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850
849화 기억의 길 (2)
“삐약아?”
그러고 보니… 삐약이의 기억은 없었다. 분명 키워드 적용이 되어 있고 감화 목록에서 사라졌음에도. 삐약이가 날개를 퍼덕였다. 다리에 달린 비행 아이템이 둔탁하게 반짝거렸다. 내가 저걸… 언제 마지막으로 충전을 해줬지. 잘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한참 전인데, 사육소 담당자들이 대신 마나를 보충해 줬나.
“삐약이 너…….”
새끼 새가 빙그르 맴을 돌았다. 내 앞의 시스템 창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모든 글들이 사라지고 이내 햇살 사이로 반짝반짝 녹아내린다. 이어 새로운 창이 나타났다.
[당신의 등급은 시스템 관리 영역을 벗어났습니다.]내 등급. 이제는 시스템 창을 열어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느껴졌다. 키워드를 적용한 이들의 두 배. S급은 물론 준 초월자까지 한 명. 그리고.
‘사람들.’
키워드와 상관없이 나와 이어진 사람들의 힘. 얇게도 두껍게도 그 중간 즈음으로도 내게 겹겹이 쌓이고 또 쌓였다. 일일이 다 헤아리기 힘들었다. 그들의 기억조차 단숨에 쏟아져 극히 일부만을 볼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분명히 내 안에 존재했다. 내 세상이나 다름없는 힘이.
“…자신의 세계를 삼키면 초월자가 된다고 했었지.”
그리고 그 두 배였다. 날개를 펼쳤다. 금빛 깃털 날개가 크게 펄럭였다. 어디로든 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로.
내 감각이 넓게 펼쳐졌다. 꿈의 세계 너머 그 밖의 광활한 공간이 느껴진다.
“…너무 넓어.”
아찔해질 정도로 끝이 없었다. 이것조차 다가 아니었다. 근원은 다섯이라 했으니 그중 하나일 뿐이었다. 성현제는 다섯 번째 근원의 세계에 있는 걸까. 내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 7일인데 그 안에 찾아갈 수 있을까.
어쩔 줄을 몰라 날개만 편 채 날아오르지 못했다. 내가 지닌 스킬들은 다양했지만 도움이 되는 것은 없었다. 윤윤의 초장거리 공간이동도 목적지를 알아야만 쓸 수 있었다. 힘은 넘쳐나는데 다룰 방법을 몰랐다. 마치 길을 잃어버린 어린애가 되어 버린 기분이 들었다.
“시스템이… 정말로 선생님 노릇을 했었구나.”
조잡한 설명이라고 투덜거렸지만 막상 그마저도 사라지니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 삐야.
삐약이가 날갯짓했다. 까맣고 동그란 눈이 나를 마주 바라봐온다. 삐약이 주위로 공간이 흔들렸다. 어디로든 마음대로 이동하곤 했던 새끼 새.
“아……!”
화들짝 정신을 차리며 삐약이에게 선생님 스킬을 사용했다. 삐약이가 공간을 넘어간다. 그 마나의 흐름을 똑같이 따라 움직였다. 세상이 확 뒤바뀐다.
“엇!”
발아래가 텅 비었다. 급히 날개를 퍼덕였다. 우주 한가운데처럼 너른 공간 너머로 까마득한 별빛이 반짝였다. 우리 세계 밖의 어딘가. 삐약이가 내 주위를 빙그르 돌았다.
– 초승달의 영역은 모든 곳에 있어요.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 달빛이 내리는 모든 공간과 시간 속에.
삐약이가… 말했다. 맑고 부드러운 음색이었다.
“삐약이 넌, 정체가 뭐니. 일부러 내게 온 거야?”
삐약이가 하얀새가 아닐까 추측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들려온 목소리는 하얀새의 것과는 분명 달랐다.
– 당신이 제 아빠니까요. 그래서 찾아간 거예요.
“…그러니까 나를 네 아빠로 만들기 위해서 온 거라고?”
– 비슷하지만 달라요. 양육자가 있어 제가 이렇게 태어난 것이니까요.
무슨 소리인지 잘 이해가 가질 않았다. 하지만 삐약이는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삐약, 어린 새가 울었다.
