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76
76화 병아리반 선생님 (3)
“조심해, 형.”
유현이가 내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발 앞쪽으로 작은 불꽃이 흔들리고 있다. 피스가 앞발로 팍, 하고 불꽃을 밟아 끈다.
언데드 군단은 유현이의 불길에 녹아내렸다. 역시 언데드 상대로는 불이 최고다. 화염내성이 있는 검은 골렘은 문현아가 박살 냈다.
몰살시키는 데 한 십 분쯤 걸렸을까. 모여 있으니 더 빨리 끝났다. A급 팀이라면 난전을 피하기 위해 군단을 분산시키는 밑작업이 필요했겠지만 압도적인 화력 앞에선 머릿수 따위 무용지물이었다.
“이건 무슨 조각상이었을까.”
받침대만 남아 있는 조각상을 발로 툭 건드렸다. 새겨져 있던 글자도 훼손되어 알아볼 수 없다.
2층 게이트는 나타났지만 빚쟁이 예림이에겐 마석 주울 시간이 필요했다. 내가 2층으로 가기 전 미리 주위를 안전히 정리해 두기도 해야 했다.
문현아와 성현제가 먼저 올라가고, 나는 남은 셋과 함께 성 안으로 들어갔다. 시간 난 김에 제대로 살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뭔가 알아볼 수 있는 건 하나도 없네.”
그나마 겉은 멀쩡한 성이었지만 속은 텅 비었다. 벽화도 천장 장식도 각종 조각들도 흔적만 옅게 남아 있다.
“그러니까 볼 거 없다고 말했잖아.”
“다른 곳도 다 이래?”
“내가 가 본 곳은 전부.”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싶은 대답이었다. 하긴 무언가 있었다면 회귀 전 5년 사이에 말이 나왔겠지.
‘시스템분들 이야기도 그렇고 명우 선배만 봐도 다른 세계가 있는 건 분명해.’
던전 속의, 우리 세계와 관련 없는 부서진 도시. 예전에는 별생각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불길하게 느껴진다.
‘내 정보를 감춰야 하는, 던전과 관련 있는 누군가.’
설마 그 정체 모를 모 씨를 막지 못하면 우리 세상도 이 꼴 나는 건 아니겠지.
‘진짜 S급 50명만 모으면 되는 건가. 시스템분들, 믿어도 되는 겁니까, 진짜.’
물방울과 나무는 그래도 괜찮았는데 다른 사람은, 특히 사슴은 영……. 하지만 지금의 나로선 다른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일단 믿고 따르는 수밖에.
믿고 따라야 하는데, 갑자기 현타가 온다.
…아니 나는 그냥 회귀해서 편하게 살고 싶었는데. 왜 지금 나는 S급들 드글대는 A급 던전에 들어와 있는 거지. 그냥 유현이가 3년만 갇혀 살아 했을 때 응 그럴게 했으면, 음… 5년 후 세계 멸망 엔딩입니까.
날 대신해 줄 사람은 없나? 그걸 물어 볼 걸. 지금은 좀 그렇고 피스랑 적당한 F급 던전 들어가서 물어보자. 설마 나밖에 없진 않을 거야.
“형, 왜 그래?”
“혹시 피곤하십니까?”
심하게 훼손된 벽화를 한참 멍하게 쳐다보고 있자 유현이와 김성한이 걱정스레 말을 걸어온다.
“아뇨, 그냥 조금… 음, 조금 피곤하긴 하네요.”
내 인생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건지. S급 50명 다 모으고 나면 편해질 수 있을까. 10년 뒤에 시스템 사라지면 특수 스킬 각성일도 손 뗄 수 있을 거고.
그래, 10년만 참자. 딱 10년만 갈리면 돼.
“안색이 안 좋으신데 걸으실 수 있겠습니까?”
“그만 구경하고 나가서 쉬자. 피스한테 올라타. 아니, 태워 줄까?”
– 그르릉.
뭐라는 거야. 스탯이 F급일 뿐이지 오늘내일하는 병자인 건 아니다.
“괜찮습니다. 괜찮아, 걸어 나갈 수 있어.”
까마득하게 높은 천장을 마지막으로 한 번 올려다보았다.
