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805
804화 두 그루 (2)
피스가 길게 날갯짓했다. 해가 떠 있음에도 별이 비치는 하늘이었다. 그 아래 거칠게 휩쓸려나간 건물의 잔해가 무덤처럼 쌓였다. 분명 서울 한복판임에도 던전을 떠올리게끔 하는 풍경이었다. 문명이 사라지고 그 흔적만 남겨진 옛 세계들.
마나폭풍으로 인해 엉망이 된 구역 너머로 시커멓게 타들어간 폐허가 보였다. 더 태울 것조차 없는 불모지 가운데 두 그루의 나무가 서 있다.
‘세계수종.’
초월자는 온갖 종족들이 섞여 있었지만 그중 가장 수가 많은 것은 의외로 식물종, 특히 거목(巨木)이었다. 일정 격을 넘을 정도의 힘을 쌓으려면 수명이 긴 편이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용종도 수명이 긴 것으로 유명했지만 그보다 한층 더 장수하는 종족이 바로 커다란 나무, 주로 세계수라 일컫는 종족이었다.
더없이 오래 살아 천 년을 넘기고 지성을 지니게 되어 다시 끝없이 성장해 세계의 기둥으로 솟아오르는 만년목.
‘신입네 나무도 세계수종이라 했었지.’
세계를 보호하는 막을 뚫고 억지로 소환되느라 약해져 하늘을 찌를 만큼 크진 않았다. 하지만 내가 본 그 어떤 나무보다 거대한 두 그루가 가지를 퍼뜨리고 있었다.
[세계수종은 전투력 자체는 다른 초월자에 비해 약한 편이에요.]신입의 메시지가 나타났다.
[하지만 한번 뿌리를 내리면 그 회복력이 막강하죠. 사나흘만 지나도 감당 못 할 만큼 힘을 회복할 거예요.]다시 말해 최대한 빨리 처리해야 한다. 두 나무는 충분히 거리를 두고서 땅에 뿌리박은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방어와 회복에 전념할 모양이었다.
“앞의 나무가 엔 두로, 뒤의 나무가 체왕이라고 했지.”
[네. 둘 다 다섯 번째 근원 출신이고요. 다섯 번째 근원에 유독 세계수종이 많이 나타나요.]근원이 나무 형태라서인가. 그럼 세 번째 근원인 가장 깊은 샘은 물에 사는 종족이 많으려나.
“혹시 인어여왕 세 번째 근원 출신이냐?”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세 번째 근원엔 수생 지성체가 많아요.]역시 근원과 해당 세계들의 종족은 연관이 있는 모양이었다. 다른 세 곳은 어떻지. 보통 수금지화목토일 텐데 화속성은 태초의 불이 따로 있었으니 없을 듯하고. 알아서 뭐 하겠냐 싶었지만 신입에게 물어봤다.
[허니에게 자세히 알려 줘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가장 높은 산과 끝없이 흐르는 날개, 모든 색의 보석이 있어요.]흙과 바람, 금속? 빛? 호칭 이상은 알려 줄 수 없다며 신입이 말했다. 가장 높은 산이 어린 혼돈이 있는 첫 번째 근원이 아닐까. 뭔가 어울려.
두 그루의 나무를 살피곤 그 가운데 즈음으로 시선을 옮겼다. 여기서는 망원경을 써야만 겨우 작게 보이는 검은 결정체. 무리 지어 날아다니는 나비가 희미하게 눈에 들어왔다. 유현이부터 먼저 구하고 싶었지만 소환의 주체인 만큼 섣불리 건드렸다간 두 초월자의 협공을 받게 될 것이라 했다. 소환물을 처리하기 전까진 저걸 부술 수도 없었다.
‘조금만 더 버텨 줘.’
형이 금방 갈 테니. 마지막으로 한번 더 확인하곤 아래로 내려갔다. 무너진 건물들 사이에 일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신입 말대로 꼼짝도 안 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꿈의 세계를 장악하면 게임 끝이니까 서두를 필요 없다는 거겠죠.”