“…어쨌든 삐약이 너는, 날 도와주는 거지?”
– 네. 아빠가 바라는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를 저도 원하고 있어요.
작은 날개가 파닥거린다. 여전히 정체도 알 수 없고 수상쩍은 점도 가득한 삐약이였다. 하지만 동시에 내가 돌봐 온 새끼 새다. 삐약이가 거짓말을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날 해치려고 했다면 기회야 얼마든지 있었지. 사고는 좀 쳤지만 나쁜 짓은 한 적 없는 삐약이다. 그냥 주방이나 성현제 주머니를 가끔 털었을 뿐이었다. 삐약이 둥지에서 세성 길드장 만년필이 발견되긴 했지만 가져가는 걸 몰랐을 리 없으니 준 거나 마찬가지지.
“삐약아. 나는 초승달을, 성현제를 찾아가야 해.”
그리고 마지막에는 동생에게. 삐약이가 내민 내 손바닥 위로 내려앉았다.
– 초승달의 영역은 모든 곳에 존재하기에 오히려 찾아갈 수 없어요. 하지만 지금의 아빠는 한 세상의 기억을 가졌어요. 아직 살아가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모두 지닌 세상과 연결되어 있죠.
삐약이가 말을 이었다. 지금 삐약이는 똑똑한 쪽임이 분명했다. 그럼 다른 한쪽은 어떻게 된 걸까.
– 그곳에서 길을 찾으세요.
“어떻게?”
– 끝없는 기억들 속으로 뛰어들어서 아빠가 원하는 순간을 찾으세요. 유사근원이 아직 아빠를 기억하고 있다면, 아빠의 기억을 지니고 있다면 분명 길이 닿을 수 있을 거예요.
삐약이의 말대로 내가 품은 기억들을 들여다보았다. 그것을 꺼내어 펼쳤다. 하얀 새끼 새가 다시금 포르르 날아오른다.
– 다만 아빠. 아빠가 지닌 기억의 힘은 곧 아빠의 세상이며 현실이 될 거예요. 뒤틀리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삐약이가 앞서 기억의 흐름 속으로 섞여 들어간다. 그 뒤를 쫓았다. 거센 물결과 같은 것이 온몸을 두들기고 눈을 번쩍 떴다.
어린 소년이 빵집 앞에 서 있었다. 더욱 작은 아이가 소년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나와 유현이였다. 12월의 찬바람이 뺨을 스쳤다.
‘…성현제를 찾아가야 하는 건데.’
지금의 나는 어떻게 된 거지. 낯선 어른의 손이 보였다. 누구냐.
– 아빠, 여기가 아니에요.
삐약이의 목소리가 재촉했다. 하지만. 어린 내가 어린 동생과 함께 발걸음을 돌린다. 무심코 손을 내밀려고 했다.
– 아빠!
그러나 삐약이가 막았다. 과거를 건드려서는 안 된다. 이를 악물고 그 자리를 떠났다. 성현제의 기억. 성현제를 만나야 해.
– 삑!
삐약이가 아니었다. 내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거의 떨어질 뻔하다가 간신히 나뭇가지 위에 내려앉았다. 뭐야, 새? 바로 앞에 유리창이 보였다. 그 너머로 성현제가 앉아 있었다.
– 삐이.
마치 정교한 인형처럼 표정이 없다. 우리 세상에 갓 심어졌을 때인가? 확실히 더 어리고 몸집도 작아 보였다. 그래 봤자 나보단 크겠지만.
‘너무 과거잖아.’
성현제를 찾아오긴 했지만 이때가 아니다. 일순 금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삑 소리 내곤 날아올랐다. 좀 더 미래, 좀 더 미래!
“형이랑 오빠가 데리로 온댔어!”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눈높이가 확 낮아졌다. 어린애 몸…인가? 알록달록한 교실이었다.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1, 2학년 교실인 듯했다. 열 명이 채 안 되는 어린아이들 사이에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별아?’
부드러운 밀색 머리카락과 동그란 파란색 눈. 그러고 보니 교실의 아이들도 인종이 제각각이었다. 각성자 아이들인 듯했다.
“별아.”
