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838
837화 태초의 불 (2)
붉게 물든 눈이었다. 시선이 유리질 벽을 넘어 나를 향했다. 반가움과 기쁨, 그리고 불안감이 밀려들었다. 스물여섯 살의 한유현이 떠나가고 자신 혼자 남았다는 사실을 알아챘을까. 잃어버린 기억을 무사히 되찾았을까.
“유현아! 이제 돌아와!”
형이랑 같이 집에 가자. 유현이의 두 눈이 느리게 깜박였다. 이어 푸른색 불꽃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맑디맑은 새파란 불꽃. 그것이 검은 결정체를 비집고 흘러넘친다. 정원사가 당황한 듯 앞발을 조금 움직였다.
푸른 불이 결정체를 삼켜 간다. 역시 통했다. 넘실넘실 더욱 크게 피어오르며─.
“유현…아……?”
동생의 손끝이. 푸르게. 불꽃으로 바뀌어 간다. 손이, 팔이, 다리가, 온몸이. 순식간에 푸른 불이 되었다. 검은 결정체도 그 안의 동생도 사라졌다. 모든 것이 삼켜졌다. 오직 투명하게 맑은 청염만이…….
“…유현아! 한유현!”
“한유진 군!”
“아저씨!”
나를 붙잡는 손을 뿌리쳤다. 무작정 달려 나가려 했다. 하지만 물이 가로막았다. 물을 두들겼다. 차가운 방울이 얼굴 위로 튀었다. 그 단단한 벽은 결이의 도움을 받는 나로서도 뚫을 수 없었다.
“유현아!!”
“아저씨! 너무 위험해요!”
투명하던 물이 흐려진다. 내 눈을 가리듯 앞을 막는다.
“저 불은 제 물로도 끌 수 없다고요!”
물방울이 굴러 떨어진다. 열기에 증발한 수증기가 구름 같은 층을 이루었다. 어느샌가 다리에 힘이 풀려 있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예림이의 목소리가 멀게만 느껴졌다. 주위에서 계속 말을 걸어왔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푸른 불은 계속해서 퍼져 가고 있었다. 작은 섬에 새파란 꽃이 활짝 핀 것만 같았다. 정원사의 단단하던 껍질도 서서히 일그러져 간다. 나비 몇 마리가 날아올랐지만 섬을 벗어나지 못한 채 불길에 삼켜지듯 사라졌다.
한들한들, 불이 춤춘다. 예림이의 말과 달리 조금도 위험해 보이지 않았다. 손을 대면 그저 따스하게 감싸 올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속에 동생의 모습은 없었다.
화르르르-
언젠가 본 적 있는 불의 용이 하늘 위로 솟아오른다. 완전히 성장한 이린이었다. 푸른 불꽃 위를 너울너울, 부드럽게 맴돌았다. 그 모든 광경에서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낮잠을 자다 눈만 간신히 뜬 듯 몽롱한 기분이 들었다.
– 아빠!
어린애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힘겹게 눈을 깜박였지만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아른거리는 청염으로부터 눈을 돌리고 싶지 않았다.
– 아빠아!
퉁, 무언가 내 등에 부딪쳤다. 겨우 고개를 돌렸다. 노란색 자동차와 그 위의 설이가 나를 바라보았다. 요정용으로 변한 결이는 예림이와 무어라 작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 큰 벌레가 먹었어.
“…응?”
– 되고 싶은 거 되는 꿈!
폴짝 뛴 별이의 모습이 변했다. 동그란 털뭉치가 되어 내게 안겨 왔다. 예림이도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고 결이도 어린 요정용이 되었다. 하늘에서 작아진 벨라레가 떨어지는 것을 노아 씨가 얼른 붙잡았다.
– 재밌어!
뀩뀩거리며 별이가 웃었다. 결이의 힘은 아직 내게 남아 있었지만 오래가진 못할 것이다. 이제 꿈도 끝나가는구나. 박하율 꽃도 다가왔다.
– 유진이 형, 애들은 좀 있으면 깨어나게 될 거예요.
