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825
824화 벌레 (2)
“나무 선배!”
신입이 당황하며 소리쳤다. 비틀거리는 나무를 향해 어린 혼돈이 검을 뽑아들었다. 그의 두 눈이 감겼다. 더없이 날카로운 감각이 세계수의 주위를 빠르게 훑는다. 극히 가느다란 실과 같은 마력이 그의 감각에 걸려들었다. 혼돈은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다.
서걱-
나무를 파고들었던 실이 잘려 나간다. 동시에 세계수의 모습이 확 줄어들며 작은 인간형으로 변해 털썩 쓰러졌다. 신입이 급히 나무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세요? 이게 대체……!”
“벌, 레…….”
나무가 힘겹게 고개를 들며 말했다. 다른 동종들의 비명이 계속해서 그의 귓가를 울리고 있었다. 벌레.
“어떻게, 된 건진 모르겠지만… 벌레였어.”
“벌레라면.”
어린 혼돈이 미간을 좁히며 세계수종의 비명이 울리는 어둠을 바라보았다.
“설마. 하지만 그놈은 오래전에 죽었을 텐데.”
“오래전이라뇨?”
“세계수종 초월자를 잡아먹던 초월자가 있었다. 내 검도 박히지 않을 만큼 단단한 놈이었지만 결국은 다른 초월자들이 힘을 합쳐 처리했어.”
“초월자를 잡아먹는 초월자…….”
중얼거리던 신입이 화들짝 놀랐다. 혼돈 또한 이를 사리물었다. 세계수종 초월자들의 힘이 한곳으로 모이고 있었다. 동시에 길이 생겨난다. 꿈의 세계를 향해.
“허니!”
* * *
그것은 작은 벌레였다. 다른 동족들에 비해 조금 더 튼튼하고 조금 더 강한 생명력을 지닌 벌레. 실상 큰 특이점은 없는 그것은 우연하게도 깊은 땅속에 파묻히게 되었다. 대지진으로 인해 생겨난 가느다란 틈. 끝이 없는 듯한 추락이었으나 벌레는 몸통의 일부가 약간 일그러진 채 살아남았다. 작고 하찮아 그만큼 가벼운 덕이었다. 그 위로 흙이 흘러내리고 틈은 이내 메워졌다. 틈이 남아 있었더라도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깊이였다.
원래도 유충일 때는 지하에서 나무뿌리를 갉거나 빨아먹으며 성장하는 종이었다. 그렇기에 벌레는 당황하지 않고 본능대로 허기를 채우기 위해 움직였다. 눈도 없고 귀도 없이 후각에만 의지해 땅을 팠다.
하지만 벌레가 자리한 깊고 깊은 곳까지 뿌리를 내린 식물은 없었다. 끈질기게 나아가고 또 나아가도 닿는 것은 흙과 돌뿐이었다. 극심한 갈증이 벌레를 덮쳤다. 매끄럽던 껍데기가 바삭바삭 메말라가기 시작했다.
배고파 배고파 배고파 배고파
벌레는 필사적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다른 벌레였다면 지쳐 멈추고 말라죽어갔을 것임에도 벌레는 조금 더 질겼기에 조금 더 버텼다. 그리고 마침내 잔뿌리 하나를 발견했다. 깊고 깊은 땅속까지 뻗어 내려온 유일한 나무.
세계수.
벌레는 세계수의 잔뿌리에 허겁지겁 달라붙었다. 이내 달콤한 즙이 텅 빈 속을 채워갔다. 세계수라 하여도 벌레가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크기만큼이나 다양한 생물을 품었다. 강력한 생명력을 지닌 거목은 자잘한 벌레들의 매달림을 거부하지 않았다. 제아무리 식욕 왕성한 벌레라 해도 겉의 일부만을 조금 갉을 뿐이었다. 거대한 나무의 가장 안쪽 맥의 중심부는커녕 나무 껍데기조차 뚫고 들어오지 못하였다.
그렇기에 잔뿌리에 달라붙은 벌레 하나는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벌레가 평범하게 성장해 땅을 뚫고 날아올랐더라면.
세계수의 잔뿌리에 매달린 채 벌레는 커졌다. 동족보다 조금 더 큰 덩치였지만 그리 다를 바는 없었다. 지상은 계절이 바뀌었고 벌레는 본능적으로 이제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벌레는 뿌리를 놓고 위로 향하기 시작했다.
