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814
813화 이상형 (1)
멍하게 열린 창문을 쳐다보았다. 나는 성현제에 대해 잘 모른다. 원래는 가까운 사이였던 듯하지만 기억을 빼앗겨 버렸으니까. 하지만 이런 식으로 슬쩍 튈 인간은 아니었던 거 같은데. 무슨 산책이라도 하듯 자연스럽게 달아나 버렸잖아!
“성현제!”
쫓아가려다가 멈춰 섰다. 송 실장님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웃고 있는 양과 그 위의 지친 얼굴이 보였다.
“쫓아가십시오.”
“어, 아니에요. 어차피 멀리 가지도 못할 거고요.”
오히려 따라가지 않으면 뭐 하나 싶어 도로 돌아오지 않을까. 왠지 그럴 것 같았다. 송 실장님의 젖은 먹물 같은 시선에 조금 멋쩍게 웃어 보였다. 그렇잖아도 검다는 이미지가 강한 사람인데 저렇게 새카만 양에 파묻히기까지 하니 정말로 먹을 뚝뚝 떨어뜨리고 크게 휘저어 만들어 낸 것만 같았다. 장소도 마침 교실이고, 어디선가 묵향이 스미는 듯했다. 요새도 붓글씨 수업 하나. 초등학교 다닐 때 배웠었는데.
“음, 제가 아까 좀 횡설수설했었죠? 하지만 저한테 있어서 송 실장님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냥 사람이에요. 어떤 본질을 타고났든 상관없어요. 그것만큼은 확실해요.”
“괜찮습니다.”
“또 괜찮으시대.”
“이번에는 정말입니다. 저는 결국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양의 털 위에 얹어진 손끝이 검은 털을 얕게 쥐었다 놓았다.
“한유진 씨와 성현제 헌터의 말대로 저는 지켜지고 있었습니다.”
“…네. 분명히요.”
“동생은 저를 사람으로 살도록 붙잡아 주었습니다. 그날 그 순간 이후로 제 근원은 동생이었을 겁니다.”
송 실장님은 스스로의 마음을, 생각을 정리하듯 천천히 말을 이어 갔다.
“비록 감당하지 못해 잊고 묻어 두었지만 틀림없이 제 속에 자리 잡았으며- 그로 인해 저는 송태원으로서 남을 수 있었습니다.”
형을 감싸면서 지키려 애쓰던 어린 소년이 눈앞에 선했다. 입안에 씁쓰레한 것이 감돌았다.
“각성 후에는 흔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월식의 힘이 완전히 깨어나고 여느 인간과는 전혀 다른 존재나 마찬가지인 S급이 되었으니까요.”
“…당연히 거부감이 드셨겠지요. 기억에는 없어도 본능적으로라도요.”
“솔직하게 말씀드려.”
송 실장님이 짧게 한숨을 흘렸다. 지금까지의 고뇌와는 또 다른 감정의 그림자가 그의 눈언저리에 맺혔다.
“성현제 헌터에게 의지했습니다.”
“어, 음. 그럴 수도 있죠.”
내 기억. 기억이 필요해. 성현제가 분명… 송 실장님을 괴롭혔던 거 같은데. 머리를 싸매자 희미한 감정이 떠오르긴 했다. 불쌍한 우리 송 실장님.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성현제 헌터의 성향상 자신의 흥미와 즐거움이 우선이었겠지만 동시에 그는 자신이 저를 지탱해 주고 있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었을 겁니다. 제가 스스로의 무게에 짓눌려 질식하지 않도록 앞에 서서 목표가 되어 주었습니다.”
…성현제에 대한 기억은 없었지만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송태원이 막아야만 하는, 그의 한층 우위에 서서 힘을 휘두르는 괴물 중의 괴물. 그에 더해 성현제는 월식이 삼켜야 할 유사근원이었다. 송 실장님은 성현제를 상대하면서 어떤 안정감 같은 것을 얻지 않았을까.
물어뜯어야 하는 본능을 채워 주면서도 동시에 사람들을 지킨다는 만족감까지 가져다주는 상대.
“성현제 헌터로 인해 힘든 일은 많았지만…….”
송 실장님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음, 참 많은 일들이 있으셨나 보구나. 떠올리자면 한도 끝도 없을 거라는 표정이었다.
“제게 사람으로서 남을 바탕을 만들어 준 것은 동생이며, 그 위에 서서 버틸 수 있도록 지탱해 준 것은 성현제 헌터입니다. 그리고 한유진 씨는.”
내게도 복잡한 시선이 닿아왔다. 저도 사고 꽤 치긴 했죠… 네.
“멈춰 선 제 앞에 놓인 길입니다.”
…뒷덜미가 조금 화끈거렸다. 그, 뭐냐, 편한 길은 아니고 억지로 들이밀기도 했겠지만 말이야. 그래도 저 말을 들은 것이 기뻤다.