피스의 등에서 내려서며 말했다. 결국 마지막 힘겨루기는 초월자 간에 이루어지게 될 거라 생각하기에 약화된 힘을 회복하는 데에만 집중하는 듯했다. 그때 둥글게 포털이 열렸다.
“도깨비왕표 특급 운송, 도착했습니다~!”
윤윤의 쾌활한 목소리와 함께 인형술사와 황림이 나타났다. 시그마야 잠들어 있고 현아 씨는 시그마의 보호감시 역으로 남았다. 황림이 반가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진아! 재회의 포옹-.”
유현이가 한 발 나서며 내 앞을 반쯤 가렸다. 황림이 멈칫하며 유현이를 바라보았다.
“오, 진이 동생 많이 컸는데? 성 모 씨보다 더 큰 거 아냐? 진이가 하루가 멀다 하고 물고 빨고 한 보람이 있는걸.”
“…헛소리 작작해라. 전화로 설명해 줬잖아.”
내가 유현이를 물고 빨고 한 건 뭐, 사실이 아니라기엔 애매하긴 하지만. 스물여섯 살이 아니라… 스물한 살 동생 상대였지. 인형술사는 성현제를 가만히 주시하고 있었다. 뭔가 못마땅한 눈빛이었다.
“대장 김서방은 집에 언제 올 수 있어? 다들 걱정하는 거 같은데.”
윤윤이 공중을 빙글 돌며 말했다.
“이젠 다른 김서방들은 이곳 꿈을 꾸지도 못하니까. 근데 안 돌아와서 도담에도 해연에도 어떻게 된 거냐고 묻는 김서방이 엄청 많아!”
“머잖아 갈 거야. 애들은 잘 있고?”
“응! 분홍 요정은 아빠 생일 파티 할 거라고 벌써부터 준비 중이래. 노랑이 말랑말랑하고 귀여워! 까망이한텐 물렸지만!”
별이한테 장난치다가 설이한테 물렸나 보구만. 내 생일이라. 아직 좀 남았으니 그때까진 돌아갈 수 있겠지.
“계속 잘 부탁해, 윤윤.”
“걱정 마, 대장 김서방! 대장 김서방 집에 오기 전까진 도담에 있을게!”
윤윤이 경례하듯 인사하고는 사라졌다. S급인 성한 씨가 있긴 하지만 유현이도 예림이도 노아 씨까지도 자리를 비웠으니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윤윤이 있어 준다면 무슨 일이 생겨도 애들 대피만큼은 확실히 해줄 테니까.
“성현제 씨.”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성현제라는 존재는 여전히 낯설었지만 나는 분명 그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떠오르는 것 하나 없어도 그런 직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에 대해 깊게 생각할라치면 머릿속에 뿌연 안개가 끼는 것 같았다. 지금도 이렇게… 무심코 눈가를 찌푸렸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진짜 둘만으로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인형술사가 보조해 주기로 했지만 두 그루의 초월자 중 하나를 상대하는 팀은 송 실장님과 성현제, 단둘뿐이었다. 성현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송태원 씨와는 합이 잘 맞는지라. 그렇지 않나.”
“예. 지금의 성현제 헌터는 회귀 전의 경험까지 있는 모양이니까요.”
“대체 두 분이 얼마나 가까웠던 거예요?”
성격은 정말 안 맞을 것처럼 보이는데. 성현제가 미소 짓고 송 실장님이 의무였을 겁니다, 하고 딱 잘라 말했다.
“제 해외 출장 원인의 9할이 성현제 헌터였겠지요.”
“100퍼센트라고 해도 된다네.”
“지금은 한유진 씨의 지분도 큽니다만.”
괜히 가슴이 뜨끔했다. 아니 그게요, 전 제가 나가고 싶어서 나간 게 아니었긴 한데요.
“예림아, 준비됐어?”
“네! 인형술사 아저씨, 가요.”
예림이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인형술사가 그 뒤를 따라갔다. 그럼 다음은. 고개를 돌려 황림을 쳐다보았다. 윙크하지 마라.
“복사 스킬 S급까지 가능하다고 했지?”