파고 파고 또 파고 계속해서 파헤치고.
평범한 깊이였다면 열 번은 더 달이 뜬 하늘을 보았을 것이나 벌레는 여전히 흙 속이었다. 벗어날 수 없었다. 벌레의 작은 몸집으로는 몇 달, 몇 년, 몇 십 년을 오르고 또 오른다 해도 빠져나가지 못할 심연이었다.
결국 때는 지나갔다. 벌레들이 잠드는 시기가 다가오고 벗어나지 못한 벌레 또한 올라가기를 멈추었다. 다시 세계수의 잔뿌리에 달라붙어 다음 해를 기다렸다.
세계수의 뿌리가 제공하는 영양분은 충분하고도 넘쳐났으며 벌레는 좀 더 커졌다. 이제는 동족의 배 이상 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작았으며 지하를 벗어날 순 없었다. 지상으로 올라 번식하고 겨울을 맞이하여 양분으로 썩어갔을 벌레는 땅속에 남았다.
한 해가, 또 한 해가 흘러갔다. 여느 벌레라면 수명을 다했어야 했음에도 조금 더 살았다. 그 약간의 차이가 더해지고 더해져 벌레는 계속해서 성장했다.
이제는 잔뿌리로는 부족했다. 더욱 단단해진 주둥이가 세계수의 굵은 뿌리를 뚫었다. 일그러졌던 몸통 또한 커지고 두꺼워져갔다. 연달은 실패 끝에 벌레는 지상으로 나가기를 포기했다. 대신 먹고 먹으며 자라고 자라났다.
“세계수의 열매가 줄어들었어.”
지상에서도 서서히 벌레의 영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거대한 나무의 꽃이 줄고 열매가 설익었다. 무성하던 가지의 일부가 메마르고 이르게 죽은 잎이 떨어졌다. 세계수의 숲에 머무는 정령들이 불안해하고 식물과 소통하는 능력을 지닌 이들이 원인을 알아내려 애썼다.
– 벌레.
세계수는 자신을 갉아 먹는 벌레가 있다 말하였다. 온갖 종족들이 거목에 붙은 벌레들을 잡아냈다. 지상에서도 지하에서도. 그러나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깊고 깊은 땅속까지는 다다르지 못했다.
세계수 또한 자신의 뿌리에 달라붙은 벌레를 떼어낼 수는 없었다. 초월자가 되지 못한, 아직은 나무일뿐인 존재였다. 한번 뿌리내린 자리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했다.
대신 세계수는 독을 만들어 냈다. 자신을 보호하려는 이들에게 경고를 보내고 거대한 몸 전체에 독기를 품었다. 벌레에게도 그 독이 닿았다. 벌레는 극심한 고통을 느꼈다. 그러나 동족보다 조금 더 강했던 벌레는 이제는 그 어떤 동족과도 아종과도 비견할 바 없이 튼튼해져 있었다.
강력한 독 또한 벌레에게 양분이 되었다. 벌레는 살아남았고 한층 더 강해졌다. 세계수에게는 방법이 없었다. 독을 머금는 것을 포기하고 더욱 간절하게 도움을 요청했다.
전 세계에서 세계수를 구하기 위해 매달리기 시작했다. 세계수는 생태계의 큰 축이었고 그 거대한 나무의 존재가 사라지면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뿌리에서 놓여난 땅은 지진을 일으키고 더는 흡수되지 못한 열기가 화산으로 폭발할 것이다. 가장 큰 수원이 사라져 강이 메마르고 공기 또한 한층 탁해지며 세계수와 연결된 수많은 숲이 죽음으로 뒤덮일 것이다.
온갖 치유력이 쏟아지고 영양분이 주입되었다. 동시에 원흉을 찾기 위한 노력이 이어졌다. 저주를 받았다며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는 희생양들도 곳곳에서 나왔다. 한 나라의 왕이 책임을 져야 한다며 높은 탑에 매달리기도 하였다.
그 모든 혼란 아래 벌레의 세계는 고요했다. 먹고 자라는 두 가지의 행위만을 반복하던 벌레가 서서히 위를 향하기 시작했다. 거대해진 몸뚱이가 뿌리 이상의 것을 원한 것이었다. 위쪽, 세계수의 줄기 가운데를 흐르는 중심 맥. 그 달콤한 곳을 향해 벌레가 움직였다. 중간중간 뿌리를 갉고 빨아먹으며 지상을 향했다.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던 지하였으나 지금의 벌레는 작고 약하지 않았다. 지상은 빠르게 다가왔다. 그러나 벌레가 벗어나는 것보다.