“가만히 놓인 게 아니라 발목 잡고 끌어당기는 하였지만요.”
“아니, 그게요, 죄송합니다.”
“성현제 헌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쓰러지는 것을 붙잡아 준다기보다는 걷어차 세우는 쪽이었죠.”
아무런 유감없다는 듯 담담해서 더 양심이 아팠다.
“제게는 그러지 않고선 소용이 없었을 겁니다.”
“아뇨! 그냥 무조건 저랑 성현제 씨가 잘못했습니다! 특히 성현제 씨는요!”
“저는 앞으로도 답답하겠지요.”
딱딱한 입매 위로 아주 희미하게 미소가 그려졌다. 홀린 듯 그것을 바라보았다. 짙게 그어진 먹 위로 점점이 붉고 작은 열매 하나가 맺힌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내 다시 검게 뒤덮인다.
“아직 혼란스럽고 모든 것이 어렵게만 느껴집니다. 지금으로서는 모르겠다는 대답 외엔 할 수가 없을 듯합니다.”
송 실장님의 눈이 가만히 감겼다가 다시 떠졌다. 지금은 이걸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성현제 헌터가 한유진 씨의 기억을 빼앗아 갔다는 사실은 확실히 인식하신 모양이로군요.”
“아, 네. 여기가 성현제 씨의 의식 속이기도 하다 보니 제 기억과 약간 연결도 된 거 같더라고요. 잊은 기억에 대한 감정도 느껴지고요.”
“다행입니다. 그동안은 성현제 헌터에 대한 이야기를 아예 듣질 못하셔서 걱정했습니다.”
아예 못 들었다면 서랍 속에서의 침묵이 역시 진짜 침묵이 아니었겠구만. 그렇다면 지금이 기억을 되찾을 유일한 기회나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나가게 되면 또다시 기억을 빼앗긴 사실을 제대로 느끼지 조차 못할 테니까.
“성현제 씨는 대체 왜 남의 기억을 훔쳐갔대요?”
“원래 성현제 헌터는 전류 외의 스킬은 쓸 수 없었습니다.”
“네? 진짜요?”
별별 거 다 쓰던데. 송 실장님이 내게 성현제는 여러 세계를 거쳐 왔으며 그 세계에서 가졌다가 잃은 스킬은 사실 성현제 안에 쌓여 있기에 중복 습득이 불가능하다고 설명해 주었다. 온갖 스킬을 지녔지만 쓰지 못할 뿐이었다고.
“그걸 제 기억이…….”
대체 어떻게, 라고 생각하자마자 양육자 칭호가 떠올랐다. 완벽한 양육자의 힘. 그랬었던 것 같았다.
“성현제 헌터는 쌓인 힘을 끌어내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초승달로부터 벗어나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쉽지 않은 일이기에 제가 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패 시 그가 그 자신으로서 마지막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죠.”
“그럼 송 실장님께서도… 무사하지 못하실 텐데요.”
“저는 그것을 위해 태어났습니다.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도와주고 싶습니다. 저는 성현제 헌터가 스스로를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안 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눌러 삼켰다. 송 실장님이 월식으로서가 아니라 송태원으로서 원하는 일이었다. 나로서는 성현제가 성공하길 바라거나 또 다른 방법을 찾아내는 것 외엔 참견할 수 없었다.
“…그럼 제 기억을 성현제 씨가 계속 가지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성현제 헌터는 한유진 씨에게 설명하고 동의를 구해야 했습니다. 그러니 가십시오. 대화를 하고 한유진 씨께서 스스로 결정하십시오.”
송 실장님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 내 기억이고 내가 결정할 일이지.
“네. 송 실장님께선 푹 쉬고 계세요.”
몸을 돌렸다. 활짝 열린 창문 너머로 날아올랐다.
* * *
송태원은 한유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금빛 날개가 펼쳐지고 새파란 하늘을 너르게 가린다. 한 조각의 햇살이 이내 멀어져간다. 그는 액자 속에 담긴 것 같은 하늘과 구름에 가만히 시선을 두었다.
한유진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를 감싼 이들은 송태일과 성현제, 한유진 외에도 존재했다. 송태원을 믿고 따라 준 사람들. 송태원은 그들에게 벽 하나를 두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송태원을 좋아했다. 월식의 타고난 본질을 몰라서일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송태원은 꿈의 세계에서 그를 지키려 하던 이들을 떠올렸다. 그들의 상사는 더없이 강한 S급 헌터인데도 지금도 걱정을 하고 있을 것이다.
‘…돌아가야, 겠지요.’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작게 고개를 들었다. 무사히 돌아간다면, 그때는 조금쯤 달라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 * *
“성현제 씨!”
