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840
839화 시계
따스하지만 내 손길을 흘려보내던 불길 사이로 단단히 끌어안을 수 있는 형체가 나타났다. 언제든 선명하게 그려낼 수 있는 익숙한 모습. 그것이 내 손끝을 따라 탄생하는 순간 분명하게 느꼈다.
내가 한유현을 이끌어 냈구나.
내가 한유현을 만들어 냈구나.
불은 원래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본질적인 불에서 한유현을 빚어낸 것은 나였다. 동생의 세계가 나라는, 막연하게 느껴지던 사실이 선명하게 다가오는 듯했다. 내가 부르고 내가 감싸 안고 내가 인정해 주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특별한 불꽃.
그러니 사랑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릴 적의 내가 동생을 선택한 그 순간부터 한유현은 단순한 동생을 넘어선 내가 만들어 낸 아이와 같았으니까. 어쩌면 그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기에 그 토록이나 유현이를 놓지 못했던 건 아닐까.
“한유현!”
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내 부름에 한유현이 완성되었다. 검은 두 눈이 천천히 열린다. 오직 나만을 바라보고 나만을 인식하고 나만을 받아들이는 눈빛. 불에겐 당연한 일이라 해도 인간인 나로서는 그 사실에 여전히 희미한 안타까움을 느꼈다. 동시에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형.”
유현이가 나를 불렀다. 환하게 미소 짓는다. 더 머뭇거릴 것도 없이 동생을 와락 끌어안았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안도와 함께 벌컥 화도 났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해야 할 말은.
“…어서 와라.”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야.
“잘 돌아왔어.”
“응, 형. 걱정시켜서 미안해.”
유현이의 두 팔도 나를 마주 안았다. 온기와 함께 심장의 두근거림이 느껴졌다. 나와 같이 살아 숨 쉬는 인간. 긴 숨이 새어 나왔다.
“유현이 네가 불 그 자체가 된다 해도 넌 여전히 내 동생이지만, 역시 지금이 좋다.”
“나도 형에게 제대로 닿을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지금이 더 좋아.”
주위를 감싸던 푸른 불길이 서서히 잦아들고 있었다. 거대하던 벌레의 껍데기는 그새 모두 타들어가고 없었다. 조금 더 이 따스한 안정감 속에 빠져 있고 싶었지만 현실이 목 아래까지 차갑게 차올라 있었다.
“정원사는, 날아간 듯한데.”
“오래 버티진 못할 거야. 신경 쓸 거 없어.”
유현이가 단정 지으며 말했다. 정원사가 머잖아 죽을 거라니.
“초월자들도 물리치지 못했던 상대인데… 어떻게 된 거야?”
청염에 기대하긴 했어도 탈출 정도나 가능할 줄 알았다. 유현이의 시선이 흔들리는 푸른 불꽃에 가 닿았다.
“태초의 불이었어.”
“태초의 불? 그 조각?”
“단순한 조각이 아닌 그 원류. 태초의 불 역시 나처럼 자신의 세계를 만났고 그로 인해 스스로를 유지할 수 없어 조각으로 흩어졌어.”
유현이가 자신이 알게 된 것을 내게 설명해 주었다. 완전한 불은 그 무엇도 없는 무(無)에 가깝다고. 유현이는 태초의 불과 비슷한 존재가 되었기에 불의 근원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고.
“하지만 나는 형의 곁에 있고 싶었어.”
동생이 응석을 부리듯 몸을 굽히며 내 어깨에 얼굴을 묻어왔다.
“내 모든 것은 형에게 있어. 비록 형은 나와 다르지만.”
“…유현아.”
“그것 또한 형이라면. 나는 태초의 불이 그러했듯 영원히 형만을 보며 사랑할 거야. 그게 한유현이야.”