달려 있었을 장식은 사라지고, 외로이 남은 녹슨 사슬들이 바람에 간간히 운다. 크고 둥글게 뚫린 저 빈 공간에는 스테인드글라스라도 있었을까. 어쩌면 전혀 상상치 못한 독특한 무언가가 설치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언젠가는, 네모반듯한 건물과 훼손 된 옥외 광고판을 보며 다른 누군가가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쓸모없는 망상은 이쯤 하자.
“다 주웠어요!”
밖으로 나오자 예림이가 신나게 외친다. 손은 물론이고 얼굴에도 검댕이가 여기저기 묻어 있다. 빚지고 막노동하는 소녀가장이 떠올라 짠해진다. 실제로는 억 단위 부수입 올리고 있는 중이지만.
“손수건 같은 거 없어?”
“그런 걸 왜 챙겨요? 던전 돌다 보면 수건을 박스로 가지고 와도 감당 안 될 때 많은데.”
그야 그렇지만. 물티슈라도 가지고 올 걸 그랬나.
게이트를 통과해 2층으로 들어섰다. 어둑어둑해진 하늘 아래 1층의 두 배쯤 되는 크기의 도시가 황량한 대지 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1층과 달리 2층은 성벽이나 도시 건물이 비교적 멀쩡한 편이었다. 성벽 밖에는 골렘이, 도시 안으로는 언데드가 득시글해 정석대로 하자면 시가전도 겸하게 되는 곳이지만.
‘다 부숴 놨네.’
높고 튼튼한 성벽 한쪽이 모래성처럼 폭삭 무너져 있다. 그 너머로 건물째 몬스터를 밀어 버린 흔적이 보인다.
“수거반 나갑니다!”
예림이가 한쪽 손을 번쩍 들며 퐁퐁 튕기듯 날아간다.
2층에 먼저 올라갔던 문현아와 성현제가 우리 쪽으로 다가온다. 둘의 모습이 가까워지자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그새 둘이 한판 했네.’
저 망할 인간들 같으니라고. 문현아의 왼쪽 팔 부분 옷이 까맣게 타들어가 있다. 성현제의 머리칼도 거칠게 흐트러진 채다.
A급 하위 던전 일반 몬스터 상대론 스치지도 않을 인간들이니 둘이 붙은 게 틀림없다. 유현이도 그걸 알아챘는지 눈이 가느스름해진다. 무심코 손끝을 움찔하는 것이 저도 시비 걸고 싶어 몸이 달아오르는 듯하다.
“현아 씨, 옷이 탔네요?”
모르는 척 묻자 문현아가 드러난 팔뚝을 매만진다.
“실수야, 실수.”
실수는 개뿔이.
“브레이커 길드장님 옷을 상하게 할 만한 몬스터는 여기엔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봅니다. 조심하세요. 제 부탁으로 와 주신 건데 괜히 몸 상하기라도 하시면 면목이 없어집니다.”
A급 몬스터에게 당했냐는 말에 문현아의 눈썹이 삐뚜름해진다.
“형님 너무하네. 고작 A급 쩌리가 내 옷을 태웠겠어? 당연히 저놈이 한 짓이지. 저놈, 저놈.”
대뜸 털어놓는 것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한껏 지어 보였다.
“던전 들어오기 전부터 시비 거시더니, 결국 진짜 싸우셨어요? 일단은 같은 공략 팀으로 온 건데 싸운 게 참도 자랑입니다. 애도 아니고 나이 드실 만큼 드셨으면 기본은 지켜 주셔야죠.”
“아니, 형님. 들어 봐. 형님은 스탯이 낮아서 잘 모르겠지만—”
“스탯과는 상관없죠. 힘겨루기를 하고 싶으시다면 따로 자리를 마련하세요. 오늘은 어디까지나 제 부탁으로 모인 게 아닙니까.”
아무 트러블 없이 신속하게 끝내고 집에 갑시다, 예?
문현아가 억울하다는 듯 성현제를 노려보았지만 성현제는 시침 뚝 떼고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한다.
“형님, 너무 나만 미워하는 거 아냐?”
“그럴 리가요, 착각이겠죠. 제가 현아 씨를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사랑합니다, 문현아 씨.”
“말은 잘하지! 성현제 놈한테도 한 마디 해 줘!”
“아, 네. 사랑합니다, 성현제 씨.”