크게 소리쳤다. 평화로운 시골 마을이 발아래 펼쳐져 있었다. 인기척 없이 냇물만 졸졸졸 흘러간다. 송 실장님이 있는 학교는 저만치 멀었다. 덩그러니 동떨어져 있다.
“말로 할 테니 나와 보시죠!”
대화로 해결하자. 어차피 그쪽도 약하진 않으면서 왜 숨고 그러냐. 하지만 성현제는 보이지 않았다. 으음.
“그쪽 가고 나서 송 실장님이 고백했습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속마음 털어놓으셨으니까.
“궁금하지 않습니까! 5초 내로 나오면 말-.”
“나왔다네.”
“으아악!”
기겁하며 오른쪽 귀 근처를 털어냈다. 뭐야, 뭐야! 급히 날개를 퍼덕여 물러나며 주위를 살폈다. 성현제 목소리였던 거 같은데, 은신 스킬인가? 스킬 등급이 대체 얼마나 높기에 느껴지지가… 어.
분홍빛 작은 무언가가 팔랑거렸다.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미친.”
요정 날개를 단 조그만 성현제였다. 정말이지 이해되지도 않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모습이었다. 저 인간 대체 뭐지. 왜 저런 꼴로 나타난 거야. 저딴 스킬은 뭐 하러 얻은 거지. 나도 미니미니쿠키 있고 유용하게 쓰긴 했지만 분홍색 요정 날개는 달지 않았다고.
작아진 데다가 이상하리만치 존재감이 옅어져서 눈치채지 못한 듯한데, 진짜 뭐냐.
“예전엔 귀엽다고 해주더니, 그새 마음이 식었군.”
“애초에 기억 자체가 없거든요. 제 기억 가지고 간 건 그쪽이잖습니까! 그보다 귀엽긴 무슨…….”
작다고 다 귀여운 줄 아나. 어쨌든 얼굴이 되니까 안 귀여운 건 아니지만 우리 애들이 훨씬 더 귀엽다. 성현제가 빙그르르 맴을 돌며 날아올랐다. 또 어딜 가려고. 내 손에 삐약이 수거용 잠자리채가 들렸다.
“잠깐만 이리 와보십쇼.”
“박제는 사양이라네.”
“저도 필요 없거든요?”
휙! 잠자리채를 잽싸게 휘둘렀지만 성현제는 순간이동해 빠져나갔다. 내 기억 내놔! 요정날개가 순식간에 커지며 검게 물든다. 빠르게 멀어져가는 빛바랜 뒤통수를 바싹 쫓았다.
“필요하다고 제대로 설명하고 부탁하면 빌려줄 수는 있습니다!”
아예 내줄 수는 없지만 무사히 초승달에게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면 야. 송 실장님 목숨도 걸려 있는 판이니까.
“그러니 일단 내놓고, 차용증 쓰시죠!”
“그래야 할 이유가 있을까.”
“뭐요?”
성현제의 모습이 아래로 쑥 사라졌다. 나 또한 날개를 접으며 급하강하는 검은 날개를 따라잡았다. 촤아아, 물이 날개가 밀어내는 바람에 휩쓸려 높게 솟아오른다. 그 순간 성현제가 몸을 휙 돌렸다. 팡- 검은 날개가 거칠게 공기를 두들기고.
쾅!
내 주위로 튀어 오른 물이 폭발했다. 윽!
“해보자는 겁니까!”
날개에 자잘하게 난 상처에 치유 스킬을 쓰며 손을 뻗었다. 내 손짓을 따라 물이 단숨에 얼어붙으며 성현제를 향해 날카롭게 치솟는다. 동시에 얼음 발판을 강하게 박차며 성현제를 향해 달려들었다.
카가강!
수화한 검은 발톱과 금빛 사슬이 맞부딪쳤다. 사슬을 잡아당기며 몸을 크게 돌렸다. 굵게 튀어나온 꼬리가 성현제의 몸통을 파고든다. 퍽! 순식간에 쳐진 방어막에 꼬리가 부딪쳤다. 직후 내 손에 잡힌 사슬이 조각조각 나며 흩어진다. 전류가 튀었다. 번득이는 빛 속으로 들이받으며 전룡화했다.
– 크르르르!
용의 포효 사이로 번개가 쳤다. 리에트의 네 배, 단단하기 그지없는 검은 비늘 위로 황금빛이 흐른다. 그대로 입을 벌렸다. 방어막에 감싸인 성현제를 향해 송곳니가 내리꽂힌다. 콰직! 방어막은 부서졌으나 이빨은 허공을 씹었다. 흑룡이 사라지고 금빛 작은 용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퍼져 나가는 독기에 성현제의 기척이 걸려들었다. 그를 향해 순간 이동했다.
캉!