검은 머리카락에 붉은 동공을 지닌 소년이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 뒤로 분홍 머리카락도 보인다.
“우리 별이! 집에 가자!”
설이와 결이였다. 지금보다 조금씩 더 나이를 먹고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 미래구나. 너무 미래로 왔어. 잘못 왔지만 떠나고 싶지 않았다. 조금만 더 보고 싶었다. 조금만 더.
– 아빠, 오래 머물면 안 돼. 아빠의 기억이 섞여 흐려질 거야.
삐약이가 경고했다. 내가 들어온 몸이 기억이 내게 스며드는 것이 느껴졌다. 이대로 계속 머물렀다간 나는 완전히 이 아이가 되어 살아가게 될 것이다. 세 아이의 모습을 한번 더 바라보곤 떠났다.
두고 온 아이들이 너무도 그리워졌다. 하지만 좀 더 과거로, 현재 시점으로 가야 했다.
“안-녕!”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그란 두 눈이 울타리 너머에서 나를 빤히 올려다봐온다. 익숙한 얼굴인데…….
“옆집 오빠-!”
“오빠는 무슨, 아저씨지.”
무심코 대답해 버렸다. 아이가 동그란 볼이 쏙 파일 정도로 활짝 웃었다.
“아저씨!”
예림이구나. 부르는 소리를 듣자마자 알 수 있었다. 애들이 보고 싶다고 생각해 버려서 이 시간과 공간으로 와 버린 모양이었다. 내가 지금 예림이 옆집 아저씨인 건가? 하지만 예림이가 먼저 아저씨라고 불렀댔는데,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겠지.
어린 예림이를 향해 마주 웃어 주었다. 그리고 그곳을 떠났다. 이번에는 성현제를 찾아야 하는데, 아이들을 보자.
– 끼아앙.
조그만 피스가 폴짝 뛰었다. 유체화 상태가 아니었다. 정말로 어리고 어린 피스였다. 피스가 내 앞발에 자기 두 앞발을 올려놓았다. 조그마했다. 지금의 내 몸이 지닌 본능을 따라 혀를 내밀어 어린 화염 뿔사자를 핥아 주었다.
– 끄웅!
피스가 발라당 뒤집어졌다. 내 앞발을 깨물고는 폴짝 뒤로 뛴다. 던전 안이구나. 나는, 성체 화염 뿔사자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성체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아무런 의식 없는 중하급 몬스터와 달리 상급 몬스터는 던전에 대해서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자신들은 이곳에 묶인 불완전한 존재였다.
‘밖으로 나가야 한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던전 안에서 몬스터들은 던전의 리셋에 따라 언제 잠들게 될지 알 수 없는 존재였다. 그들의 세상은 수시로 멈추고 때로는 아예 사라지기까지도 하였다. 제대로 된 생명체가 아닌 던전에 속한 힘의 결정체.
그렇기에 몬스터들은 헌터들을 적대시하고 던전이 터지면 일제히 몰려나가는 것이었다. 자각 못 한 하급이라 해도 근원이 새겨 놓은 본능에 더해 스스로의 불안정함 때문에 밖에서 온 지성체를 잡아먹고 싶어 했다.
– 꺄웅, 꺙!
피스가 놀아 달라는 듯 내 다리에 치대었다. 이 어린 것 때문에 화염 뿔사자 성체는 더욱 초조해하고 있었다. 그 마음이 내게 침범해 드는 것에 피스를 한번 더 핥아 주곤 그곳을 떠났다. 어린 화염 뿔사자는 밖으로 나가게 될 것이다.
“…몬스터를 꼭 자아가 있는 생명체로 만들어야 했나.”
저렇게 쓸 거라면 왜 굳이.
– 몬스터는 근원의 이빨이나 발톱, 소화기관과 같은 단순한 존재로 만들어졌어요. 다만 살아가는 존재는 결국 자기 자신을 알게 될 뿐이죠.
삐약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의도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저렇게 되었다는 뜻일까. 상념을 떨쳐 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몇 번 몬스터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 크르륵!
중하급 몬스터는 확실히 던전에 대한 자각이 없었다. 네다리로 들판을 달렸다.
콰르릉!
‘성현제!’
