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831
830화 동료 (2)
콰과과광-!
물길을 따라 폭음이 터졌다. 무성한 나무들이 순식간에 밀려나가며 앞이 확 트였다. 나타난 길을 향해 송 실장님이 달려간다. 나는 그 어깨 위에 델로우즈 유체화하여 매달렸다. 하율이 녀석은 여전히 내 머리 위에 있었다. 지금 내 크기에 맞게 작아진 채로.
– 형, 이제 거의 다 왔어요! 이대로 직진!
길을 찾기는커녕 방향조차 분간할 수 없는 숲에서 박하율은 훌륭한 내비게이션이 되어 주었다. 아니, 훌륭한까지는 아니고 그럭저럭 괜찮은. 내비게이션치고는 쓸데없는 말이 너무 많아. 시끄러워.
“꽉 잡으십시오.”
– 걱정 마세요!
성현제가 내어주는 길을 따라 송 실장님이 전력을 다해 달려갔다. 뿌리가 치솟고 가지와 덩굴이 휘둘러왔지만 성현제의 전투예지를 나를 통해 공유받으며 그야말로 완벽에 가깝게 공격을 피했다. 속도조차 거의 줄어들질 않았다.
– 성현제 씨! 얼마 안 남았다니까 무리하지 마세요!
성현제가 대답 대신 날개를 크게 펄럭였다. 그의 몸이 땅을 스칠 듯 급강하하며 두 날개가 날카로운 절삭력을 띤다. 서걱- 검은 날개에 닿는 식물이 모조리 두 동강났다. 내 기억이 지닌 양육자 칭호 효과로 다양한 스킬을 쓰는 것에 한결 능숙해져 말 그대로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하루가 넘게 걸렸지.’
단순히 정원을 벗어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그사이 정원의 영역이 더욱 늘어나고 정원사가 공간을 마구잡이로 뒤틀어댔기 때문이었다. 날아서 가로지르는 건 불가능했다. 박하율의 지시에 따라 미로를 헤매듯 길을 찾아야만 했다.
– 벌레 없는 정원이 이렇게 징그러울 줄 몰랐어요! 그래도 벌레까지 있는 것보단 낫겠지만요.
– 제일 큰 벌레 한 마리 있잖냐.
– 아, 맞다! 으악, 또 덩굴! 덩굴 지긋지긋해요~.
– 난 원래도 싫었어.
– 신입이 형은 왜 그렇게 촉수를 싫어하냐고 아쉬워하기에 전 괜찮댔는데! 이젠 저도 싫어졌어요!
아무렴 누구든 겪어 보면 싫어할 거다. 동물형이든 식물형이든 말이야. 보통 동물형이 좀 더 끔찍하긴 하지만.
차르르, 금빛 사슬이 조각나며 땅 이곳저곳에 박혀들었다. 전류가 튀고 조각난 식물들이 흙과 함께 치솟는다. 저 앞으로 익숙한 빌딩이 언뜻 보였다. 지겹기만 하던 시멘트 건물이 미치도록 반가웠다.
– 난 아무래도 도시 체질인가 봐.
– 저도 평생 할 산림욕 다 한 기분이에요!
송 실장님이 강하게 땅을 박찼다. 드디어 정원의 끝에 다다랐다. 성현제가 속도를 늦추며 우리 뒤로 처지고 송 실장님이 앞서 나간다. 등 뒤에서 폭음이 들려왔다. 시커먼 아스팔트 바닥, 깨진 보도블록, 빛을 반사하는 유리창. 삭막하게 느껴지던 풍경이 지금만큼은 천국이 따로 없었다.
“하율아!”
송 실장님 어깨에서 뛰어내려 인간으로 돌아가며 외쳤다. 박하율이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이 우르르, 아이템을 옮겨온다. 성현제도 정원을 벗어났다. 그러나 정원은, 식물들은 계속해서 우리를 뒤쫓고 있었다.
“던져!”
– 넵, 형!
폭탄형 아이템들이 우르르 공중으로 치솟는다. 창을 꺼내들었다. 검은 불길이 정원을 향해 던져진 폭탄을 가로질렀다. 이내 콰과광- 요란한 소리와 함께 불길이 크게 일었다. 잠깐이지만 정원의 파도가 멈추었다.