그것이 한유현이라는 불이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든 다른 누가 무어라 하든 바뀌지 않고 바뀔 필요도 없는 한유현의 본질. 유현이가 고개를 들었다. 눈치를 살피듯 나를 바라봐왔다. 나 또한 이질적인 불의 본질을 느꼈을 테니까 조금쯤은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 시선을 향해 미소 지어 주었다.
“나도 그래. 너는 나와 다르고 나는 30년 넘게 내 기준으로, 우리 사회 기준으로 살아왔으니 앞으로도 무심코라도 널 걱정하고 고민하게 되겠지. 그래도 언제나 널 사랑하는 형이 한유진이야.”
유현이가 우리 사회 기준에 맞춘 인간이 될 수 없듯이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괜찮았다.
“완전히 불이 된 너도 내 동생이구나 싶었는데 뭘 신경 쓰냐.”
유현이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1년 전쯤에 갑자기 이런 일을 겪었다면 내 동생 어쩌냐, 어디 상담이라도 받게 해야 하나 싶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겪고 느낀 일들이 있으니까. 동생분이 갑자기 불이 되어 버렸는데요, 해도 아 제 동생이 원래 불이었어요 대답해 줄 수 있는 것이다. 뭐, 나는 평범한 사람이니 걱정을 아주 안 하진 않겠지만.
유현이가 나를 마주 보며 웃었다. 용이 되었던 이린이 다시 작은 도마뱀으로 돌아와 유현이의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아까의 나는 태초의 불에 가까워진 상태였어. 그래서 정원사의 껍질도 녹일 수 있었고.”
유현이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청염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한유현’은 한유진이라는 세계 속에 머무는 불이야. 단순한 능력적인 면으로는… 순수하게 자기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태우는 불에 비해 한참 뒤떨어질 수밖에 없어.”
그래서 유현이의 정령인 이린도 작아진 모양이었다. 태초의 불이라. 대단하게 느껴지긴 하지만.
“어떤 불이든 간에 내 동생이 최고다.”
당연하게도 말이다. 더 강하다고 해서 더 좋아할 거였으면 주위에 널린 게 초월자인걸.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설사 네가 평범한 F급이 된다 하더라도 상관없어. 보호하겠답시고 24시간 옆에 끼고 더 감싸고돌 수는 있겠다만.”
유현이의 눈빛이 살짝 바뀌었다. 혹했구만. 하지만 동생이 정말로 비각성자나 마찬가지가 된다면 불안해서 어떻게 혼자 두겠냐. 마석 잔뜩 싸들고 휴가 낸 뒤 서랍에라도 들어가 있어야지. 아니면 명우나 신입에게 장소 좀 마련해 달라고 하고 같이 가 있거나. 애들도 데리고서 말이다.
“…이전처럼 인간의 육체를 지닌 채 차근차근 강해지긴 할 거야. 스물여섯 살의 나보다도 더.”
스물여섯 살의 나라고 말하다니, 받아들인 걸까. 그 애의 기억이 조금쯤 전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 태초의 불과 같은 존재라니까 언젠가는 유현이 너인 채 그만큼 강해질지도 모르지!”
이린이 동의하듯 탁탁 꼬리를 흔들었다. 불이 거의 사그라지자 뒤쪽에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아저씨!”
가장 먼저 예림이가 날아왔다. 아직 열기가 느껴지는지 물을 주위에 휘감은 채였다.
– 아빠!
“안 돼, 불 완전히 꺼지고 땅도 식으면.”
결이가 별이를 달래는 목소리도 들려왔다. 예림이가 우리 위쪽에서 빙그르 돌았다.
“아, 진짜 놀랬는데! 다행이에요! 아저씨도 한유현도 멀쩡한 거 맞죠?”
“응, 둘 다 괜찮아.”
예림이 얼굴까지 보자 완전히 안심이 되었다. 유현이가, 우리가 확실히 원래대로 돌아왔구나 싶어졌다. 집에 가지 않아도 여기가 집인 것처럼. 사실 집이 따로 있냐, 어디 살든 가족이 다 같이 있으면 거기가 집이지.