만나긴 했네. 얼굴 한번 제대로 보지 못하고 빛에 휩쓸렸다. 낯선 헌터들과 부딪치기도 하고 아는 헌터와 마주치기도 했다.
– 삐잇!
풀숲에서 머리를 내밀었더니 유현이가 바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바람결을 따라 탄내가 맡아진다. 깜짝 놀라며 유현이를 쳐다보았지만 스물두세 살쯤 되어 보이는 동생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질 않았다. 휴식을 멈추면서까지 손댈 필요 없는 약한 몬스터라는 건가. 물을 조금 마시고 건조식량을 한입 먹더니 인벤토리에 넣어 버린다.
– 킥!
제대로 먹어라, 제대로! 불만스럽게 소리치자 유현이가 나를 보며 몸을 일으켰다. 으악, 유현아 나다! 동생의 검이 날아들기 전에 빠져나갔다.
– 아빠, 집중하세요.
내가 보지 못한 유현이를 더 보고 싶었다. 어떻게 지냈는지 살피고 싶었다. 그런 마음을 억지로 눌러 참았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 7일이다. 지나간 일들이 아닌 현재를 생각해야 했다.
어떻게든 생각을 돌리려 이런저런 기억을, 잠깐만.
“엄마!”
…네? 어린아이 하나가 나를 향해 달려왔다. 씩씩해 보이는 소년이었다. 내 기억에는 없는 낯선 얼굴이었지만… 누군가가 떠올랐다. 아니야, 잠깐만, 나 지금 어디 있는 거냐!
“엄마?”
나는 절대 모르는 소년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어릴 때는 귀엽… 아니 내가 무슨 생각을. 비명이 나올 것 같았지만 최선을 다해 부드럽게 웃어 주었다. 시… 소년이 마주 웃었다. 그래, 엄마한테 효도 많이 하고. 얼른 도망쳤다.
“삐약아,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 같냐.”
– 하루 정도요.
벌써? 현재의 성현제를 찾아 날개를 크게 퍼덕였다. 다시 몇 차례 사람들을 거쳤다. 겪으면 겪을수록 내 머릿속이 어지러워져갔다. 시간이 헷갈렸다. 공간 또한 가늠할 수 없었다.
“각성자 관리실장 송태원입니다.”
정장 차림의 송 실장님이 서 있었다. 나는 관련 직원 중 한 명인 듯했다. 공기가 무서워지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결국은.”
성현제가 재미있다는 듯, 하지만 불쾌감을 감추지 않은 채 미소 지었다. 성현제가 있지만 과거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나는 한유진. 한유진.’
빈 팔목을 매만졌다. 시계를 아주 잠깐 찼을 뿐이지만 벌써부터 허전했다.
“괜찮아.”
‘헉!’
현아 씨의 얼굴이 바로 앞에 있었다. 현아 씨가 무척이나 다정한 미소를 머금었다. 목소리 또한 달콤할 정도였다. 심장이 다 콩닥거렸다.
“걱정할 거 없어. 까짓거 길드 만들어 보지 뭐.”
현아 씨가 각성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인가. 나는… 함께 각성한 헌터들 중 하나? 아니, 한유진이다. 한유진.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커다란 손이 내게 내밀어졌다.
“이곳은 위험합니다.”
송 실장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아주 작았다. 강아지? 고양이? 아니면 송이? 돌연 비가 쏟아져 내렸다. 세성의 옥상 정원에 강소영이 서 있었다. 나는 그녀의 등을 바라보는 세성 길드원이었다. 성현제가 사라진 세성. 달이 보였다. 도심지의 야경이 펼쳐진 어느 테라스였다. 긴 의자에 반쯤 눕듯이 한 황림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뭐야, 금빛 털로 뒤덮인 내 앞발이 보였다. 크기를 보니 대형견인 듯했다. 하필 이놈 집이냐. 황림의 손을 힘껏 물어 주었다. S급이라 이도 안 박혔지만.
“왜 그래, 달링. 간식 줄까?”
이번에는 발굽이었다. 네다리로 달리는 게 편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 얼른 머리 저어 떨쳐냈다. 누군가 내 목덜미를 가볍게 두드렸다. 성현제의 얼굴이 보였다. 힘껏 뒷발질을 해주었다.