“저도 아이템은 쓸 수 있으니 교대로 휴식하죠.”
정원은 벗어났지만 이게 끝은 아니었다. 정원사는 자신의 영역을 계속해서 넓혀가고 있었다. 박하율도 맞서곤 있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러니 우리가 버틸 수 있도록 도와줘야 했다.
내 사람들이 찾아와 줄 자리를 지켜야 했다.
– 유진이 형! 힘내세요! 하율이가 있잖아요!
“넌 헛소리 좀 줄이고. 제발.”
“마시게.”
어느새 편의점에서 스포츠 음료를 가지고 온 성현제가 나와 송 실장님에게 건네주었다. 캔디도 손에 쥐어졌다. 당 보충 좀 해야 하긴 하지. 그 잠깐 새 정원은 또다시 꿈틀거리며 다가왔다.
“핵 한 발 못 떨어뜨리냐.”
– 마력 없는 폭탄이잖아요. 순간적으론 피해가 커보여도 소형 마력 폭탄 맞았을 때보다 회복은 훨씬 빠를걸요.
“하율이 너 방금은 준 초월자 같았다.”
– 저도 그간 공부 많이 했어요!
캔디를 입에 넣으며 불을 질렀다. 검게 타오르는 불을 보자 유현이가 그리워졌다. 둘 모두.
“숲은 불태우는 게 최곤데 말이지.”
우르릉- 하늘 위로 먹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박하율이 불러온 우뢰가 구름 사이로 번득거린다. 이내 비가 투둑, 툭 떨어졌다. 성현제가 파라솔을 송 실장님에게 던지고 내게 송 실장님 쪽으로 가라 손짓했다. 빛바랜 머리카락이 젖어든다.
“내가 먼저 맡지. 둘은 쉬고 있어.”
“괜찮겠어요?”
“며칠씩 이어지는 전투야 예사지. 여차하면 한유진 군이 챙겨 준 도시락을 먹으면 되고.”
도시락? 아, 세계수의 마석. 걱정이 들긴 했지만 성현제는 계속해서 자신의 힘을 다루어야 했다. 만에 하나 그가 성공하면 초승달의 계약도 정원사의 계약도 떨쳐 버리고 우리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 다만 성공 확률이 극히 희박할 뿐.
“너무 무리하진 마세요.”
“…혹 위험한 느낌이 든다면 곧장 부르십시오.”
파라솔을 받쳐 든 송 실장님이 말했다. 성현제가 대답 대신 미소 지어 보였다. 검은 하늘 아래로 콰르릉 번개가 쳤다.
또 하루가 금세 지나갔다. 송 실장님은 광역 화력이 부족했기에 나와 함께 정원을 막아 냈다. 기어들어오는 식물을 송 실장님이 잘라내고 나는 뒤에서 불길과 폭탄을 휘둘렀다. 정원은 사방에서 박하율의 영역을 잡아먹고 있었지만 우리가 있는 한 부분을 밀어내는 것만으로도 전체적인 침범 속도를 줄일 수 있었다.
그래도 꿈의 세계는 계속해서 줄어들어갔다.
– 미국도 방금 완전히 빼앗겼어요.
박하율이 조금 시무룩하게 말했다.
– 그쪽 아이템은 전부 옮겨왔지만요.
“최대한 버텨. 신입은 아직 연락 안 되고?”
– 네. 어느 한 영역이 완전히 자리 잡기 전까지는 힘들 거예요.
“만약 영역을 완전히 빼앗기게 되면 너는.”
– 힘없고 가련한 꽃이 되겠죠~.
그래도 완전히 사라지진 않는 모양이었다. 내가 챙겨가 줘야 하나.
다시 하루가, 그리고 또 하루가 지나갔다. 어쩌면 이틀이 아닌 사흘이 지났을지도 몰랐다. 하늘은 먹구름으로 가득했고 시간의 흐름은 느끼기 힘들었다. 아무런 소식도 징조도 없었다. 막연한 기다림이었다.