“형.”
유현이가 고개를 약간 기울이며 말했다.
“칭호가 새로 생겼어.”
“뭐?”
“한 명의 세계.”
예림이가 들으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하고 귀를 막았다. 동시에 나는 귀를 의심했다. 저 칭호는.
“그거 혹시… L급 칭호야?”
“아니. 신화급으로 되어 있어.”
…스물여섯 살의 유현이는 L급으로 지니고 있었던 칭호였다. 내 반응을 본 유현이가 물었다.
“이거 혹시 스물여섯 살의 내가 가지고 있던 거야?”
“…맞아. 등급은 다르지만.”
“기억과 함께 내게 영향을 준 걸까.”
칭호를 살피는 듯 유현이의 시선이 허공을 향했다.
“당신의 세계는 단 한 명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누구도 절대 발 들일 수 없이 완벽하게 당신을 감싸는 세계입니다. 눈을 뜨는 순간부터 마지막 숨을 내쉬는 순간까지 단 한 명만을 바라보는 불의 축복이 깃들었습니다.”
설명이 달라졌다. 불의 축복이라면, 태초의 불도 관계가 된 것일까.
“세계, ‘한유진’의 완전한 사망 시 칭호가 사라집니다. 칭호의 소멸은 세계의 소멸입니다. 세계의 소멸은 당신의 소멸입니다.”
전과는 달리 누군가가 발 들일 시, 라는 조건이 사라졌다. 이제 유현이가 완전히 자기 자신에 대해 알고 받아들였기 때문일까. 태초의 불의 동류로서 스스로를 깨닫게 된 한유현이라는 불꽃. 그보다.
“유현이 너 웃지 마!”
동생 녀석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거 거절 선택지 있다고 했는데, 없어?”
“응. 있어도 거절하진 않겠지만.”
“아니, 유현아! 있어서 좋을 거 하나 없는 칭호잖냐!”
“왜? 난 좋은데.”
마음에 드는 선물이라도 받은 듯한 얼굴이었다. …그야 넌 좋겠지만.
“그래서 회귀 전의 내가 끝까지 버틸 수 있었구나.”
“…유현아.”
“이 칭호가 있으면 또다시 흔들리게 되더라도 괜찮을 거야. 내 세계는 항상 나와 함께 있다고 알려 주는 칭호니까.”
짧은 한숨과 함께 나도 미소 지었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어쩔 수 없었다.
“그래. 많은 일들을 겪었어도 난 여전히 네가 살았으면 싶은 모양이다. 괜찮다 괜찮다 말은 해도 마음은 쉽지가 않네.”
“응. 알고 있어. 그래도 이것만큼은 내가 바라는 대로 할 거야.”
어쩌겠냐. 애초에 내가 아니었으면 진작 불타 사라졌을 불이라는데 인간의 삶을 강요할 수는 없다. 그냥 내가 노력해서 최대한 오래 살아야지.
– 아빠! 퓨잇!
부드러운 털뭉치 하나가 폴짝 뛰어 내 다리에 달라붙었다. 뀩뀩거리는 별이를 안아들었다. 짤막한 앞발이 유현이를 가리켰다.
– 삼촌 신기해!
“갑자기 짠, 하고 나타났어. 그치?”
– 짠 아니야. 파랑 불이야.
반짝반짝 예쁜 불이 삼촌이었어, 하고 별이가 앞발을 파닥이며 진지하게 설명했다. 그걸 알아봤구나. 다른 사람들도 무사해서 다행이라며 한 마디씩 했다.
“그리고 형.”
유현이가 인벤토리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냈다. 저건. 무심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원래라면 한참 전에 주려고 했던 건데.”
“…응, 유현아.”
“형 생일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때 주는 것도 괜찮겠지만.”
유현이의 손이 시계가 담긴 상자를 살짝 쓰다듬었다.
“지금은, 아직은 스물여섯 살의 나의 잔재가 남아 있어.”