“누나!”
눈물 맺힌 커다란 눈을 끔벅이며 천사 같은 어린아이가 베개를 잔뜩 끌어안았다. 무서워하면서도 앞서 가는 누나의 뒤를 쫓아간다. 소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눈이 일순 부드러워졌다. 나는 친구들과 담장 뒤에 숨어서 남매를 훔쳐보고 있었다. 저 여자애는 사납고 무섭다. 돌을 던지고 도망치자.
“윽!”
열기가 확 몰려들었다. 나를 향해 치솟는 불을 누군가의 손이 가로막았다.
“조심하십시오.”
명우였다. 명우의 손이 불길을 가볍게 내리누르곤 녹은 아이템을 집게로 들어 꺼낸다. 능숙한 움직임이 아름답게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명우를 존경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고생해서 대장간에 들어오길 잘했…….
“…허억.”
거친 숨이 튀어나왔다. 내 몸뚱이가 내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지.
– 이틀 지났어, 아빠.
몇 달, 아니 몇 년이 흐른 것만 같았다. 삐약이가 걱정스럽게 나를 바라봐왔다. 그 눈동자에 비친 나를 보았다. 한유진. 몸뚱이는 스물여섯, 속은 서른한 살. 동생으로는 한유현이 있고 새로운 가족으로 박예림을 데려왔고… 가족이나 다름없는 친구 유명우와 피스와 삐약이 벨라레 블루…… 결이와 설이와 별이라는 세 아이. 도담 사육소 소장. 빌딩이 내 건물. 건물주. 채터박스 재산. 재산 정리도 아직 다 못 했는데! 애들 넣어서 유언장도 고쳐야 한다고.
“컥!”
창이 내 가슴에 박혔다. 헌터였다. 나는 몬스터가 아니었다. 누군가 내 머리채를 잡는다. 숨이 가빴다. 눈을 감았다 떴다. 성현제의 집을 청소하고 있었다. 짜증은 났지만 덕분에 정신은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또다시 피비린내가 났다. 몬스터가 내 다리를 물어뜯는다.
“성현제!”
대체 어디에. 어디로 가야.
– 기억으로 길을 연결해야 해요.
기억. 성현제의 기억. 그가 가지고 간 내 기억. 하지만 나는 성현제가 무슨 기억을 가져갔는지 알 수 없었다. 아주 조금도 떠올리는 것이 불가능했다.
다시금 수많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들이 스쳐 지나갔다. 도하민, 서경훈, 박하율, 에블린, 석하얀, 김성한… 최석원, 사미르, 에밀리…… 동물이며 몬스터, 식물,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 몇 번이고 바닥을 기었다. 내 감각이 둔해지고 자아가 흐려질수록 처하는 상황도 어두웠다. 꽤 끔찍하기도 했다. 삐약이의 목소리마저 멀어져간다.
멀리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까맣고 붉고 하얗게.
하얗게. 창 너머로 햇살이 스며들었다. 따스하게 내 잎에 와 닿는다.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다. 펜을 쥔 손가락이 굵고 단단하면서도 희었다. 그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유현아.’
내 동생이다. 유현이가 전화를 받았다.
“응, 형.”
웃는다. 현실 감각이 화악 돌아오는 느낌이 들었다.
“곧 끝나. 저녁 먹기 전에 집에 돌아갈 거야.”
그래, 집에 돌아가야지. 기억. 성현제가 지닌 기억. 생일 파티는 아니다. 내가 기억하고 있으니까. 다시 날아올랐다.
“성현제 이 인간 찾기만 해봐!”
멱살부터 잡고 탈탈 흔들 테다. 물결이 일었다. 정말로 물속으로 빠져들었다. 투명한 유리 너머로 저택 내부가 보였다. 물을 헤치며 나아갔다. 금색 두 눈.
입을 뻐끔거렸다. 성현제의 저택 수조. 그가 수조를, 물고기를, 나를 바라보았다. 물이 일렁인다. 그 일렁임 사이로.
“수족관에 같이 가준다면 얼마든지 벗어 주겠네.”
내 기억에 없는 말이 들려왔다.