“아저씨! 저 바로 들어올 테니까요! 그러니까…….”
반쯤 울상이 되어 예림이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다른 사람들 또한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불을 바라보았다. 현실감각이 서서히 칼날로 찌르듯 아프게 돌아왔다.
– 예쁘다!
별이가 푸른 불을 향해 앞발을 휘저으며 말했다. 그 불길 속에서 정원사는 아직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점차 껍질이 약화되는 것이 내 눈에도 보였다. 저놈만큼은, 내가─.
“…아.”
문득 눈을 크게 떴다. 허겁지겁 상태창을 열었다. 키워드 적용 대상자들.
[한유현(S)]그래, 뜨지 않았다. 마지막 보은의 메시지 창이.
“…살아 있어.”
“아저씨?”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름답게 일렁이는 푸른 불꽃이 두 눈 가득 들어왔다.
“유현이야. 내 동생. 그 어떤 모습을 하고 있어도.”
단지 인간의 모습을 버렸을 뿐, 유현이다. 동생은 아직 저곳에 있었다.
“무슨 말이에요, 아저씨!”
“형님, 그러니까 저 불이… 한유현이라고?”
“네. 제 동생입니다.”
확신을 담아 대답했다. 유현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별이를 설이에게 건네주었다. 설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다가오는 결이에게 미소 지었다.
“아빠, 삼촌한테 갔다 올게.”
– 응!
별이가 머리를 끄덕거렸다. 결이는 걱정스러운 듯 눈동자가 흔들렸다.
“괜찮아. 정말로.”
당연히 괜찮을 것이다. 나는 동생을 데리러 가는 것일 뿐이다. 푸른 불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아저씨!”
“진짜 괜찮아, 예림아. 저 불은 유현이고 유현이는 절대 날 해치지 않아.”
“그건… 알고 있지만요…….”
“여차 싶으면 바로 데려오자.”
현아 씨가 예림이에게 말했다. 성현제와 송 실장님 또한 나를 가만히 주시하고 있었다. 노아 씨는 날개를 꺼내 들었다. 불로 뒤덮인 섬을 향해 걸어가는 나를 피스가 쫓아왔다.
– 끄응
하지만 청염에 가까워지자 열기가 힘겨운 듯 머뭇거린다. 피스에게 돌아가 있으라고 손짓했다. 강력한 화염 저항을 지닌 피스는 물론 다른 사람들도 일정 거리 이상은 접근하지 못했다. 초월자라 하더라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부드럽게 따스했다. 뻗어 오는 불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푸른 불은 나를 해치지 않았다. 다정한 온기를 머금고서 내 손길을 감싸왔다.
“유현아.”
정말로 너로구나. 동생은 이곳에, 내 곁에 있었다.
* * *
뜨겁다. 정원사는 초월자가 된 이후 처음으로 고통을 느꼈다. 푸른 불의 열기는 그 어떤 힘도 막아 내던 단단한 껍질조차 녹이고 있었다. 변화하지 않는 정원사의 본질이 모든 것을 삼키는 불과 충돌하고, 검은 외피는 일그러졌다 재생하기를 반복했다.
‘뜨거워.’
정원사의 껍질은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열기가 그 안으로 침투하는 것까지는 완전히 막지 못했다. 정원사는 존재하지 않는 눈 대신 감각으로 인간들을 바라보았다. 이 불이 유일하게 사랑한 존재가 감지되었다. 정원사는 몸을 떨었다.
불은 절대 꺼지지 않는다. 닿는 모든 것을 삼키기 전까지는. 결국 변화하지 않는 본질마저 불태우고서 정원사를 삼켜 버릴 것이다.
불길에 일그러진 정원사의 다리가 바닥을 긁었다. 여기서 이렇게 끝나 버린다. 유사근원을 바로 앞에 두고서.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 바로 직전에, 이렇게.
‘뜨거워, 뜨거워!’
