라고. 성현제가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웃었다.
“나는 나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있다네.”
“아주 잘 알죠.”
“내 일부 또한 쉽게 버리지 못해.”
“갑자기 무슨… 설마.”
성현제의 일부. 나를 향한 감정. 금색 눈이 부드럽게 휘어진다.
“내가 다시 한번 한유진 군을 믿고 의지하게 된다면, 묻어 둔 감정 또한 되돌아올 것이라네.”
“…그, 아니 잠깐만요! 결국 같은 짓을 한 번 더 하라는 소리잖아! 믿고 의지? 진짜 하긴 했어요?”
“기억은 남아 있으니 유리하지 않겠나. 감정은 지워져도 이성적으로 한유진 군의 행적을 높이 평가하고 있어.”
“남의 삶에 점수 매기지 말고요! 아무튼 제가 다른 해결책 찾아오면 된다 이거 아닙니까!”
“비슷하겠군.”
“짜증 나니까 웃지 마!”
버럭 화를 내면서도 마음이 놓였다. 조금 울 것 같기도 했다. 망할 인간이 그래도 날 믿긴 했구나. 이딴 열 받는 대책을 마련해 놓긴 했어도, 원래 그런 인간이니까 봐준다. 표정을 가다듬으려 헛기침을 했다.
“일단 서울로 이동할 테니까요, 내려오세요. 저 먼저 나가 있겠습니다. 같이 가면 티 낼 거 같으니까.”
문 쪽으로 돌아서는 내 어깨를 성현제의 손이 잡아챘다. 평소보다 확실히 거칠었다. 그가 내게 작게 말했다.
“마음을 놓지는 말게.”
“…놓기는 무슨.”
손을 뿌리치고 방을 나섰다. 얼굴을 문지르며 계단을 내려가자 윤윤이 보였다.
“대장 김서방! 나 왔어!”
“괜찮아?”
두 팔을 크게 흔들며 인사하는 윤윤 앞으로 유현이가 나서며 물었다.
“어, 괜찮아. 세성 길드장도 멀쩡하고.”
유현이야 관심 없겠지만. 동생이 나를 가만히 바라봐왔다. 묘하게 날카로운 시선이었다.
“서울로 이동해서 재정비하지요.”
꿈속이나마 집에 가서 차분히 생각을 해보자. 아직 기회는 남아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