“괴, 괴물이다!”
세계수를 말려 죽이는 원흉을 찾던 사람들이 벌레를 먼저 발견했다. 파헤친 흙구덩이 사이로 검고 단단한 껍데기가 드러났다. 벌레는 천천히 몸뚱이를 들어올렸다. 햇빛이 닿아왔음에도 느끼지 못했다. 사람들의 공포어린 비명과 분노에 찬 외침도 듣지 못했다.
벌레의 감각에는 오직 세계수의 중심 맥만이 느껴졌다.
“벌레! 저 벌레가 세계수를 갉아먹고 있었다!”
사람들이 무기를 들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검은 껍데기를 뚫을 수 있는 날은 없었다. 긁힌 자국조차 하나 나질 않았다. 모든 것을 베어내는 검사도 대지를 뒤엎는 마법사도 벌레 앞에서는 무력했다.
“세계수에게 향하고 있다!”
“막아! 어떻게든 막아야 해!”
벌레가 세계수를 먹지 못하게 막기만 해도 된다. 벌레를 죽이는 것을 포기한 사람들은 그 앞을 막아서기 시작했다. 공중으로 띄우거나 이동시키는 마법은 통하지 않았다. 그 어떤 마법사보다도 벌레가 지닌 마력의 힘이 훨씬 컸기 때문이었다.
“다리를 묶어!”
“당겨!”
굵은 쇠사슬과 단단한 줄이 모여들었다. 벌레의 몸을 사슬과 줄이 칭칭 감았다. 그 끝에 튼튼한 가축과 기계와 장정들이 달라붙었다. 필사적인 몸부림 끝에 드디어.
지이이익-
거대한 벌레가 뒤로 끌려갔다. 저주받을 괴물이 조금이나마 세계수와 멀어졌다. 사람들의 환호성 속에서 벌레는 처음으로 주위를 인식했다.
무언가 자신의 몸을 움직였다.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여전히 눈도 귀도 없었지만 벌레는 자신이 가득 품은 마력을 어설프게나마 사용했다. 주위의 마나가, 존재들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 아.
벌레의 세계에 처음으로 자신이 아닌 존재가 들어섰다. 단순한 먹이가 아닌 움직이고 말하는 존재들. 그런 것들이 수도 없이 모여 있었다. 이어 하늘이 보였다. 새파랗게 높은 하늘 위로 새가 날아간다.
지이익, 드드득
벌레의 몸이 다시금 뒤로 당겨졌다. 벌레는 앞을 바라보았다. 나무. 끝도 없이 거대한 나무.
“좋아! 이대로 바다까지 끌고 가는 거다!”
“수장시켜 버려!”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벌레는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배가 고팠다. 마력을 사용하기 시작하자 더더욱 저 앞의 나무가 먹음직스럽게 느껴졌다. 벌레는 자신을 휘감은 사슬과 줄을 느끼고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어떻게.
벌레는 움직이는 무언가와 싸우거나 맞서려 한 적이 없었다. 단지 먹고 성장했을 뿐이었다. 방법을 찾지 못하고 끌려가는 그때, 자신을 고통스럽게 했던 독이 떠올랐다. 줄과 사슬은 무생물이었지만 벌레는 단순하게 자신이 괴로웠던 독이니 몸을 묶은 것들도 똑같이 느끼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그그그극-
세계수가 한층 더 멀어졌다. 벌레를 당기는 힘에 속도가 더해진다. 사람들의 함성이 높아져갔다. 기뻐하며 날뛴다. 살았다며 서로를 끌어안는다. 그 속에서 벌레는 독을 이끌어냈다. 진득한 독이 검은 껍데기 위로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치이이익!
독에 닿은 줄과 사슬이 녹아내린다. 이내 투두둑, 벌레의 전신을 얽매던 것들이 모조리 끊어졌다. 환호성이 사라졌다. 내려앉은 침묵 속에 벌레가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뭐, 뭐야!”
“독이다!”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사이로 벌레가 발을 내딛었다. 땅 위에 걷기 적합한 신체가 아니기에 속도는 느렸다. 그러나 천천히 세계수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막아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벌레는 계속해서 걸어 나갔다. 새어나오는 독은 더없이 강력해 이제는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하릴없이 벌레를 바라보던 사람들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벌레 앞에 벽을 세웠다. 그러나 제아무리 단단한 돌도, 담금질한 강철도.