회귀 전의 내 동생이. 유현이가 조금 머뭇했다가 부드러운 눈길로 나를 바라봐왔다.
“내 기억을 여기까지 가져와서, 내게 돌려줘서. 그래서 형에게 줄 수 있는 거니까. 이건 우리가 형에게 주는 선물이야.”
“…그래.”
고개를 끄덕이는 것 이상의 말은 할 수 없었다. 내 동생들이 주는 선물이다. 둘이 함께.
“고맙다.”
내민 내 손목에 시계가 채워졌다. 검은색 줄에 푸른 시계 판을 지닌 손목시계. 문득 시계 언제 주나 하고 전전긍긍하던 때가 떠올랐다. 다른 한 명의 동생을 기다리느라 이렇게 늦어진 거로구나 싶어졌다.
“나도 있어, 유현아.”
두 개의 시계 중 남은 하나를 꺼내들었다. 별이를 잠시 내려놓고 선물 상자를 열었다.
“두 개를 준비했었어.”
“하나는 가지고 갔구나.”
“응. 이건 네 거야. 그동안 제대로 이야기해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유현이가 아니라고 살짝 고개 저었다. 자연스럽게 내밀어오는 동생의 손목에 푸른색 시계를 채워 주었다. 속이 울컥하면서도 뿌듯해졌다. 둘 모두 전해 주었다. 나도 둘에게서 받았다.
“고마워, 형.”
동생의 미소가 무척 행복하게 느껴졌다.
“내 첫 손목시계야.”
“스물여섯 살의 너도 그렇다더라. 둘 다 길드장씩이나 되어 가지고 말이야.”
괜히 타박하듯 하는 말에 동생이 웃었다.
“형이 아니면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까. 그 녀석도 멈춰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을 거야.”
유현이의 말에 가슴 안쪽이 누르듯 아파왔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함께 있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마지막 시간이 너무도 짧았다. 이 아쉬움은 아마도 영원히 지워지지 않겠지.
– 퓨이익!
별이가 자기 한쪽 앞발을 흔들었다.
“별이도 시계 가지고 싶어?”
– 응!
장난감 시계를 사줘야겠네. 결이랑 설이한테도. 셋이 같이 맞춰 줘야지. 예림이가 슬쩍 자기 손도 들어 보였다.
“아저씨, 저도 비었는데. 처음은 아니지만요.”
“시계 가지고 있었어? 못 봤는데.”
“어렸을 때요. 장난감 시계~.”
“예림이 너도 당연히 사 줘야지.”
“저 파란색은 절대 안 해요! 빨강, 도 좀 찝찝하고. 하얀색이요!”
“그래, 그래.”
– 유진이 형, 저도요!
박하율 꽃이 잎을 팔랑였다. 넌 어떻게 하려고.
“나도 노아한테 시계 사 줄래!”
“앗, 저도요! 리에트 언니한테도요!”
“…누님, 이번이 다섯 개째예요.”
양팔을 붙잡힌 노아 씨가 곤란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사이좋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어?”
이번에는, 분명 성현제의 목소리가 들려와야 하는데. 자기 시계는 거절했느니 송 실장님이 시계를 부쉈다느니 끼어들지 않을 리가 없었는데 조용했다. 조금 당황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성현제 씨와 송 실장님은요?”
“정원사를 쫓아갔어.”
현아 씨가 말했다. 정원사를?
“둘이서만요?”
“세성 길드장이 먼저 가고 제가 송태원 실장님을 정원사 위로 데려다드렸습니다.”
노아 씨가 덧붙여 설명했다. 정원사는 곧 쓰러질 것이라 했고 그 둘이면 위험하진 않겠지만. 다만 문제는.
‘정원사가 사라지면.’
그의 영역이 사라지고 예림이 또한 원래대로 돌아왔으니. 이제 초승달이 움직일 것이다. 불길한 예감이 든 직후.
잘랑-
하늘에서 은빛 종소리가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