“스킬 등급까지, 니까. 상대의 협조가 있을 시엔 S급 칭호와 스킬의 효과를 백 퍼센트 발휘. 훔치는 조건은 비밀이야~.”
“복사 된 스킬이 상태창에도 뜨는 건가?”
“아니. 설명도 없어서 눈치껏 사용해야 한다고.”
그러니까 상대의 스킬에 대해 알고 있어야 복사, 사용할 수 있다는 거구만. 어쨌든 S급까지 복사 가능하다니까 잘되었다. 공격 스킬 두 배를 지닌 베테랑 F급 칭호와 스킬 공유를 지닌 찾을 수 없는 칭호는 둘 다 S급이었다. 다시 말해 황림의 복사 스킬이 칭호의 능력치를 가져갈 수 있다는 뜻이었다.
“네 복사 스킬로 내 공유 스킬을 가지고 가. 그리고 공유 스킬로 네 복사 스킬을 유현이에게 넘겨줘.”
“동생은 다시 형님의 공격 스킬 두 배를 가져오고?”
“그래. 넌 유현이에게 호감이 없으니 미니쿠키 먹고 붙어 있어도 되니까.”
거기에 복사된 스킬은 사용 대기시간도 리셋된다. 황림 이놈 잘만 쓰면 엄청 유용하겠는데. 등급이 딱 하나만 더 올랐으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쉽구만. 공격 스킬 효과 두 배도 좋지만 리에트 단절 같은 것도 유용할 텐데.
황림에게 미니미니 쿠키를 던져 주었다. 놈이 쿠키를 받아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이왕이면 샤오진 가슴에 파묻히고 싶은데 말이지.”
“개가 짖네.”
“동생은 내 취향이 아니라서.”
“유현이가 어디가 어때서- 아니다, 다행이다.”
“아니면 공무원 형님도 괜찮지.”
황림 놈이 송 실장님을 향해 미소를 날렸다. 송 실장님은 못 본 척하고 성현제는 송태원 씨 인기란, 하고 말했다.
“허니랑 공무원 씨라니~ 취향이 극과 극인데?”
리에트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냐, 비슷하게 통하는 부분이 있는 것도 같아. 나도 공무원 씨도 먹음직스럽다고 생각해~.”
“그렇지? 역시 괜찮은 누님이라니까. 누님 동생도 꽤나-.”
“자기야, 쟤 팔 잘라 버려도 돼? 어차피 스킬만 공유하면 되잖아.”
리에트가 정말로 칼을 빼들고 황림 놈이 내 뒤로 숨으려다가 유현이의 발길질을 피해 달아났다. 유현이가 주방에 나타난 바퀴벌레 대하듯 황림을 쳐다보았다. 참고로 유현이는 바퀴벌레가 징그럽다고 느끼진 않는 듯했다. 그냥 형이 싫어하고 위생에 나쁜 퇴치해야 할 해충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
“잔말 말고 스킬이나 쓰고 여기 들어가. 고개도 내밀지 마라.”
허리 벨트에 차는 주머니를 열며 말했다.
“보조 스킬 있으면 써주고.”
“네, 네.”
쿠키 먹고 작아진 황림을 주머니에 넣어 유현이에게 건네주었다. 형이 이런 거 들고 다니게 해서 미안하다.
[아저씨! 도착했어요!]예림이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좋아. 선생님 스킬을 쓰며 피스 등에 탔다. 유현이도 버들잎을 딛고 뛰어 오르고 전룡화한 리에트 위로 성현제와 송 실장님이 올라섰다. 짧게 숨을 들이켰다.
“가자.”
피스가 날개를 펼쳤다. 콰드드, 발톱이 길게 땅을 긁으며 검은 흑룡이 앞으로 튀어나간다.
“리에트, 물길을 마저 잇고 내 쪽으로 돌아와!”
– 응!