카각, 카각
벌레의 앞발을 버텨내지 못했다. 벌레는 느리게 벽을 파헤쳤다. 사람들은 느리게 절망에 빠져들었다. 방법이 없었다. 그 어떤 힘도 벌레의 껍데기를 뚫지 못했다. 붙잡아 둘 수도 없다. 앞을 막지도 못한다. 땅을 파 빠뜨려도 애초에 지하에서 올라온 괴물이다.
벌레가 나아간다. 몇몇이 그 앞으로 뛰어들었으나 아무 소용없었다. 밟히거나 중독되어 죽어갔다. 울고 소리치고 저주를 퍼부었다. 기도하고 애원하는 자들도 있었다. 존경받는 성자가 모든 업을 받겠노라 벌레 앞에 머리를 숙였다. 벌레는 그를 지나쳤다. 권력자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주겠노라 외쳤다. 벌레는 그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느리고 둔하며 독을 두르는 것 외엔 아무런 능력도 없는 벌레. 단순히 천천히 걸어가는 그 모습이 가장 두려운 공포가 되어 퍼져 나갔다.
이윽고 벌레가 세계수의 둥치에 다다랐다. 사람들은 무력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길고 뾰족한 주둥이가 드러나고 나무껍질을 꿰뚫는다. 그럼에도 종말은 즉각 찾아오지 않았다. 어둠은 느리고 길었다.
벌레는 세계수의 중심 맥을 빨아먹기 시작했고 나무는 천천히 메말라갔다. 포기하지 않은 몇몇이 벌레에게 덤벼들었으나 무의미했다. 일부는 가망 없는 대비를 시작하고 대다수는 모든 것을 놓았다.
세계수는 살기 위해 주위 모든 양분을 흡수했다. 세계수와 연결된 숲이 빠르게 사라져갔다. 땅이 척박해지고 물이 메말랐다. 그 모든 노력이 벌레에게는 달았다.
– 나는 무엇이지.
벌레는 세계를 알게 되었다. 자신이 삼키고 있는 세상을. 그러나 먹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사람들의 말을 이해하게 되고 그 원망을 느꼈으나 멈출 이유는 없었다.
쩌저저적-
거대한 나무줄기가 갈라졌다. 잎은 이미 사라지고 가지 역시 수없이 부러졌다. 속이 텅 빈 나무가 무너져 내린다. 모든 강과 호수가 메말랐다. 대지는 갈라지고 터져 나온 열기에 녹아내렸다. 바다 또한 줄어들며 그 속의 생물들과 함께 썩어갔다. 숨쉬기조차 힘들어진 공기 속에 살아남은 지성체는 없었다.
벌레는 자신의 세상을 먹어치웠다.
그렇게 초월자가 되었으나 벌레는 여전히 벌레였다. 껍데기는 이제 그 누구도 침범하지 못했다. 세계수종 초월자를 잡아먹는 벌레를 여러 초월자가 공격하였으나 껍데기는 부서지지 않았다.
– 나무.
벌레의 먹이. 그 많은 존재들이 지키고자 하였던 생명의 둥지. 세계수들을 마시고 또 마셔도 갈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심해졌다. 원인을 모를 허기였다.
벌레는 설원 위에 섰다. 그가 본 그 어떤 나무보다 거대하고도 아름다운 새하얀 나무를 바라보았다.
– 눈이 내리는 나무.
근원. 세계수를 넘어서 모든 생명과 세계를 만들어 내는 존재. 근원의 힘을 손에 넣는다면 이 갈증도 멈출 것인가. 아니, 근원 그 자체가 된다면.
먹고 성장하기만 했던 벌레는 자신의 죽음을 꾸며냈다. 그리고 자신의 정원을 만들기 시작했다. 세계수와는 태생부터가 달랐다. 나누고 키우고 태어나게 하는 것과는 반대되는, 그저 삼키기만 하는 벌레.
벌레는 정원사가 되었다. 정원이라는 작은 세상을 만들고 꾸몄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모형정원일 뿐이었다. 세상을 만들어 낼 힘은 없다. 잡아먹은 세계수들을 바탕으로 흉내만 낼 따름이다.