벌레의 다리가 둔하게 움직였다. 제대로 걷지 못한 채 제자리에서만 조금 까닥거리고 만다. 그는 도망칠 수조차 없었다. 연결된 세계수는 모두 이 세계 밖에 존재했다. 정원의 대부분을 잃은 지금으로서는 세계를 벗어날 정도의 힘은 쓸 수 없었다. 땅을 파고 숨기에는 온통 물이었다. 그의 영역은 얼마 남지 않았으며, 그 작은 섬 전체가 불길에 휩싸였다.
세계수에, 식물에 기생하여 살아온,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벌레.
정원사는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불이 사랑하는 존재를 바라보았다. 한유진.
‘모든 것을, 망쳤구나.’
그가 패배했다. 벌레는 이곳에서 타 죽을 것이다. 허무히 사라지고 말 것이다. 정원사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혼자 가지는 않겠다.’
이윽고 껍질이 녹아내린다면 오래 묵은 힘을 터뜨릴 것이다. 한유진은 물론 그 주위의 다른 인간들, 꿈의 세계, 보호 받고 있는 저들의 세계에까지 영향이 갈 폭발을. 모든 것이 쓸려 나갈 것이다.
정원사는 저항을 포기했다. 불이 영원에 가까운 시간 동안 변하지 않았던 껍질을 녹인다. 단단히 감싸여진 외피에 틈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사이로.
– 되고 싶은 거 되는 꿈이야!
작은 속삭임이 새어 들어왔다. 껍질을 넘지 못하고 바깥에서만 맴돌던 반짝임이, 불이 만들어 낸 길을 따라 스며들었다.
‘…이건.’
멈춰 있던 시간을 흐르게 하는 빛. 자신이 원하는 미래로 향하게 하는 빛. 정원사는 당황했다. 그때 한유진이 일어섰다. 그 누구도 접근하지 못할 불의 바다를 향해 걸어온다.
‘…양육자.’
푸른 불이 한유진의 손끝에 닿았다. 정원사의 바로 앞에 그가 서 있었다. 정원사는 한유진의 아이가 아니다. 그러나 지금 그에게는 한유진의 아이가 만들어 낸 빛이 닿아 있었다. 더욱더 크게 열린 틈새로 양육자의 힘 또한 스며든다.
‘나는…….’
저 인간이 밉다. 이 모든 상황이 증오스럽다. 그러나 그 모든 미움의 시작은.
‘나는.’
자신이 되고 싶은 것이 되는 꿈. 바라던 것을 이룬 자에게 타인을 향한 원망이 남아 있을까. 미워할 이유도 없고 화를 낼 필요도 없다. 실로 원하는 것을 손에 넣는다면.
지금이라면 한유진을 죽일 수 있다. 정원을 망쳐 놓은 자들을 모조리 쓸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정원사에게는 또 한 가지의 길이 생겨났다. 불이 가져다준 길. 반짝거리는 빛의 길.
정원사는 스스로의 힘을 터뜨려 복수하는 대신 새로이 생겨난 길을 선택했다.
쩌저저적-
정원사의 등껍질이 길게 갈라진다. 불은 더욱 높게 치솟았다. 꺼지지 않는 불은 이미 그의 속으로 파고들었으며 죽음을 피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마지막으로.
푸른 불이 낡은 껍질을 녹이고 삼킨다. 그 사이로 날개가 펼쳐졌다. 접히고 접혀 잔뜩 구겨졌던 날개가 열기 속에 활짝 펴진다. 불길처럼 푸르른 날개가 힘차게 퍼덕였다. 정원사의 몸이 단숨에 하늘로 솟아올랐다.
펼쳐진 새파란 바다. 그 너머 솟아오른 도시와 산, 평야, 숲과 강. 더는 목이 마르지도 허기가 지지도 않았다. 그는 독립적이며 자유로운 존재였다.