“그거 말고!”
“아저씨, 저도요!”
“그새 마석 다 주웠니. 그래. 너도 사랑한다, 예림아. 우리 유현이도, 성한 씨도. 피스도 당연히 사랑하고.”
예림이가 내 팔에 덥석 매달리며 짓궂은 눈빛을 보내온다.
“그럼 제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예요?”
이 녀석 봐라.
“사고 안 치고 말 잘 듣는 사람.”
“저 오늘 착했던 거 같은데!”
착한 아이는 남한테 시비 걸지 않는단다. 유현이 넌 또 왜 기대하는 눈빛인 건데. 오늘 제일 사고 안 치고 말 잘 들은 건 역시 피스랑 김성한 씨지.
* * *
해가 저물었다. 아직 너른 도시의 반의반도 공략 못 한 채로.
물론 A급 던전 공략 속도치고는 무척이나 빨랐다. 내일 중으로 끝날 것 같으니 이틀도 안 걸리는 셈이다. 만약 여기 있는 S급들에게 전부 기승수가 있었더라면 하루 만에 공략되었지 싶었다.
화르륵.
사람 머리통만 한 불꽃이 피어올랐다. 모닥불은 아니다. 그렇다고 가스나 전기불도 아니었다. 소소한 던전 아이템 중 하나였다. 던전 공략 중에 저렇게 대놓고 밝은 불을 피우는 건 몬스터의 표적이 되기 쉬워 금기지만, 지금 이 멤버로는 대형 스피커 빵빵하게 음악 틀고 스포트라이트에 미러볼 돌리며 폭죽을 터뜨려 대도 문제없을 거다.
그에 더해 텐트도 꺼내 펼쳐졌다. 던전 부산물로 만들어져 인벤토리에 넣을 수 있는 텐트다. 그렇지만 헌터들은 잘 쓰지 않았다. 텐트는 감각을 가리고 바로 빠져나오기도 불편해 혹독한 환경이 아니고선 그냥 침낭 정도나 쓴다.
“피곤할 텐데 들어가서 자.”
유현이가 작아진 피스를 내 품에 안겨주며 말했다.
“맞아요, 아저씨는 얼른 주무세요.”
“바깥일은 신경 쓰지 마시고 푹 쉬십시오.”
아니, 안 자도 되는데.
“하루쯤은 밤새워도 돼. 피스 훈련시킬 때도 밤새웠는데 뭘 새삼 던전에서 누워 자겠냐. 그냥 빨리 끝내고 나가는 편이 낫지.”
“우리는 계속 공략 진행할 거야. 두 명씩 번갈아가며 사냥하고 돌아오는 식으로 하려고.”
오가는 거리를 생각하면 그냥 내가 따라 움직이는 편이 나을 텐데. 게다가 하필 두 명씩이냐. 이것들 순순히 몬스터만 잡고 올 거 같지가 않다.
“그래도 내가 같이 가는 게 빠르잖아.”
“어두워서 위험해. 그냥 편히 쉬어, 응?”
유현이 놈이 과하게 상냥한 어조와 표정으로 말한다. 옆을 보니 예림이가 눈을 빛내며 얼음나무 창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문현아는 흠집 난 상의를 어느새 갈아입었고 성현제도 장갑이 바뀌었다.
작정했네.
뭐, 솔직히 이만큼이나 내 눈치를 본다는 게 신기한 인간들이지만. 유현이와 예림이는 그렇다 쳐도 나머지 둘은 각성한 이후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고 살아왔을 것이다. 그런 독불장군들이 내 눈앞에서라도 얌전한 게 대단하긴 하다. 그렇지만.
“그래, 자긴 잘게. 하지만 말이야.”
내가 이 방법까지는 안 쓰려고 했는데.
“딱 몬스터만 잡아. 딴짓 하지 말고. 예림이 너도. 다른 두 분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팀원들끼리 싸운 흔적이 보인다면.”
한숨 한 번 삼키고 말을 이었다.
“유명우 헌터에게 이를 겁니다. 제가 싸우지 말라고 혀가 닳도록 말했는데도 무시해서 스트레스로 잠도 못 자고 위도 아프고 눈물도 좀 날 거 같고. 덕분에 화병 났다고, 저 인간 때문에 죽겠다고 이마 싸매고 한탄할 겁니다. 그럼 아주 국물도 없을 거예요. 방송 다 보셨죠? 대기실에서의 일도 들었죠?”