그럼에도 정원사는 포기하지 않았다. 새로이 태어나는 세계수종 초월자들에게 자신의 힘을 조용히 심어 넣으며 정원을 관리했다. 길고 긴 시간에도 바래지지 않는 집착이자 지독한 욕망이었다.
– 네가 바라는 것은 불이 가져다줄 거야.
어느 날 침묵하는 하얀 새가 말했다.
– 너조차도 모르는 네 바람을. 그러니 불이 원하는 것을 들어줘.
하얀 새는 정원사에게 눈이 내리는 나무를 지킬 수 있도록 도와달라 부탁해왔다. 근원이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자신이 바라는 것을 대가로 얻을 수 있다 말해왔기에 정원사는 하얀 새를 도와주었다.
– 유사근원이라니.
언젠가 나타날 유사근원을 삼킬 월식을 만드는 일은 쉽지 않았다. 정원사는 월식의 힘이 모일 씨앗의 형태만 만들어 뿌릴 뿐 월식 자체는 근원의 면역체계와 같은 작동으로 만들어질 것이라 하였지만 모아 놓은 세계수종 초월자의 힘 상당수가 들어갔다.
– 내가 바라는 것은 근원의 힘인데.
유사근원을 손에 넣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텐데 하얀 새는 불을 말하였다. 흔하디흔한 불을. 하얀 새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정원사는 기다렸다. 참고 견디는 것은 벌레가 가장 잘하는 일이었다.
“초승달의 눈을 피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어느 날 인형술사와 그의 아이가 찾아왔다. 유사근원과 연결된 존재였다. 정원사는 그들을 받아들였다. 월식이 유사근원을 정원사에게 데려다준다 하더라도 초승달과의 계약을 끊을 방법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시그마를 잘만 이용하면 유사근원을 손에 넣기도 더욱 쉬워질 터였다.
하지만 여전히 불의 존재는 없었다.
다시금 시간이 흘러갔다. 월식이 태어나고 정원사는 기다렸다. 그 세계에 자신의 수족이 될 씨앗을 뿌려 보았으나 쓸 만한 것은 없었다. 간섭하지 못하고 지켜보는 사이 월식은 유사근원을 삼키는 것을 실패했다. 인형술사는 아이를 데리고 도망쳤다. 정원사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가 바라는 것은 여전히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 벌레는 아직 벌레였다.
그때 하얀 새의 존재가 사라졌다. 그녀와 이어져 있던 계약 또한 완전히 끊어졌다. 정원사는 하얀 새의 계약의 흔적을 찾아갔다.
눈이 내리는 나무. 그 아래.
– 불.
존재의 근원이 사라진, 불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고작 이런 흔적이 자신이 원하는 것일 리 없었다. 정원사는 불의 흔적을 두고 돌아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형술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계약은 계약이니까요. 그 쪽이 유사근원을 차지한다면 우리 애한테는 더 볼일이 없어지겠죠.”
시간이 되돌려진 영향일까, 쓸모없던 씨앗들 중 괜찮은 것이 하나 나왔다. 정원사는 그 씨앗을 인형술사에게 빌려주었다.
– 저 불인가.
이윽고 한유진과 한유진이 품은 불에 대해 알게 되었다. 정원사는 다시금 눈이 내리는 나무 아래의 불의 흔적을 찾아갔다. 그 불을 깨워 계약했다. 여전히 하얀 새의 예언이 가리키는 것을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유사근원을 목표로 하여 움직였다.
불의 흔적을 바탕으로 불 그 자체를 손에 넣고. 자신의 힘을 심어 놓은 세계수종 초월자를 내려보냈다. 세계수종 초월자들이 유사근원을 무사히 붙잡았다면 그것으로 일단락되었을 터인데.
– 유사근원은 도망치지 못한다.
모든 초월자들이 노릴 것이니. 하지만 불은. 초승달의 위협 또한 있었다. 정원사는 몸을 일으켰다. 오랜 옛날 정원 아래 파묻어 놓은 벌레가 머리를 들었다.
세계수를 바란다. 근원의 힘을 바란다.
– 내가 바라는 것은.
이 오랜 갈증은.
직접 움직이는 것은 위험하다. 꿈의 세계라 하여도, 세계수종 초월자들의 힘을 끌어들인다 하여도 타격은 있다. 그저 단단할 뿐, 정원사는 여전히 전투능력이 낮았다. 그럼에도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벌레가 지상으로 올라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