리에트가 방향을 틀었다. 한강으로부터 미리 파놓은 물길을 향해 달라간다. 거대한 몸뚱이가 파헤쳐진 수로의 끝에 내려서고 리에트가 지닌 단절의 힘이 땅을 갈랐다. 콰과과과- 순식간에 흙이 파헤쳐지며 길이 이어지기 시작한다. 흑룡이 점차 다가오고 있음에도 두 그루의 초월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긴 저 크기면 리에트도 강아지가 흙장난 하는 수준으로 느껴지겠지.’
수로가 엔 두로 앞을 지나친다. 넓게 퍼진 뿌리에 닿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둔 채 거의 달리는 것과 다름없는 속도로 체왕을 향해갔다. 그대로 두 번째 세계수까지 도착한 뒤 리에트만 돌아오기로 했다. 나를 보호하고 여차하면 유현이를 도와줄 대기 역이었다.
“아, 아.”
확성기에다 입을 대고 가볍게 소리를 내보았다.
“신입아, 너도 준비됐지?”
[네, 허니. 신호 보내면 바로 초월자들이 들을 수 있게 연결할게요!]“좋아. 유현이 너도 준비하고.”
하늘을 가릴 듯이 무성한 나뭇가지를 올려다보았다. 어두운 푸른빛이 도는 줄기는 나무라기보단 금속덩어리처럼 느껴졌다. SS급 흑혈염조차 태울 수 없는 극히 단단한 철목. 엔 두로는 세계수종 중에서 강력한 전투력을 지닌 초월자였다. 가지와 잎, 뿌리 그 모두가 날카롭고 단단한 무기였으며 한번 활동하기 시작하면 얽힌 줄기와 뿌리들이 짐승의 형태로 뭉쳐 변화하여 속도 또한 빠르다고 한다.
[자기야, 끝!]리에트의 메시지가 나타났다. 동시에 예림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예림아, 지금!”
쾅! 저 멀리 수로를 막아 놓았던 벽이 터져나간다.
[물 출발~!]구구구구- 이내 엄청난 양의 물이 쏟아져 들어오는 울림이 느껴졌다. 수로를 가득 채우며 물결이 높게 치솟는다. 그 사이로 눈동자 색이 변한 인형술사가 보였다. 그가 나를 흘끔 쳐다보았다.
“그대로 송 실장님 쪽으로!”
열기에 바싹 메말랐던 땅에 물이 넘친다. 수분이 느껴지자 세계수가 이내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드드드득, 기다란 뿌리 몇 개가 땅을 파헤치며 물줄기를 향해 뻗어왔다.
“역시.”
유현이의 불에 의해 수분을 죄다 빼앗긴 땅이다. 세계수도 나무인 만큼 물을 원하겠지. 막 다른 세계로 뚫고 들어오느라 피곤한 상태라면 더더욱. 엔 두로는 물론 체왕 또한 물을 흡수하기 시작했다고 송 실장님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이걸로 밑작업은 끝났고.
“하율아, 깨어 있냐? 한 번만 힘내고 푹 쉬자!”
[네에에에.]내내 기절해 있다가 겨우 깨어난 박하율이 힘없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신호 잘 들으라고 말하곤 확성기를 들었다. 하늘 위로 반짝이는 별들이 보인다. 거 가운뎃손가락이라도 들어 주고 싶구만. 하지만 지금만큼은 소중한 시청자들이지.
“내 동생 유현아.”
스킬을 쓰기 위한 말이었건만 괜히 속에서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우선 스물여섯 살 생일을 다시 한번 축하한다. 제대로 챙겨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아니야, 형.”
유현이가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마른침을 한번 삼키곤 인벤토리를 확인했다. 시계.
‘…두 개를 준비하길 잘했지.’
아직 전해 주지 않았다. 스물한 살의 유현이를 구하면 함께 선물하고 싶었다. 너희 둘 모두를 똑같이, 하지만 다르게 품고 있었노라고 말하며. 스물여섯 살의 유현이의 상태가 나쁘긴 하지만 이번 전투를 하더라도 며칠 정도는 더 버틸 수 있을 거라 했으니까. 그러니까 두 명의 동생에게 함께. 그리고 나도… 시계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항상 너를 되찾고 싶었어. 많이 틀어지고 지치고 아파서 결국 제대로 표현하지도 못하는 지경이 되어 버렸었지만, 언제나 그랬다. 다시 옛날로 돌아가고 싶어서. 그래서 여기까지 온 거야.”