세계수종 초월자들과의 연결이 모조리 끊어졌다. 긴 세월 얽매여 온 모든 것이 저 아래 껍데기로 남아 불길 속으로 사라져 갔다. 길고 커다란 날개의 끝에 푸른 불꽃이 맺혔다. 천천히 날개를 삼키며 기어 올라온다. 그럼에도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신이 났다. 즐거웠다.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아름다운 날개가 자랑스러웠다. 구름을 바라보는 맑은 눈이 자랑스러웠다. 바람 소리가 스치는 귀, 유연하게 움직이는 다리들과 부드러운 몸뚱이, 그 모든 것이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웠다.
– 나는.
수많은 세계수를 삼켜도, 초월자마저 잡아먹었어도, 작은 세계를 만들어 냈어도, 설사 유사근원을 손에 넣었더라도. 그럼에도 정원사는 만족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자신이 아닌 타인의 것을 빼앗았을 뿐이기에. 처음부터 무언가 다른 존재가 되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자기 자신인 채 스스로에게 만족할 수 있기를 바랐다. 스스로의 성장 그 자체를 원했다.
그 어떠한 끝이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나로서 나아갈 수 있기를.
정원사는 추락이 예정된 비행을 시작했다.
* * *
유현아!
꿈결처럼 일렁이는 목소리였다. 겹겹이 가로막혀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희미했지만 한유현은 그 목소리의 주인을 이내 떠올렸다.
형.
형이 그를 부르고 있었다. 대답해야 한다고 생각한 순간 또 다른 자신이 떠올랐다. 형이 부르는 것은 정말로 ‘나’일까. 망설여졌다. 흔들렸다. ‘한유현’은 누구지. 한유진의 동생은.
형…….
나는. 한유현은 한유진의 부름에 답할 수 없었다. 그는 한유현이지만 한유현이 아니었다. 흐릿하게 깨어났던 의식이 다시금 가라앉아 간다. 어둡고 어두운 그 속에서.
“한유현.”
형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그와 같은 존재가 한유현에게 스며들었다. 시계. 한유진을 위해 준비했던 시계가, 까맣게 잊고 있던 선물이 떠올랐다.
“일어나.”
무덤덤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한유현은 한유현을 바라보았다. 그보다 키가 조금 더 크고 좀 더 나이를 먹은 얼굴이 한유현을 마주 본다.
“나는 사라졌다.”
기억 구슬과 함께 흘러들어 온 스물여섯 살의 한유현의 조각이 말했다.
“이제 한유현은 너 하나다.”
한유현은 또 다른 자기 자신의 흔적을 느꼈다. 그의 감각이 결정체 너머를 감지했다. 형의 곁에 있는 무언가. 흔적일 뿐인 불.
“…너는.”
“형에게 돌아갔어.”
한유진의 곁으로 돌아가 한유진의 곁에서 마지막을 맞이했다. 미련 하나 없는 목소리였다. 스물여섯 살의 한유현은 원하는 것을 이루었다.
“그러니 이제 네 차례다.”
“내가.”
“형의 곁에서 형을 지켜.”
한유현은 눈을 떴다. 검은 유리와 같은 벽 너머로 한유진의 모습이 보였다. 형이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동시에 그의 뒤쪽으로 위험한 존재가 느껴졌다.
‘…정원사.’
내내 잠들어 있었지만 한유현은 빠르게 상황을 인식했다. 한유진의 곁에 선 초월자. 강력한 물의 힘을 지닌 초월자도 정원사를 해치우지는 못했다. 형이 자신을 간절하게 바라봐 왔다. 형은 결국 여기까지 다다랐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동생을 구하려 할 것이다. 스스로를 해쳐서라도.
손등과 손목이, 팔 전체가 뜨거웠다.
– 어린 불아.
태초의 불의 조각이 그에게 속삭여 왔다.
– 너의 본질은 모든 것을 삼키는 불이니.
불길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새파랗게 투명한 불이었다.
– 너의 불은 네 자신 또한 삼킬 것이다.
그것이 완전한 불. 청염. 스스로의 생명을 소모하는 것이 아닌, 존재 그 자체로서 완성되는 푸른 불꽃.
검은 결정체를 녹여 삼키며 한유현이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