“도시락 싸 올 시간 있으면 눈이라도 조금 더 붙이라고요!”
“이럴 때일수록 잘 먹어야지.”
“그 말만큼은 동의합니다. 특히 한유진 씨는 제대로 드셔야 합니다.”
– 맞아요, 맞아요!
“정말이지. 맛은 있네요.”
그 막막함 속에서도 웃을 일은 있었다. 송실장님이 긴 언월도를 휘둘렀다. 후두둑, 불에 탄 덩굴들이 잘려나간다. 박하율의 영역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동아시아 일부가 고작이었다. 여전히 새로운 일은 생겨나지 않았다. 답도 없고 길도 없었다.
“분명 막막한데 왜 나쁘지 않은 기분일까요.”
엉망인 모양새로 그렇게 말했다. 들어가 쉬라는 잔소리에도 성현제는 의자를 가져다가 우리 근처에 앉아 있었다. 그걸로 충분하다나.
“여전히 방법은 없는데 말이에요.”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송 실장님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제가 무사히 돌아갈 가능성은 희박할 겁니다.”
“그래도 돌아가야죠.”
버티고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지.
– 형!
그때 박하율이 소리쳤다. 성현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또한 느꼈다.
– 우리 세상인데, 꿈이 아니에요, 이건!
박하율의 당황한 목소리 사이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아빠!
* * *
정원사가 온다.
세계의 흔들림이 느껴졌다. 인형술사는 자신의 팔 안에 들린 시그마를 바라보았다. 스스로의 길을 지니지 못한 채 영원히 멈춰 있었던, 이제는 삶 그 자체도 유지하지 못하는 그의 어린아이.
“준비해.”
인형술사의 짧은 명령조의 말에 황림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얼굴은 비슷한데 말이야, 역시 난 외모보단 성격인가 봐. 우리 진이도 동생한테 집착은 심하지만 나한테도 상냥했다고. 또 말랑말랑하고 부드럽고~. 속이든 겉이든 말이지.”
인형술사의 시선이 서늘해졌다. 황림이 에휴 한숨을 내쉬며 재차 말했다.
“친절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아무리 목줄 매여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신세라 해도 말이죠, 최소한의 돌아가는 상황은 알아야지.”
황림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또한 종속된 자로서 정원사의 움직임을 느끼고 있었다.
“아직 시간 좀 남았잖아. 진이네한테는 정말로 안 알려 줄 건가.”
“미리 알았다고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야.”
“아니, 그건 아니지. 세계수종 초월자의 소환 자체를 막을 기회도 있었고 나무를 완전히 죽이지 않고 잡아만 둘 수도 있었지. 게다가 진이는 다른 초월자와 연락도 하고 있잖아. 그쪽에서도 막을 방법을 찾으려 했을걸.”
정원사의 정체를 미리 알았더라면. 그가 오래전 죽은 것으로 알려졌던 벌레이며 세계수종 초월자들에게 선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줬더라면. 황림은 시선을 내려 인형술사를 마주 바라보았다.
“그랬다간 그쪽 계획이 어그러지는 건가? 정확히 뭘 어떻게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인형술사는 정원사가 계속해서 방해받는다면 세계수종 초월자를 제물로 한 길을 만들어 직접 강림하리라 짐작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유사근원을 보호하고 한유진을 도왔다.
“내 목적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단 한 가지뿐이야.”
“걔를 지키는 거?”
“이 아이가 독립적인 존재로서 자신의 세계에 무사히 자리 잡는 것. 그래서 처음에는 너를 사용해 유사근원과 월식을 빼돌리려 했지.”
인형술사가 할 수 있는 일은 몇 없었다. 그래도 그 둘을 손에 넣는다면 정원사와 계약 조건을 협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유사근원이 쉽게 넘어올 리 없거니와 위험성도 컸어.”
“그 형씨도 만만찮지. 붙잡는다 해도 계약 같은 건 절대 해주지 않았을 테니까.”