사슬이 이빨에 걸린다. 입안에 불을 머금었다. 짙게 검은 불을. 사슬이 녹아내리고 그대로 다시 입을 벌렸다. 카득, 쏘아지듯 길게 뺀 목에, 송곳니에 성현제의 어깨가 걸렸다. 피 맛이 옅게 느껴지고.
‘아, 네. 사랑합니다, 성현제 씨.’
‘뭘 피하려고 듭니까. 십 년 만에 치과 가는 어른도 아니고 말입니다.’
‘실례하겠습니다~ 다음번에는 화장지 사올게요.’
기억이 후루룩 떠올랐다. 되찾은 것은 아니었다. 성현제가 지닌 내 기억과 완전히 연결되었다.
퍽!
“큭!”
비틀거리는 나를 성현제가 가차 없이 걷어찼다. 빙글 돌아 바닥에 착지하며 성현제 놈을 노려보았다.
“야! 성현제!”
저 망할 인간!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래, 그랬었지. 감정을 묻었다니 어쩌느니 하던 헛소리도 생각났다. 그것도 짜증 났었는데 내 기억까지 지워 버려? 차악, 열손가락 끝에 번들거리는 손톱이 세워졌다.
“잘생긴 인간은 머리 벗겨 놔도 봐줄 만하다던데, 어디 시험 한번 해봅시다.”
“시험해 봐야 답이 나오는 얼굴은 아니라고 생각하네만.”
“닥치고 머리 내놔, 개새끼야!”
쾅! 성현제를 스친 내 손이 땅을 두들겼다. 다른 쪽 손으로 검을 빼들었다. 차르르르- 금빛 사슬이 흔들거린다. 그 너머 금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놈의 감정, 아직도 없을까. 땅에 칼을 박고 그대로 크게 그었다. 부드러운 케이크를 잘라 뒤엎듯 흙과 돌이 치솟는다. 쾅, 콰앙! 성현제를 향해 쏟아지던 흙더미가 폭발하고 하늘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날씨 조종 스킬도 있으신가.”
“내 의식 속이기도 하니 말이야.”
툭, 투둑. 비가 떨어진다. 우르릉- 겹겹의 구름 사이로 전류의 울림 또한 들려왔다. 봐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지만.
“회귀 전 기억까지 되찾은 모양이죠.”
“정확히는 한유진 군의 기억이지만. 회귀 전의 나와 있었던 일들도 내 기억으로 치부되어 전해졌다네.”
“재밌으셨겠습니다?”
성현제가 대답 대신 웃었다. 그때의 기억까지 가졌다면 나를 쉽게 신뢰하지 않을 법했다. 지금보다 훨씬 약하고 많이 흔들렸을 때니까.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젖은 공기가 숨구멍을 두들긴다.
“이렇게 된 거 솔직하게 말하죠. 저 성현제 씨 싫어했습니다.”
“그랬었나.”
“기억도 봐놓고선.”
“감정까지 완전히 전해지진 않아서.”
“부러웠어요. F급 주제에 어이없는 소리지만 질투했습니다. 성현제 씨처럼 되고 싶었습니다.”
그때 당시 가장 강한 S급 헌터였으니까. 뭐든 할 수 있을 거 같았으니까.
“머리부터 발끝까지 제 이상형이었습니다.”
강한 힘과 여유로운 태도, 성공적으로 사회에 자리 잡은 어른. 외모도 뭐, 부럽긴 했다. 얼굴보다는 키와 덩치가. 얼굴은 보기엔 좋은데 내가 가지기는 너무 부담스럽고.
“영광이군.”
“제 주위에 마땅한 어른이 없어서 더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부모님께선 일찍 돌아가신 데다가 모범이 되어 줄 만한 상황도 아니었으니까. 그 밖에도 괜찮은 어른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경훈이 형도 있었고. 하지만 나는 동생을 위해서라도 강한 어른이 필요했다. 자연히 세성 길드장이 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의 그림자를 비춰 보지 않았다곤, 말할 수 없겠지요.”
“그런가.”
성현제가 관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빠라고 불러 보게.”
대답 대신 빗물을 끌어들여 얼렸다. 파바박- 날카로운 얼음 가시들이 성현제를 향해 쏘아졌다. 금빛 전류가 터지며 얼음 가루가 사방에 흩뿌려진다.
“모친 쪽이었나. 한유진 군이 원한다면 노력은 해보겠네만.”
“필요 없어! 이런 인간인 줄 알았으면-.”
“알았으면?”
어쨌든, 성현제는 성현제였다.
“알게 되어서 기분 째진다고요!”
텅! 바닥을 박찼다. 푸른 버들잎이 자연스럽게 내 주위를 흐른다. 성현제 또한 날개를 펼쳤다. 상쾌할 정도로 쏟아지는 빗줄기를 온몸으로 받으며 뛰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