처음에는 무슨 농담인가 싶던 얼굴들이 점점 굳어져 간다. 기승수는 이미 계약이 되어 있지만 명우는 다르지. 명우야, 미안하다, 잠깐만 호가호위 좀 하자.
“아니, 아저씨. 전 아직 장비 제대로 갖추지도 못했는데. 창 하나뿐인데.”
“그럼 안 싸우면 돼. 팀원들과 사이좋게 지내렴.”
“그냥 가볍게 겨뤄 보자는 거지 싸움까지도 안 갈 텐데.”
“동생이라고 예외 없다.”
가볍게는 무슨 가볍게. 내가 랭킹전 한두 번 본 것도 아니고, 십에 팔구는 끝까지 가지 못해서 안달인 인간들이 S급이었다. 딱 10분 둘이 놔둔 걸로 옷이 탔는데 아예 따로 멀리 떨어지면 어디까지 갈지 상상만으로도 골이 아프다.
“아, 그리고 선의의 밀고자에겐 저도 선의를 내어 보이겠습니다. 만족하실 만큼요.”
짜고 증거 인멸할 수도 있으니 덧붙여 두고 텐트로 들어갔다.
– 갸르릉.
“그래, 그래. 피스야. 오랜만에 같이 자자.”
역시 우리 피스가 제일 착하다.
* * *
생각보다 푹 잠들었다가 눈을 뜨자,
[SS급 스킬, ‘살벌한 병아리반 선생님’ 획득!>ㅁ<]메시지창이 둥둥 떠 있었다. 아니 이게 뭐야… 근데 이거…….
‘사슴새끼구나.’
사슴새끼 칭호 스킬 이름 좀 못 짓게 해 주세요.
* * *
– 삐약.
□□□□□□□은 작게 울었다. 오랫동안 아빠가 보이지 않았다. 실제로는 고작 이틀째였지만 □□□의 어린 감각으로는 무척이나 길게 느껴졌다.
– 꺄아! 꺄악!
“블루야, 안 돼! 착하지, 이리 와!”
해연의 A급 헌터가 천장 전등갓에 매달린 어린 그리폰을 향해 손을 뻗는다. 한유진으로부터 주인의 증표를 받았지만 아직 어려서인지 아무리 다독여도 얌전히 있질 못한다.
블루를 억지로 붙잡아 천장에서 떼어 낸 헌터가 시무룩 쳐져 있는 털 뭉치를 돌아보았다.
“삐약아, 왜 그래. 배고파?”
– 삐이.
□□□은 파닥거리며 소파에서 뛰어내렸다. 종종종 느린 걸음으로 향한 곳은 다름 아닌 한유진의 침실이었다.
– 삐약삐약!
“문 열어 줄까?”
열린 문 사이로 들어간 □□□이 작은 머리를 꺾어 침대를 올려다보았다. 파닥파닥 뛰자 헌터가 □□□을 들어 침대 위에 내려놓아 준다.
“아빤 없어요. 내일쯤 올 거야.”
– 삐야.
□□□은 텅 빈 침대 위에 풀썩 주저앉았다. 헌터는 그런 새끼 새를 안쓰럽게 바라보다가 방을 나갔다. 꺅꺅대는 소리가 또다시 시끄럽게 들려온다.
– 삐삐 삐이.
없다.
– 삐약삐!
없다. 불러도 안 온다. □□□은 파닥대며 다시 일어났다. 없으면 찾자.
– 삐약!
아빠! □□□은 힘차게 외쳤다. 그리고 부족한 힘을 끌어내려 애썼다. 만약 한유진이 지금 이곳에서 □□□의 상태창을 확인했다면 놀라운 변화를 볼 수 있었을 것이다.
‘□□□□□□ 성장 후 습득’이,
‘공간의 지배자(L) 획득’으로 뒤바뀐다.
– 삐익!!
그리고,
– …삐야.
실패했다. 역시 부족하다. 배도 고파졌다. 무척이나.
– 삐약… 삐약삐약삐약!!
상태창은 원래대로 돌아가고 □□□은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