채터박스가 연회를 열고 패륜아와 효도중독자 간의 내기가 벌어지는 내내 인형술사는 틈을 찾아 헤맸다. 자신의 아이를 빼낼 수 있는 작은 틈을. 그러나 쉽지 않았다. 방법을 찾아내기 힘든 그때, 꿈의 세계가 나타났다. 인형술사를 비롯한 초월자들이 직접 개입할 수 있는 새로운 무대가.
“정원이 이곳에 내려오면 저 안의 세계는 완벽하게 보호되겠지.”
“…정원이? 통째로 내려온다고?”
“정원사는 그 스스로의 전투력은 약해. 죽일 수 없을 뿐이지. 그러니 자신의 영역 자체를 가지고 올 수밖에 없어.”
정원사의 종속자, 회귀 전 한유현의 존재는 인형술사로서도 예상 밖이었다. 그러나 한유현은 시그마를 손에 넣지 못했고 결국 한유진의 품으로 돌아갔다. 인형술사는 수족을 잃은 정원사가 직접 내려오기만을 기다렸다.
“곧 영역과 영역이 부딪친다. 세계의 충돌과 흡사한 힘의 움직임이 일어날 거야.”
비록 초월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는 원래의 세계를 바탕으로 두고 있으며 다른 하나는 지극히 오랜 시간 가꾸어진 정원이다.
“그 비틀림을 이용하면 내 아이를 독립적인 존재로 만들어 줄 수 있어.”
“대충 그렇다고 치고. 지금이라도 한유진에게 말해 주지 그래.”
황림이 인형술사와 가사 상태에 빠진 시그마를 바라보았다.
“진이는 그쪽도 지키려고 들 게 분명하거든. 그러니 털어놔도 된다고.”
자신의 소중한 이를 보호하고 싶다. 그러한 목적이라면 한유진은 막아서지 않을 것이다. 시그마까지 포함하여 모두를 지킬 방법을 어떻게든 찾아내려 애쓸 것이 분명했다. 인형술사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인형술사의 입술에 쓴 것이 희미하게 맺혔다.
“정원사의 정체에 대해서는 제약이 붙었기에 어차피 자세한 말은 못 해줘. 그러는 너는 퍽이나 한유진이 마음에 든 모양이로군.”
“당연하잖아?”
황림이 하하 웃으며 말을 이었다.
“유별난 종자들이라면 좋아하거나 그 반대거나. 둘 중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고~. 한유진 그 자체보다는 한유현을 끌어안고 있는 한유진을. S급들이 자기 잘난 맛에 취했다지만 태생적인 불안감은 조금이라도 있을 수밖에 없어. 다르니까.”
인간이나 하루아침에 여느 인간과는 동떨어진 존재가 되어버렸다. 하급 헌터들은 크게 다를 바가 없었고 중급은 따로이 사회를 만들 수 있을 만큼 수가 많았다. A급까지도 그 숫자가 소속감을 느끼기엔 부족하지 않았다.
하지만 S급은 극히 드물었고 서로의 유대감 또한 적었다. 오히려 적대시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수십억 안에 파묻혀 있다가 돌연 홀로 서게 된 것이었다. 물론 S급은 세상에 그 홀로 남더라도 살아갈 힘을 가졌다. 그렇기에 당당히 위에 서고 나아갔지만 사회적인 생물로서의 희미한 외로움은 남아 있었다.
“하지만 우리 진이를 보고 있으면 달라도 괜찮겠구나~ 하는 안정감을 준단 말이지. F급이 태생 S급을 저렇게나 평범하게 대하니까. 한유현이 S급 중에서도 유독 비인간적이라서 더더욱 그래.”
“너도 그런 불안을 느꼈다고?”
“나야 나는 대체 누군가 수준이었지~. 뒤틀린 씨앗이니까. 내 스킬만 봐도 그렇잖아. 정체성이 없다고.”
황림은 한유진이 시간을 되돌린 순간 변화했다. 그는 아마도 본래 전혀 다른 인간이었을 것이다. 혹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릴 때의 기억은 분명 있었다. 초화운과의 인연도 오래전부터 이어진 것이었다.
하나 그는 황림이었으나 동시에 황림이 아니었다.