그저 그것뿐이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세상을 구하든 반대로 멸망시키든 그 어떤 대단한 목적을 가졌든 아무래도 좋았다. 알게 뭐야, 멋대로들 하라지. 나는 그저 내 사람들 붙잡고 살아가려는 것뿐이니.
“마지막 순간에 이 말을 꼭 해야 했다고 몇 번이나 후회했다. 유현아, 사랑한다. 형은 널 정말 많이 사랑해. 그리고 고맙다. 너는 정말…….”
회귀 전의 기억들이 우르르 떠올랐다. 우리 애 스킬이 발동된다는 메시지도 나타났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단번에 쏟아냈다.
“최고였지! 한국 최고의 헌터이자 길드장! 사실상 세계 1위! 이제는 우리 세상 최초이자 유일한 SS급이기까지! 내 동생이 최고다, 가자!”
[예에에에.]박하율의 맥없는 대답과 함께.
우르르르-
세계수 앞의 황무지에 온갖 물건들이 나타났다. 박하율이 옮겨다 준 태우기 좋은 것들이었다. 유현이 능력치 올리려면 많이 태워야 하는데 여긴 더 태울 것도 없거니와 저놈의 나무는 잘 타질 않으니까. 하율아, 수고했고.
“형, 물러나.”
화르르, 유현이의 손끝에서 불길이 피어오른다. 얼른 거리를 벌렸다. 동시에 예림이가 얼음나무 창을 높이 들어 올렸다.
“인어여왕 선배님의 바다아아!”
박하율의 힘이 약해져 전처럼 인어여왕의 바다를 전부 끌어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미리 준비한 물을 통해 그 능력 일부를 불러오는 것은 가능했다.
스킬 무효화 능력.
‘원래라면 유현이까지 휩쓸리겠지만.’
예림이와 인형술사가 끌어온 물은 전부 사라졌다. 두 그루의 세계수, 나무의 몸속으로. 본래라면 다른 각성자의 신체 안의 물은 외부에서 조종이 불가능했다. 상대가 자신보다 한참 약하다 해도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예림의 마나를 미리 듬뿍 넣어 놓고 인형술사가 특수 처리까지 한 물이다.
‘거기에 조종이라기보단 단순한 스킬 무효화 발동일 뿐이니까.’
불길이 번져 나간다. 유현이의 능력치가 빠르게 상승하는 것이 느껴졌다. 모든 능력치 두 배, 고독한 공략자 버프, 재의 발자취 버프, 불의 축복 버프, 홀로 타오르는 길 버프.
단신으로 불길에 휘감긴 한유현은 틀림없는 최강의 헌터였다.
구구궁-
위력을 더해가는 열기가 심상치 않아 느꼈는지 세계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뿌리가 들리고 가지들이 접힌다. 유현이의 손이 허공을 훑었다. 그 손길을 따라 십수 개의 도검이 나타난다. 도검 포식자. 녹아내리는 SS급의 검들. 검붉게 타오르는 쇳물이 하얀 손에 들린다. 공격 스킬 효과 두 배 버프.
– 조그만.
엔 두로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울렸다. 유현이의 앞을 거대한 가지가 막아선다. 방어 스킬이라도 쓰듯 마력이 강하게 휘감기고.
쾅!
녹아내린 검과 가지가 충돌한다. 세계수와 그 힘이 맞먹었으나 베지는 못했다. 그러나.
“됐어요!”
예림이가 소리쳤다. 꿈의 바다의 스킬 무효화 효과. 그것이 세계수의 몸 안에서 발휘되었다. 전신으로 퍼진 생명수가 독으로 화한다. 동시에.
콰드득-!
유현이의 검이 가지를 갈랐다. 쿵. 어마어마한 크기의 가지가 추락하고 굶주린 늑대 무리처럼 달려드는 불길에 휩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