“근데 그런 고민 해봤자 답도 없고 달라질 것도 없고. 우리 아빠는 살짝 짜증 나지만 말이야. 신나게 씨 뿌려 놓고 책임지기는커녕 남의 집 노예로 빌려주다니. 아빠가 그 모양이니까 나도 대충 즐겁게 살기로 했답니다♡”
아 물론 내가 책임질 일은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며 황림이 윙크했다. 인형술사의 눈빛이 한층 차가워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황림은 스스로의 턱을 자랑스럽게 쓰다듬었다.
“충부호자(蟲父虎子)까진 못 되어도 시자(豺子)쯤은 되지 않을까? 아빠가 개만 되었어도 나도 호랑이였을 텐데~. 개보다 못한 아빠 밑에서 참 잘 컸지? 이 정도면 공무원 씨가 호형(呼兄)을 허락해 주지 않을까나.”
“…….”
“그래서 진이는 신기하고 재밌고 귀여워서 좋은 쪽! 잘만 꼬드기면 나도 사랑해 주겠구나 하는 맘이 없지는 않지만 찔러보는 게 더 재밌어서. 무서운 형님 동생들이 아니라면 제대로 가지고 놀아 보고 싶은데.”
인형술사는 황림의 헛소리를 흘려 넘기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세계수들의 비명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세계가, 꿈이 서서히 일그러지며 정원의 침입이 시작되었다.
오싹한 뒤틀림. 아스팔트가 갈라지며 싹이 돋아났다. 퐁, 퐁, 퐁, 작은 들꽃이 피어난다. 꿈과 정원이 뒤섞이고 그 사이로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자그마한 틈이 생겨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어둡고 작고 고요한 틈새. 인형술사는 빠르게 점멸하는 그 틈을 바라보았다.
찰나.
“스킬을 써!”
황림이 자신의 능력을 사용했다. 뿌리 없는 무명의 씨앗. 한유진에게 알려 준 스킬은 그 능력의 일부 효과일 뿐이었다. 자신의 근본이 없는 그 모습이 정해지지 않은 씨. 뿌리로 삼은 상대의 존재 근원을 일순간 완벽히 복사할 수 있는 힘.
복잡한 발동 조건은 이미 완수한 뒤였다. 존재가치 SSS급 이하라는 제약이 있었으나 초월자에 준하는 시간 속에서도 멈춘 상태였던 시그마는 조건을 충족했다.
시그마의 존재가 둘이 되었다.
정원사의 계약이 흐트러진다. 동일한 존재가 둘이 된 순간 갈 길을 잃고 헤맨다. 황림이 스킬을 해제하면 다시 원래 주인을 찾아갈 것이었으나. 아주 짧은 시간 유지 가능한 스킬이 풀어지기 직전.
사아아아-
비틀린 세계의 틈새로 인형술사의 영역이 자리 잡았다.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영역 사이의 영역이, 거대한 비틀림이 찢어 낸 시공간의 제약조차 사라진 장소가. 그곳으로 들어서기 직전, 인형술사가 손을 뻗었다.
“어?”
그의 손이 꿈의 세계에서 쫓겨나던 문현아를 잡아챘다. 직후 네 사람이 인형술사의 영역으로 들어섰다.
“…뭐야?”
문현아가 당황하며 인형술사와 시그마, 황림을 쳐다보았다. 인형술사는 대답 대신 시그마를 내려다보았다.
“이걸로 정원사의 계약은 사라졌어. 동일한 존재에 가까운 성현제에게로 옮겨갔겠지.”
“…무슨 소리인지 전혀 이해가 가질 않는데. 여긴 또 어디고.”
“내가 눈 뜬 곳입니다.”
이곳이 몇 번째로 떠돌다 다다른 세계인지 시그마는 기억하지 못했다. 어딘지 모를 조용한 숲에 버려진 오두막이었다.
“정확히는 재현한 것이지만.”
오랜 시간 여러 세계를 거친 인형은 이곳에서 첫 숨을 내쉬었다. 조금씩 쌓이고 쌓인 시간 사이로 극히 미미한 근원의 부스러기가 모이고 모여 살아 움직이는 새로운 생명으로.
그리고 이내.
“…여기는.”
시그마가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